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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조선일보 커뮤니티 지식시너지 게시판에서 이 까페와 상관있건 없건 몽땅 가리지 않고 다 퍼다 나릅니다.
다만 본 펌글은 저의 의견과 같기 때문에 퍼온 것이 아니며 얼마든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리플 단 사람 중에 "그냥"은 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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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터릭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208 추천수 1 다운횟수 :0
중국어는 원래부터 고립어였을까요?
중국어는 원래부터 고립어였을까요?
아시다시피 중국어는 어족상으로 시노티베트(Sino-Tibetan)어족이며 형태상으로는 고립어(isolating language, 孤立語)에 속하죠...
그런데 전부터 궁금하던 것은 중국어가 원래부터 전혀 굴절이나 교착되지 않는 고립어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중국어를 보면 모든 의미가 극단적으로 단음절로 표현될 수 있으며 그 음절의 형태소가 거의 절대적으로 고유한 발음과 성조를 가지고있으면서 전혀 교착이나 굴절을 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저는 옛날에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습니다...
태고적의 중국어는 교착과 굴절을 하는 아주 자유로운 언어였는데...
그들이 표음문자를 발명하지 않고 뜻 문자를 발명하고서 모든 문자에 인위적으로 하나의 음절과 성조 그리고 의미를 할당하였다...
그러다보니 세월이 지나면서 자연적으로 그들이 만든 문자에 그들의 언어가 스스로 구속되어버린것이다...라구요...
이것은 아마 중국어와 같은 시노티베트어족에 속하면서 뜻 문자인 한자를 쓰지 않는 언어...예를 들면 태국어 등과 같은 언어가 교착이나 굴절을 하는지 여부를 알면 좀 더 정확한 답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듭니다...
혹시 아시는 분이 계시면 답변부탁드립니다...
작성자 : 곡불급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163 추천수 2 다운횟수 :0
태국어의 경우
태국인들과 몇 년 일한 적이 있는데, 그들의 글자는 로마자 계통의 괴이한 문자지만, 그들의 말은 중국말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맹획과 연합했다가 제갈량에게 쫓겨서 도망간 남만의 일족이 산악을 넘어 새 땅을 발견하고 자리잡았다 하더군요.
제 생각입니다만, 중국말도 교착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름을 부를 때 이름 끝에 '아'라고 하는 것 따위 말씀입니다. 태국말에서도 그 정도의 교착 외에는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또, 어휘가 대부분 중국말 어원의 어휘입니다. 그들의 숫자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 보겠습니다.
1. 능
2. 송
3. 삼
4. 시
5. 하'아ㅁㅇ' ('아' 쓰고 그 밑에 미음, 그 밑에 이응 쓴 우리 옛글자 발음)
6. 혹
7. 쪳
8. 빳
9. 카오
10. 십
100. 로이(loi)
1,000. 빤
10,000. 머언
반(半): 킁
재미있는 것은 월남말처럼 첫소리에 ng가 더러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재미있느냐 하면, 옛 영화 장면 하나 때문입니다. 성삼문이 중국으로 발음 비교 연구하러 왔다갔다 했는데, 중간의 야만족들은 그 첫소리 ng발음을 하지 못했습니다. 더욱 재미있는 것은, 그 성삼문역의 그 배우도 그 발음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성삼문과 야만인이 같이 앉아서 발음 연습을 한 글자는 다음과 같습니다.
"ㅣ아" (꼭지 달린 이응과 "ㅏ"를 결합한 문자. nga 소리.)
이것을 성삼문역은 "응아"라 발음했고 야만인은 "으?아" (으 다음에 후두폐쇄음 아)라 하면서, 아무리 해도 성삼문의 발음을 따라 하지 못했습니다. 꼭지 달린 이응은 그래서 창출된 것이고, 그 때 조선말에는 그 발음이 있었습니다. (종성 이응과 같은 발음이 초성에 쓰였다는 뜻입니다.)
후세에 와서 조선말에서는 그러한 초성이 없어지고 문자도 없어졌습니다. 현대의 한국인 중에서는 아직 초성 이응을 발음할 줄 아는 분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시켜봐도 해내지 못하더군요. 월남인 성씨 'nguen'에 그 발음이 나오는데, 기껏해야 '응우엔'이라 하더군요. 정확한 발음은, '응우엔'에서 처음 '으'를 제거한 발음입니다. 어렵죠? 그러나 터릭님은 해내실 것 같습니다.
태국말에서 '탐ㅣ안' (위의 임시 표기법 참조) 할 때 둘째 음절의 초성이 바로 그것입니다. '일'이라는 뜻입니다. '끝'을 '러억(luhk)'이라 하고 일의 끝을 '러억 ㅣ안'이라 합니다. 여기서 보면 한자말 '업무', '종(終)', '종무' 등의 관계와 그 구조가 비슷합니다.
태국말을 깊이 아는 것도 아니지만, 그들과 실지로 깊이 사귄 적이 있음을 밝히기 위해 여러 소리를 했습니다. 4성인가 5성인가도 존재했습니다. 가락을 바꾸면 전혀 다른 말이 됩니다. 그냥 느낌을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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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터릭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76 추천수 1 다운횟수 :0
폐음절과 개음절...
곡불급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역시 곡불급님의 깊고 방대한 지식에 새삼 또 한번 감탄하게 됩니다...
태국어에도 조예가 깊으시고...
태국어도 월남어에서 처럼 'ㅣㅇ(ng)'이 존재하는군요...
저는 사실 요즘 우리가 쓰는 한글을 보면서 음가가 없는 첫음의 이응과 엄밀히 말하면 아음(어금니소리)에 속하는 음가를 가지는 받침 이응을 둘 다 'ㅇ'로 표기하는 것을 옛날처럼 'ㅣㅇ(ng)'를 사용하더라도 구분을 해서 써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나라나 민족의 문자가 그들의 언어를 구속하는 것 같아서요...
사실 우리나라 사람이 의식적으로 그 두 발음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는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서 지금까지 'ㅣㅇ'표기를 사용해 왔다면 아마 한국인들도 월남어나 태국어의 단어를 발음할 때 굳이 앞에 '응'이라는 말을 붙이지 않고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듭니다...(세모(z)발음도 그렇습니다...)
일본어에서도 보면 어떤 지방 방언에서는 주격조사 'ga'를 'nga'로 발음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가끔 일본어강좌나 NHK를 보더라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광동어를 쓰는 옛날 홍콩영화를 보면 또 그런 발음을 많이 들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광동어 얘기가 나온 관계로 잠깐 삼천포로 빠지는 얘기를 하나 할까 합니다...
지금의 중국의 표준어는 아시다시피 북경어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한자발음을 보면 북경어보다 오히려 광동어나 산동어같은 방언들의 발음에 더 가까운 것 같이 들리더라구요...
우리나라의 한자발음은 당나라에서 왔다고 언뜻 들은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중국 방언들 중 상당수가 오히려 고대 중국어의 발음에 더 가깝고 북경어가 만주족등 다른 이민족의 언어에서 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옛날에 한국의 어느 언어학자가 이렇게 주장했다고 합니다...
추운 북방계통 언어에서는 체내의 열손실은 막기 위해서 '폐음절'이 발달하고 더운 남방계통 언어에서는 체내의 열을 발산시키기 위해서 '개음절'이 발달했다라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북방어로 한국어를 남방어로 일본어를 경우 닫히면서 끝나는 말이 없죠...(tsu밖에 없예로 들었다고 합니다...사실 일본어의 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주장에 좀 의문이 갑니다...
왜냐하면 북방어라고 할 수 있는 북경어의 경우 오히려 발음이 폐음절이 전혀 없이 모두 개음절이죠...
즉 단어의 발음이 -k,-t,-p 등의 자음처럼 닫히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음이나 -n, -ng, -er 와 같은 비음으로 끝나죠...
오히려 남방어인 광동어가 한국어처럼 폐음절로 끝나는 발음이 훨씬 많습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이 계시면 부탁드립니다...
작성자 : 그냥 분류 역사·문학 조회수 47 추천수 1 다운횟수 :0
[RE] 언어학자가 아니구요.
언어학자들 욕먹을까봐.. ^^; 씁니다.. 님께서 쓰신 윗 글 중 아래 문맥은.. 혹시 추측컨대 제가 중국통 게시판인가? 에 남겼던 글의 내용을 희미하게 기억하신 듯 해서요.. 너무 넘겨짚었나요?
언어학자가 춥고 더운 것과 발음을 연관지으려는 생각은 안 할 겁니다.
아래 님께서 쓰신 글 중에서 인용한 내용은 평소 저가 창안한 생각 중의 하나인데 동남아 언어가 오히려 폐음절이 많다니 다시 한 번 생각해보아야겠군요..
그런데 일단 제 생각엔 북경어가 폐음절이 적고 남방어가 폐음절이 많은 것에 대해선 저의 기후원인론설이 틀린 때문이라기보다 다른 원인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후원인론설은 유럽에서 독일어등 북구어와 남유럽어를 비교해도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일단 한가지 생각이 떠오르는 것은 일단 북경 지역은 중국의 정치중심지로서 한 700여년간 기능해왔습니다. 원나라 시절부터..
한국은 중심지가 서울이지요? 일본은? 동경이지요? 일본의 언어엔 말씀하신 바와 같이 'ㅇ'발음이 들어가게 주격조사 'ga'가 'nga'로 발음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근데 이건 다른 지방 아니고 동경이 주로 그렇고 현대 일본어가 그렇지 원래 그러했던 건 아닌 것 같아요.
사람이 잘 살고 잘 먹게 되면 성격도 부드러워지고 표정도 순해지고 유연해집니다. 신세대와 구세대 비교해도 그렇지요? 키도 커지고.. 중국에서 유전적으로 키가 제일 큰 지방은 산동성으로서 예로부터 산동장한이니 산동거한이니 불리어왔지만 현재는 우수한 인재가 몰려든 북경지방이 평균키는 제일 큽니다.
발음도 그렇습니다. 일본의 언어는 예로부터 딱딱하기가 경상도 말투 비슷했지만 현대화 이후 발음이 그렇게 구렁이 담넘어가는 소리로 바뀌었고 현재는 한국인이 일본발음하면 너무 억세다고들 얘기합니다.
한국에서도 제주도도 그래요.. 제주도 방언에 '왔수까' 이런 발음이 중세 한국어와 동일한데.. 제주도는 현재 '왔수까'라고 발음하기도 하는 음가도 남아있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우리 표준말 사용자에게 들리기로는 '와숭아'라고 'ng' 발음으로 넘어가고 있어요..
즉 중국 북경어의 그 문제는 중국의 북경이 발전한 지역이었다 보니까 그런 음가로 발전한 원인 중에 하나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이유로 들 수 있는 것으로서
중국 남방어하고 한국어 한자발음 유사한 문제에 대해서는
광동어와 한국어의 유사성에 대한 다른 분들의 글을 퍼올린 것이 있으니 참고하시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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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터릭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31 추천수 1 다운횟수 :0
[RE][RE] 언어학자가 아니구요.
그냥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새로운 지식을 또 알게 되어 감사합니다...
제가 들은 것은 과거의 어느 국어학자의 주장이 확실합니다...
아마 언어학에 권위가 있던 유명한 학자였던 것 같던데...
확실히 기억이 나질 않는군요...
님도 같은 생각을 하셨다면 님의 언어적 고찰능력이 거의 학자 수준이라는 생각이듭니다...
어쨋든 저의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님의 까페에 가서 많은 것을 배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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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하준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32 추천수 1 다운횟수 :0
[RE][RE][RE] 그렇게 주장하는 언어학자가 많습니다.
많은 언어학자가 그런 내용의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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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냥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21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RE][RE] 그렇게 주장하는 언어학자가 많습니다.
아.. 그런가요.. 고맙습니다.. 가르쳐주셔서..
어디선가 제가 읽은 것이 희미하게 머리에 저장되었다가 다시 떠 오른 건가..??
저 생각엔 제 독창적인 생각이라고 생각해오곤 했는데.. 잘 모르겠군요.
그런 생각을 하게 된 배경을 짤막하게 말씀드리면요..
저는 관상을 공부했습니다. 하고 있구요. 그리고 역사에도 나름대로 관심이 많습니다. 좀 황당한 생각으로 비추어지겠지만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오늘날 중국의 거대인구와 발전에 눌려 한국이 정체성을 상실할 위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서 그렇다면 북방몽골계라는 슬로건하에 민족 M & A 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근데 일종의 걸림돌이 된 게 한국인은 분명 유전적으로나 언어의 어족 분류로 북방몽골이 다수이면서도 남방몽골의 영향을 받은 점도 의외로 컸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남방계와 북방계에 대한 생각을 골똘히 많이 해 보았는데..
(저는 어학도 꽝일 뿐만 아니라 언어학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습니다.)
구별 표준이
관상에서 목화토금수 오행형상 구분에 따라 볼 때 水형체입니다. 북방계는 동글고 굴곡이 없고 얼굴의 하관이 강하고 등등의 여러가지 요소가 있는데 그 중 동글고 굴곡이 없어야 하는 이유는 체열 손실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한편으로
역사에서.. 기존의 문제제기도 많았지만 예전에 TV 역사스페셜에서 삼국시대 삼국의 언어가 동일하지 않지 않냐 라는 문제제기가 되어서 어떤 동호회에서 그거에 대한 반박자료를 나름대로 구성해서 글 올려보다가
(2004. 5. 7 보충 ==> 월간 신동아 2004년 5월호인가? 아마 그럴겁니다. 삼국시대 삼국의 언어는 기존 통설과 달리 통역이 필요없는 동일한 언어이고 단순한 방언(사투리) 정도의 관계라는 제 주장과 동일한 주장을 하는 글이 실렸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한국언어와 삼국의 언어의 흔적도 생각해보면서 언어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이유였구요..
다음에도 좋은 가르침을 바라겠습니다.. 혹시 언어의 기후영향설에 대한 언급이 있는 책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작성자 : 김하준 분류 이론·용어 조회수 22 추천수 1 다운횟수 :0
[RE]폐음절어, 개음절어와 기후관련자료
제가 이 관계 내용은 외국언어학자가 쓴 국제공통조어에
관련된 번역서였는데, 오래전에 읽어 제목은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각 지역의 언어를 비교, 친족어 및
신체어에 공통조어가 많이 존재한다는 내용입니다.
그후에도 언어학 관련자료에서 여러학자들이 부분적으로
언급하는 것을 읽었는데, 이에 대해 반박하는 분도 꽤
있었습니다.
다음은 경희대 명예교수 서정범님과 혜전대교수 최문길
박사의 글중 일부입니다. 참고바랍니다.
언어통에서 전에 제가 한번 언급한적이 있습니다.
(중략)한여름에 색안경을 쓰는 것은 눈부신 태양광선을 피하기
위해서인데 남방은 일년 내내 태양광선이 부시니 눈동자가
자연적으로 검어진 것은 아닌지. 우리나라말은 알타이어에
속한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말을 보면 밥, 떡, 옷, 밭과 같이 끝소리에 자음이 붙는다.
그러기 때문에 말을 할 때 비교적 공기가 나가지 않는 편인데
폐음절어(閉音節語)라고 한다. 일본어를 비롯해서 남방계 말은
모두 모음으로 끝나기 때문에 말을 할 때 공기가 나가는
개음절어(開音節語)라고 한다.
추운지방에서는 체내에 더운 공기가 나가면 체온이 떨어지니까
폐음절이 되고 남방계의 말은 더운 공기를 밖으로 내보내면서
몸을 식히는 것이 아닌가. 복날 개들이 입을 벌리고 있는
것은 더운 공기를 내보내기 위한 것이리라.
몇 해 전에 인도네시아 발리섬에 간 적이 있었다.
민속춤이 있는데 주로 손가락 춤이었다.
양팔을 옆으로 벌리고 손가락을 붙였다 떼었다 하는 동작이고
검고 큰 눈알을 옆으로 왔다 갔다 하는 눈알 춤이었다.
유난히 흰 눈동자가 크게 보일 때에는 좀 섬짓하는 느낌을
주기도 했다. 인도나 태국 등은 손가락에 긴 구리 손톱을
덧겨워 그 손이 얼굴앞까지 올라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남방계 춤도 손가락 춤이 중심이 된다고 하겠다.
(중략)-서정범박사
(중략)오후에는 민속촌인 농눅 빌리지 관광을 하였는데, 태국전통쇼,
코끼리쇼, 코끼리 트랙캥 등을 관람하였다.
태국 전통쇼 중에 특기할 것은 손가락 춤이 있었는데,
이는 날씨가 더워 운동량을 줄이기 위해 에너지 소모가 적은
손까락 춤이 생기게 되었고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기후가 온화한 우리나라의 민속춤에는 아리랑이 있는데
활동량이 많거나 적지 않은 적당한 것으로 기후와 관련이
있을 범하다. 러시아는 추우니까, 발을 그냥두면 발이 시려
탭댄스가 발달한 것이라는 추리도 해본다.
언어도 추운지방의 말은 ㅋ,ㅍ,ㅎ 등의 격음이 많고
온대지방인 우리나라는 개음절어, 폐음절어, 경음, 격음 등이
섞여 있으나 일본만 하여도 개음절어 만 있는데, 이는 말을
하면서 추운 지방에서는 체온의 소비를 줄이려고 격음을
많이 쓰고 더운 지방은 체온을 쉽게 발산할 수 있는
개음절어를 많이 쓴다고 할 수 있다.(중략)-최문길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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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곡불급 분류 기타 조회수 76 추천수 2 다운횟수 :0
잃어버린 글자들
그냥 약간 경험이 있었을 뿐입니다. 태국어는 잘 모릅니다. 예맥님과 김하준님이 보태어 놓으니, '시너지'란 말이 살아나는군요.
잃어버린 글자를 되살리고, 같은 선상에서 새로운 글자를 조금 지어내면 외국어 표기에 무척 편리할 것이라 생각한 적이 있어서, 대강 적어 봅니다.
꼭지 달린 이응 - 초성 ng
삼각표 - z
꼭지 없는 히읗 - 독일말 후두폐쇄음
피읖 밑에 이응 - f
비읍 밑에 이응 - v
미음 밑에 이응 - 프랑스말 콧소리
이상은 있던 글자.
다음은 응용하여 새로 만들 글자.
티읕 밑에 이응 - think 할 때의 th
디귿 밑에 이응 - that 할 때의 th
쌍리을 - 초성 l(엘)
"자음자 밑에 이응"은 옛글자를 말하기 위함이며, 실지로 쓰고자 하면 이미 있는 쌍자처름 옆으로 붙이는 것이 더 편리할 것입니다. (이미 있는 쌍자 예: ㄺ)
출신이 갱상도라 모음자에 좀 약해서, 아래아가 어떤 소리인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작성자 : 비인 분류 기타 조회수 15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잃어버린 글자들
이 글은 일전에 베트남통에서 베트남어를 훈민정음으로 적을 수 있는가하는 토론중에 올렸던 글인데 참고가 될 듯해서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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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언어학 전공자 아닙니다마는, 고등학교때 기억을 더듬어 말씀드리겠습니다.
1. 영어의 v, f 발음은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지만, 훈민정음에는
"ㅂ 순경음(ㅸ), ㅍ 순경음(ㆄ)"이라는 것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각각
ㅂ, ㅍ 아래 ㅇ 이 병서되어 있는 문자입니다.
r, l 문자는 훈민정음으로는 구별되지 않으나, ㄹ, ㄹㄹ로 나누어 쓸 수는
있습니다.
z 문자의 발음은 한국어에서는 쓰지 않으나, 훈민정음의 반치음 ㅿ 을 사용하여
표기할 수 있습니다.
2. 북경어의 4성, 광동어의 6성, 베트남어의 6성과 같은 성조 표기는 문자로는
표기가 불가능, 불필요하고 어깨숫자나 방점과 같은 추가표기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점은 웨이드식 표기도 마찬가지입니다.
3. 독일어의 Ach-laut나 Ich-laut는 한국어에서는 쓰이지 않으나, 훈민정음의
쌍히읗(ㆅ) 병음으로 표기가 가능합니다.
4. 프랑스어의 설전음 r과 후음 r(소위 파리의 r)은 한국어로는 구별되지
않으나 훈민정음으로는 각각 ㄹ, ㅭ으로 구별하여 표기할 수 있겠습니다.
훈민정음으로 표기하지 못할 발음도 좀 있는데, 가령 유성 ㄱ, 유성 ㄷ,
유성 ㅂ은 훈민정음으로는 표기하지 못하고 새로운 보조 문자를 만들어야만
표기가 가능합니다. 서울대 언어학과의 이 현복 교수가 태국 치앙마이 북부
라후족, 리수족의 언어를 표기할 때 사용한 바 있습니다. (그들 언어의 독특한
발음은 세계 어떠한 문자로도 표기가 불가능하여 언어학계의 숙제이었는데,
이 현복 교수가 세계 최초로 확장 훈민정음을 사용하여 그들 언어를 표기하는데
성공하였고, 현재 성서의 번역 및 그들 구전 역사의 문자화가 시도되고 있다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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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5.25.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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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터릭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46 추천수 1 다운횟수 :0
권설음(捲舌音:retroflex)도...
곡불급님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거기다가 중국어의 권설음(捲舌音:retroflex)도 표기할 수 있는 글자도 만들면 좋겠습니다...
上海를 한어병음으로 표기하면 Shang hai가 되는데...
한국인들은 '상하이'라고 표기하므로 "sang hai"라고 읽고...
미국인들은 영어식으로 "섕하이"라고 발음하죠...
사실 둘다 원음과는 전혀 다른 발음인데 말입니다...
이건 ㄽ 으로 표기하는 게 그래도 가장 가까운 것일 듯합니다...
아래아는 대충 ㅏ 와 ㅓ 의 중간음으로 영어의 삿갓발음과 비슷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예를 들면 cup, under, 등에서의 u 발음이죠...참고로 저도 곡불급 선생님과 같은 갱상도라서...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어의 발음기호[x] 즉, a 나 o 다음에 오는 ch 발음과
불어의 r 발음이 들을 때는 확연히 구분히 가는데 발음할 때 비슷하게 발음이 되어 버립니다...
일단 둘 다 비슷하게 들리는데...다만 불어의 r 이 약간 목젖을 진동하는 것 같으면서 좀 더 부드럽고 독일어의 ch 가 좀 격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독일어의 r 도 간혹 불어의 r 처럼 목구멍 근처에서 발음을 합니다만...
불어 의 r 발음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우리나라에서 외국어나 외래어를 표기할 때 좀 일관성이 결여된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불어와 포르투갈어의 r 발음인 것 같습니다...
불어의 경우 France 나 Paris 의 경우 r 에 해당하는 발음을 ㄹ로 표기해서 '프랑스', '파리'라고 표기하면서 똑같은 발음인 포르투갈어의 r 은 'ㅎ'으로 표기하여Ronaldo를 '호나우두', Rivaldo를 '히바우두'라고 적습니다...
불어의 r 이나 포르투갈어의 r 모두 한국인이 들을 때는 'ㅎ'과 비슷하게 들리는데 사실은 한국어에는 없는 발음이죠...(이것도 굳이 한글로 만들려면 ㅎㄱ 으로 표기하는 게 그래도 가장 근접한 것 같기도 하구요...)
영어의 r 은 권설음 (捲舌音:retroflex)이고 l 은 설측음(舌側音:lateral)이며 스페인어와 이탈리아어의 r 은 전동음(轉動音:trill)이지만 모두 다 한글로는 ㄹ 로 표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한국어의 초성 ㄹ 발음은 위의 것들 중에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는 탄설음(flapping)이죠..
곡불급님의 말씀하신 것처럼 설측음은 쌍ㄹ로 표기하고...
나머지 것들도 모두 한글로 만들어서 우리 민족이 세계의 어떤 나라의 말도 자유자재로 표기하고 발음할 수 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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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곡불급 분류 기타 조회수 36 추천수 2 다운횟수 :0
후두폐쇄음 (수정)
후두폐쇄음(喉頭閉鎖音)은 사실 음이 아닙니다. 새로운 백마비마론을 펴는 것 같지만, 사실로 오실로 그것은 음이 아니라, 목구멍의 입구를 꽉 닫는 동작입니다. 연음되지 않는 음절 첫머리의 모음을 시작하는 동작이라 하면 표현이 될까요?
엄밀히 따지면, 자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일어에서는 자음으로 인식되어 있고, 한글 창제 당시 조선말에서도 자음으로 인식되어 있었습니다. 문제는 대부분의 언어에서 무시되어 왔기 때문에 그것을 인식하기 힘들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생각해 보면, 깜짝 놀랐을 때 '아' 하는 소리를 할 때와 노래의 발성 연습을 할 때의 '아' 하는 소리를 할 때는 목구멍의 최초 상태가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닫혀 있고, 하나는 열려 있습니다. 입술을 닫은 '미음'은 자음이라 하면서, 목구멍을 닫은 후두폐쇄음은 자음이 아니라 하면 일관성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면,
"알아서 해라" 할 때, 첫 글자 '알'에는 후두폐쇄음이 있고, '아'에는 없습니다.
"잘 알아서 해라" 할 때, 어떤 사람은 "자 라라서 해라" 하고 발음합니다. 이 때의 '알'에는 후두 폐쇄음이 없습니다. 그러나, "잘 아라서 해라" 하고 끊어서 발음하면 '알'에는 후두폐쇄음이 있는 것입니다.
끊어서 발음한다고 항상 후두폐쇄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나랏 말싸미 듕귁에 달아" 할 때는 "달라" 하고 발음하므로, 후두폐쇄음이 없습니다. L.A.는 세 가지로 발음할 수 있는데, 그 중 둘은 맞습니다.
엘 에이 (맞는 발음): 연음되지 않고, '엘'과 '에'에 후두폐쇄음 있음.
엘레이 (맞는 발음): 연음되지 않고, '엘'에만 후두폐쇄음 있음.
에레이 (틀린 발음): 연음되고, 처음 '에'에만 후두폐쇄음 있음.
독일어 x는 히읗 발음의 일종일 뿐, 후두폐쇄음이 아닙니다. ㅡㅇ (꼭지 없는 히읗)은 후두폐쇄음을 표기하기 위해 만들었던 것으로서, 히읗과는 아주 다릅니다. 히읗은 소리이지만, 꼭지 없는 히읗은 소리가 아닙니다. (용각산인가?)
독일말 단어의 첫머리에 나오는 모음에는 거의 모두 후두폐쇄음이 있고, 그 앞에 접두사가 붙어도 연음되지 않고 접두사 끝에서 말이 딱 끊어져서 원말의 첫머리에는 그냥 후두폐쇄음이 남아 있습니다. 그 표시를 물음표(?)에서 점을 뺀 것으로 하는데, 그 표시의 음가가 우리말 고어의 ㅡㅇ(꼭지 없는 히읗)과 정확하고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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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비인 분류 기타 조회수 9 추천수 1 다운횟수 :0
[RE]후두폐쇄음 (수정)
후두폐쇄음이 아니라 성문(聲門)폐쇄음입니다.
후두는 연골조직으로 되어 있어서 후두경련은 일어날지언정 폐쇄는 안 됩니다.
폐쇄되는 부분은 후두와 기도의 사이에 있는 성대(聲帶, vocal chords)입니다.
2003.5.25.
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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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예맥 분류 역사·문학 조회수 90 추천수 1 다운횟수 :0
참고 : 광동어와 우리 한자발음 (내글 다시 펌)
두분 말씀 잘 들었습니다.
곡불급 님이 예로 들은 태국어 중
3, 4, 7, 8, 9, 10, 10,000 은 어원자체가
중국어인 것 같이 들립니다. 음의 형태상.
(3. 삼 4. 시 7. 쪳 8. 빳 9. 카오 10. 십 10,000. 머언)
아마 숫자를 가르키는 고유 태국어가 소멸된 모양이지요 ?
우리는 고유와와 한자어가 병행하고 있지만
해가 갈 수록 한자쪽이 세력이 더 해 가는 듯 합니다.
터릭님이 제기한
" 광동어가 한국어처럼 폐음절로 끝나는 발음이 훨씬 많습니다 '
라는 질문은 제가 감당하기 어려우나
광동한자음과 우리 한자음에 대하여는
제가 얼마전 베트남통에 어느분 댓글로 올린 적 있습니다.
님이 질문 포인트와는 거리가 있으나
한번 참고하시라고 여기에 그때 제글을 퍼서 올립니다.
=========베트남 통에 올렸던 제글 펌=============
우선 광동어및 민남어 (복건어, 대만어) 에
우리 말 한자 발음과 비슷한 것이 많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건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말 한자 발음이 어디서 왔겠습니까 ?
(우리 고유어 말고)
당연히 중국에서 왔겠지요.
달리 올데가 어디 있습니까 ?
그런데 달라진 이유는 ?
그건 우선 중국자체의 음이 달라졌고
중국 중심부가 달라 졌습니다.
한자및 한 문화가 우리나라에 처음 대량으로 들어 왔다고
생각되는 3-4 세기 경의 중국중심부는 ?
(물론 기원전 10세기 아니면 그 이전 부터 중국과의
교섭은 있어 왔지만 제 뜻은 대량으로 유입된 때)
좀 복잡합니다.
당시 중국은 위진 남북조 시대입니다.
따라서 북조라면 장안과 낙양이 될 터이고
남조라면 오늘날 남경, 상해 일대가 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남북조 두군데 다 영향을 받았습니다.
남조와는 연합하여 우리에게 군사적 위협이 되는
북조를 견제하기 위하여 (주로 유목민들이 세운 왕조)
북조와는 군사적으로 대결상태지만 맞대고 있으니
대결만 한 것이 아니라 아무래도 교류를 해야겠지요.
그런데 당시 중심부는 오늘날
중심부 - 북경과는 다릅니다.
당시 북경일대는 燕 이라고 불렀지요.
중국자체 의 발음이 세월도 많이 흘렀고
중심부도 바뀐 까닭에 엄청 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 언어 및 모든 문화의 기본 특성은 ;
중심부에선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주변엔 느리고
완전히 벗어나면 변화가 거의 정지되는 특성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영어와 영국영어를 비교하면
영어 고어투 및 옛날 발음이 더 잘 보전된 것은
미국영어 쪽이라고 하더군요.
따라서 우리나라 한자음이 본토보다
오히려 옛날 발음에 더 가까울 개연성이 충분합니다.
남조중심부 - 양자강 하류 오늘날 강소, 절강 일대는
吳 라고 불렀습니다.
남조와 상당히 많이 교류를 했기에
우리나라 한자음 상당수를 吳音 이라고도 합니다.
이 오의 약간 남쪽인 민남 (복건) 어와 비슷할 수가 있겠지요.
거기에 중국의 광동은 변방입니다.(옛날엔)
한 시대 까지 중국사람들도 (물론 낙양, 장안 쪽 사람들)
광동의 형편에 대하여 잘 모를 정도 입니다.
따라서 복건을 민월 이라고 부르고
광동은 뭐 잘 모르겠는 데 "월" 같은 여겨지는
부족이 여럿있다 해서 "백월" 또는 "남월" 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당시 민남(복건),광동의 "월"은 오늘날
월남인 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제갈량이 남만정벌했을 때 남만은
오늘날 귀주성, 운남성 일대 입니다.
이것은 전에 제가 삼국지연의 에 대하여 글 올릴때
밝힌바 있습니다)
당연히 본부와 말이 달랐지요.
그래도 한자가 뜻글이라 써 놓으면 서로 통하기는 하지요.
그러니 상당수 글자의 발음이 북쪽에서 수입해 들어 온 것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경우 그 음은 옛날 발음과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로 광동어, 민남어의 한자 발음이
우리나라 한자음과 비슷한 발음이 많지 않나 합니다.
뭐 물론 권위있는 해석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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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하준 분류 역사·문학 조회수 54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고려 문종의 영향이 아닐지요?
우리나라에 한자가 도입된 것은 기원전부터(漢시대)라고
생각되나, 본격적인 사용은 신라 경덕왕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나라의 전 지명을 본격적으로 한자화하였죠.
그 이후에는 고려의 제11대왕 문종이 고려의 문물제도을
크게 정비하였는데, 그가 흠모한 나라가 중국 남방에
자리잡고 있던 송(宋)나라였고, 송나라의 제도를 모방,
우리나라의 현실에 알맞게 채택하였습니다.
문종은 이름 그대로 우리 역사상, 문물제도를 획기적으로
정비한 인물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우리나라의 한자의 음이
중국의 남방지역의 발음과 유사한 것은 아닐지요.
또한, 우리나라에 귀화한 중국계 성씨도 거창 愼씨,
창녕 成씨 등 대부분 중국의 남방지역 출신이 많습니다.
왕조간의 교류도 중요하였겠지만, 민간교류는 주로
남방지역과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참고로 고려 문종의 소개자료를 올립니다.
문종(文宗,1019-83) 고려 제11대왕 재위기간:1046-1083
*출생과 성장과정
문종은 현종의 셋째아들이자 운혜태후 김씨 소생으로 1019년
12월 계미일에 출생하였으며 이름은 휘(徽), 자는 촉유(燭幽)이다.
1022년에 낙랑군에 책봉되었고 1037년에 내사령에 올랐다가
1046년 5월 정유일 정종의 선위를 받아 고려 제11대 왕에 올랐다.
이때 그의 나이 혈기왕성한 28세였다. 문종은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문무의 재능을 겸비하고 사리에 밝아 주변으로부터 칭송이 자자한
인물이었다. 제10대왕 정종은 그의 형으로 정종에게 아들이 있었으나,
형제상속의 형태를 취하여 정종의 사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고려의 제11대왕으로의 등극
역사는 그의 재위기간을 소위 고려의 문물제도가 크게 정비되어
흔히 이 시기를 고려의 황금기라고 한다.
불교·유교를 비롯해서 미술·공예에 이르기까지 문화 전반에 걸쳐
큰 발전을 보았는데, 이것은 신라문화를 계승하는 동시에
송의 문화를 수용하여 독특한 창조적 고려문화를 형성한 것이었다.
문종의 치하에서 양반전시과(兩班田柴科)가 갱정(更定)되고
관제가 개편되며 백관의 반차(班次)와 녹과(祿科)가제정되는 등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을 의미하는 정치·경제의 여러 제도가
완비되었다. 제도가 정비되는 과정에서는 송제(宋制)를 모방, 수용한
흔적도 많이 보이나, 대개의 경우 수입된 제도는 고려의 실정에 알맞게
수정되어 실시되었다. 특히, 하부구조인 사회·경제의 상태는 고려와
송나라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으므로, 송나라의 제도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여 전시과제도와 같은 고려 독자의 토지법이
여러번 개편되어 실시되었다. 지방통치체제도 성종 때 처음 외관(外官)이
설치된 이래 점차로 정비되어 나갔는데, 현종을 거쳐 문종대에 이르러서는
양계(兩界)에 방어사·진사·진 장의 수가 늘어나고 남방의 제도(諸道)에서는
지주부군사(知州府郡事)·현령(縣令)이 증설되어 수령의 관료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제도의 완비는 물론 집권적 지배체제의 확립과 불가분의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문종의 치적은 그가 재위하고 있는 시기에
활동한 최제안이나 최충을 시중으로 앉히면서 그의 능력이 발휘되었다.
이 시기가 태평성대라는 것은 그 시기에 일어나는 중요한 사건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이 알 수 있다. 그는 1년(1047) 시중 최충에 명하여 법률가들을
모아 종래의 율령(律令)·서산(書算)에 대하여 상세한 고정(考定)을
가하였는데, 이 결과 고려의 형법(刑 法)이 크게 정비되었다.
3년(1049) 5품 이상의 고급관료들에게 상속이 가능한 일정한 토지를
지급하여 양반 신분의 유지에 필요한 재정적 후원을 목적으로 한
공음전시법(功蔭田柴法)을 정하고, 4년(1050) 재면법(災免法)을
마련하였으며 또 답험손 실법(踏驗損實法)을 보충하였다.
재면법은 농사의 피재액(被災額)에 따라서 피재액이 4분 이상일 경우
조(租)를 면하고, 6분인 경우 조·포(布)를 면하고, 7분인 경우
조·포·역(役)을 모두 다 면제해주는 법제였다. 답험손실법은 현지의
농사상황을 관(官)에서 잘 조사한 결과 피해의 정도에 따라서 조세를
경감, 조절해주었다.
16년(1062) 삼원신수법(三員訊囚法)을 마련해서 죄수의 신문(訊問)에는
반드시 형관(刑官) 3명 이상을 입회하게 하여 범죄의 조사가 공정히
이루어지도록 하였고, 17년(1063) 국자감 제생(諸生)의 고교법(考校法)을
제정하여 학생의 재학연한을 제한하였다. 이에 따라 유생(儒生)의
재학기간은 9년, 율생(律生)의 재학기간은 6년으로 제한해서,
자질이 부족하여 재학기간중 학업의 성적을 올리지 못하는 자는
퇴학시켰다.
양전보수법(量田步數法)이 규정되어 결(結)의 면적이 확정된 것도
문종 23 년(1069)의 일이다. 이에 의하면 양전(量田)의 단위는
보(步)로써 정하되 6촌(寸)을 1분(分), 10분을 1척(尺), 6척을 1보로 하고
방(方)33보를 1결, 방 47보를 2결로 하여 이하 10결에 이르기까지
그 면적을 명시한 것이다.
이 양전척(量田尺)의 실체는 알 수 없으나 고주척(古周尺, 19.8㎝)은
아닌 듯하며, 이 양전척에 의하여 산정되는 결의 면적은 약 1만7천평(坪)
·6,800 평·4,500평 등으로 추정하는 견해들이 서로 대립되어 있다.
이해 또 종래 1결에 대하여 5승(升)을 징수하던 전세(田稅)가
7승(升) 5홉(合)으로, 10부 (負)에 대해서는 7홉5작(勺)으로 각각
인상되었다. 고려의 전품(田品)에 관해서는 문종8년(1054) 해마다
경작하는 불역지지 (不易之地)를 상전(上田)으로 하고, 1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일역지지(一易 之地)를 중전(中田)으로 하고,
2년 쉬고 1년 경작하는 재역지지(再易之地)를 하전(下田)으로 하는
3등급의 전품제(田品制)가 마련되어 있었다.
양반전시과가 갱정되어 고려 전기의 토지법이 최종적으로 완비되고
또 녹봉제도가 문·무 백관 및 유역인(有役人)들에게 실시되는 것도
문종 30년 (1076)의 일인데, 이것은 모두 집권적 지배체제의 물질적 토대가
정비되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향리의 자제를 인질로 서울에 보내어
출신지방의 계문(啓聞)에 대비한 선상기인법(選上其人法)이 제정된 것은
이듬해의 일인데, 이것도 물론 집권적 지배체제의 강화·진전을
의미하는 것이다.
문종의 치하에서 또 주목되는 것은 23년(1069) 경기의 범위가 확대되어
종전의 13현이 4배로 늘어나 50여현으로 팽창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경기의 확대는 종래 양반전시과의 개편을 앞두고 양반의
전시지(田柴地)를 왕경의 주변인 경기의 땅 안에서 확정 지급하기 위한
조처를 전제로 하는 것이라고 해석되어 왔는데, 현재로서는 양반에 지급된
과전(科田)은 경기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하도(下道)전역에 걸쳐
지급되었으리라는 견해가 유력시되어 있으므로, 경기확대의 이유와 동기는
앞으로 다른 각도에서 재검토되어야할 필요가 있다.
또, 남반직(南班職)의 최고위가 종래의 4품위(品位)에서 7품위로 떨어져
격하된 것도 문종대의 일인데, 이것은 문무양반에 비하여 남반이 천시된
결과이며 양반관료의 신분의 우월성이 정착된 것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대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4년·6년·18년·22년·27년에
각각 변방에서 동여진(東女眞)의 침구를 보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대여진관계는 대체로 평온하여 여진측이 토산을 바쳐 내부(內附)하였으므로
후일에 보는 큰 변동은 아직 예측되지 않았다. 문종은 고려 전기의
문물제도가 완비되는 문화적 황금기를 상징하는 영매한 국왕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태평시기를 이끈 문종도 1082년 인절현비 이씨가 죽고,
이듬해 4월 아홉번째 왕자 왕침이 죽고 난 다음 실의에 빠진 문종도
갑자기 병상에 누웠다. 그리고 5월부터 일어나지 못하다가 7월에 태자
훈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생을 마감하였다.
이때 향년 65세로 재위 37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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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냥 분류 역사·문학 조회수 26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 창녕 成씨는 남방계 아닙니다.
먼저 변명하고픈 건 제가 딴지 걸고 다니는 사람은 아닌데.. ^^; 제가 成씨이기 땜에.. 어쩔 수 없이.. ^^;
님께서 쓰신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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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우리나라에 귀화한 중국계 성씨도 거창 愼씨,
>창녕 成씨 등 대부분 중국의 남방지역 출신이 많습니다.
>왕조간의 교류도 중요하였겠지만, 민간교류는 주로
>남방지역과 활발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
거창 신씨는 제가 모르겠군요.. 그렇지만 추측컨대 거창이란 산악지방이므로 최소한 신라부터 정착한 사람들일 거 같군요..
저희 대동보에 의하면 成씨는 주나라(어떤 나라인지 아시죠??) 문왕(은나라를 멸망시킨 무왕의 아버지) 7번째 아들의 후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나라는 중원(대강 현재 하남성) 땅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서 당시 중국인(夏族, 華夏) 입장에선 북방 오랑캐 였습니다. 후대의 진나라도 그렇게 여겨졌는데 주나라 때는 당근 북방인이고 주 문왕은 몽골족과 DNA 거의 같을 겁니다.
그리고 족보상 시조는 고려 호족 중 한 사람으로서 고려 왕건에 협력하였습니다. 고로 신라시대부터 이미 정착단계니까.. 귀화라고 하기는 좀 그렇군요..
저희도 한국인입니다.. 흑흑..
혹시 삼국사기인가? 신라를 진나라 멸망시 유민이 도망 어쩌구 했는데 그 중에 섞인 유민이라면.. 정통 한국인입니다..
그렇지만 님의 글의 전체적 맥락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고 다른 많은 중국 남방 귀화인이 있다는 것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작성자 : 김하준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17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RE] 죄송합니다만.....
죄송합니다. 남의 집안 일에 이러쿵 저러쿵해서.....
제가 성(姓)씨에 관심이 많아, 생각해 본겁니다.
단순히 참고만 바랍니다.
창령 成씨의 유래
내가 알고 있는 成씨는 모두 6명이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학구열이 강하다.
또한, 이중 두명은 무척 고집이 강하다.
이러한 내력은 조상으로부터 물려 받은 것 같다.
나라가 망했다고 姓씨를 城에서 成으로 바꿨으니.....
우리나라의 成씨는 그 본관이 강릉, 경주, 나주,
달성, 달진, 양근, 예산, 전주,
창령, 창원, 청룡, 청양, 청주등이 있으며,
인구가 약 20만명정도인 것으로 알려져 있고,
창령 성씨가 대표적인 것으로 되어 있다.
창령 성씨의 시조는 고려때
창령에서 향직의 우두머리인
호장 중윤을 역임한 成仁輔인데,
성인보의 아버지 성숙생은
신라 대관 성저의 후예라 한다.
백제때 성충이 보이나 창령
성씨와의 관련성은 알 수 없고,
신라때 당나라의 학사 성경이가 우리나라에
건너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조상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일곱째 아들의 후손인데,
그 자손이 나라이름인 城을 성씨로 삼았으나,
성나라가 초나라에게 망하자,
城에서 成으로 姓씨를 바꿨다고 한다.
대체로 볼 때,
成씨는 그연원이 중국에 있는 듯 하다.
중국 史書에 의하면, 遼나라때(947년) 遼東에
漢人을 이주시켜 成州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고,
五代十國시대(943년경)에는
楚나라 남쪽, 월남의 북쪽, 즉, 중국 남부에
城州가 기록되어 있다.
오대십국시대의 성주와 초나라는
성경이의 내력과 일치하고 있다.
이로 볼 때, 成씨는 城州의 王族으로
초나라에 망한후에 고향을 떠나, 요동을 거처
신라말 고려초에 우리나라로
이주해 온 것으로 보인다.
성씨하면, 성삼문, 성춘향과 백제충신
성충등이 떠오른다.
거창 愼씨의 유래
우리나라의 愼씨의 대표적인 본관이 居昌인데, 愼씨는
중국 天水(현 감숙성위천도에 속한 지명)에서 系出된
姓씨라고 한다. 거창 신씨의 시조 愼修의 선조는 중국
송나라 開封부 사람인데, 고려 문종때 우리나라에
귀화했으며, 학식이 풍부하고 의술이 능하여 1075년
(문종29년)에 시어사(侍御史)가 되었고, 숙종때
수사공우복야참지정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송나라는 당에서 오대십국을 거쳐, 960년 조광윤이
개봉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하여, 300년간 유지하다가
1277년에 멸망했는데, 잘 알려진 판관 포청천이 북송
인조시대 명신이다.
고려 문종은 송나라의 문화를 매우 흠모하였으며,
송의 신종이 즉위(1067년)한 후 聯麗對遼策(연려대요책)을
실시, 1071년에 국교를 재개한 후 문화교류를 활발히
하였다. 신씨의 시조 신수는 이러한 배경속에서 고려에
귀화한 것이다. 그 당시 신씨들은 문무와 음율, 기개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신씨중, 현대에 이르러 대표적인 인물로
포청천과 같은 기개와 학술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서울대 愼鏞夏교수가 있고, 교보 창립자 愼鏞虎 명예회장이
있는데, 신수의 32대손으로 추정되며, 신용호 명예회장의
후계자인 愼昌宰 교보회장은 서울의대에서 산부인과를
전공했는데, 의술이 능하고 학문과 기개가 높았다던
선조의 피가 몇 세대의 異系結合에도 불구하고,
愼씨의 혈관속에 도도히 흘러 온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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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냥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21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RE][RE] 그렇군요.. 하지만 남방계는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타이핑한 것이 2번이나 날라가서 정말 괴롭네요.. 다시 쓰기가.. 다시 간략히 쓰면요)
대단하시군요. 보학의 맥을 다시 세우실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씨가 적어도 남방계는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한다면요..
성씨가 중국에서 왔다는 것은 물론 그렇습니다.
본은 현재 단일 본입니다. 창녕 성씨.
신라시대에 왔으니 한국인이라고 생각한다는 거구요..
그리고 城이 아니고 윈도우에서 한자 지원이 안 되는 成 + 우부방입니다. 城은 고유명사가 될 수 없는 보통명사지요. 정말 城이라는 글자를 쓰는 "성"씨가 있다면 그 "성"씨는 저희 성씨와 계통이 틀릴 겁니다.
그리고 그 위치가 맞더라도 성씨가 북방계일 것이라 추론하는 내용을 아래와 같이 올리겠습니다.
1. 楚의 수도 郢은 호북성 정중앙이고 삼국지에서 한중 땅에 가깝구요.. 그런데 越地는 강소성 중 양자강 밑에 부분은 吳고 그 밑에 현재 절강성인데.. 물론 郢보다 越은 남쪽이지만 동서로 매우 멀으므로 거의 수평인데 楚 남쪽 越 북쪽이란 것은 조금 의문스럽습니다.
2. 이에 대해서 楚는 秦이 팽창하던 전국후기 한중 땅을 빼앗기고 망할 때까지 잠깐(楚의 긴 역사를 생각할 때) 도읍을 양자강 하구 쪽으로 옮겼는데 이런 상태에서는 楚의 남쪽 越의 북쪽이란 얘기가 성립할 수 있구요.
3. 그런데 전국 후기에는 중국 전체적으로 봉건시스템이 파괴되었습니다.
4. 더구나 吳, 越은 전국 초기까지 존속했던 나라인데.. 이들은 楚와 함께 중원의 夏族인 제, 晉(또는 그것이 분열한 한, 魏, 조), 노, 송, 衛 등으로부터 異族으로 취급받았으며 이들은
(근래 고고학 보고에 의하면 거의 동일한 수준의 또한 별개의 문명을 이룩한 황하문명, 요하의 대문구 문화권, 양자강 문화권 중에서 후자를 계승한 국가들이며)
이들에게는 周와 동일한 봉건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周의 가족을 분봉하는 봉건시스템이 여기에까지 실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5. 춘추 5패가(학설에 따라 吳가 들어가기도 하지만) 楚에 대항한 연합전선을 구축하면서 사실상 춘추전국시대는 남북조시대였는데 (4의 이유에 따라)楚가 병탄한 제후국들은 주로 陳, 蔡 등 회하유역의 국가들입니다.(노, 송, 제, 韓(또는 그 이전의 晉)) 등 황하유역 국가들의 변경에 있던 국가들이지요..
6. 그래서 楚의 남쪽, 越의 북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면 그것은 고대에 흔히 행해졌던 복국(復國)입니다. 한 나라를 병탄하고 나서 나중에 다시 제사 지낼 땅 정도만 주어서 명목상으로 다시 세워주는 겁니다.(殷 유민으로 宋을 세웠듯이) 그랬다가 다시 병탄했겠지요..
7. 즉 주 문왕 제7자 후손이 맞다면 성(成 + 우부방)은 황하유역 내지 회하 북쪽에 위치하였을 수 밖에 없고 잠깐의 기간동안 양자강 하구에 집단이주 되었을 수 있었겠지요.
한편 저 홀로만 생각하는 의미로서 남방계는 아직 남방계 혈연적 요소가 남아있는 것을 가리키고요.. 주로 전남 해안가에 여말선초 및 나말여초에 이주한 집단입니다..(왜구는 본래 양자강 하구 고려인설 - 김성호씨 일련의 저술 참조)
이들은 삼국초기부터 북방계와 결합하여 한민족을 형성하였던 자들로서 한국인 남방계 혈통 지분을 갖는 자들로서 다시 말해 그 계통은 남방계입니다.
한편 김성호씨 학설상 이들은 나말 여초에도 대거 왔는데 그 설명에 의하면 그 집단은 중국인들이 당시에도 이족 그 중에서도 신라인이라고 인정하였던 양자강 하구 거주의 자들로서 무역 등 해상업에 종사한 자들이며 성경이가 당나라의 학사였다고 한다면 혈통이 그들과는 다를 것 같으며
양자강 하구 거주 신라인들(중국인이 부르기에)은 정착지가 한반도 서부 및 서남부 지방 해안가이며.. 그 중심지였던 양자강 하구 주산군도는 현재에도 소나무가 일품인 곳으로서 왕건의 송악을 비롯해서 송악이란 지명을 한반도 해안가 곳곳에 남겼습니다.
예컨대 안산 - 목포간 고속도로변에서 당진? 인가 기억이 희미합니다. 거기 송악 인터체인지가 있지요..
성씨의 주 본관이 창녕이란 것은 양자강 하구 거주 신라인이 아니란 얘기이고.. 그렇다면 그들과는 다른 적어도 중국 북방 거주인이었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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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하준 분류 역사·문학 조회수 15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RE][RE][RE] 고대지도 참고하시길.....
역사에 관한 지식이 대단하시군요.
김성호님의 일련의 저작을 언급하신 것을 보니 대부분
읽으신 것 같습니다. 저도 대부분 읽었고, 역사관련
저서중 제일 먼저 접한 것이 김성호님의 글이었습니다.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보는 시각을 배웠죠. 그런데,
다른 저서들을 계속 읽어오면서 김성호님의 글을
비판하는 시각도 생겨나더군요.
김성호님은 '비류백제'라는 자기 자신의 옥쇄를 만들어 놓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시는 것 같습니다. 일련의 저서가
그틀속에서 바라보는 역사의 해석입니다.
최근의 저서 '단군과 고구려가 죽어야 민족사가 산다'에서는
도를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고대 동북아에 관한 저서중 중국학자 손진기가 쓰고, 임동석이
옮긴 동문선의 '東北民族源流'라는 책이 있습니다.
중국인 중심의 시각이 눈에 약간 거슬리긴 하지만 매우 도움이
되는 책이더군요.
특히, 시대별로 첨부한 고대 지도는 위에 제가 그리고 '그냥'님이
언급한 나라와 도시가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습니다.
고대의 역사가 한눈에 들어옵니다.
성씨의 유래와 이동도 상상이 됩니다. 참고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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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그냥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5 추천수 0 다운횟수 :0
[RE][RE][RE][RE][RE][RE] 좋은 자료입니다.
일요일 본 게시판에서 님의 방대한 견해를 날독(눈동자를 날리며 빨리 읽기)해보고 감탄하였습니다만..
고대지도에 대한 자료는 좋은 안내였습니다. 그런데 주의할 것은 고대의 지명이란 것은 '중국인의 선입견을 제거하고 보면 유익' 할 것이라고 정확히 지적하신 것처럼 오늘날 지명과 기계적으로 연결하기 곤란합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역사적활동의 무대가 좁아들었기 때문인 점, 고유언어나 보통명사였던 지명을 한자화하는데 따른 점 등을 대표적으로 생각할 수 있고 중국은 상내약외 등 중화적 춘추필법과 고대의 상형문자인 한자가 동시다발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서로 다른 한자를 사용하다가 통일하게 되는 과정에서 특히 고대의 지명이 혼동되는 것이지요.
무수하지만 예컨대 遼와 越의 지역 명칭이 시대가 지날수록 "요"라는 지명은 점점 더 동쪽으로 "월"이라는 지명은 점점 더 남쪽으로 내려온 것과 같이 말입니다.
일단 成氏가 남방계가 아니라는 것에 대해서는 큰 무리가 없다는 것으로 알겠습니다.
그리고
김성호 저술에서 전개되는 이론에 있어서 남방계에게 과잉된 가중치를 부여한 부분에 대하여 짤막하게 쓰겠습니다.
우선 물론 김성호의 저술에 대한 님의 의견에 동감입니다. 한반도 거주자는 북방계의 요소가 매우 강하다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구요..
특히 소서노 및 비류와 오족 왜인(계통상 월족 왜인이 차라리 나은 것 같음 : 이하 越人이라 함)을 결부시키는 것은 일종의 비약이고.. 이러한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제 중의 하나가 흔들려버린다는 것은 그 이론에서 무시할 수 없는 약점이지요.
그렇다 하더라도 김성호 저술 중에서 전반적으로 양자강 남쪽 거주 越人들이 한반도 서남해안 거주자 들과 강한 연관성을 갖는다는 것은 인정할 만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 분의 저술만을 참고로 하여 저의 사고가 형성된 건 아닙니다. 이러한 견해를 주장하는 분들도 꽤 있지요.
한반도의 남방계 혈통의 지분은 多數는 아니지만 그 부분이 상당히 존재한다는 것에 대하여
역사서를 통한 문헌 고증 얘기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것이구요. 방증으로 일단 가 봅니다.
이 부분은 화교들과 결혼한 분들의 한국 문화와의 유사성(특히 식생활 등의 유사성)에 대한 내용이 있다는 것에 대한 펌글 참조.
전세계 화교 중 대다수가 복건성 潮州 및 그 일대 출신이라 할 수 있고 그와 결혼한 한국 여성들은 그 곳과 한국과의 유사성에 대한 얘기를 일부 전하고 있습니다.
물론 潮州人이 바로 그 고대의 越이라기보다는 삼국시대 손권이 장악하기에 고생했던 바 민(門 + 蟲)越이지만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의 관심분야인 관상으로도 그 정통 분야말고 역시 그에 관하여 방증으로 간단하게 생각해 보면 항간에 얘기하기를 우리나라에서 각도의 남도와 북도의 차이점에 대한 얘기가 있다는 것은 다 아실 겁니다.
얼굴도 다릅니다. 남방계의 혈통이 남도쪽 또는 해안가입니다. 북방계 혈통이 북도쪽 또는 산악지방 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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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 김하준 분류 지역·민족 조회수 5 추천수 0 다운횟수 :0
우리말통도 한번 보시길.....
우리말통에 올린 제 글도 참고하십시요.
'언어와 민족의 뿌리' 등에서 우리민족의
형성에 남방계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그냥'님과 견해가 같습니다.
출처:http://cafe.daum.net/yukdiscou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