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영이보다 예쁜 사람은 너무 많아요. 근영이는 아직 자라는 새싹일 뿐인 걸요.” 문근영의 할머니가 손녀를 애잔한 눈빛으로 쓰다듬는다. 영화나 화보 촬영장, 심지어 레드 카펫 행사장에도 동행하는 그녀의 할머니는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손녀에게 인생의 지혜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멋진 여성이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기 전에 네가 제일 어리니 물을 떠오너라” “밥 좀 많이 먹어라” “인사를 더 공손히 하거라” 등등의 건전한 잔소리로. 지난 몇 년 동안 드라마 <겨울동화>와 <명성황후>의 아역 배우, <연애 소설> <장화 홍련> <어린 신부> <댄서의 순정> 등의 많은 촬영장을 오갔지만(물론 방학을 이용해서!), 광주에 있는 학교야말로 그녀가 가장 애정을 느끼는 장소다. 학교는 문근영의 진지한 지적 호기심을 채워주기도 하지만, 평범한 친구들 속에서 생활하는 것 자체가 그녀에겐 일종의 정화 작용이다. “제 취미가 뭔 줄 아세요? 그냥 가만히 앉아 있는 거예요. 책을 보고 공상을 하고 친구들을 관찰하고… 교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많은 소리가 들리지요. 친구들이 수다 떠는 소리, 책상과 필통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 바람 소리, 햇빛 소리….” 문근영은 종달새처럼 지저귄다. 그리고 문근영은 내게 자연의 소리와 들풀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혹시 삐비란 풀 아세요? 껌처럼 오래 씹을 수 있는 들풀이에요. 아카시아도 너무 달콤해요. 찔레순은 어떻구요. 그런데 찔레순은 너무 많이 먹으면 꽃이 피지 않기 때문에 조금만 먹어야 해요. 누룽지밥이라는 들풀은 누룽지 여문 꽃밥이 참 고소해요.” 식물을 좋아했던 그녀의 어머니는 과수원집 아들(그녀의 아버지!)과 결혼했고, 그녀에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교육시켰다. 덕분에 그녀 안에는 식물적인 영혼과 나이를 뛰어넘는 지혜가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젠 광주집 뒷산에서 그 아름다운 것들이 다 사라져버렸어요.” 그녀의 삶에서 그런 갈등들은 과도기를 겪고 있다. 현재 문근영의 배우로서의 재능의 대부분은 ‘그녀가 동정심 많고 공감할 만한 소녀라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 1%의 불순물도 존재하지 않는 훼손되지 않은 원형질. 슬프고 아름다운 공포 영화 <장화 홍련>에서 그 슬픔의 심장과 목소리는 문근영이 연기한 수연의 것이다. 그리고 이 불가사의한 슬픔의 전염성으로 2003년 6월에 개봉한 이 영화는 개봉 3일 만에 전국 77만4천5백 명을 동원해 한국 영화 개봉 첫 주말 오프닝 역대 신기록을 세웠다. “근영이는 보기만 해도 사람을 흔들어 놓는다. 그런 힘은 한국 여배우 가운데 심은하 정도만 발휘할 수 있었던 힘이다” 라고 <장화 홍련>의 감독 김지운은 문근영에 대해 얘기했었다. 하마터면 롤리타 콤플렉스에 빠질 뻔했던 <어린 신부>는 ‘어린’과 ‘신부’ 사이에 자리잡은 섹슈얼리티의 긴장감을 문근영 특유의 ‘무공해’ 이미지로 채웠다. <어린 신부>로 문근영은 한 영화 전문지에서 백윤식과 함께 2004년의 남녀 대표 배우로 선정됐었다. “어떤 영화 관계자는 우리나라 배우를 통틀어 가장 뛰어난 배우는 아역배우다,라고 하세요. 그냥 그 사람이 되어서 전하는 진심이 마음을 울리는 경우가 있다잖아요. 제게는 <장화 홍련>과 <어린 신부>가 그랬던 것 같아요. 하지만 이젠 정말 연기를 하고 싶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하는 것과 머리로 하는 것, 두 가지를 다 해보고 싶어요.” 직업적으로 문근영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성인 역할을 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걸 감독들과 관객들에게 확신시키는 일. 물론 아직은 외모 때문에 그런 역할을 하기가 힘들다고 할 수도 있다.
“아무래도… 저는 아직도 어린 소녀 같은 면을 많이 가지고 있지만,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변할 거예요. 한편으론 어른과 어린이라는 구분점을 만들기보다 그냥 자유로운 근영이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래도… 그 안엔 어른이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어요.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두려움도. 내 안에 내가 모르는 내가 얼마만큼 있는지 알 수 없어서, 그게 두려워요.” 문근영은 마치 우리 모두가 소녀에서 여자, 어린이에서 어른으로 가기까지의 혼란과 두려움을 그대로 반사하는 거울 같다. 그래서 그녀가 원치 않아도 그녀를 보호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다행히도 문근영은 순수하긴 해도 연약하진 않다. 그녀는 도치법을 많이 쓰고, ‘아무래도’라는 어휘를 자주 사용한다. 그녀는 마치 진화하는 생명체처럼 본능적인 직관으로 표현하고 그것을 자신과 타인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침착하게 부연하고 정리한다. 당신이 아무리 그녀에게 짓궂은 질문을 한다 해도 “아니요”라고 고개를 젓지 않고 “아무래도…”로 시작한 도치법으로 조금씩 천천히 당신의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 것이다. 내년이면 문근영은 스무 살이 된다. 그러고 나면 그녀는 부모님과의 연결고리를 느슨하게 풀기 시작할 것이다. “할머니는 그분이 제 할머니라는 사실만으로 존경스러워요. 엄마는 어린 시절부터 도서관의 책을 가져다 주셨어요. 영화 촬영이 시작되면 엄마는 세 통의 편지를 써서 주세요. 크랭크인 할 때, 촬영이 절정에 이를 때, 그리고 끝날 때.” 그건 마치 교육적인 연애 편지 같다. 그리고 딸의 성공과 수입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부모님은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다. 문근영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광주 시청에서 근무하는 공무원이고, 특히 어머니는 도서관의 사서로 일하고 있다. “엄마는 제가 당신보다 더 많은 돈을 번다고 섭섭해 하세요.” 딸의 ‘과도한’ 수입이 걱정거리였던 어머니는 현명한 해결책을 찾았는데, 그녀가 번 돈을 모두 어려운 이웃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다. 많은 청소년 배우들이 점점 자신이 번 돈으로 부모 형제를 부양하게 되고, 가족 사이의 자연스러운 역학 관계가 기형적으로 뒤바뀌는 데서 혼란을 겪는다. 과도한 등짐을 진 가여운 소녀 가장이나 가족 안에서 분에 넘치는 대우를 받는 어린 주인이 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엄마가 그러셨어요. 니가 돈을 버는 것은 사랑을 받기 때문이다. 그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일은 너무 당연하다.” 문근영의 가족들은 문근영이 결코 스타덤의 무중력 상태로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주는 훌륭한 안전장치다. 어머니는 그녀가 서울의 대학에 진학하면 당신의 적성과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살려, 딸이 다니는 대학의 도서관에서 사서로 무료 봉사를 할 계획이다. “엄마는 저와 함께 출퇴근하고 싶어하세요. 전 그런 엄마가 제발 건강하게 사시는 게 소원이구요.” 캔버스화만 신고 다니던 문근영은 얼마 전에 5cm 굽의 앞코가 동그란 구두를 샀다. “여성스러워지고 싶었거든요. <장화 홍련>의 수연이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살아 있는지 죽어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어린 신부>의 보은이는 친근한 여고생 그 자체였고, 그리고 <댄서의 순정>의 채린이는 그런 보은이가 자라서 첫사랑의 마음을 갖는 숙녀가 되는 얘기거든요.” <어린 신부> <제니, 주노>에 이은 컬처캡미디어의 세 번째 작품 <댄서의 순정>에서 문근영은 언니 대신 한국에 온 연변의 가짜 댄서 역할을 맡아 스포츠댄스 경연대회 우승을 노리는 진짜 댄서와 알콩달콩 사랑 얘기를 엮어간다. 이번 영화에서 문근영은 원래 뮤지컬 배우인 박건형과 하루 10시간씩 춤 연습에 매달렸고 덕분에 멋진 라틴 댄스 솜씨를 선보인다. 물론 문근영은 아직 ‘여자’가 아니다. 여자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일이 아주 멋지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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