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들도 어느 정도 상식이 있는 이상 이런 불평등을 그저 감내하기는 힘들어서 당장 외국인들과 무력으로 대항하고자 하는 부류와 힘을 키울 때까지 은인자중하자는 두 부류가 충돌하고 있었다. 결국 성급한 무리가 조약을 옹호하는 번주를 암살하는 사건과 영국인 상인을 노상에서 습격하여 죽이는 일이 사쓰마번에서 일어났다. 이에 영국은 범인의 처형과 사과와 배상을 요구했지만, 사쓰마번 측에서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미루었다. 그러자 서구 열강은 가만히 있지 아니하고 연합하여 사쓰마번을 공격하여 초토화를 시켰다. 이것은 중국의 의화단의 난과 유사하지만 자그마한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아직 힘이 약한 상태에서 외국인을 쫓아내려고 하는 시도는 당랑거철螳螂拒轍이라는 것을 자인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교훈은 엉뚱하게 일본을 지배하는 에도에 있는 막부에게 화살을 돌리게 되었다. 막부도 현대화 계획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개방에 대한 열망이 시급했던 그 사쓰마와 조슈번의 생각과는 다르게 상당히 미지근하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1868년, 개혁적인 두 번의 무사들은 먼저 교토의 황궁을 점령하고 지지를 얻어낸 후에 에도를 향하여 실질 지배하던 쇼군의 영지와 지위를 박탈하는데 성공하고, 그 사이에 오랜 기간 허수아비처럼 있던 천황에게 권력을 돌려준다고 선언하였다.
약 1년간 쇼군을 인정하는 자와 천황을 인정하는 군벌끼리 다툼이 있은 후에야 쇼군은 완전히 물러나고 서구 열강은 천황의 정부는 인정하게 되는데 이 사건이 그 유명한 《 메이지 유신 》이다.
메이지 유신은 성공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나라의 방향을 어떤 방식으로 이끄느냐가 문제이었던 것이다. 일단 쇄국주의자가 원했듯 당장 서구인을 추방하는 것은 무모하기에 이제 목표를 서구가 일본에 강요한 불평등한 조약을 바로 잡아야했다. 심지어는 영국의 외교관은 일본이 계몽이 되고 문명화되는 정도에 따라 영국 국민에 대한 일본의 사법권을 인정하겠다는 말도 내뱉었다.
이런 가운데 결론적으로는 일본은 다른 나라에 비해 현명하게 이 위기를 헤쳐나간 셈이 된다. 메이지 시대의 지도자들은 각각의 생활권에 일본의 상황과 가치에 가장 적합한 외국 모델을 찾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예컨대 군대를 개혁할 때는 해군은 영국을 모델로 육군은 독일을 모델로 법률일 경우에는 민법은 초안은 프랑스 학자에게 맡기고 수정할 때는 독일의 민법을 모델로 맡긴 것이다.
그리고 국가의 체제는 서구에 영향을 받았지만, 내부적인 목표는 일본적인 것을 지켰다. 대표적으로 천황제가 그렇다.
게다가 바깥 세상( 서구권 )을 경험한 젊은 사람들을 정부와 민간 분야 모두에서 지도자로 부상을 시켰다. 자국 내의 반란도 잦았지만 약 30년 후에는 위에 말한 불평등 조약을 수정할 수 있게 되었다.
witpo
의화단의 난
의화단 운동은 1899년 ~ 1901년 약 3년에 걸쳐 청나라와 의화단(義和團)이 반외세, 반제국주의, 반기독교를 내걸고 서구 열강 8개국 연합군과 벌인 국제전쟁이다. 국제정세를 오판한 중국인들이 사실상 당시 전 세계를 상대로 싸운 무모한 전쟁이었다. 결국 의화단 운동은 1901년 신축조약을 통해 외국 군대가 중국에 주둔하게 허가하는 빌미를 제공하였으며 수도 베이징까지 유린당하며 끝났다.
헌법발포약도
1867년 대정봉환 당시의 그림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로부터 22년 뒤인 1889년 제국헌법 제정을 묘사한 그림이다. 엄밀히 말해 메이지 유신 이전 에도 막부 말까지만 해도 저런 서양식 제복을 입은 일본 관료는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다만, 메이지 유신이 특정한 시기에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긴 시간에 걸쳐 진행된 일련의 '과정'이므로 저 그림이 메이지 유신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