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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6월 25일 목요일
[(백)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 남북통일 기원 미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민족 분단의 아픔을 안고 사는 한국 교회는 1965년부터 해마다 6월 25일에 가까운 주일을 ‘침묵의 교회를 위한 기도의 날’로 정하였다. 1992년에 그 명칭을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로 바꾸고, 2005년부터 이날을 6월 25일이나 그 전 주일에 지내다가, 2017년부터는 6월 25일에 거행하기로 하였다. 한국 교회는 남북한의 진정한 평화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하여 끊임없이 기도하며 노력하고 있다.
말씀의 초대
모세는 백성에게,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 주 하느님께서 그들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라고 권고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 신명기의 말씀입니다. 30,1-5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였다.
1 “이 모든 말씀, 곧 내가 너희 앞에 내놓은 축복과 저주가 너희 위에 내릴 때,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몰아내 버리신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너희가 마음속으로 뉘우치고, 2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서,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대로
너희와 너희의 아들들이 마음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그분의 말씀을 들으면,
3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또 너희를 가엾이 여기시어,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를 흩어 버리신 모든 민족들에게서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4 너희가 하늘 끝까지 쫓겨났다 하더라도,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그곳에서 너희를 모아들이시고
그곳에서 너희를 데려오실 것이다.
5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조상들이 차지하였던 땅으로 너희를 들어가게 하시어,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하고 조상들보다 더 잘되고 번성하게 해 주실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서로 용서하십시오.>
▥ 사도 바오로의 에페소서 말씀입니다. 4,29―5,2
형제 여러분, 29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
30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속량의 날을 위하여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
31 모든 원한과 격분과 분노와 폭언과 중상을 온갖 악의와 함께 내버리십시오.
32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5,1 그러므로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
2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는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로 내놓으신 것처럼,
여러분도 사랑 안에서 살아가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8,19ㄴ-22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9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20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마태오 복음서 18장은 공동체 안에서 상처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묻습니다. 죄를 지은 형제를 바로잡는 절차, 두세 사람이 함께 모인 자리, 그리고 기도로 이루어지는 분별. 그러나 이 모든 규정의 밑바닥에는 하나의 전제가 놓여 있지요. 누군가는 이미 상처를 입었고, 누군가는 그 상처의 원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은 그 지점에서 시작합니다.
“두 사람이 …… 마음을 모아 …… 청하면”(마태 18,19). 이는 단순한 합의의 기술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두 사람이, 저마다 분노와 억울함을 잠시 내려놓고, 하느님 앞에서 함께 서 있는 순간을 가리킵니다. 그 침묵 속에서 공동체는 자기 확신 대신 서로를 향한 두려움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내리는 판단이 누군가의 생각과 삶을 더 무너뜨리지는 않을지, 그 조심스러운 두려움을 안고 기도합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이 함께 하는 청은, 먼저 서로의 아픔을 오래 바라본 뒤에야 겨우 입 밖으로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를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마태 18,21)라고 묻습니다. 용서를 서로 간의 계산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계산을 무너뜨리십니다. “일흔일곱 번까지라도”(18,22). 이 말씀은 형제에게 받은 상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상처가 되풀이되는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고단하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의 말씀입니다. 용서는 상처의 크기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을 선택하는 일입니다. 지치면서도, 다시! 분노가 식지 않았는데도, 다시! 그 ‘다시’가 용서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공동체가 완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상처 속에서도 서로 포기하지 않는 법을 배우라고 말합니다. 그 배움의 자리 한가운데 주님께서 계십니다. 그런데 배우기 참 힘들지요. 배우기 싫기도 합니다. 그런 상처받은 마음 또한 예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 분명히!(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 남분 분단의 고착화!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625, 즉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을 맞아 남북분단이 점점 고착화되고, 기정사실화 되며 이제는 더 이상 되돌이킬 수 없는 과제로 여겨지는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바라봅니다.
남북 간의 화해와 협력, 그리고 궁극적으로 남북통일이 얼마나 간절한 우리 민족의 염원이었으면,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국가 주요 부서로 통일부를 만들고 장관까지 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많은 사람의 머릿속에 통일은 물 건너 간 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만일 통일이 된다면 남쪽이 안게 될 부담, 통일로 인한 리스크가 너무 크다며 그냥 이대로 가는게 좋다고 외칩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 남북 분단은 국제정치패권세력이 만들어낸 것입니다. 강대국들의 국익에 따라 강제된 분단이기 때문에, 분단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외치던 수많은 민족인사들이 속속 제거되었습니다.
당시 국제정치패권세력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우리 민족에 참으로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815 해방 이후 유럽 쪽 전범 국가인 독일을 분단시켰다면, 당연히 아시아 쪽 전범 국가인 일본을 분단시켰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승전국가들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를 분단시키는 중차대한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가로막는 분단 고착화 세력은 바깥에만 있지 않습니다. 더 큰 적은 내부에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는 강대국들에 빌붙어 제 한 목숨, 제 호주머니만 생각하는 독재자들을 거듭 배출시켰으며, 기회주의의 명수인 친일파 세력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했으며, 아직도 그들의 잔존 세력들은 독버섯처럼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버젓이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도 어떤 정당 안에서, 여러 매체 안에서 얼토당토않은 논리로 선량한 국민들을 호도시키고 있습니다. 분단 고착화를 자신들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으로 삼고 있습니다. 자연스레 그들은 남북 사이의 가뭄에 콩 나듯이 조성되는 해빙 무드라든지, 남북 간의 소통과 만남의 분위기 앞에, 별의별 꼬투리를 잡고 훼방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같은 날, 안타깝게도 분단 고착화 세력에 희생되신 백범 선생님의 유언과도 같은 말씀을 마음 깊이 담고 지내야겠습니다. “분단된 동포를 하나로 만드는 것은 이 시대 새로운 독립운동입니다. 통일 운동은 곧 제2의 독립운동입니다”(백범 선생)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다른 그 누구의 과제가 아니라, 남북 당사자들 사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남북을 둘러싼 주변 국가들 겉으로는 반기는 듯하지만 속으로는 지속적인 분단을 원합니다. 한반도의 분단이 곧 그들의 국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의 내밀한 가정사에 대해 옆집 이웃들이 끼어들어 이래라저래라 한다면, 얼마나 기분 나쁜 일이겠습니까? 지금 우리가 처한 형국이 똑같은 현실입니다. 너무나도 당연히 남북문제의 주도권을 우리 손으로 가져와야 마땅합니다.
70여년 이상 분단고착화로 인한 남과 북의 증오와 대립, 불신으로 우리는 북한에 대하여 아는 것 같지만, 사실은 왜곡, 날조된 정보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이른 바 우리는 북맹(北盲) 상태입니다. 북한에 대하여 증오와 불신으로 눈이 멀어 아무것도 아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을 좀 더 알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겠습니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사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분단의 벽을 넘어서는 일은 낭만적이거나 감상적인 것이 아니라, 온몸이 으깨어질 고통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담대한 용기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평화의 주님께서 우리 한민족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이제는 그만 분단의 세월을 끝내고, 조속한 평화 통일을 선물로 주시라고 열심히 기도해야겠습니다.
우리는 통일을 원하는가, 통일의 이득을 원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도 한 날을 잘 지내셨는지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남북통일 기원 미사 복음 묵상을 함께 나누겠습니다.
오늘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상처인 6·25 전쟁이 일어난 날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이맘때 제단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통일을 간절히 청합니다. 그런데 오늘 저는 뼈아픈 질문 하나를 던지고 싶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통일을 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까. 더 정확히 묻겠습니다. 우리는 '통일' 그 자체를 원합니까, 아니면 통일이 가져다줄 '이득'을 원합니까. 이 둘은 전혀 다릅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전혀 다른 것을 바랍니다. 고해소에서 "신부님, 저에게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게 해 달라고 매일 기도하는데 잘 안 됩니다" 하며 눈물짓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그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용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훨씬 클 때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미워하면서 얻는 묘한 쾌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저 사람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해. 나는 피해자니까 동정받을 권리가 있어." 나아가 상대를 마음의 감옥에 가두고 "내가 너를 용서해 주느냐 마느냐"의 자리에 올라서서 군림하는 즐거움마저 은근히 누립니다. 속으로는 이 미움의 드라마를 끝내고 싶지 않으면서, 입술로만 "용서하게 해 주세요" 하고 청합니다. 어느 하느님께서 그 가짜 기도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무서운 진실을 마주합니다. 사람은 결과는 원하면서도 그 결과의 본질은 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화해의 '평온함'은 원하지만 화해에 드는 '자기 낮춤'은 원하지 않습니다. 용서가 가져올 '마음의 평화'는 탐나지만, 용서 그 자체, 곧 상대를 나와 같은 자리로 끌어올려 품는 일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도가 가짜가 됩니다. 본질은 빼고 열매만 달라고 조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통일 기도가 정확히 이러합니다. 입으로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지만, 냉정히 보면 분단을 꽤 쏠쏠하게 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덕에 방위산업이 번창하고 무기 수출이 막대한 흑자를 냅니다. 어떤 이들은 젊은이들이 군대에서 규율을 배운다며 이 체제를 은근히 긍정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선거철마다 북녘의 위협과 분단의 긴장을 끌어다 제 권력을 연장하는 데 써먹습니다. 이렇게 분단이 주는 달콤함을 속으로 계산하면서 제단에 모여 "주님, 휴전선을 무너뜨려 주소서" 한다면, 이것은 하느님을 기만하는 위선입니다.
그러나 오늘 제가 더 아프게 짚고 싶은 것은 이 노골적인 위선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고 은밀한 문제입니다. 설령 분단으로 이득을 보지 않는 선량한 우리조차, 사실은 통일 그 자체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통일이 가져올 '편안한 평화'는 원하지만, 통일 그 자체가 요구하는 '하나 됨의 대가'는 원하지 않습니다. 갈라선 형제를 다시 내 살붙이로 끌어안는 일, 그 낯섦과 부담과 손해를 감당하는 일, 내 것을 덜어 저쪽을 채우는 일을 원하지 않습니다. 곧 우리는 통일의 열매는 따 먹고 싶지만, 하나가 되는 그 일 자체는 치르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기도는 "하나 되게 하소서"가 아니라 "내 손해 없이 평화만 주소서"였던 셈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됨이란 본디 무엇이며 무엇을 요구하는가. 솔로몬 임금의 명재판이 이를 환히 비춥니다(1열왕 3장 참조). 한 아기를 두고 두 여인이 서로 제 아들이라 우깁니다. 임금이 칼을 가져와 아기를 반으로 잘라 나누라 하자, 가짜 어미는 통쾌해하며 외칩니다. "내 것도 네 것도 안 될 터이니 반으로 가르십시오." 가짜 어미, 곧 마귀에게 속한 자는 제가 갖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생명을 찢어 갈라 버리는 쪽을 택합니다. 분열은 생명을 죽이는 사탄의 본성입니다. 그러나 진짜 어미는 다릅니다. 자식을 잃는 찢어지는 고통을 무릅쓰고, 아기를 살리려 제 소유권을 통째로 포기합니다. 보십시오. 하나 됨을 진정 원하는 사람은, 그 하나 됨을 위해 '제 몫을 내려놓는 고통'을 먼저 받아들입니다. 진짜 어미가 원한 것은 '내가 아기를 차지하는 결과'가 아니라 '아기가 살아 하나로 온전한 것' 그 자체였습니다. 통일을 원한다는 것은 바로 이 진짜 어미의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니 화해를 청하려면, 먼저 '갈라짐은 악이며 악은 곧 고통'이라는 확신이 영혼에 새겨져야 합니다. 머리로는 죄인 줄 알면서 몸은 죄로 달려갈 때, 영과 육이 갈라진 그 사람이 얼마나 괴로운지를 우리는 압니다. 부부가 집에서 매일 으르렁대면서 성당에 와 "우리 자녀는 우애 깊게 하나 되게 하소서" 청하면 그 기도가 하늘에 닿겠습니까. 교우끼리 파벌을 짓고 뒤에서 헐뜯으면서 민족의 일치를 위해 미사를 봉헌하는 것은 비극입니다. 성령께서는 일치의 영이시며, 사랑은 둘을 하나로 묶는 신성한 힘입니다. 그러므로 부부든 공동체든 민족이든, 갈라져 있다는 것은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빠져나갔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도대체 왜 하나 됨이 이토록 절대적인 선일까요. 뇌과학이 말하는 '분리뇌 증후군'이 그 까닭을 섬뜩하게 보여 줍니다. 극심한 뇌전증을 치료하려 좌뇌와 우뇌를 잇는 신경 다리, 곧 뇌량을 끊은 환자들이 있었습니다. 뇌가 하나로 통합되지 못하고 둘로 갈라지자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침에 오른손이 셔츠 단추를 채우면 왼손이 슬그머니 다가와 그 단추를 풀어 버립니다. 아내를 안으려 오른팔을 뻗는데 왼팔이 아내를 밀쳐 냅니다. 한 몸 안에서 끝없는 내전이 벌어지는 지옥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우리 민족도 그러합니다. 하나로 이어지지 못하고 갈라진 생명은 스스로를 공격하며 파멸로 치닫습니다.
성경은 이 하나 됨이 곧 예수님의 마지막 소원이었음을 증언합니다. 수난을 앞두신 그 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요한 17,21 참조) 그리고 그분께서는 그 하나 됨을 위해 단지 기도만 하신 것이 아니라, 갈라진 하늘과 땅을 다시 잇고자 당신 몸을 십자가 위에서 찢기게 내어 주셨습니다. 참된 하나 됨은 언제나 누군가의 자기 내어 줌을 대가로 이루어집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통일을 '구호로 외치는 법'이 아니라 '몸으로 치르는 법'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통일은 철책선이 무너지는 정치적 사건이기 이전에, 우리 마음이 하나로 포개어지는 영적 사건입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의 기도를 정직하게 바꾸어야 합니다. "내 손해 없는 평화를 주소서"가 아니라 "하나 되기 위해 제 몫을 내려놓을 용기를 주소서"라고 청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는 척하며 우월감을 즐기던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으십시오. 내 가족, 내 이웃, 우리 교우와 끊어진 뇌량을 사랑과 용서로 다시 꿰매지 못한다면, 남북통일은 영영 오지 않을 헛된 구호일 뿐입니다.
우리가 통일의 '이득'이 아니라 하나 됨 '그 자체'를 원하여, 그 하나 됨에 드는 고통까지 끌어안고 피눈물로 기도할 때, 비로소 하느님께서는 이 한반도에 드리운 미움의 장벽을 허무시고 참된 화해와 일치의 기적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하시기를.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여기 모인 모든 이에게 강복하시어 길이 머물게 하소서. 주님을 찬미합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입니다. 우리는 한 민족이지만 오랜 세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살아왔습니다. 같은 말을 쓰고, 같은 음식을 먹고, 같은 조상을 기억하지만, 마음의 거리는 멀어졌습니다. 분단은 단순히 국토의 분단만이 아닙니다. 마음의 분단이고, 기억의 분단이며, 용서하지 못한 역사와 상처의 분단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인류를 ‘호모 사피엔스’라고 부릅니다. 학자들은 현생 인류가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으로 왔을 때 유럽에는 이미 ‘네안데르탈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유럽에는 아프리카에는 없던 질병이 있었기에 현생인류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그런 피해를 극복하는 방법은 네안데르탈인과 결합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적인 강점이 현생 인류에게 전해졌고, 지금의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는 네안데르탈인의 유전자가 2% 정도 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가 산소가 부족한 고지대에서 적응하는 방법도 비슷했다고 합니다. 고지대에는 ‘데니소바인’이 살고 있었다고 합니다. 현생 인류는 데니소바인과 결합하여 고지대에서 적응하는 유전적인 강점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금의 현생 인류의 유전자에는 데니소바인의 유전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현생 인류는 혼자만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는 방법이 아니라 이웃한 인종과 결합하면서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북미주한인사제 협의회’ 총회가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와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가 함께 모여서 총회를 했습니다.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들은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로부터 새로운 사목의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로부터 미국에서 얻을 수 있는 사목 프로그램을 배울 수 있어서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파견된 사제들은 ‘레지오 수첩과 교본, 매일 미사와 본당 달력’과 같이 신앙생활에 필요한 것들에 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미국에서 서품받은 사제들은 미국에서 만들어지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을 소개하였고, 교우들과 함께하는 다양한 사목 프로그램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영상으로 제공되는 성경 공부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합니다. 한국 교우들을 위해서 영상에 한국어로 자막을 만들어 나누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께하니 총회가 더욱 풍성해졌습니다. 내년에는 달라스에서 하기로 결정하고 모임을 마쳤습니다.
남과 북의 현실도 그렇습니다. 서로 다르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서로 다르기 때문에 경계합니다. 그러나 신앙은 우리에게 다른 길을 말해 줍니다. 하느님께서는 갈라진 담을 허무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 서로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에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께 묻습니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계산이 아닙니다. 화해는 조건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고백성사 때 듣는 기도문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성자의 죽음과 부활로 세상을 당신과 화해시켜 주셨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먼저 화해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먼저 용서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는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합니다. 그러나 통일은 정치와 경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이 열려야 합니다. 서로를 향한 미움과 편견이 치유되어야 합니다. 상대를 악으로만 바라보는 마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야 할 형제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 너희의 운명을 되돌려 주실 것이다. 너희를 다시 모아들이실 것이다. 나는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고 위로하리라.” 하느님께서는 흩어진 백성을 다시 모으시는 분이십니다. 상처를 치유하시는 분이십니다.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때때로 통일이 너무 멀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무너질 것 같지 않던 장벽도 무너졌습니다. 독일의 베를린 장벽도 무너졌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종차별 정책도 끝났습니다.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해 보였지만 결국 변화는 시작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미움이 아니라 희망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도 그런 희망이어야 합니다. 서로를 저주하는 기도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 축복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정치적 승리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민족의 치유를 위한 기도여야 합니다. 전쟁의 논리가 아니라 화해의 논리를 선택하는 기도여야 합니다. 화해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가정 안에서 시작됩니다. 부부 사이의 용서에서 시작됩니다. 부모와 자녀의 화해에서 시작됩니다. 본당 공동체 안에서 서로 이해하고 품어 주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작은 화해가 모여 큰 화해가 됩니다. 작은 용서가 모여 민족의 치유가 됩니다. 오늘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면서 우리 모두가 먼저 화해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용서하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이 땅에도 미움과 분단의 장벽이 무너지고, 평화와 사랑의 새 길이 열리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서로 너그럽고 자비롭게 대하고, 하느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오늘의 성인
성녀 페브로니아 (Febronia)
활동년도 : +304년
신분 : 동정순교자
지역 : 니시비스(Nisibis)
같은 이름 : 뻬브로니아
성녀 페브로니아는 메소포타미아(Mesopotamia)의 니시비스에서 살았으며 그 지방 최고의 미녀로 유명하였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때 지방 장관 셀레누스(Selenus)는 그녀가 만일 신앙을 포기하고 자기 조카 리시마쿠스(Lysimachus)와 결혼하면 석방하겠다고 달랬다. 그러나 리시마쿠스도 이미 신자가 되려고 마음을 먹기 시작한 줄 알고 그녀는 이 제안을 거부하였다. 이때부터 그녀에게 온갖 형태의 고문이 시작되어 마침내 죽게 되자 셀레누스는 거의 미친 사람이 되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이 사건 때문에 리시마쿠스와 수많은 부하들이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으며, 이 소문은 삽시간에 울려 퍼졌다.
성 빌리암(William)
신분 : 은수자, 수도원장
활동지역 : 베르첼리(Vercelli)
활동연도 : 1085-1142년
같은이름 : 굴리엘모, 빌헬름, 윌리암, 윌리엄
이탈리아의 베르첼리에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난 성 빌리암은 불행하게도 아기 때에 고아가 되어 친척들에 의하여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로 순례여행을 떠났다가 몬테 솔리콜리(Monte Solicoli)에서 은수자로 살기 시작하였다. 그 후 예루살렘 순례를 계획하였으나 강도들의 습격을 받은 후 이를 포기하고는 몬테 베르질리아노(Monte Vergiliano)에서 은수자로 지냈다.
이때부터 그를 존경하는 수많은 제자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었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몬테 베르지네(Monte Vergine)의 은수자들'로 알려진 수도자들이다. 그 후 그와 그의 친구인 마테라(Matera)의 성 요한(Joannes, 6월 20일)이 이끄는 수도원의 규칙이 너무 엄격하다고 회원들이 반대하자 그는 몬테 라체노(Monte Laceno)로 가서 공동체를 세우는 등 여러 지역에 그가 세운 은둔소가 남아 있다. 그는 나폴리(Napoli)의 로제르 1세(Roger I)의 고문으로도 유명하였다. 그는 윌리엄으로도 불린다.
성 굴리엘모(St. Gulielmus Abbas)
신분 : 은수자, 아빠스
성인의 활동지역 :
성인의 활동연도 : 1085-1142년
성인과 같은이름 : 굴리엘무스
1085년 이탈리아 피에몬테(Piemonte) 지방 베르첼리(Vercelli)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성 굴리엘무스(또는 굴리엘모)는 어릴 때 양친을 여의고 경건한 친척의 집에서 자랐다. 그는 14세 때에 일생 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성 야고보 (Jacobus, 7월 25일) 사도의 묘지가 있는 에스파냐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Santiago de Compostela)를 순례하였다.
그 후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한 그는 이탈리아에 돌아와서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 7월 11일)의 수도 규칙에 따라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설립하였다. 그는 몬테 비르지니아노(Monte Virginiano) 산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 비르지네 (Monte Virgine)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을 건축하였다. 동료들과 함께 경건하고 엄격한 생활을 하던 그는 1142년 6월 25일 세상을 떠났다.
굴리엘모는 '의지와 보호'란 뜻이다. 유럽에서 최초로 번성한 수도원은 5세기에 창립된 성 베네딕토 수도회인데 하느님께서는 9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수도 정신이 헤이해진 경향이 보이자 성 로베르토, 성 베르나르도, 성 브루노 등 수도원 개혁자들과 또는 새로운 수도원의 창립자들을 보내시어 그들로 하여금 수도 생활의 쇄신을 도모하게 하셨다. 베네딕토회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한 성 굴리엘모도 역시 이러한 일에 선택되신 분들 중의 한 분이시다. 그는 1085년 이탈리아의 비에몬드에서 가까운 베르첼리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어렸을 적에 일찍이도 양친을 여의어 경건한 친척 손에서 자라 신심에 비상한 열심을 표시했다.
그 일면을 본다면 겨우 14세로서 일생동안 고행의 생활을 할 뜻을 하느님께 약속하고 나이도 아직 어린 몸으로 멀리 성 야고보 사도의 묘지가 있는 스페인의 콤포스텔라까지 순례의 길을 떠났다는 사실로 봐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순례 도중 그는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실행해 쇠로 된 허리띠를 매고 맨발로 걸으며 음식물은 모두 자비심이 많은 사람에게 구걸했다. 이탈리아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소경이 된 어느 농부를 보고 측은한 생각이 들어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 즉시 농부는 눈을 떴다고 한다.
그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문이 부근 일애에 높아져 그는 이를 귀찮게 생각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피하기 위해 광야에 들어가 그곳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며 즐겁게 하느님을 섬기고 있었으나 이전부터의 희망이었던 팔레스티나로 순례의 길을 떠났다. 성지에 도착해 베들레헴에 있는 아기 예수의 말구유, 나자렛에 있는 검소한 성가정의 가옥 등 주님의 수많은 지취들, 그중에서도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구원의 대사업을 완수하신 골고타의 언덕을 직접 눈으로 보고 묵상해 그의 신앙은 더욱더 견고해지고 수덕에 대한 열심은 점점 더 증가 했다.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산적을 만났다.
모든 것을 잃고 가혹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 재난도 성지에서 얻은 거룩한 감동과 기쁨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굴리엘모는 더 한층 하느님께 직접 계시를 받고 성 베네딕토의 규율하에 온전히 세속을 떠나 적막 속에서 기도와 고행에 매진하는 은수자 수도원을 창립하기로 했다.
그는 이것을 위해 남부 이탈리아의 아베리노 시에서 가까운 몬테 비르지니아노라는 산 위에 이미 제자가 된 수명의 사제들과 각각 조그마한 초막을 장만하는 동시에 이교의 시인 비르지니오를 따라 지은 산 이름을 동정 마리아의 이름을 따서 몬테비르지네(Monte Virgine) 라고 개칭하고 성모님께 봉헌한 성당에 건축했다.
굴리엘모와 그의 동료들의 경건하고도 엄격한 생활은 시작됐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사람, 혹은 그 성스러운 생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감동하지 않은 사람들이 없었다.
수도원의 평판이 널리 퍼짐에 따라 입회자도 점점 늘어나 굴리엘모는 여러 차례 다른 깊은 산이나 광야 들에 수도원을 세워 열심한 수도자들을 돌봐주었다. 당시 시칠리아의 사람들은 신앙에 냉랭하고 향락을 즐겨 영적 상태는 매우 한심했다. 그래서 그들의 왕 로제리오 2세는 예의를 갖추고 굴리엘모를 초대해 신앙 생활의 쇄신에 대해 의뢰했다.
그의 노력은 많은 효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를 언짢게 여긴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성인을 죄에 떨어뜨리려고 미모의 창녀를 보내 그의 정결을 빼앗으려고 했다. 굴리엘모는 처음부터 그를 쳐다보지 않았으나 창녀의 유혹이 점점 심해져 그는 타고 있는 장작불 위에 누워 버렸다. 창녀는 대경 실색했다. 그뿐 아니라 불 속에서 나온 그의 몸에 티끌 만한 상처도 없는 것을 보고 비로소 그가 하느님께서 보내신 성자라는 것을 깨닫고 자기 죄를 통회하여 다시는 죄의 생활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덕의 절정에 도달하고 여러 가지의 기적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굴리엘모는 1142년 6월 25일 본 고향, 천국을 향해 이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성스러운 유해는 손수 건립한 굴레도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