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알아볼까요]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 (3)
1. 장례의 시편
위령기도의 중심은 시편입니다. 우리는 계속 죄를 저지르고 배반하는데도 하느님은 늘 사랑으로 용서하고 안아주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 순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우리가 하느님께 간구해야 할 바를 잘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시편 제62(63)편 악보의 ‘구성지게’를 ‘구슬프다·서글프다·청승맞다’로 이해하는 이가 있지만,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불행한 끝이 아니라 새롭고 영원한 생명으로 주님 안에서 누리는 행복한 시작입니다. 따라서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 안에서 본래 의미대로 ‘천연스럽고 구수하며 멋지게’ 불러야 합니다.
시편 제62(63)편은 다윗이 자기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궁전을 떠났을 때 바친 기도입니다. 그는 아들과 싸워야 하는 아비로서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사정을 하느님께 하소연하고 어려움에서 건져 주시기를 간절히 바랐고, 주님은 난관에 빠진 다윗을 변함없이 건져 주셨습니다. 우리도 주님께 대한 확고한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 있다면 어떤 위기도 극복하고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이라는 절망과 고통을 부활의 희망과 기쁨으로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니 늘 용서하고 구원하시는 하느님만 믿고 찬미해야 합니다.
시편 제129(130)편은 주님의 자비와 은총에 모든 것을 내맡기는 위령기도의 중심 부분입니다. 주님께 죄의 용서를 빌고 그분 자비를 바랄 수 있는 것은 분명한 믿음과 희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이므로 죄를 지을 수밖에 없지만, 하느님은 늘 용서해주십니다. 주님의 은총이 당장 베풀어지지 않는다고 느끼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주실 것이니 죄악과 곤경에서 절망하지 말고 자기 죄를 참회하며 그분의 용서와 사랑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 제50(51)편은 자기 죄에 대한 참회를 가장 절절하게 나타내는 대표적인 시편이어서 교회는 장례뿐 아니라 참회 예식에서도 바쳤습니다. 이 시편은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 11-32)에서 돌아온 아들을 무조건 받아 주시는 아버지의 사랑을 불러일으킵니다. 비록 우리가 몇 번이고 깊은 죄에 떨어졌을지라도 진심으로 뉘우치고 죄악의 사슬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면 하느님께서는 멀어졌던 당신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주십니다.
2. 성인호칭기도
성인호칭기도는 눈먼 사람(마태 9, 27 참조), 귀신 들린 딸의 어머니(마태 15, 22 참조) 등 가난하고 힘없는 이가 예수님께 치유를 간청하는 자비송인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Κυριε Ελέῃσον, Kyrie Eleison)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성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성령, 삼위일체이신 주님의 자비를 바라며 간절한 청원을 들어 주시기를 빕니다. 이어 성모 마리아, 천사, 성인들에게 죽은 이의 구령을 위한 전구(轉求)를 요청하고 나서 다시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그런데 이 기도의 생성과 변화를 잘못 가르치는 이가 있습니다. “성인호칭기도에서 무교(巫敎)의 사령(死靈) 신앙적 사고를 찾아볼 수 있다.”라고 하거나 “연도 문화는 한국의 전통문화인 효 정신의 습합(習合), 무교의 사령 신앙적 사고, 공동체 문화를 바탕으로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라고 주장합니다. 성인들에게 전구를 요청하는 것을 무당이 본격적인 굿을 벌이기 전에 신들을 부르는 것과 같은 것처럼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3세기에 동방교회에서 발견되며, 5세기에 서방교회에 전해졌고, 8~9세기가 되면 온 유럽으로 퍼졌습니다. 1570년까지 교황청으로부터 허락받고 성인의 이름을 넣거나 뺄 수 있었으나, 비오 5세의 ‘미사 경본’부터는 획일적으로 고정되었습니다. 라틴어로 된 이 기도문을 중국교회가 한문으로 번역하고, 조선교회가 한글로 바꾸었을 뿐 달라진 내용이 없었습니다. 신앙의 선조들은 우상을 숭배하거나 미신에 빠지지 않으려고 늘 조심했습니다. 굿판을 벌여서도 안 되고, 구경해서도 안 되기 때문에 보고 듣지 않으려고 피해 멀리 돌아간 사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3. 찬미와 간구
우리를 구원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찬미하면서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모든 성인의 전구를 통해 선종한 이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생전에 지은 모든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합니다. 이어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받게 하시려고 받으신 다섯 상처, 십자가, 성심 등으로 선종한 이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간구합니다. 또한 세상의 빛, 어진 목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선종한 이를 부활시켜 주시기를 탄원하고, 성모님께도 세상을 떠난 이를 위해 전구해 주시어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간청하면서 위령기도를 마무리합니다.
4. 그리스도인의 수의와 상복
장례에서 유족은 삼베 상복을 입고, 시신에는 삼베 수의를 입히는 것을 전통이라고 오해하는 이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상복과 수의는 유교의 상례에서 비롯된 것인데 상복을 입고 수의를 입히는 이유는 다릅니다. 유교에서 죽음은 가장 불행한 사건이므로 부모나 조부모의 죽음을 막아야 하지만 이를 못 막은 자녀나 후손은 가장 큰 불효를 범했으므로 죄인의 의미를 드러내려고 거친 삼베로 지은 상복을 입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의는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유교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은 효도인데 마지막 길을 떠나는 분께 지금은 비싸고 귀하지만 지난날에는 싸고 흔했던 삼베를 전통 수의로 잘못 알고 입히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유교 예서인 ‘주자가례’, ‘상례비요’, ‘사례편람’ 등에 특별히 수의를 지으라는 규정이 없습니다. 조선 중기 이전 무덤에서 살아있을 때의 옷을 입힌 시신이 발굴되고, 그 이후는 평소에 입던 옷과 함께 비단[緞]‧무명[木棉]‧모시[苧]‧삼베[麻] 등으로 지은 다양한 수의가 나타납니다. 삼베 수의는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었는데, 전쟁을 중심으로 산업 체계를 바꾸었기 때문에 고급 천이 귀해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삼[麻]과 베틀만 있으면 짤 수 있는 삼베로 수의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인데 이를 오랜 전통처럼 착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기계로 짠 옷감보다 손으로 짠 삼베가 비싸고, 그 삼베로 지은 수의는 더 비쌉니다.
“민족들의 풍습에서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면 무엇이든 호의로 존중하고…”(전례 헌장, 37)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열린 자세를 본받으면서도 교회의 주요 가르침에서 벗어나면 안 될 것입니다.
“문) 비단 등 보배로운 옷으로 시체를 입힘이 어떠하뇨? 답) 옷을 입힘은 각 사람이 처지대로 할 것이로되 체면만 돌아보아 분수에 지나면 헛되이 씀과 교오(驕傲)를 부리는 두 가지 죄를 면하기 어려우니 가히 삼가지 아니하랴?”(텬쥬셩교례규)라고 가르쳤습니다.
선종한 이가 평소에 입던 옷 중에 좋은 것을 입혀 주님께 보내드리고, 상복은 형편을 따라 정하되 가능한 한 비용을 아껴 장례를 마친 뒤에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선조들의 참된 신앙생활을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
[슬기로운 ‘전례상징’] 성품성사의 상징 ‘인호와 안수’
2020년 초부터 시작된 코로나19 팬데믹은 전 세계와 보편 교회, 그리고 한국 사회와 교회에도 크나큰 영향을 미쳤고, 그 여파가 지속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유럽이나 미국 등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던, 주일미사 참석률 감소와 청소년층의 붕괴, 그리고 신자의 고령화 등의 현상이 한국천주교회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전반적인 교회의 복음화 방향성에 대한 검토와 대안을 찾기 위해서 ‘시노달리타스’(하느님의 백성이 함께 걸어가는 여정)라는 주제로 세계주교시노드(2021-2023년)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이는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요한 3,8)라는 성령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반으로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복음화의 사명을 구현해야 하는 가톨릭교회의 몸부림이라 생각합니다.
여기서 ‘하느님 백성’이라는 교회의 개념은 교계적 구조가 상하의 일방적인 권력의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을 중심으로 다양한 역할을 통한 일치 실현의 중요성을 말해줍니다. 거기에 ‘함께 걸어가는 여정’은 겸손한 자세를 바탕으로 서로의 의견을 경청하는 ‘소통’을 통해 주님께 향해가는 공동체의 모습과 현세에 안주하지 않고 성조 아브라함처럼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해 길을 떠나는 ’여정‘임을 잘 말해줍니다.
이러한 여정에 있어서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지 묻게 됩니다. ‘성품성사’의 상징인 인호와 안수를 살펴보면서, ‘함께 걸어가는 여정’에 있는 교회에서 성직자인 주교, 사제, 부제의 역할과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사람이라는 ‘인호’
성사 중에서 세례․견진․성품성사는 성사의 은총뿐 아니라 성사의 인호(印號, Sphragis), 곧 ‘인장’을 새겨 줍니다. 이 인호를 통하여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사제직에 참여하며, 각기 다른 신분과 역할에 따라 교회의 지체를 이룹니다. 그리고 이 세 성사는 결코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1121항 참조).
‘인호’를 받는 예식은 일반적으로 후보자의 이마 위에 십자 표시를 긋습니다. 인호는 성령과 연결되어 있음을 예루살렘의 키릴루스는 그의 저서 ‘신비 교리교육’에서 말합니다. “아브라함에게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주어지고 할례가 베풀어진 것처럼 성령에 힘입어 세례로 할례를 받은 우리에게 영적 표시가 새겨집니다.” 이 언급은 사도 바오로가 에페소 신자들에게 말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의 말씀, 곧 여러분을 위한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리스도 안에서 믿게 되었을 때, 약속된 성령의 인장을 받았습니다”(에페 1,13)를 연상시킵니다.
성령의 인장은 그리스도인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를 스스로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합니다. 그래서 인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고 그분을 영원히 섬기겠다는 표시인 동시에, 종말의 큰 시련 때에 하느님께서 보호해 주시겠다는 약속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성품성사에서 인호는 성직자가 “성령의 특별한 은총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교회를 위하여 그분의 도구 역할을 하도록 그리스도를 닮게”(‘가톨릭교회교리서’, 1296항) 하였음을 확인해줍니다.
‘안수’를 통해 내려온 성령에 의해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성직자!
성품성사를 유효하게 하는 핵심은 ‘안수’와 ‘서품기도’입니다. 그러나 피렌체 공의회(1439년)에서 ‘안수’ 대신에 각 품과 관련된 ‘제구의 수여식’(사제직은 포도주가 담긴 성작과 빵을 얹은 성반, 부제직은 복음서)을 필수 요소로 선포하였고, 이것은 성령을 따라 수행해야 하는 성직자의 역할과 삶을 전례적 기능으로 축소시켰습니다.다행히 교황 비오 12세가 1947년 11월 30일에 발표한 교황령 ‘성품성사’(Sacramentum Ordinis)에서 “부제와 사제 성품의 질료는 동일한 안수이다. 형상은 이 질료의 적용을 밝히는 기도인데, 이 기도는 교회가 수여하는 성사적 효과인 성품의 권한과 성령의 은총을 드러낸다.”라고 초기 교회에서의 본질을 회복하였습니다.
서품식에서의 ‘안수’는 말없이 두 손을 뽑힌 이의 머리에 얹는 방식입니다. 주교 서품에서는 주례 주교와 참석한 모든 주교가 안수를 하며, 사제 서품에서는 주례 주교와 참석한 사제들 모두가 합니다. 반면에 부제 서품식에서는 주교만 합니다. 이는 3세기 초에 작성된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 8장에서 “그는 사제직을 위해 서품되는 것이 아니라 감독자(주교)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이행하고 감독자에게 봉사하기 위해 서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좀 달라져서 부제직이 사제로 향해가는 과정처럼 여겨지고 있지요.
주교, 사제, 부제가 받는 성령의 은사는 어떻게 다른가?
각 서품기도에서 성령은 각 품에 적절한 성령에 대해서 말합니다. 주교 서품기도는 “다스리시고 이끄시는 성령을”(Spiritum principalem)이라 하면서, 그리스도로부터 파견된 사도들이 지역마다 교회를 세우고 그곳이 하느님의 이름에 끊임없이 영광과 찬미를 드리는 성소가 되게하는 성령임을 이어진 기도문에서 밝힙니다. 사제 서품기도는 “거룩함의 성령을”(Spiritum sanctitatis) 청하면서, 사제들이 주교의 협력자로서 복음 선포와 성사 거행을 통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양 떼를 거룩하게 하며 덕행의 삶으로 모범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부제 서품기도는 단순하게 “성령을”(Spiritum sanctum)을 말하고, 부제가 봉사의 직무임을 분명히 하면서 이를 충실히 수행하도록 성령칠은으로 굳세게 해달라고 청합니다.
성품성사를 통해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다른 ‘직무 사제직’을 수행할 자격을 얻은 성직자는 그 자체로 거룩하다고 할 수 있을까? 직무 사제직은 신자들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받은 거룩한 권한이기 때문에 신자들의 보편 사제직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합니다.
성품을 받은 교역자들은 ”가르치고(munus docendi), 하느님께 예배드리며(munus liturgicum) 사목적 다스림(munus regendi)으로써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가톨릭교회교리서’, 1592항)하면서 군주적인 태도가 아닌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한 봉사 직무자임을 교회는 분명히 말합니다.
교회, 수도원, 신학교들이 텅 비어 가며, 수만 명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스승님, 저희가 밤새도록 애썼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하였습니다.”(루카 5,5)라고 하며 주저앉지 않고,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4) 하신 주님의 말씀에 따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린 시몬 베드로처럼 예수님이 가르쳐준 “깊은 데”를 찾아서 그물을 내려야, 그물이 찢어질 만큼 매우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요.
주님께서는 현재의 한국천주교회의 성직자들에게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라고 하십니다. 그동안 해오던 정형화되고 구태의연하며 성직자 개인의 역량에 좌지우지되는 교회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명령으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환청은 아닐 듯합니다.
[전례력 돋보기] 8월 15일, 성모 승천 대축일과 광복절
제2차 세계 대전의 막바지인 1945년 8월 9일 11시 2분, 검은 구름을 헤치고 4.6톤의 거대한 원자폭탄이 일본 나가사키 상공에 투하되었다. 이 두 번째 원자폭탄으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무조건 항복했다.
나가사키는 일본에서 가장 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자리 잡은 곳이다. 1500년대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전파된 이래 신자들은 박해의 칼날 아래에서도 숨어서 신앙을 지켜왔으며, 19세기 종교의 자유와 함께 당시 동양에서 가장 큰 성전을 봉헌하기도 했다. 하필 하느님을 믿고 살아온 자신들의 신앙 공동체 위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것을 그곳 신앙인들은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나가사키에는 방사선과 의사로 모범적인 신앙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가 있었다. 그 역시 원폭으로 폐허가 된 집에 아내를 찾으러 갔다가 아궁이 앞에서 아내가 늘 지니고 있던 묵주가 녹은 흔적을 발견해 그 잿더미를 양동이에 담아 와야만 했다. 그런 그가 처참하게 부서진 성당에서 열린 합동 위령미사에서 담담히 말했다. “우리 성당은 갑작스런 화염에 휩싸여 찬란한 불꽃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정확히 바로 그 시각에 황궁에서는 천황이 전쟁을 끝내기로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8월 15일 드디어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 천황의 칙서가 발표되었고, 이로써 전세계는 평화의 빛을 보게 된 것입니다. 8월 15일은 또한 성모 승천 대축일입니다. 우라카미 성당이 성모 마리아에게 바쳐진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종전과 마리아 대축일, 이 두 가지 사건이 같은 날 발생한 것이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오묘한 하느님의 섭리인지… (중략) …미군 조종사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지역을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라카미가 선택된 것은, 그리고 우리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진 것은 모두 하느님의 섭리입니다. 나가사키의 궤멸과 종전 사이에 깊은 상관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가사키는 제2차 세계 대전과 연루된 모든 민족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쳐진, 하느님의 선택된 희생제물, 곧 흠 없는 어린양이 아니었을까요?”(『나가사키의 노래』 p. 228~229 참조)
나가이 박사의 말처럼 하느님은 신자들의 흠 없는 제물을 어여삐 여기셨고, 전쟁을 일으킨 이들의 마음을 움직여 평화를 가져오게 하셨다. 대한민국의 독립이며, 마리아의 노래처럼 권력과 지배욕에 눈이 먼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루카 1,52 참조) 선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며 살던 이들, 또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목숨을 바치고 옳은 일을 위해 자신을 돌보는 일을 하찮게 여긴 수많은 의인들을 하느님은 당신 자녀로 귀하게 여기시고(마태 5,9-10 참조) 당신 곁으로 불러 올리셨으며,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셨다. 공교롭게 겹치는 날짜인 8월 15일은 그렇게 한평생 평화를 이루며 살아간 성모님과 성모님의 마음으로 이 세상을 살다간 모든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외면하지 않으시고 당신이 마련하신 하늘 낙원에서 참된 행복을 누리게 해 주심을 전례 거행을 통해 확인하는 날이다.
성모님의 승천은 교회가 공식적인 교의로 발표하기 이전부터 전례 안에서 거행되어 왔다. 6세기에 겟세마니 동산에 성모님의 무덤 성당(성모 영면 성당)이 봉헌되고 순례자들이 찾아오면서 성모 승천 대축일 거행은 급속도로 확산되었고, 7세기에는 로마에 전해져 성모님의 가장 중심 축일로 자리잡았다. 이후 오랜 논쟁 끝에 1950년 비오 12세 교황은 성모님이 지상 생애를 마친 다음 육신과 영혼이 함께 천상의 영광으로 들어 올림 받았음을 교의로 선포했다.(사도헌장 「지극히 관대하신 하느님」(Munificentissknus Deus, 1950년 11월 1일)
하느님은 예수님을 낳으신 동정 마리아의 몸이 무덤에서 썩지 않도록 섭리하신 것이다. 하지만 성모님의 전 생애가 그렇듯 성모 승천 교의와 축제가 성모님에게만 초점이 맞추어 질 수는 없다. 이날 전례는 성모님이 아들 예수님의 강생에 협력한 공로로 하늘에 불림 받으시고, 우리의 어머니로서 그 길을 여셨으니, 우리도 성모님의 삶을 따라 살다가 마침내 하늘로 불림을 받아 하늘 나라 천상 행복에 이르는 희망을 되새기는 것으로 그 의미가 확장되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 동안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고난을 겪은 이들, 정의롭고 올바른 일을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은 이들과 하느님께 제물로 바쳐져 악인들의 죗값을 대신 치른 이들의 영혼은 지금 성모님과 함께 하느님 나라에서 복락을 누리고 있음을 우리는 믿는다. 성모 승천 대축일을 지내며 그분들의 대열에 동참할 수 있도록 일상 안에서 우리의 다짐을 새롭게 해 보면 어떨까?
[알아볼까요]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 (2)
1. 상장례의 개념과 변천
상례(喪禮)는 숨을 거두는 초종(初終)부터 신주를 사당에 안치하기 위해 지내는 길제(吉祭)까지 거행되는 유교 의례입니다. 장례(葬禮)는 상례의 일부로 장사지내는 예식이라고 할 수 있지만, 유교의 예서에 독립적으로 언급된 예는 거의 없고, 상례의 한 부분인 장례를 상례에 붙여 만든 상장례(喪葬禮)는 조어(造語)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죽은 이를 위한 의식에 여러 종교의례가 혼합되었고, 교회는 중국의 한문본 ‘성교례규’의 ‘장상예절(葬喪禮節)’과 조선의 ‘텬쥬셩교례규’의 ‘상장규구(喪葬規矩)’처럼 함께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유교의 개념으로는 불합리한 조어이지만, 오늘날 상례의 전 과정 그대로 이행하는 이가 드물고, 말은 반드시 합리적으로 변하지 않는 현실을 존중해 통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합니다.
2. 위령기도의 정의
인간은 영원히 살고 싶지만 죽음을 피할 수 없으므로 그로 인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죽음으로 인한 절망에서 벗어나려고 누군가 믿고 기대고 바라는 노력 가운데 기도가 있습니다. 사전은 기도를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비는 것이나 그런 의식’이라고 하지만, 간절히 바라는 바를 얻으려고 빌고 의식을 행해도 아무나 원하는 바를 들어주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존재는 한 분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며,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그분께 기도합니다.
선종한 이를 위해 바치는 기도를 ‘위령기도(慰靈祈禱)’라고 하는데, 예전에는 ‘연도(煉禱)’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연옥도문(煉獄禱文)’에서 유래되고, ‘도문’은 ‘호칭기도(呼稱祈禱)’이므로 직접적인 의미는 ‘연옥에 있는 이를 위해 바치는 호칭기도’입니다. 그러나 넓게는 교회의 이전 예식서인 ‘텬쥬셩교례규’와 오늘날 사용하는 ‘상장예식’의 돌아가신 분을 위한 모든 기도를 통칭(統稱)하는 것이므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구원을 위해 바치는 기도’입니다.
3. 위령기도의 토대
위령기도의 토대는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와 모든 성인의 통공(通功)에 관한 교리입니다. 인간의 활동에 관한 교리는 피조물인 인간의 모든 활동이 창조주이신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펼쳐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친히 창조하신 피조물의 협조를 받아 그분의 나라를 이루고, 인간의 활동을 통해 당신 뜻이 세상에 드러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와 함께 묻혔다가 하느님이 심판하실 때 다시 살아난 사람(로마 6,4 참조)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았더라도 자기가 지은 죄로 인해 하느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은 회개하고 정화(淨化)해야 온전히 그분께 돌아갈 수 있습니다.
모든 성인의 통공에 관한 교리는 성인들이 친밀하게 교류하면서 서로 사랑하고 가진 바를 나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승의 착한 삶을 복되게 마무리하고[善生福終] 하늘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는 이들, 그리스도인으로 죽었으나 정화 중인 이들, 하늘나라로 향해 가는 나그네들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이들은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사랑 안에서 여러 단계와 방법으로 친하고 가까운 사이가 되어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립니다. 그리스도께 딸린 이들은 성령 안에서 하나인 교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에페 4,16 참조).
그리스도께 속한 이들 가운데 하나가 고통을 겪으면 나머지도 고통을 겪고, 하나가 영광을 받으면 나머지도 기뻐합니다(1코린 12, 26 참조). 하느님 안에서 잠든 형제와 세상 나그네들의 결합은 중단되지 않고 영신적(靈神的)으로 도움이 되는 교류로 튼튼해지며(교회헌장, 49 참조), 정화 중인 이들을 위해 바치는 나그네들의 희생‧자선‧기도 등은 매우 필요하고 큰 도움이 됩니다.
4.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큰 효도는 기도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해내야 할 일이 많습니다. 요즘은 상조회사 직원이 상중의 일들을 처리하기도 하지만, 신자는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연령회에 상가의 제반 업무를 맡겨야 합니다. 교우 장례에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없는 장례미사‧고별식, 입관‧출관‧하관 예식과 기도 등인데 상조회사 직원만으로 모든 예식과 기도를 제대로 수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우가 운명하면 가장 먼저 연령회장이나 총무 그리고 성당 사무실에 소식을 알려 여러 업무를 원활히 처리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 목적은 주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리는 것이므로 선종한 이의 구원을 위해 기도하고 선한 행위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런데 누구보다 열심히 기도해야 할 유족은 소홀히 하고, 연령회원 또는 이웃만 모여 기도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족으로서 관련 업무를 처리하고 문상객을 접대하는 일을 소홀히 하면 안 되겠지만, 돌아가신 분을 위한 기도를 등한시해서는 더욱 안 될 것입니다.
따라서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모여 기도하고, 함께 모이기 어렵다면 문상객과 교우들이 돌아간 시간에 한마음으로 바쳐야 할 것입니다. 교회 장례의 의미와 절차 등을 잘 아는 연령회원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이를 잘 모르는 유족들이 교회의 가르침대로 장례를 거행할 수 있도록 자세히 가르쳐 주어야 합니다.
5. 바람직한 문상 예절
교우가 선종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성호경과 주모경 등을 바치고 “하느님, ○○○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등과 같은 화살기도로 주님께 그분의 영원한 안식을 빕니다. 시간이 허락되면 상가를 직접 방문하고, 도저히 안 되면 ‘상장예식’ 또는 ‘가톨릭 기도서’에 있는 위령기도를 바칩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요한 15, 5)라는 말씀처럼 세례를 통해 우리는 모두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肢體)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 안에서 형제자매입니다. 형제자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최대 관심사는 영혼의 구원입니다. 따라서 선종한 이를 위해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느님께 그분의 구원을 간구(懇求)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죽음으로 인한 아픔과 아쉬움을 온전히 떨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은 주님 안에서 영원하고 새로운 생명으로 들어가는 복된 날이므로 아픔과 아쉬움에 파묻히지 말고 새로운 희망과 기쁨을 지녀야 합니다. 교우 상가에서 “얼마나 망극(罔極)하십니까?”라는 유교식 문상을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고, 그리스도인답게 영원한 생명과 구원에 대한 희망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의 영혼에 영원한 안식을 주실 것입니다. ○○○의 영혼 구령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겠습니다.” 이러한 내용으로 문상해야 할 것입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