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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4차 文化踏査(4-4) 德壽宮 殿閣 - 貞洞
德壽宮 殿閣
*德壽宮 -사적 제124호
朝鮮時代 宮闕로 ‘慶運宮’이라고 부르다가, 1907년 高宗이 純宗에게 讓位하고 이곳에 머물면서 高宗의
長壽를 祈願는 뜻의 ‘德壽宮’으로 부르게 되었다. 德壽宮 자리에는 第9代 成宗의 兄 月山大君의 집이
있었으며, 壬辰倭亂으로 避亂갔다 漢陽으로 돌아온 宣祖가 宮闕이 모두 燒失되어 임시로 月山大君의 집을
居處로 정하고 宣祖 26년(1593)부터 宮으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근처의 桂林君(成宗의 三男 桂城君 恂의
養子)과 文臣 沈義謙의 집도 宮으로 吸收했다. 宣祖의 뒤를 이은 光海君은 卽位 3년(1611) 이곳을 ‘慶運宮’으로
고쳐 부르고 1615년 昌慶宮으로 옮길 때까지 王宮으로 사용했다. 그후 宣祖의 繼妃 仁穆大妃가 慶運宮으로
쫓겨난 후로 光海君은 西宮으로 부르게 했다. (*恂: 정성 순)
1623년 光海君이 仁祖反正으로 물러나면서 仁祖는 卽阼堂과 昔御堂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없애 버렸다. 그 뒤 高宗이 1897년 俄館播遷에서 돌아오면서 慶運宮을 다시 王宮으로 사용하면서,
宮闕다운 건물들을 갖추게 되었다. (*阼: 동편 섬돌 조 *昔: 예 석 *俄: 아까 아 *播: 뿌릴 파)
1904년 大火災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燒失되어 西洋式建物인 石造殿들을 建立하면서 宮闕空間의 調和를
잃어버렸다. 또 가장 큰 변화로 德壽宮 正門은 남쪽에 있던 仁化門이었는데, 宮을 再建하면서 동쪽에 있던
大安門을 수리하고 大漢門으로 고쳐 정문으로 했다. 朝鮮後期에 宮闕로 갖추었으나, 舊韓末의 歷史的現場이며
傳統木造建築과 西洋式建築이 함께 남아있는 곳으로 朝鮮王朝의 宮闕中에서 特異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01) 德壽宮 大漢門
정면 3칸, 측면 2칸의 多包系 우진각지붕이다. 원래 正殿인 中和殿의 정면에 있던 것을 동쪽으로 옮긴 것이다.
光武 1년(1897) 高宗이 明禮宮을 옛이름인 慶運宮으로 다시 부르게 하고 1906년 정문인 大安門을 수리하고
명칭도 大漢門으로 고쳤다. [大漢門] 扁額은 당시의 宮殿大臣 南廷哲이 썼다.
(02) 德壽宮 禁川橋
德壽宮 禁川橋는 大漢門이 원래 위치보다 14m가량 뒤로 물러나면서 지금처럼 大漢門과 바로 이어서
붙어있게 되었다.
*禁川橋: 宮闕正門 안에 흐르는 明堂水를 禁川이라고 부르며, 그 위에 놓은 다리를 가리킨다. 이 다리를 건너는
官人들이 淸廉한 마음을 가지고 百姓과 나라 일을 위해 임금에게 나아가라는 의미를 內包하고 있다.
*明堂水: 大闕附近의 물로, 明堂은 임금이 政治를 밝게 하는 곳이란 뜻으로 大闕을 말하며, 風水地理上의 明堂을
가리키기도 한다.
(03) 德壽宮 中和門 -보물 제819호
德壽宮 中和門은 中和殿과 함께 보물 제819호로 지정되었다. 中和門은 德壽宮의 中門이며 中和殿의 正門으로
光武 6년(1902) 2층으로 건립했으나 1904년 火災로 燒失되어 1906년 單層으로 再建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원래는 左右로 行閣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문 동쪽에 行閣의 일부 흔적만 보인다.
이 문은 높이가 같은 3개를 나란히 배치시킨 平三門으로 기둥을 높게 해 正殿南門의 威嚴을 나타내고 있다.
(*威: 위엄 위)
(04) 特別展 관람 후 德壽宮 中和殿을 보면서….
(05) 德壽宮 中和殿 -보물 제819호
中和殿은 德壽宮의 중심건물로 임금님이 賀禮를 받거나 國家行事를 거행하던 곳이다. 光武 6년(1902)에
건립했으나 1904년 燒失되어 1906년에 再建했으며, 앞면 5칸·옆면 4칸, 多包樣式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밖으로 뻗쳐 나온 貢布部材가 가늘고 약해 보이며 曲線이 큰데 이는 朝鮮後期 手法의 특징이다.
(*賀: 하례할 하 *貢: 바칠 공)
(06) 中和殿 內部 御座
御座뒤에는 日月五峯(嶽)圖, 천장에는 화려한 닫집을 달았다.
*日月五峯(嶽)圖: 다섯 개의 산봉우리와 해와 달을 그린 그림으로, 統治者가 다스리는 森羅萬象을 상징한다.
朝鮮王室의 御座 뒤편에 배치했다.
(07) 中和殿 드므
드므는 ‘넓적하게 생긴 독’으로 木材建物에 脆弱한 火災豫防을 위해 防火水를 담는 容器로, 火魔가 드므의 물에
비친 凶惡한 自己의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게 하는 火災豫防을 위한 象徵的·呪術的 意味가 크다. (*脆: 연할 취)
(08) 德壽宮 石造殿
石造殿은 高宗이 寢殿兼 便殿으로 사용하려고 건립한 건물로, 基本設計는 英國人 G.R.하딩, 內部設計는 영국인
로벨이 했으며, 光武 4년(1900)에 착공, 隆熙 3년(1910) 完工했다. 地層을 포함한 3층 石造建物로 정면 54.2m,
측면 31m이며, 地層은 居室, 1층은 接見室 및 홀, 2층은 皇帝와 皇后의 寢室·居室·書齋 등으로 사용했다.
18세기 新古典主義 유럽宮殿建築樣式을 따른 것으로, 당시 건축된 西洋式 건물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건물이다.
이곳에서 1946년 美蘇共同委員會가 열렸으며, 6·25戰爭 이후 1986년까지 國立中央博物館으로 사용했다. (*寢: 잘 침)
1992~2004년에는 宮中遺物展示館으로 사용하다가 2005년 國立古宮博物館이 건립되면서 移轉하고, 復元以後
2014년 10월 大韓帝國歷史館으로 開館했다.
(09) 石造殿 西館, 國立現代美術館 德壽宮館
石造殿 西館은 1937년 李王職博物館으로 지은 건물로, 擬石造의 建物몸체 중앙에 코린트식 기둥의 玄關을
덧붙인 모습이며, 同時에 石造殿 앞에 西洋式 噴水庭園을 만들었다. 8·15光復後 石造殿(東館)의 부속건물로
사용되었다. 1998년 12월 國立現代美術館 分館으로 開館했다. (*擬: 비길 의)
(10) 德壽宮 昔御堂
光武 8년(1904) 燒失되어 그해에 再建한 건물로, 1층은 정면 8칸, 측면 3칸, 2층은 정면 6칸, 측면 1칸의 重層
팔작지붕翼工建物이다. 정면 8칸 중에 가운데 2칸은 툇마루를 깔고 뒷면 역시 쪽마루를 달아냈다. 上層은 退樑과
大樑위에 올려 세운 角柱로 構成하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德壽宮 昔御堂은 現存하는 唯一한 木造重層建物이며,
宮殿建築이지만 權威主義的 形式을 벗어나 순수한 在來式 民間建物의 성격을 띄고 있다. (*翼: 날개 익 *樑: 들보 량)
(11) 昔御堂 살구나무
德壽宮에서 가장 오래된 살구나무로 꽃피는 시기는 3月末이다. 노랫말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에서 보듯
살구나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봄꽃 나무이다. 宮闕에서 보기 드문 2層木造建物인 昔御堂과 활짝 핀 살구꽃
風景은 德壽宮의 아름다운 봄을 잘 보여준다. 나무줄기는 꽈배기처럼 꼬이면서 올라갔다.
(12) 昔御堂에서 보이는 南山서울타워(*렌즈를 당겨서 본 모습)
서울의 랜드마크이며 대표적인 觀光名所인 南山서울타워는 타워의 총 높이가
塔身 135.7m와 鐵塔 101m를 합하여 236.7m이며, 南山의 海拔高度 243m를 합하면
타워頂上의 海拔高度는 479.7m에 이른다.
(13) 德壽宮 卽阼堂
임금이 寢殿으로 사용하던 건물로, 光海君이 卽位하고, 昌德宮이 完工되어 移宮할 때까지 卽阼堂에서 머물렀다.
卽阼堂에서 仁祖가 登極하고, '卽阼堂'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사용했다. 훗날 高宗이 慶運宮으로 移宮해 正殿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1904년 德壽宮의 큰 火災로 燒失되어 이듬해인 1905년 復元했다.
建物構造는 정면 7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좌측에 있는 浚眀堂과 回廊으로 연결되었다.
(*阼: 동편 층계 조 *浚: 깊게 할 준 *廊: 행랑 랑)
(14) 德壽宮 浚眀堂
德壽宮의 內殿으로 사용한 건물이며 1897년 建立했다. 高宗이 昌德宮에서 慶運宮(現 德壽宮)으로 옮겨올 때
建立했으며 1904년 德壽宮의 大火災때 燒失되어 이듬해에 再建했다. 高宗이 政務를 보던 便殿이며 寢殿으로도
사용했다. 또한 어린 德惠翁主를 위해 幼稚園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로
溫突을 깔아 暖房施設을 갖추고 正面 3칸은 대청마루로 개방되어 있다. 右側의 卽阼堂과 回廊으로 연결되었다.
(*翁: 늙은이 옹 *稚: 어릴 치 *暖: 따뜻할 난)
(15) 德壽宮 德弘殿(왼쪽)
中和殿 동쪽에 있는 便殿으로 高宗의 寢殿인 咸寧殿과 나란히 있는 南向建物로 政務를 보던 곳이다.
1904년 德壽宮 火災로 燒失되어 復元했다. 정면 3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이며 景福宮과 昌德宮의 便殿과는
다르게 거의 正方形의 독특한 모양이다. 오른쪽 건물은 咸寧殿이다.
(16) 德壽宮 咸寧殿 -보물 제820호 -08.06.25사진
咸寧殿은 大韓帝國 初代皇帝 高宗이 居處하던 寢殿(生活空間)이다. 光武 1년(1897)에 建立했으나 光武 8년(1904)
燒失되어 現存建物은 그해 12월에 再建한 건물이며, 高宗이 純宗에게 讓位하고, 1919.01.21 昇遐한 곳이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4칸이며 서쪽 뒤로 4칸을 덧붙여 平面이 ㄱ字形이며 팔작지붕 위쪽에 여러가지 彫刻을
裝飾했다. 앞면 가운데 3칸의 퇴칸은 트였고 나머지 전부는 居室로 사용하도록 꾸몄다. 4面壁에는 土壁이 없고,
交窓門과 井字살 및 띠살문의 四分閤 문짝만 달려있다. 겹처마 마루에는 鷲頭·龍頭·雜像이 놓여 있다.
집은 매우 크고 무게가 있으면서도 裝飾은 매우 簡素하며 大韓帝國 마지막 皇室 寢殿建物로 建築史硏究에 좋은
자료이다. (*讓: 사양할 양 *昇: 오를 승 *遐: 멀 하 *閤: 쪽문 합 *鷲: 독수리 취)
(17) 光明門
光明門은 高宗의 寢殿인 咸寧殿의 正門으로 高宗이 승하한 후 1938년 噴水庭園 남서쪽으로 强制 移建되고,
光明門에는 昌慶宮 自擊漏 漏器(국보 229호), 興天寺銅鐘(보물 1460호)과 神機箭機火車 등을 展示했었는데
80년 만인 2019년 3월 1일 원래의 자리를 찾았다. (*噴: 뿜을 분 *擊: 칠 격 *漏: 샐 루/누 *箭: 화살 전)
(18) 德壽宮 靜觀軒
宮闕 後苑의 언덕 위에 세운 休息用建物로 1900년 大韓帝國時節 高宗이 茶菓를 들거나 外交使節團을 맞아
宴會 등을 위해 건립한 回廊建物로, 宮內의 近代建築物 중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정면7칸 측면5칸의
로마네스크樣式으로, 正面과 左·右側 발코니를 화려하게 꾸몄으며, 灰色과 赤色벽돌로 壁面을 多樣하게
장식하는 등 華麗하고 異色的인 모습이다. 多樣한 建築材를 사용한 건축물로 西洋風의 建築樣式에
傳統木造建築要素가 加味된 독특한 모습이다. 한때 太祖·高宗·純宗의 影幀과 御眞을 모시기도 했다.
[靜觀軒]이란 솔밭과 어우러진 咸寧殿 등의 건축물을 고요하게[靜] 내다보는[觀] 곳이라는 뜻이다.
(*靜: 고요할 정 *苑: 나라동산 원 *壁: 벽 벽 *幀: 그림 족자 정)
(19) 향나무
측백나무科 常綠喬木으로 4~5월에 꽃이 피며, 노란 수꽃이 가지 끝에서 긴 楕圓形을
이룬다. 열매는 다음해 9~10월에 익는다. 木材를 香으로 써왔기 때문에 ‘향나무’라고 한다.
(*喬: 높을 교 *楕: 길고 둥글 타)
(20) ‘苦難’의 소나무
(21) 闕內各司터와 圜丘壇
이 숲 일대와 담장너머 市廳앞 서울廣場一部는 宮闕의 官廳들이 있던 闕內各司터이다.
國家의 軍事權을 管掌하던 元帥府와 皇室業務를 보던 宮內府가 있었다.
이 밖에도 侍講院, 太醫院, 電話局 등 여러 官廳이 있었으나 1912년 太平路 開設로 일부가
道路에 編入되어 半以上의 殿閣들이 사라졌다. 담장 안의 나머지 殿閣들은 1933년
公園化로 撤去되었다. 서울광장 너머 건립한 圜丘壇은 1914년 朝鮮京城鐵道호텔을 지을 때
파괴되었으나 神位를 모셨던 皇穹宇와 돌북[石鼓]가 남아있어 大韓帝國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圜: 둥글 환 *丘: 언덕 구 *掌: 손바닥 장 *侍: 모실 시 *穹: 하늘 궁 *鼓: 북 고)
(22) 天圓地方의 연못
貞 洞
朝鮮 太祖의 繼妃 神德王厚 康氏의 무덤인 貞陵이 있던 곳이라고 貞洞이라고 한다. 貞陵은 太祖의 次男 李芳遠이
王位(太宗)에 올라 ‘都城 안에 묘지를 써서는 안된다.’는 규정에 따라 貞陵을 京畿 楊州(現 서울 城北區)로 移葬했다.
貞洞은 德壽宮을 비롯해 舊韓末의 歷史的事件의 現場이 많은 곳으로 宣敎師들이 세운 培材學堂과 梨花學堂,
韓末政治人과 歐美外交官들의 社交場으로 이용되던 손탁호텔, 러시아帝國公館 등이 있었다.
大漢門에서 京鄕新聞社로 이어지는 ‘덕수궁길’ 길가에는 貞洞監理敎會·柳寬順記念館 등이 있으며, 德壽宮돌담을
끼고 돌면 英國大使館, 大韓聖公會 서울敎區聖堂, 마당 세실劇場 등이 있다.
(23) 德壽宮돌담길
(24) 雲橋[구름다리] 모습
俄館播遷後 慶運宮으로 還宮한 高宗은 大韓帝國의 틀을 잡기 위해 宮域을 확장하면서
옛 獨逸公使館터를 買入해 闕外各司(宮闕밖의 官廳)를 설치하려고 했는데 慶運宮과의
사이에 길이 있어 雲橋를 架設해 두 地域을 연결했다.
(25) 雲橋[구름다리] 痕跡 (*痕: 흔적 흔 *跡: 발자취 적)
(26) 薔薇빛 人生 -최정화 作 -2012년 -스틸 프레임, FRP -340x320x320cm
强烈하면서도 整齊된 최정화의 造形物은 藝術괴 非藝術, 純粹美術과 商業美術의 境界를 넘나드는 독특한 感性을
보여준다, 傳統的인 彫刻材料를 脫皮하는 플라스틱 合成材料에 빨간原色의 工業用페인트를 彩色한 巨大한
꽃송이는 大衆的 키치美學으로 풀이된 現代 物質文明에 대한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薔: 장미 장 *薇: 장미 미)
*키치[Kitsch]
키치라는 用語는 그것이 指稱하는 개념처럼 매우 近代的인 것이다. 키치는 1860~1870년대에 뮌헨의 畵家와
畵商의 俗語로 사용되었으며, 하찮은 藝術品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1910년대에 이르면 느슨하고 널리
流通되는 호칭으로 國際的인 用語가 된다.
(27) 서울 貞洞敎會 -사적 제256호
光武 2년(1898)에 竣工한 우리나라 最初의 본격적인 改新敎 敎會建物이다. 본래는 十字形으로 115坪이었으나
1926년 增築 때 양쪽 날개부분을 넓혀 현재는 175평의 네모난 모양을 이루고 있다. 原來建物은 그대로 두고
양 날개 부분만 늘려지었기 때문에 건물의 원래모습에는 損傷이 없다. 벽돌 쌓기를 했으며, 곳곳에 아치형의
창문을 내 고딕樣式의 單純化된 敎會堂모습을 이루고 있다. 돌을 다듬어 반듯하게 쌓은 基壇은 朝鮮時代
木造建築의 솜씨가 배여 있어 주목된다. 이 敎會堂의 鐘은 裝飾없는 내부 기둥들의 겉모습과 함께 素朴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北美系統의 單純化된 敎會建物이다. (*飾: 꾸밀 식)
(28) 培材學堂歷史博物館
1885년 美國 北監理敎 宣敎師 헨리 게르하트 아펜젤러(Appenzeller, 1858~1902)는 우리나라 최초의 西洋式
近代敎育機關인 培材學堂을 설립했다. 學堂設立을 반겼던 高宗은 1886년 ‘有用한 人材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의 ‘培材學堂’이란 이름을 下賜했다. 2008년 培材學堂 東館(1916년 준공, 서울시기념물 제16호)에
培材學堂歷史博物館을 開館했다. 아펜젤러가 全人敎育을 實踐했던 空間, 數많은 近代知識人들을 배출했던 곳에서
‘新敎育의 發想과 新文化의 胎動’에 대한 다양한 展示와 敎育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賜: 줄 사 *踐: 밟을 천)
踏査를 마치고….
(01) 청송옥(靑松屋) -西小門洞
(02) 커피를 마시며 歡談하고 文化踏査 마무리.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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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스크를 쓰니 누가누군지.... 잘보고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