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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요르단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을 처음 방문하고 돌아오던 때, 한 가정이 나에게 작은 액자를 주었습니다. 거기에 "Pray For Syria"라는 문장이 자수로 적혀 있었습니다.
그리고 쿠웨이트로 돌아온 후, 내 마음 속에 시리아 난민들은 계속하여 기억되었습니다. 그 때는 코로나 얼마 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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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을 두 번째로 방문하고자 했을 때, 코로나가 터졌습니다. 지금 출국했다간 쿠웨이트 공항이 닫힐 수도 있었습니다. 이미 교회광고가 되었고, 비행기 예매도 되었지만, 긴급히 당회는 요르단 방문을 연기했습니다. 그 연기가 수년이나 걸릴지는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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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방문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선교사님을 통해서, 코로나 위기의 난민들을 돕는 일은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쿠웨이트 한인연합교회도 교인의 3/4이 한순간에 떠나고 극악의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더 극악의 어려움을 겪는 그들이었기에, 별 망설임이 없이 도왔습니다.
우리도 NECK 밖 예배당 렌트비가 없어서 예배당 없는 교회가 되었고, 또 목회자 사례비조차 없어서 부목사님은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러나 <덜 힘든 자가 더 힘든 자를 돕는 길>을 선택했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그 선택은 옳고 좋은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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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웨이트를 떠나며, <쿠웨이트 한인연합교회>를 떠나는 몇 가지 염려가 있긴 했습니다.
'나의 담임목사 사임발표 이후에도, 교회 재정은 계속 안정적일 수 있을까?' , '당회의 경험이 전혀 없는, 우리 젊은 7집사님들이 운영위원회를 잘 감당할 수 있을까?', '혹시 청빙위원회 안에 분란이 일어나지는 않을까?'와 같은 염려들이었습니다.
물론 그 염려가 크지는 않았습니다. 정말로 우리 젊은 7집사님들이 교회를 든든히 안정적으로 잘 지켜주었습니다. 7월 첫째 주일 제직회 때, 6개월 동안의 헌금이 이미 1년 예산 전체의 75%나 되었습니다. 청빙위원회를 너무나 잘 감당해 주어서, 매우 평안히 후임담임목사님이 지난주 12월8일에 결정되었습니다. 우리 주님께 참 감사했고, 나는 평안히 교회를 떠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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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쿠웨이트를 떠나려 하니, 단 하나! 요르단의 시리아 난민들이 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마치 부안을 떠난 후, 부안의 우리 할머니/할아버지 어르신들이 아픈 새끼 손가락처럼 내 마음에 걸렸었는데, 이번에도 그와 같을까... 염려되었습니다, 어르신들 곁에 더 오래 부안에 머물러 드리지 못한 것이 내 마음에 아픈 새끼 손가락이었습니다. 아직 시리아 난민들을 위해 마쳐할 일이 아직도 남아 있었기에, .... , 쿠웨이트를 떠나고자 할 때 그 분들이 떠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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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12월 9일부터 14일까지 다시 요르단을 다녀왔습니다. 이번에는 우리 세 녀석들과 함께... 난민들 보러 가는 걸 싫어하는 녀석들과 함께... 끝까지 안가겠다고 버티는 녀석들을 내 아내가 눈물로 겨우겨우 설득해서 절반은 억지로 .... 요르단의 시리아 난민들을 뵈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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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시리아 학교>로 곧장 갔습니다. 절반은 억지로 왔던 우리 세 녀석들의 마음이, 시리아 학교에 도착해서 한번에 녹아내렸습니다. 밝고 즐거움이 역력한 아이들! 똑똑해보이고, 총명한 눈빛을 한 아이들! 처음에 읽고 쓸 줄도 몰랐던 아이들이 이제는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까지 얻는다고 하니 너무 놀라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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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 어린이들의 행복한 모습을 보며, 우리 세 녀석들이 큰 충격을 받았나 봅니다. 또 아이들이 너무 너무나 예쁘고 귀여서 좋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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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사님을 따라, 난민가정 방문하는 걸, 우리 세 녀석들이 너무나 행복해 하였습니다. 호텔로 돌아온 후, 엄마에게, 그리고 나에게 자꾸 질문하려고 합니다. 자기가 느낀 걸 확인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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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난로 하나에, 10여명의 가족들이 둘러 앉아, 추위를 견디는 모습도 인상적이었겠지만, 더 큰 충격은 그분들의 얼굴에 밝고 적극적이인 기쁨이 가득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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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난민 가정에 그 작은 난로들! 우리 교회가 선물로 준 거야!
* 우리 교회 재정으로 시리아 학교 운영될 수 있도록 하는거야!
* 선생님 월급도, 학교 렌트비도, 아이들 간식비도, 학용품도...
* 난민가정 방문할 때, 필요한 것들, 우리 교회가 돕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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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그런거보다, 우리 선교사님! 너무너무 귀하지? 저 한 분의 큰 희생이 참 많은 난민들에게 밝은 기쁨을 주고, 큰 행복을 주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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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내일 난민 가정 또 안 가?
아빠도 몰라. 선교사님이 아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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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다음날, 난민가정을 방문하는 선교사님을 기쁘게 따라 나섰습니다. 그날 나는 너무 피곤해서 잠들었고, 우리 녀석들은 늦밤까지 선교사님을 따라서 난민가정을 방문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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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녀석들도 난민가정을 방문하면서, 많이 능숙해졌습니다. 아랍어 번역기로 대화를 하였습니다. 시리아 청소년 & 청년들과 너무나 쉽게 친구가 되었고, 쿠웨이트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것을 들고,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었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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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날 우리 선교사님께서 요르단 방문이 어떠했나고 물으시니, 내 딸 소리가 답변합니다. "쿠웨이트에서 6년보다, 이곳에서 6일이 더 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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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했던 것 그 이상의 경험을 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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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방문했을 때, 활달스러운 장난끼 있던 어린 소녀가, 이번에는 히잡을 쓴 채, 얌전하고 조용한 소녀로 성장해 있었습니다. 다시 뵈니, 더욱 정겨웠습니다. 어머니가 여러 딸들을 매우 휼륭하게 성장시키셨습니다. 내 마음에 크게 남아 있는 가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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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감히(?) 시리아 난민을 도왔던 것이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나는 나의 타락 가능성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시리아 난민들에게서 도움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분들이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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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욕에 빠지지 않도록
풍성한 물질의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있도록
"주는 자가 더 복 되도다"라는 우리 주님의 말씀을 경험할 수 있도록
가난을 싫어하지 않을 수 있도록
가난의 선택을 피하지 않을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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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 난민들이 나를 지켜주었습니다. 나에게는 너무나 감사한 분들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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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나의 마지막 설교가 있었습니다.
어제 쿠웨이트 한인연합교회의 담임목사직을 사임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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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제 더 이상 목사가 아닙니다.
이제 평신도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매우 기쁘고, 가벼운 마음으로 돌아갑니다.
마치 군제대를 하는 가벼운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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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쁜 이유는 이것입니다. 요르단을 방문할 때, 이젠 22세 청년이 된, 우리 세 쌍둥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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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잘 사는 삶인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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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보다 더 바쁜 사람 처음 봐
우리 선교사님이 왜 그처럼 바쁘게 살고 있을까?
누구를 위해서일까요?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닌데...
왜 저렇게 자기희생적인 삶을 바쁘도록 살아내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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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다 잘 살려고 사는데
과연 무엇이 잘 사는 삶일까?
- 나 돈 많이 벌고
- 나 돈 많이 쓰고
- 내 몸 더 즐겁고
- 내 몸 더 기쁘면, 잘 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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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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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나는 목사의 직을 다 마치고, 며칠 뒤 쿠웨이트를 떠납니다. 남은 며칠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날이 될 것입니다. 숨만 쉬고 일해야 합니다. <중동지역 한인교회사>를 다 마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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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참 기쁘고 감사합니다. 쿠웨이트를 떠나기 바로 직전에, 우리 세 녀석들에게 '무엇이 진정으로 잘 사는 삶인지?'를 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첫댓글 덜 힘든자가 더 힘든 자를 돕는 길을 선택하는 삶~
무엇이 잘 사는 삶인가?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