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즘(IZM) 개설 6주년 기념 특집 2
"1990년 이후, 우리를 감동시킨 작곡가 TOP 20"(1위-공동5)
음악은 가수의 능력만으로 완성될 수는 없습니다. 무대에 올라 노래하는 가수는 작사가, 전문 연주인, 녹음 엔지니어 등 한 곡이 완성되기까지 노력한 많은 사람들의 대표자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첫 시작점은 누구일까요. 작곡가가 아닐까 합니다. 바로 노래의 기본 골격이 되는 멜로디를 창작한 이들이지요.
작곡가의 이름은 항상 뒤에 위치하기에 기억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들의 작업이 없었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수많은 명곡들은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데 말이죠. 그래서 저희 이즘에서는 사이트 오픈 6주년을 기념하여 두 번째 설문을 실시했습니다. '우리를 감동시킨 작곡가 TOP 20'입니다. 요즘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인물을 밝히기 위해 시기는 역시 1990년 이후로 한정했습니다.
비록 순위로 차등을 두었지만 칼로 자르듯이 냉정하게 구분될 수는 없습니다. 또한 스무 명의 명단으로 뛰어난 음악작가들을 모두 담아낼 수 없기에 이 설문이 완벽한 기준이 될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시대에 왕성하게 활동한 작곡가를 가늠하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악보를 사용하여 이해를 돕도록 하였습니다.
설문은 이즘필자 17명 외에도 강기영, 김홍범, 김재희(이상 방송 PD)와 김영식, 유병렬, 이주엽(이상 음반기확자)등 외부전문가 16명이 도와주셔서 모두 33명이 참여한 결과입니다. 설문에 응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아울러 이즘을 찾으셔서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 방문객 여러분께도 다시 한번 고마움을 표합니다.
● 1위
김형석 (17표) -악보
1990년대의 주류음악을 주도한 작곡가로서 편곡까지 포함, 800여곡 이상을 가지고 있는 그의 음악을 사람들은 흔히 "'테마'가 살아있다"라고 얘기한다. 이는 곧 철저히 동기 중심으로 풀어가면서 한가지의 주제를 반복 진행시킨다는 뜻일 텐데 조금만 더 쉽게 설명을 하자면, 베토벤의 운명 교향곡 중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그 부분, 즉, 1악장의 1테마 부분인 그 동기는 이 악장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변주되면서 풀어진다. 전혀 다른 모티프로 엮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이 주제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동기를 발전시켜가는 방법 중에는 가락과 리듬까지 동일한 부분을 계속 반복시키기, 또는 리듬이나 가락이 서로 대조적으로 움직이게 하거나, 리듬은 같지만 가락에 변화를 줌으로써 발전시키는 방법이 있다. 이 마지막의 경우가 바로 '동형진행'이라는 것인데 국내 작곡가중 이 부분에의 재주꾼이 바로 '김형석'이다. 실제로 김형석은 인터뷰에서 곡을 쓸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부분이 바로 이 '동형 진행'이라고 밝힌 바 있다.
그의 대표곡 중 아름다운 선율을 가진 '그대 내게 다시'만 보더라도 한 가지 테마를 얼마나 잘 이끌고 가는지 볼 수 있다. 악보를 보면, A부분과 B부분은 ♩=♪♪로 나눠준 것 이외에는 아주 동일한 형태를 가지고 있고, B부분과 C부분을 살펴보더라도 A부분에서의 2분음표를 ♩♩로 그리고, ♩. ♪♩은 모두 똑같은 리듬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대 내게 다시'는 한 가지 주제에 조금씩 변화를 주면서 하나의 이야기를 완성시켜나가는 발라드의 명곡이다.
대표곡
내게 오는 길(2000), 처음처럼(2001) -성시경
I believe(2001) -신승훈
사랑이라는 이유로(1996) -김광석
꿈, 이 밤의 끝을 잡고(1995) -솔리드
● 2위
서태지 (16표)
서태지의 곡 만들기 방법론은 '스퀴즈' 아니었을까. 전술적 번트로 점수를 짜내는 치밀한 작전처럼 그는 단순히 멜로디를 풀어내 곡을 완성한 것이 아니라, 초벌구이를 거쳐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로 들어가는 식의 마치 쥐어짜내듯 고통스런 과정을 통해 곡을 만들었다. 더 놀라운 것은 여러 패턴의 곡을 동시에 그렇게 만들어낸 뒤, 마지막에 하나로 통합하는 식이었다는 점! 원대한 자기 이상을 담은 '큰 그림'을 상정해놓고 여러 '밑그림'을 그려 그것을 합일시키는 기법이었다. 스퀴지에다가 '콜라주'도 동원한 셈이다.
1990년대 우리 대중음악 판을 송두리째 뒤흔든 '난 알아요' '하여가'가 그렇게 탄생했다. 따라서 이 2곡은 '작은 교향악'(Little Symphony!)라 일컬어도 손색이 없다. 하나의 곡일지라도 파고 들어가면 거기에 서너 패턴의 곡이 얼키설키 공재(共在)했던 것이다. 일례로 '난 알아요'의 속에는 랩, 프로그레시브 그리고 전통적 멜로디 파트 등 적어도 서로 다른 세 가지 패턴의 곡이 존재한다.
'하여가'에서 유일한 농악의 선율악기 태평소를 활용한 것은 그 재능의 꼭짓점. 뒤에는 스트레이트하고 강한 것, 그리고 늘 새것을 찾아갔다는 점에서 약간의 집착을 읽을 수는 있지만 그는 언제나 동급 최강이었다. 총기와 재기에 넘친 곡 만들기로 그는 세상을 지배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열풍을 견인한 실질 동력은 서태지의 탁월한 작사, 작곡, 편곡, 프로듀싱 역량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대표곡
난 알아요(1992년)
하여가(1993년)
죽음의 늪(1993년)
울트라맨이야(2000년)
● 3위
김창환 (11표)
'댄스 음악을 주류로 끌어올린 일등공신"(KBS 라디오 프로듀서 민일홍) 1990년대 가요계를 '김창환'이라는 이름을 지우고 생각할 수가 있을까. 그에게 속한 모든 가수들의 스타덤과 더불어 '이미지'까지 만들어내는 '프로듀서' 주체의 음반 비즈니스의 부상, '200'만장 시대라는 음반 산업의 황금기를 주도, 레게음악, 하우스 음악을 가요에 정착 등의 수식어는 온통 그의 이름 앞에 붙여도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 그는 작곡가이기 전에 시대를 지배하는 트렌드를 정확히 짚어내는 프로듀서의 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요소들을 곳곳에 도입해 한국 가요의 핵심인 '쉽고 잘 들리는 멜로디'를 결합, 가공할만한 히트 세례를 퍼부었다. 1990년대 댄스계를 평정한 그의 노래는 전면적으로 '뽕짝 댄스'라 불리는 하우스 음악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는데, 사실 이 리듬의 출발은 춤추기 위해 흐느적거리는 '그루브'를 위함이었지 감상의 목적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이 리듬에 1980년대를 시작으로 1990년대 온 세계를 휩쓴 '레게(reggae)', 랩, 라틴 등을 가미해 가뜩이나 흥겨운 리듬을 한층 더 끌어올린다. 바로 한 번에 쏙쏙 들어오는 캐치한 선율이라는 '팝'의 요소들과 결합해 레게 팝, 라틴 팝 등의 이름을 대중성으로 멋지게 포장한 것이다.
대표곡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1992), 핑계(1993), 잘못된 만남(1995) - 김건모
날 울리지마(1991) - 신승훈
꿍따리 샤바라(1996) - 클론
상상속의 너(1995) -노이즈
나를 봐(2004) - 이정
● 4위
윤상 (10표) -악보
"한국형 일렉트로니카의 선구자, 베이시스트 출신답게 독특한 '윤상표 리듬구조'는 어언 20년이 되가는 지금도 가요팬들에게 유효하다"(KBS 라디오 프로듀서 민일홍)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초반의 음악을 듣고 자라온 뮤지션들에게 '윤상'의 음악은 정신적 멘토 역할을 톡톡히 했다. '윤상'하면 떠오르는 사운드, 이를테면 전자 음악, 월드 뮤직을 향한 무한한 애정, 혹은 일렉트로니카 등 김동률, 유희열과 같은 음악인들에게는 그의 이런 뮤지션으로서의 실험적인 사운드란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솔로 앨범에서 이렇듯 '스타일리시'한 편곡에의 새로움을 실험했다면, '작곡가'로서의 그의 능력은 히트곡 목록에서 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1990년대부터 사랑을 받아 지금도 애청되는 김민우의 '입영열차 안에서', 강수지의 '보라빛 향기', 드라마 주제곡 '파일럿' 등을 거쳐 최근에 '팀(Tim)'에 이르기까지 그 사운드 패턴은 늘 같으면서도 그 안에 대중성을 정확히 간파한 멜로디 조탁감각이란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것이었다.
특히 '팀(Tim)'의 데뷔곡인 '사랑합니다'는 악보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화성학의 '세컨더리 도미넌트'라는 문법에 정확히 들어맞는데 이렇듯, 정해진 화성에 철저히 내 맡기고도 그 속에서 오롯이 담아내는 선율이란 너무도 단아하고 대중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곡가이다.
● 공동 5위
신해철 (9표)
"끊임없는 자기 진화! 가요계의 데이빗 보위"(음악평론가 고영탁). 그의 출발은 전도유망한 '밴드'였지만 그를 스타덤에 올린 것은 '안녕'이라는 아이돌 가수 이미지였다. 시간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영원한 희망가 '그대에게'의 무한궤도, 철저한 가요앨범이었던 솔로 앨범들, 그러나 '진짜' 자기 음악을 시도한 건 '넥스트'가 그 시발점이었다. 늘 자기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 사운드에 대한 치열한 실험, 변화에 대한 열망은 그를 늘 진화하게 했고, 넥스트, 노댄스, 모노크롬, 비트겐슈타인을 거치며 이를 더 구체화시켰다.
헤비메탈, 프로그레시브, 국악, 일렉트로니카, 재즈와의 접목은 때론 너무나 장황했지만 이런 다양한 스펙트럼을 넓혀온 그의 음악의 중심에는 늘 '메탈'이 있었다. 기타리스트로 출발한 '밴드'중심의 음악을 추구해온 그에게 빼놓을 수 없는, 필살의 멜로디를 가진 발라드들에서도 이런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결코 코드에 기대지 않는, 악보를 보면 허망할 정도의 간단한 코드 프레이즈로 '나에게 쓰는 편지', '내 마음 깊은 곳의 너'의 선율을 그려낼 수 있다는 것, 여타의 작곡가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독특한 아우라는 결국 록, 메탈에 깊게 뿌리를 박고 있는 그의 감성 덕분이 아닐까.
대표곡
안녕(1990), 재즈까페, 나에게 쓰는 편지(1991) -신해철
도시인(1992), The ocean(1994) - 넥스트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1999) - 모노크롬
윤일상 (9표) -악보
젊은 음악 팬들에게는 그가 단지 '쿨'과, '엠씨 더 맥스'등으로 대표되는 한 철 여름노래를 쓰는 '댄스 곡의 귀재' 정도로만 알려져 있겠지만 그는 발라드에서도 그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선율이 수려했던 터보의 '회상', 김범수의 '보고싶다' 등은 지금까지도 꾸준히 회자되는 그의 스테디 셀러다.
그의 이런 히트곡 제조에는 아주 중요한 법칙이 하나있다. 바로 선율의 진폭을 크게 하지 않는다는 것. 보통 규모가 큰 스트링과 다양한 악기소스들로 덩어리가 커지면 차분한 '감상'을 유도할 수는 있겠지만 쉽게 따라 부르는 유행가의 미덕은 획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쉽고 귀에 감기는 멜로디'가 그의 과녁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선율의 움직임이 적어야 한다는 것을 정확히 짚어냈다. 1번 '회상'은 동형진행인 동시에 그 폭이 크지가 않으며, 2번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다.
또한, 박지윤의 '아무것도 몰라요', '이소은'의 'Charm'에서와 같이 그가 무언가 동양적인 느낌을 담은 곡을 쓸 때는 어김없이 베이비 페이스(Baby face)가 작곡한 마돈나(Maddonna)의 'Take a bow'의 패턴을 사용하는데 이는 위의 두 곡과 'Take a bow'의 후렴 직전의 전개방식이라든지, 스트링을 이용한 리듬 , 펜타토닉 스케일(Pentatonic Scale) 의 5음계를 사용한 작법 등이 아주 닮아 있는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펜타토닉 스케일 - 메이저 스케일의 1,2,3,5,6음으로 구성되며, 음 간의 반음이 없다. 블루스와 아일랜드 등의 민속음악에서 볼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