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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고백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습관적으로 믿고 고백하던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아담이 대면 했고, 아브라함과 이사야가 만났던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
예수님을 보내시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 그 피눈물 나는 기도를 들으신 하나님은 어떤 마음으로 듣는 분이실까?
한 번쯤 궁금해 해 볼 만 합니다.
지난 수많은 세월동안 그것을 설명하기 위한 수많은 노고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이제 소개할 것은 과정신학으로 보는 하나님입니다. 신학을 전문으로 공부한 적은 없지만, 여러 분들이 말하는 것처럼 19세기 이후 세계 전쟁과 과학의 진보를 격으며 우리 인간은 신에 대한 전통적인 생각을 다시 하게 되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런 중에 과정신학에서의 하나님의 설명을 듣게 됐고, 그것은 하나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경험이 있어,
그 느낌을 공유 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고자 [과정신학을 소개]해 봅니다. 신학논쟁의 소지가 없진 않겠지만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뜻을 정반합으로 향해가는 과정의 일부라 생각해봅니다.
어떤 하나님이 참 모습인지 우리는 알 수 없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 그 참 모습을 궁금해하고, 이해하려 노력하고 따르려 하는 노력이 계속되야 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소개글을 전합니다.
본 글에서 궁금한 부분에 대한 대중적 참고도서로는 한국기독교연구소에서 출판한 “화이트 헤드와 새로운 민중신학” 이 있고, 그 서평중 하나는 에큐메니안 홈페이지 중에 http://www.ecumen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526 에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http://blog.naver.com/kaistq/150097129008 에서 가져왔으며, 최종 참조시의 우선 저작권도 그쪽에 있음을 밝힙니다. 이하 본문은 원문을 가급적 그대로 사용했습니만, 읽기에 편하거나 문장 구성상 더 좋은 구성이 있다고 판단된 부분은 약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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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현대 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던 두 가지 요인은 전쟁과 과학이다. 제1차 세계 대전은 19세기 자유주의 신학의 사상적 토대였던 낙관주의적 세계관을 무너뜨린 반면 환멸과 염세, 절망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비관주의적 세계관이 널리 확산되게 했다. 이런 분위기로부터 실존주의 철학에 기반을 둔 신정통주의 신학이 일어났다. 한편 다윈의 진화론과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으로 과학적 세계관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 그것은 정적인 세계관으로부터 동적인 세계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이런 세계관에 따라 형성된 것이 화이트 헤드의 형이상학에 토대를 둔 과정신학과 샤르댕의 진화론의 신학이다.
과정 신학은 미국에서 일어난 독특한 신학운동이다. 전통 신학이 존재의 철학에 기초했다면, 과정 신학은 화이트헤드의 과정 혹은 생성의 사상을 모델로 하여 현대 정황에 맞는 신학을 형성한 것이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 존재와 생성의 두 철학 흐름이 있었다. 파르메니데스는 참으로 있는 것은 존재뿐이며, 존재는 생성도 소멸도 하지 않으며 영원히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반면 헤라크리토스는 모든 것은 영원한 흐름, 즉 끝임 없는 운동과 변화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 가운데 파르메스데스는 후기 그리스 철학의 토대와 형이상학의 시조가 되었으나 헤라크리토스는 거의 무시되었다.
서구 사상의 대부분은 생성, 과정, 진화 등의 역동적인 개념보다는 존재, 실체, 본실 등의 정적인 개념에서 유래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와 생성 사이의 긴장은 서구사상을 통해 지속되었으며, 19세기 이후 생성, 과정 및 관계의 문제가 헤겔, 마르크스 등에 의해 철학적 논의의 주요한 주제가 되었다. 과정 사상은 미국에서는 제임스, 듀이,화이트헤드 등에 의해, 프랑스에서는 베르그송에 의해, 그리고 영국에서는 알렉산더와 모르간 에 의해 발전되었다. 과정 신학은 극단적으로 상반된 평가를 받고 있다. 지지자들은 과정 신학을 ‘성서적 유신론에 대한 최초의 조직적 표현’이라고 평하거나 ‘1세기 이후 기독교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으로 간주한다. 반면 비판자들은 ‘현재 기독교 신앙을 위협하고 있는 가장 위험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Ⅰ. 생애와 저작
화이트헤드는 1861년 2월 15일 영국 남쪽에 위치한 램스게이트에서 영국 성공회 사제의 아들로 태어났다. 1880년 그는 수학 분야의 장학금을 받고 캠브리지 대학교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그는 이곳에서 30년 동안 수학과 논리학에 몰두하여 대성하게 된 시기였다. 1910년 그는 캠브리지 대학 강사직을 사임한 후 런던으로 옮겨 14년 동안 과학 철학을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1924년 나이 63세에 하바드 대학으로부터 철학 교수로 초빙되어 미국으로 이주해 1936년 은퇴하기까지 철학을 가르쳤다.
하바드의 철학 교수직은 그의 과학 철학을 포괄적인 형이상학적 체계로 발전시킨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그는 유기체의 철학, 즉 실재를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보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발전시켰으며 이는 과정 신학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수학의 원리』 『자연인식의 여러 원리에 관한 연구』 『사상의 구조』 『과학과 근대 세계』 『형성 도상의 종교』 『상징작용:그 의미와 효능』 『과정과 실재』 등이 있다.
Ⅱ. 유기체의 철학
화이트헤드는 현대 과학과 조화되는 새로운 형이상학을 제시하는 일에 그의 생애 마지막 부분을 보냈다. 칸트가 뉴턴의 고전 물리학에 철학적 토대를 제시하는 것을 그의 생애의 과제로 삼았던 것 같이, 화이트헤드는 아인쉬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기초한 현대 물리학에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노력했다.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형이상학을 유기체의 철학 또는 과정 철학이라 불렀다. ‘자연은 과정을 가지고 있다. 그 실재성은 과정에 있다. 붉은 빛이 실재하냐고 묻는 것은 우스운 일이다. 붉은 빛은 실현의 과정에서 존재한다. 자연의 실재성은 자연의 이해, 즉 자연의 사건 속에 있다.’존재와 절대성에 우위를 두는 전통적인 철학과는 달리 생성과 관계성을 강조하는 것이 화이트헤드 사상의 특징이었으며, 실재를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소들이 어떻게 서로 관계되는 가를 제시하는 것이 그의 철학의 목적이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 형이상학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의 실재 개념, 즉 현실적 존재, 영원한 대상 및 신에 대한 이론이다.
1. 현실적 존재
화이트헤드는 『과정과 실재』에서 이 우주가 무수한 사건 또는 계기로 구성된 유기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그런 기본적인 요소를 ‘현실적 존재’또는 ‘현실적 계기’로 불렀다. 현실적 계기는 이보다 더 실재적인 것을 발견할 수 없는 우주의 궁극적인 사실들을 의미한다. 모든 실재가 이것에 의해 설명되며 어떤 것도 이것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존재하는 것들의 유일한 토대이다. 이것이 화이트헤드 사상의 중심 개념인 동시에 그의 철학의 핵심이다.
화이트헤드의 현실적 존재 개념을 좀더 분석하면 다음 몇 가지로 요약된다. 모든 현실적 존재는 계기와 사건으로서의 성격을 지닌다. 그는 『과학과 현대 세계』에서 고전 역학과 양자 역학의 입장을 대비함으로써 이것을 설명했다. 고전 역학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물질의 이동으로 설명하는 반면 양자 역학은 그것을 진동으로 설명한다. 예를 들어, 전자는 빛의 방사를 물질적 에테르의 이동으로 설명했고 후자는 어떤 주기를 지닌 진동으로 설명했다. 따라서 전자는 물질의 지속을 실재로 간주하는 반면, 후자는 반복을 실재로, 모든 진동을 하나의 사건으로 간주했다. 화이트헤드는 자연 현상을 이동으로 설명하고 실체를 지속으로 보는 고전적인 물질 개념을 거부하고 자연 현상을 진동으로, 실체를 사건으로 보는 물질 개념을 제시했다. 그에게는 모든 사건이 과정이며 생성이었다. 진동과 진동 사이에 존재하는 도약과 단절은 곧 새로운 창조와 신기성(novelty)의 출현을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는 시간과 공간의 모든 영역에 편재해 있고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상호 의존적이다. 따라서 서로를 반영한다.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현대 물리학의 시공 연속체에 있어서의 장(field)의 개념을 자신의 형이상학 체계에 도입한 것으로 이해된다.
장의 개념에 따르면 물질, 분자, 원자, 전자 등은 시공에 있어서의 장의 여러 측면이며, 이들은 상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서로를 반영한다. 모든 현실적 존재의 관계 방식은 파악(prehension) 또는 느낌이다. 파악은 관계성의 구체적 사실을 나타낸다. 파악에서 현실적 존재는 다른 현실적 존재들의 가능성을 실현시킨다. 또한 그것은 파악의 활동을 통하여 사회 또는 연쇄(nexus)로 무리 지어진다. 연쇄는 현실적 존재가 집합하는 독특한 사실을 의미한다. 현실적 존재와 연쇄들은 ‘만족’이라고 부르는 최종 국면에 이를 때까지 함께 성장하는 과정 속에 있다.
새로운 파악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이 성장의 과정을 ‘합생(concrescence)’이라고 한다. 합생의 과정 속에는 새로운 파악이 일어나는 국면의 연속이 있다. 그것은 이전의 국면에 존재하는 파악의 통합에 의해 일어난다. 이 과정은 모드 파악들이 하나의 완전한 만족스런 구성 요소가 될 때까지 계속된다. 따라서 모드 현실적 존재들은 그 자체를 과정으로 나타낸다. 그것은 생성과 흐름이다. 그것은 항상 신기성을 지니며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사건으로서의 모든 현실 존재는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유기적이다. 유기적 자연의 근원에는 무한한 창조성이 있다. 이에 근거하여 화이트헤드는 자신의 철학을 유기체의 철학이라 규정한다. 현실적 존재들은 양극성을 지니고 있다. 물극(physical pole)과 심극(mental pole)이 그것이다. 어떤 현실적 존재도 이 중 하나를 결여하고는 존재할 수 없다.
데카르트가 물질과 정신을 두 종류의 독립된 실체로 간주한 데 비해, 화이트헤드는 그들을 한 실체의 두 속성으로 취급했다. 화이트헤드에게는 현실적 존재가 물질과 정신의 양극을 가진 유일한 종류의 실체였다. 따라서 현실적 존재는 주체적인 동시에 객체적이며, 능동적인 지각 작용과 수동적인 소재의 역할을 함께한다. 그 지각 작용이 앞서 말한 파악이다.
1. 영원한 대상
화이트헤드는 현실 세계를 현실적 존재들이 합생하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한편, 이와 대비하는 궁극적 실재로서 영원한 대상들과 신을 제시했다. 따라서 이들은 그의 형이상학 체계의 골조를 이루는 또 다른 중요한 개념이다.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의 순수 가능태라면, 현실적 존재는 영원한 대상의 현실태를 의미한다.
영원한 대상은 항상 현실적 존재를 위한 가능태이다. 그것은 ‘사실의 특수한 결정을 위한 순수 가능태’이며 현실적 존재들의 성격을 규정하는 ‘한정의 형식(Forms of Definiteness)’이다. 영원한 대상의 기능은 현실적 존재 속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진입은 ‘영원한 대상의 가능태가 특정한 현실적 존재의 한정에 기여하면서 그것에서 실현되는 특정한 양식’이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영원한 대상은 현실적 존재의 생성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그것의 가능태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영원한 대상은 추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영원한 대상은 그 자체 속에 있으므로 그 본질은 어떤 특수한 경험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이해된다. 오히려 그것은 그런 경험을 초월한다. 예를 들어 초록색 공이나 초록색 깃발이 감각 대상이라고 한다면 초록색은 영원한 대상이다. 초록은 시간적 사건으로서의 감각 대상을 초월하는 불변의 존재자인 것이다. 이런 면에서 영원한 대상은 플라톤의 형상 개념과 유사하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는 후자가 현실적인 존재 배후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관념적인 존재자라면, 전자는 현실적 존재들 속에서 존재의 진정한 모습을 가진다.
영원한 대상은 그것이 표명되는 현실태와 독립해서 존재할 수 없다. 이 때문에 화이트헤드는 그것을 현실적 존재가 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정의했다. 영원한 대상은 두 가지 본질을 지닌다. 개체성과 관계적 본질이 그것이다. 전자는 영원한 대상의 개별적인 본성이며 존재 자체 외의 다른 것으로 기술될 수 없다. 후자는 영원한 대상이 다른 영원한 대상과 분리될 수 없을 정도의 관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관계적 본질은 어떻게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로 진입하는 것이 가능한가를 결정한다. 영원한 대상이 현실적 존재로 진입하는 경우, 영원한 대상들 사이의 관계성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 내에서의 그들의 지위에 대한 언급을 필요로 한다. 그것은 현실적 존재의 지위에 대한 언급 없이는 표현될 수 없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시간과 공간의 관계성을 영원한 대상들 사이의 일반적이고 체계적 관계성 내에 존재하는 선택적인 한정으로 간주했다. 여기서 그는 궁극적인 한정으로서의 신 개념을 제시했다. 그러한 형이상학적 상황이 어떤 매개하는 작인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인이 신이다. 신은 맹목적인 현실태와 단순한 가능태의 무시간적 영역 사이의 매개자로 나타난다.
Ⅲ. 양극적인 신
1. 신개념
현실적인 존재와 영원한 대상은 우주의 근본 요소이기는 하나, 그들만으로 체계적인 우주가 구성되는 것은 아니다. 화이트헤드의 형이상학 체계는 이 양자와 함께 제 3의 근본적인 개념이 있다. 현실적인 존재와 영원한 대상 사이의 중재자로서의 신 개념이 그것이다. 현실적 존재들은 영원한 대상들에 참여함으로써 일어나며, 이 양자를 중재하는 궁극적인 존재자가 신이다. 신은 시간적인 것의 현실성과 가능적인 것의 무시간성을 결합한다.
신은 양자의 요소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가능하다. 신은 시간적인 사건으로서의 현실적인 존재와 같이 현실적일 뿐만 아니라, 영원한 대상과 같이 비시간적이다. 신은 ‘현실적이면서도 비시간적인 존재자’이다. 그는 비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자인 동시에 시간적인 현실적 존재자들과 영원한 대상들의 종합이다. 신은 자신 안에 전체 우주의 종합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질서 있는 우주는 신에 의해 구성된다. 화이트헤드는 신을 한정의 원리 또는 구체화의 원리로서의 기능을 가진 것으로 보았다. 우주는 무한한 자유를 가진 창조성과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형상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신은 이들을 직시하여 한정함으로써 생성에 적절한 가능성이 현실화될 수 있는 계기를 부여한다. 즉 가능성과 현실성을 이상적으로 조화한다. 따라서 한정이 과정에 본질적이다. 현실적 존재자는 한정의 원리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런 한정의 이유를 합리적으로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신의 본성에 대해서도 이유가 제시될 수 없다. 그 본성이 합리성의 토대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신은 ‘궁극적인 한정’이며, 신의 존재는 ‘궁극적인 비합리성’이다. 한편 신은 현실적 존재와 영원한 대상을 한정하여 우주를 구체화하나, 그 자신은 구체적인 존재가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인 현실성의 근거’이다. 이와 같이 화이트헤드는 신을 한정의 원리 또는 구체화의 원리로 정의하고, 이것이 모든 종교에서 예배의 대상이라고 선언했다. 여호와, 알아, 브라만 등의 명칭은 동일한 존재에 대한 다른 이름일 뿐이다. 『과정과 실재』에서 화이트헤드는 기독교 전통 신학을 지배해 온 신관 가운데 세 가지 잘못된 신 개념들, 즉 부동의 동자, 절대 군주, 냉혹한 도덕주의자의 개념을 비판하고 자신의 독자적인 신 개념인 신의 양극성 이론을 제시했다.
종래의 개념들은 각기 아리스토텔레스, 신격화된 시저, 그리고 히브리 예언자와 연결된 것으로 신을 세 가지 표상, 즉 황제, 도덕적인 힘의 의인화 및 궁극적인 철학적 원리로 만들었다. 그는 근원적이며 실재적인, 초월적 창조자로서의 기독교 전통적인 신관은 두 근원을 가졌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사상으로부터 유래한 부동의 동자로서의 신 개념과 기독교 신학이 선호한 ‘탁월하게 실재적인’존재로서의 신 개념이 그것이다. 이 두 개념이 결합하여, 그의 명령에 의해 세계가 존재하게 되고 그가 부과하는 의지에 세계가 복종하는 초월적 창조자의 교리가 형성되었다. 그는 이것을 기독교 역사에 나타난 비극적인 오류로 간주했다. 한편 기독교가 전파되었을 당시, 서구 세계는 시저의 통치하에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의 법률가들이 서구 신학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것은 또한 황제의 표상으로 신을 만들어 내는 우상 숭배적 요소도 있었다. 전적으로 시저에게 속했던 속성들을 신에게 부여하게 된 것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다.
화이트헤드는 전술한 세 가지 신 개념과 구별되는 또 다른 신 개념을 기독교의 갈릴리적 기원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세계 내의 부드러운 요소를 강조한다. 즉 부드럽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신의 개념이다. 사랑은 지배하는 것도 부동적인 것도 아니며 도덕에 별로 관심을 갖지도 않는다. 그것은 직접적인 현재에서 목적을 찾는다.
2. 신의 본성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신은 양극적인 본성을 가지고 있다. 현실적 존재들이 물극과 심극을 가지고 있듯이, 신 역시 개념적이며 물리적인 양극성이 있지만 양극의 관계성은 현실적 존재와 동일하지 않다. 신에게는 심극이 물극보다 우선하는데 비해, 세계에 있어서는 물극이 심극보다 우선한다. 그는 신의 개념적인 본성을 원초적 본성이라 부르고 신의 물리적인 본성을 결과적 본성이라 불렀다. 이 두 본성의 구별은 신이 다른 현실적 존재들에 관계되는 방법과 관련되어 있다.
(1) 원초적 본성
원초적 본성은 순수한 정신적 본성이라는 의미로 신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이것은 영원한 대상들을 지시하고 배열함으로써 그들의 질서 있는 영역이 이루어지게 하며, 한정의 원리와 신기성의 기관과 유사하다. 신은 영원한 대상들의 다양성을 완전하게 개념적으로 파악함으로써 이 세상에 있는 가능성 전체를 그 자신 내에 포함한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는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을 ‘절대적으로 풍부한 가능태의 무한한 개념적 실현’이라고 하였다. 원초적 본성은 현실적 존재로서의 신으로부터 추상된 것이다. 그것은 ‘탁월한 실재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그 자체 내에 현실성이라곤 전혀 존재하지 않고, 완전히 개념적일 뿐이다.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신은 충만한 느낌이나 의식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이 세상의 사랑이나 증오에 영향을 받지도 않는다. 따라서 화이트헤드는 신을 ‘느낌을 위한 유혹이며 욕구의 영원한 충동’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의식적인 것이 아니라 개념적이며, 현실적인 것이 아니라 현실적인 것의 토대임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다. 그는 자유로우며 완전하며 원초적이며 영원하다. 이러한 본성은 그의 개념적 경험에 의해 구성된 것이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도 시간 또는 과정에 전혀 영향 받지 않는다. 원초적 본성은 세계에 영향을 끼치나 그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신의 역할은 무엇인가? 그것은 현실적 존재의 순수 가능태인 영원한 대상들을 직시하여 그들을 배열하고 한정하여 질서화하는 것이다. 즉 가능성의 구체화이다. 그러나 신이 다른 현실적 존재들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자기 창조를 위한 최초의 자극을 부여하는 것이다. 다니엘 월리암즈의 설명에 따르면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에 대하여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이 그의 행동이다. 그가 존재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그의 행동이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세계와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대상들을 통한 간접적인 관계만을 가진다.
(2) 결과적 본성
결과적 본성은 신의 물극이며, 이것은 현실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적 존재에 대한 신의 물리적 파악으로부터 생겨난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에 내재하면서 합생의 과정에서 현실적 존재들에게 한정성의 자극을 부여함으로써 세계를 창조적으로 전진하게 한다. 이러한 세계의 창조적 전진의 결과로 생겨난 것이 신의 결과적 본성이다. 따라서 결과적인 본성에서 신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신은 물질 세계의 모든 현실 존재들을 파악하는 반면, 모든 현실 존재는 신에게로 수용됨으로써 신의 실재에 그들의 실재를 첨가하게 된다. 그리고 이로 인해 신은 계속적으로 변하게 된다. 신의 결과적 본성의 또 다른 특징은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원초적 본성이 개념적인 감정에 존재하는 까닭에 의식을 소유하지 않는데 반해, 결과적 본성은 의식적이다. 그것은 신의 본성의 통일에서 현실 세계가 실현되며 신의 원초적 개념들 위에 신의 물리적 느낌들을 짜맞춘 것이다.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유한하고 제한적이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모든 가능성들의 개념적인 질서에서 무한하다. 하지만 결과적인 본성으로서의 신은 그의 성취, 가치, 개념적인 본성의 실현에서 유한하다. 신의 결과적 본성은 원초적인 본성에 대한 세계의 반작용으로 구성되기 때문에, 가치의 실현에서 물질적으로 제한 받는다. 결과적 본성과 관련된 신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그의 무한한 인내심이다. 이것은 세계를 구원하려는 신의 사랑을 의미한다. 신은 인내하는 가운데 그의 개념적 조화의 합리성이 이루어지게 한다. 화이트헤드는 신의 이런 면을 ‘진리, 미, 선에 관한 그의 비전에 의해 세계를 주도하는 부드러운 인내심을 가진 세계의 시인’으로 표현했다. 한편 결과적인 본성은 현실적인 신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본성으로서의 신은 현실성을 완전히 결여한 개념적인 존재이다. 반면, 결과적 본성은 이를 보완하여 ‘현 실태의 다양한 자유를 신 자신의 현실화의 조화 속으로 수용함으로써 신의 경험을 성취’하는 것이다. 따라서 결과적 본성은 개별적인 자기 실현을 동반하는 여러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 멜러트의 설명에 따르면, 그것은 세계의 모든 현실태의 합성이다. 신의 결과적인 본성은 영속적이다. 원초적인 본성이 시간이나 과정에 영향 받지 않는 영원한 것이라면, 결과적인 본성은 시간과 같이 창조적인 전진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영속적이다. 신은 현실적인 존재이나 생성하고 소멸하지 않고, 다른 현실 존재들을 파악하고 수렴하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한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소멸되던 모든 현실적 존재들이 신의 본성 속에 수용됨으로써 역시 영속적인 것이 된다. 요약하면, 결과적 본성은 파생적인 본성으로 유한하며 불완전하고 결과적이며 영속적인 동시에 현실적이면서 의식적인 것이 그 주요한 특성들이다.
(3) 양성의 관계
화이트헤드 비판가들은 그가 자주 이 두 본성을 별개의 것처럼 다루거나 심지어 신이 이 본성들의 첨가물인 것처럼 기술한다고 지적했다. 즉 두 본성이 각기 다른 기능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화이트헤드가 두 본성을 분리하거나 또는 대비해서 취급한 데서 일어난 오해로 이해된다. 그의 의도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신의 존재는 양극적이다. 그러나 두 본성을 가진다고 해서 어떤 이중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단순히 한 현실적 존재의 두 측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멜레트는 신의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은 신을 구성하는 두 요소가 아니라고 설명했다. 신은 통일체이며 그의 본성의 어떤 측면도 다른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에 대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각각 그의 철학적 신관과 종교적 신관을 반영하고 있다. 원초적 본성에 대한 논의에서는 단지 그의 철학적인 사고만이 표현되고, 결과적 본성에 대한 논의에는 철학적 관심과 종교적 관심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 전자에서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적 신 개념이 전개되고 후자에서는 그의 종교적인 신관이 전개된다. 따라서 그의 철학적 신관인 원초적 본서에 대한 토의는 그의 형이상학 체계에 대한 참조 없이는 이해하기 어렵다. 요약하면, 화이트헤드에게 있어서 신은 일종의 현실적 존재이다. 그는 실재가 나오는 구조인 동시에 실재의 전체이다. 전자는 신의 원초적 본성이며, 후자는 결과적 본성이다. 신은 이 두 본성으로 가능성의 전체와 현실성의 전체를 완전히 파악한다. 이 두 본성은 또한 화이트헤드가 이해한 신이 추상적인 동시에 구체적이며, 영원한 동시에 시간적이며, 초월적인 동시에 내재적인 존재임을 말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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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과정신학의 태동
과정신학은 세계가 불변적인 실체나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변화와 과정 속에 있는 것으로 이해한 화이트헤드의 동적인 세계관을 수용했다. 화이트헤드는 하나님이 양극적인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초적 본성과 결과적 본성이 그것이다.
전자는 순수한 정신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절대성을 나타낸다. 원초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초월적인 존재이며 세계에 대해 영향을 끼치나 그 자신은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는다. 한편 후자는 현실적인 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신의 유한성과 제한성을 나타낸다. 결과적 본성으로서의 신은 세계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며, 세계는 신에 대해 반응한다. 신은 정적인 완전 속에 있지 않고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은 토마스 아쾨나스의 사상에 기초한 전통적인 신관과 같지 않았다. 따라서 신의 주권적 의지와 존재 자체로서의 신 개념을 강조하는 기독교의 전통적인 입장을 변호하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사상을 기독교에 수용하는 것을 반대했다.
한편 그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화이트헤드의 신관은 기독교에서 보이는 계시의 하나님을 반영하며 과정적인 신 개념이 그리스 철학의 영원한 절대자의 개념보다 기독교인의 경험과 성서의 증거에 보다 가까이 접근해 있다고 주장했다.
멜러트는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어거스틴, 아퀴나스의 신 개념보다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성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데 보다 탁월하고 적절한 방법이라고 평가했다. 과정신학은 1930년 이후 시카고 대학교의 신학부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이로 인해 과정신학파는 흔히 시카고 학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고전적 유신론에서는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여 그 누구도 능가할 수 없으며 세계에 필요한 존재이나 그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반면 과정신학의 유신론에서는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며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 받는 동적인 관계에 있다.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 하나님과 세계는 상관적이나 동일한 것은 아니다. 하트숀은 이것을 만유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불렀다. 과정신학자들은 성서의 하나님은 변화하는 세계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에서 일어나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신 개념이 기독교의 계시를 반영할 뿐 아니라 전통 신학의 절대자로서의 신 개념보다 성서의 증거에 더 부합된다고 판단했다.
Ⅱ. 과정신학설
과정 철학은 존재를 실재로 보는 실체론적 존재론을 거부하고 생성과 과정을 실재로 보는 사상이며, 이것에 근거하여 기독교신앙을 재해석한 것이 과정신학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에선 초 자연적 존재론에 사상적 기반을 두고 있는 전통 신학의 교리들은 재 진술되거나 폐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뿐만 아니라 과정신학자들 또한 신약 성서에 대한 역사 비평적인 연구 방법을 수용하여 성경의 기록을 문자적으로 참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성서의 역사성을 신뢰하지 않고 오히려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필요에 의해 예수의 생애와 교훈에 관한 본래의 자료들이 변경되거나 초 자연적 교훈과 기적 이야기들이 첨부될 수 도 있다고 보았다.
1. 양극적 본성
어거스틴,안셀름, 아퀴나스 등으로 이어지는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정적인 존재로 이해하여 완전한 선과 동일시했다.
하나님을 인간의 희로애락에 참여하는 동적인 인격적 행위자로 보지 않고 불변적이며 고정적인 존재로 설명했다. 과정신학자들에 따르면, 이런 신관은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상호 작용하는 인격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서적 증거를 위협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고 실천할 뿐만 아니라 과거의 일을 기억하며 미래의 일을 예상하여 인간에게 반응한다. 반면, 고전적 유신론의 하나님은 이런 일들을 어떻게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과정신학은 전통 신학의 신론을 성서적인 개념과 그리스 사상의 혼합물로 간주했다. 고전적인 유신론은 이교적인 그리스 철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들에 지나치게 의존할 뿐만 아니라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과정 신학은 일반적으로 하나님의 본성에 대해서는 양극적인 본성을 주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과정신학에선 하나님을 단순히 절대자로만 보는 전통 신학의 단일극적인 신론은 상대성과 생성이 결여된 하나님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비판하고, 화이트헤드의 양극적인 신 개념, 즉 신의 원초적인 본성과 결과적인 본성의 개념을 수용했다.
하나님은 지극히 절대적인 동시에 지극히 상대적이다. 하나님은 영원하고 불변적인 동시에 시간적이며 변화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추상적인 극과 구체적인 극, 또는 절대적인 측면과 상대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추상적인 극에는 영원성, 절대성, 독립성, 불변성과 같은 필연적인 속성이 포함되며, 구체적인 극에는 시간성, 관계성, 생성과 변화와 같은 우연적인 속성이 포함된다. 이 두 극은 상호 보충적이며 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면을 나타낸다.
고전적 유신론은 하나님을 정적이며 무감각한 실체로 간주하는 데 비해, 과정 유신론은 실체를 과정으로 이해하고 하나님 역시 과정과 변화 속에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나님의 불변성에 대한 고전적 교리를 거부하고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을 주장했다. 과정신학자들은 불변적인 절대자의 개념보다는 변화하는 하나님의 개념이 더 성서적이라는 것이 성서적 근거라고 주장하고 기독교인의 경험이 이를 입증한다고 하였다.
과정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무시간성 혹은 영원성의 교리를 부정했다. 하나님이 살아 있으면서도 불변적이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고 보았다. 즉 하나님이 살아 있다면,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시간적이며, 어떤 변화를 경험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은 시간적이며, 관계적이며, 가변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것이 신의 구체적인 면 또는 결과적인 본성이다. 또한 전통 신학은 완전성을 더 이상 아무것도 첨부될 수 없는 또는 결코 능가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것은 완성된 또는 성취된 완전이다. 반면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완전을 계속적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취급한다. 특히 하트숀에 의하면, 하나님의 완전성은 하나님이 세계에 의존한다는 것이나 피조물로부터의 영향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2.만유재신론
과정신학자들은 범신론과 고전적 유신론을 수용할 수 없는 양 극단으로 취급하고 이들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자신들의 입장을 만유재신론 또는 신고전적 유신론이라고 불렀다. 범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는 데 비해, 과정신학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만유재신론은 하나님은 세계 안에 있으며 세계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한다. 고전적 유신론과 만유재신론은 하나님과 세계를 동일시하지 않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그러나 유신론은 하나님이 모든 면에서 절대적으로 완전하며 세계에 대해 필요한 존재이나 자신은 세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한다. 즉 세계에 의존하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만유재신론에 따르면,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내적 의존관계에 있으며 하나님과 세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
1. 무로부터의 창조
화이트헤드는 하나님 자신이 변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과정 속에 있고 과정이 하나님 속에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도 세계도 정적인 완성에 이를 수 없고 양자 모두 신기성에 이르는 창조적인 전진 속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화이트헤드의 견해는 전통 신학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전통 신학에 따르면, 전능한 하나님이 말씀에 의해 무로부터 이 세계를 존재하게 했다. 하나님은 모든 존재의 근원이요 창조자이며, 세계는 그가 창조한 피조물이다. 이것이 성서적 창조론의 핵심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전통 신학의 창조론을 받아 들이지 않고, 화이트헤드의 견해에 근거하여 성서적 창조 교리를 재해석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는 물론, 하나님이 우주의 창조자라는 사실조차 부정했다. 하나님은 태초에 우주를 무로부터 창조하지도 않았으며, 그것이 존재하도록 보존하지도 않는다고 주장했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를 선재하는 재료의 단순한 재형성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 세계는 어느 시점부터 존재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항상 존재해 온 것이다. 끊임없이 과정 속에서 존재했다 소멸하고 다시 존재한다. 하트숀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전에 존재했던 우주로부터 현재의 우주를 만들었다. 이 세계는 이전의 세계와 비슷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또한 이전의 세계는 그 이전의 세계로부터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하트숀에게 있어서, 창조는 성장하도록 지고의 영향력을 미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러한 과정신학의 창조론에 따르면, 세계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구별되지 않으며 오히려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의 일부이다. 하나님은 세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하트숀은 이것을 인간의 정신과 육체의 비유에 의해 설명했다. 하나님과 세계의 관계는 정신과 육체의 관계와 유사하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여러 부분으로 구성된 세계와 같으며, 정신은 육체에 내재하는 하나님과 같다. 정신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 같이 하나님은 세계에 영향을 미친다. 세계는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므로 세계가 하나님의 창조물이라고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세계와 하나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만, 세계가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은 아니다. 요약하면, 전통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무로부터 세계를 만든 창조자이다. 세계는 하나님에게 의존하지만, 하나님은 세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세계의 통치자이다.
반면 과정 신학에서는 하나님이 이미 있는 재료로 세계를 재형성한 것을 뜻한다. 하나님과 세게는 상호 의존 관계에 있으며, 하나님은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협력자요 동반자이다.
4.과정 기독론
과정신학은 기독론을 신론처럼 철저히 탐구하지 않았다. 과정신학은 언제나 신론이 중심이었고 기독론은 파생적이었다.
그리스도에 관한 가장 고전적인 신조는 칼케돈 신조(A.D.451)이다. 칼케돈 신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완전한 하나님인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며 그 안에 신성과 인성이 연합되었다는 양성의 교리를 명시하고 있다. 피텐저는 이런 고전적 신조는 더 이상 현대인에게 의미가 없다고 주장했다.
피텐저에 따르면, 예수님은 1세기에 살았으며 그 시대의 사고 방식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진정한 인간이었다. 피텐저는 예수님 자체가 말씀이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하는 바로 그 지점이라는 데서 예수님의 의의를 찾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행위와 인간의 반응적인 행위의 일치점이다. 창조적인 말씀이 우주 전체에 임재하며 활동한다. 예수님 안에서 그 말씀이 육화되었으며 가장 역동적으로 활동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거대한 사랑의 표현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랑이 하나님 자신이다. 피텐저의 견해에서 보듯이, 과정신학은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선재성과 신성, 성육신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론의 핵심 교리를 부정했다. 그것을 신화적이며 비 역사적인 것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을 단지 보통 인간, 즉 목수의 직업을 가졌던 팔레스틴 유대인으로 취급했다.
Ⅲ. 과정신학의 논쟁거리
과정신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재해석을 시도한 주제들은 대부분 기독교의 핵심에 관련된 것이었다. 하나님은 영원 불변하며 우주의 창조주인가?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하나님이자 진정한 인간인가? 그리스도의 성육신, 죽음 및 부활이 인류 구원을 위해 필요한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속죄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가? 과정신학은 이런 질문에 대해 부정적인 대답을 제시했다. 이것은 전통 신학에 대한 부정이요 공격이었다. 과정신학이 특히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신론에 관한 것이다. 따라서 전통 신학과 과정신학 사이에서 논쟁도 신론에 관련된 것이 많다. 신론에 관한 논쟁은 하나님의 본성과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것으로 나뉜다. 과정신학은 하나님의 절대성과 완전성, 영원성과 불변성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를 거부하고 이들 개념을 재해석했다.
이와 관련한 논란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무감각’의 원리이다. 전통 신학에 따르면 하나님은 어떤 외적인 사건이나 원인에 의해 전혀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이 세계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 있다면 그는 전적으로 자족적인 존재나 불변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고통이나 슬픔의 감정을 가질 수 없다. 이것이 무감각성 혹은 무고통성의 교리이다. 과정신학은 이 교리의 포기를 주장했다. 왜냐하면, 피조물과 함께 고통 받을 수 없는 하나님, 어떤 방식으로든지 피조물에 의존하지 않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신앙과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전통적인 신학자들은 무감각성의 원리가 세상의 일과 사건에 대한 하나님의 관여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했다.
즉 하나님이 피조물과 함께 고통 받을 수 없다는 것이 곧 하나님이 피조물의 고통에 구속적으로 관여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한편 하나님의 사역에 관해서는 특히 창조론이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과정신학은 무로부터의 창조를 부정하고 창조를 기존 재료들의 재형성으로 해석했으며, 하나님을 세계의 창조주가 아니라 세계의 협력자로 간주했다. 이에 대해 성서와 전통 신학에 근거한 많은 반론이 제기되었다. 예를 들어 피노크는 과정신학의 창조론이 비 성서적임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창조하다’는 히브리어 동사는 오직 하나님의 활동에만 사용되며 하나님이 사물을 만든 재료를 말하는 것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성경에는 시편33장 9절 같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존재하게 했다는 강한 암시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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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곧 청년들과 독서모임 시작되면, 과정신학도 커리큘럼에 넣어 읽어야겠네요..ㅋㅋ
논의할때 꼭 함께해주세요..
헉뜨.... 이런 리플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