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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포네를 소탕하는 언터쳐불 멤버들
[ 영화, 언터쳐블 ]
이 영화는 로버트 드니로와 캐빈 코스트너, 숀코네리가 출연하고 브라이언 드 팔마감독이 연출을 맡은 갱영화로 엔니오 모리코네가 영화 음악을 맡은 명작입니다. 숀코네리는 이작품으로 남우 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알 카포네의 전성 시절, 시카고 경찰은 부패의 극에 도달해있었습니다. 대부분의 간부들이 갱들로부터 뇌물을 받고 있었습니다. 카포네를 비롯한 갱 조직을 타파하려는 특수수사반을 조직한 네스 반장(케빈 코스트너 분)은 강직한 성품의 경관들을 휘하에 모아서 갱들과의 싸움을 시작합니다.
그와 부하들은 전혀 뇌물과는 거리가 멀었기에 갱들은 그들을 가리켜 ‘손댈 수 없는 사람들(Untouchables)’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을 상징하는 말로 된 것입니다. 네스 반장의 이 조직은 후에 FBI의 모체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도 FBI의 수사관을 상징하는 말(언터쳐블)로 넓게 쓰이고 있기도 하죠.
* 시카고 역에서의 총격 장면
원래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동명의 인기 TV 시리즈(1959-1963)를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영화로 만든 것인데 그는 이미 알 카포네를 다룬 리메이크작 <스카페이스>(83)를 감독한 바 있습니다. 일류급 각본가 데이비드 마멧의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음악 거장 작곡가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이 영화에 힘을 불어넣고 있습니다.
여기에 의상 디자이너 조르지오 아르마니, 촬영의 스티븐 부럼, 그리고 케빈 코스트너, 숀 코네리, 앤디 가르시아, 로버트 드니로 등 초호화 배역이 참가한 복고풍의 갱스터 영화로서 흥행에서도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특히 앞 이마가 벗겨진 카포네로 분한 드니로의 카리스마 넘치는 악역 연기 변신이 볼만합니다.
이 영화에서 총격전이 펼쳐지는 시카고 역 내에서 유모차가 굴러 내려가는 이 영화의 하이라이트 씬이기도 합니다. 이 장면은 영화사에 빛나는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감독의 1925년도 무성영화 <전함 포템킨>에서의 오데사 계단에서의 민중학살 장면을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이 그대로 차용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 재판정에서 으르렁 거리는 네스(오른편)와 카포네(왼편)
실제 밤의 제왕이라고 불리웠던 알 카포네는 영화와는 달리 수사관을 살해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뇌물을 써 회유를 하여 했다고 합니다. 영화 속 하이라이트 부분 중의 하나인 재판정속에서 으르렁 거리던 네스와 알 카포네는 실제는 얼굴조차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영화 속에서 알 카포네가 경찰단속을 당한 자신의 부하를 야구방망이로 때려 죽이는 장면은 실제 알 카포네가 자신을 죽이려던 갱 두 사람을 야구 방망이로 때리고 머리에 총을 쏴 죽인 실제 사건을 차용한 것입니다.
드니로는 살을 찌울 시간이 없어 패드와 베게로 뚱뚱한 알 카포네의 몸집을 재현했습니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알 카포네 회계사가탄 열차를 세우려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 이었지만 1930년 열차를 배경으로 사용하기엔 너무 비싼 이유로 열차역 내 계단에서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으로 바꾸었다고 합니다.
* 캐나다 국경에서 술 밀수범들을 기다리는 언터쳐블 멤버들
주인공 엘리엇 네스는 영화 속에서 행복한 결혼생활에 아이가 있는 것으로 그렸지만 실제로는 세번의 결혼을 했고 입양한 아이가 한명 뿐이었습니다. 원래 엘리엇 네스의 역은 케빈 코스트너가 아니라 미키 루크였으나 그가 거절했습니다. 당시 케빈 코스트너는 그리 잘 알려진 배우가 아니었습니다.
숀 코네리는 <언터쳐블>로 아카데미 남우 조연상을 받아 유일한 아카데미 수상작으로 남았습니다.
[ 밤의 제왕, 알 카포네 ]
알 카포네는 1899년 1월 17일 뉴욕의 브루클린에서 이태리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이민 2세입니다. 본명은 알폰소 가브리엘 카포네로 애칭을 알 이라 불러 알 카포네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나폴리에서 이발사를 했었고 어머니는 재봉사로 원래는 헝가리로 이주를 했다가 1893년 미국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카포네의 형제들은 모두 9남매로 카포네는 카돌릭 학교를 다녔지만 14살때 여선생의 얼굴을 주먹으로 갈기는 바람에 교사에 대한 폭행으로 퇴학을 당하고 맙니다.
* 알 카포네
퇴학당한 카포네는 뉴욕 브루클린의 조직폭력배인 조니 토리오의 부하가 되었습니다. 깡패치곤 성격이 온화하고 섬세한 토리오가 폭력배들을 조직하여 범죄에 이용한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는 특정한 업종이나 사업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예를 들어 일정한 구역의 모든 얼음 배달집들은 토리오에게 수수료를 상납하는 대가로 특정 지역에서 독점적인 영업권을 부여받아 가격을 인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독점권에 도전하는 사람은 다이나마이트가 터지거나 두 다리가 부러지거나 소유한 건물이 시 당국으로부터 부실 건물로 판정을 받거나 하는 등 다른 여러 가지 불이익에 봉착하곤 했습니다.
토리오는 전성기에 탄산수 판매기에서 제빵, 크래커, 효모, 파이 노점상 조합 등 200개의 개별 업종 협회를 지배했습니다. 심지어 구두닦이들도 그에게 15 달러의 선금을 낸 다음 매달 2달러를 상납해야 했습니다.
뚜렷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지만 몇 가지 이유로 토리오는 1920년에 브루클린을 떠나 시카고에서 둥지를 틀기로 결심합니다. 첫 번째 조치로 그는 시카고의 조직폭력배였던 콜로시모를 때려눕히고 그의 활동지역을 빼앗았습니다.
몇년간 토리오의 깡패 사업은 잘 진행이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925년 1월 어느 추운 날 오후에 토리오가 아내를 도와 차에 싣고 온 장바구니를 집 안으로 옮기고 있을 때 상대방 폭력조직배 3명이 그에게 다가와 총알 5발을 선사했습니다.
* 전성시대의 카포네(왼쪽에서 4번째)
토리오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런 생활은 사람이 할 짓이 못된다고 판단하고 그의 모든 깡패사업 활동을 카포네에게 넘겨주고 고향인 이태리로 돌아갔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카포네의 무법자 시대가 막이 올랐습니다.
카포네 지배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가 아주 젊었으며 지배 기간이 아주 짧았다는 사실입니다. 카포네가 토리오로부터 지배권을 물려받았을 때 나이가 겨우 스물여섯 살이었습니다. 또한 그가 조직폭력배의 두목으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는 1925년부터 1927년까지 겨우 2년간이었습니다.
카포네는 흉터가 있는 얼굴을 뜻하는 “스카페이스(Scarface)"라는 별명이 붙었습니다. 이는 그가 어느 날 뉴욕의 브루클린의 한 술집에서 만취하여 건너편에 있는 한 여자에게 ”아가씨, 궁뎅이가 정말 이쁘네, 어쩌구 저쩌구“하다가 옆에 있던 그녀의 남동생에게 당한 것입니다. 그가 휘두른 나이프가 카포네의 왼쪽 뺨을 긁어버렸던 것입니다.
카포네에게 상처를 입힌 인물은 프랭크 갈루치오로 추후 카포네에게 사과를 하고 카포네는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경호원으로 채용하게 됩니다. 카포네를 미화하는 것은 아니고 그만큼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라 대범함도 남달랐던 것 같습니다. 카포네는 이 흉터를 가리느라고 얼굴을 땀띠약으로 떡칠을 하고 다녔습니다.
금주법이 시행되는 동안 시카고에서는 맥주가 유달리 다량으로 공급되었습니다. 맥주에는 공무원들의 대규모 부패가 필요했습니다. 다른 술과 달리 양조장을 숨길 도리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거액의 입막음용 돈이 필요했습니다. 시청 공무원들 중에 이 돈의 혜택을 입지 않은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 야구장에서의 카포네
경찰들과 관리들이 메트로폴 호텔에 있는 카포네의 본부로 뻔질나게 찾아왔습니다. 시카고 경찰은 사실상 그의 사병집단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금주법은 정부가 카포네와 같은 깡패들에게 준 더할 나위없는 최고의 선물이었습니다. 1927년 여름이 끝나갈 무렵 카포네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시카고 암흑가의 세계에서 아일랜드계가 이탈리아계를 제압하고 있었습니다. 유수한 마피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이탈리아계로선 ‘한판 전쟁’이 불가피한 셈이었습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게 1929년 2월 14일 미국 시카고 북쪽 링컨공원 근처에서 카포네 부하 7명이 아일랜드계의 모린 부하 7명을 톰슨 기관총으로 아작을 낸, 이른바 ‘밸런타인데이 학살’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처벌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알 카포네가 쌓아놓은 거대한 인맥이 움직인 것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물론 윌리엄 톰슨 시카고 시장도 알 카포네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습니다. 당시 시카고에는 낮과 밤 두 명의 대통령이 존재한다는 얘기가 나돌았습니다. 밤의 대통령이 바로 알 카포네였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조직범죄의 춘추전국시대였는데, 1929년 시카고에는 91개 협박 조직이 존재해 사업가들에게서 돈을 갈취하는 걸 생업으로 삼고 있었습니다. 주류 밀매업을 하는 갱단은 톰슨 기관총을 애용한 반면, 협박 조직들은 주로 다이나마이트를 사용했습니다. 1927년 10월 11일부터 1929년 1월 15일까지 15개월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시카고 지역에서 적어도 157건의 폭탄이 터졌지만, 이 모든 사건의 가해자들 가운데 벌을 받은 사람 역시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시카고의 깡패들이 특별히 애착을 느꼈던 한 가지 물건이 토미 건(Tommy gun)이라는 애칭으로 널리 알려진 톰프슨 기관단총이었습니다. 이 총의 이름은 미국 정부 병기감이었던 톰프슨 장군에게서 유래했습니다. 톰프슨은 병사 개인이 휴대하기에 충분히 가벼운 기관총을 만드는 것이었고 기어코 이 목적에 맞는 기관단총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이 총은 발사 때 반동이 너무 강해 정확한 조준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경찰은 이 총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직폭력배들에게는 딱이었습니다. 이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 시작하면 정확도는 제쳐두고 마구 난사되기 때문에 근처의 사람들에게 아주 무시무시한 공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 토미 건
1927년을 깃점으로 카포네의 짧은 전성기가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1929년, 영화 <언터처블>에 나오는 주인공 연방주류 단속요원 엘리엇 니스는 카포네에 대한 수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1931년 카포네는 소득세 탈세 및 주류금지법 위반혐의로 기소를 당하게 됩니다. 카포네는 변호사를 통해 유죄를 인정하고 형량을 줄이는 청원을 했으나 기각을 당하게 되고 혐의를 인정하고 판결을 받는 것으로 마음을 굳히게 됩니다.
하지만 재판부는 결국 카포네의 주류금지법 위반혐의는 기소하지 못했고 탈세 부분의 죄목으로 11년의 형량을 선고받게 됩니다. 카포네는 1932년 5월에 애틀란타의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카포네에게 감옥은 그리 험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스프링이 장착된 푹신한 침대를 제공받았고 집에서 만든 근사한 요리가 사식으로 들어갔습니다. 추수감사절에는 그날을 위해서 특별 고용된 요리사가 상을 차린 칠면조 만찬이 제공되기도 했습니다.
그는 개인적으로 독한 술을 보관하고 손님을 접견할 때에는 교도소장의 방을 쓰는 것이 허용되었습니다. 교도소장은 카포네에게 특별대우을 한다는 사실을 강력히 부인한 다음 카포네의 승용차를 사용하는 것이 들통이 나기도 했습니다.
* 알카트라즈 감옥소와 죄수 카포네
1934년 8월에 샌 프란시스코 앞바다의 알카트라즈섬에 교도소가 완공되자 카포네는 그곳으로 이송되게 됩니다. 알카트라즈 감옥의 교정국은 카포네가 조직과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을 모두 차단하고 그를 고립시키게 되는데 전 미국을 주름잡던 밤의 황제는 이 감옥 안에서 아무런 특별 대우도 받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이발을 하려고 줄을 서는 자리에서 카포네가 먼저 나서는 것을 보고 같이 수감 중이던 죄수 하나가 그에게 뒤로 가서 줄을 서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는 텍사스에서 은행강도를 하다 형을 살게 된 제임스 루카스라는 인물이었고 카포네는 내가 누군지 알고 하는 얘기냐고 반문했습니다.
제임스는 그런 카포네에게 이발사의 가위를 뺐어들고 그의 목에 들이대며 당신이 누군지 알지만 줄은 서야 한다고 위협을 했고 이일로 카포네는 가벼운 상처를 입게 되었습니다. 망신살이 뻗친 겁니다.
카포네는 현실이 바뀐 상황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쇠약해진 상태로 1939년 11월에 가석방으로 출감해 잠시 입원을 했다 마이애미의 저택에 은둔하게 됩니다.
카포네가 감옥에 있는 동안 조직은 거의 와해가 되어 더 이상 갱스터로서의 삶은 살 수가 없었고 긴 시간동안 긴장된 삶을 살아왔던 그는 회복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과 육체가 피폐해져 있었습니다. 더구나 매독까지 걸려있어서...
1946년에 그를 진단한 주치의와 정신과 의사는 카포네가 12살 정도 소년의 정신상태로 되돌아갔다고 진단했습니다. 그는 때때로 공산주의자나 외국인, 그리고 라이벌이었던 벅스 모란이 자신을 죽일 거라고 중얼거렸다고 합니다. 1947년 1월 27일,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카포네는 나흘 후 파란만장했던 생을 가족들에 둘러싸여 눈을 감습니다.
[ 웃기는 미국 금주법 시대 ]
금주령은, 다른 면에서는 합리적인 국가였던 미국이 역사상 시행한 가장 극단적이며 판단이 잘못되고 대가가 컸던 사회공학 실험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금주법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인 금주운동이 일어나게 된 이유는 1910~20년대 미국 도시에 이민자들이 유입되면서 대량의 범죄가 발생했고 이들의 원인이 바로 음주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특히 이민자들이 일자리를 소개받는 자리가 술집이다보니 더더욱 술이 범죄와 부패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죠.
더불어 1차세계대전으로 미국과 독일 양국사이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인들이 미국에 이주해 양조업으로 경제생활을 시작했는데 이들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금주법이 시행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습니다.
* 술통을 깨부수는 단속요원들
1919년 금주법이 제정되면서 미국은 자국의 5번째로 큰 산업인 주류산업을 단번에 폐쇄했습니다.이 조치로 영리기관들로부터 20억 달러를 빼앗아 흉악무도한 폭력배들에게 넘겨주었던 겁니다. 금주령이 선량한 시민들을 범죄자로 만들었고, 전국의 음주량을 사실상 증가시켰습니다. 금주령과 관련된 모든 것이 미숙하거나 웃음거리였습니다.
미 의회가 필요한 예산을 제공하지 않은 가운데 금주령 담당기관은 불과 1,520명의 요원을 채용하여 불가능한 임무를 맡겼습니다. 요원들은 3만 킬로미터의 국경선을 밀수꾼들로부터 지키는 동시에 1억 명 인구(요원 1인당 대략 7만 5천명)의 알코올 생산과 소비를 막아야 했습니다.
나라의 경제적 대가도 엄청나게 컸습니다. 연방정부는 연간 5억 달러의 주류세를 상실했습니다. 이는 국고 수입의 10분의 1에 달했습니다. 주정부 차원에서도 그 고통이 훨씬 더 컸습니다.
주류 밀매점이 걷잡을 수 없이 번창했습니다. 맨해튼 중심가의 한 블록에만 술을 마실 수 있는 장소가 32곳이나 되었습니다. 대략 2만 개의 선술집이 계속 영업을 하고 있었던 시카고의 일부 동네에서는 바(bar)가 버젓이 문을 열었습니다. 뉴욕에서는 음주를 할 수 있는 술집이 3만2천개로 추산되었는데, 이는 금주령 시행 이전의 2배였습니다.
금주령 때문에 이같이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 것은 웨인 휠러라는 사람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습니다. 휠러는 1869년 오하이오의 한 농장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날 술에 취한 농장 일꾼이 부주의하게 휘두른 쇠스랑에 다리를 찔렸습니다.
* 아까운 술을 하수구로...
이때부터 휠러는 미국에서 영원히 술을 추방하겠다는 독기를 품고 이를 필생의 사업으로 굳혀나갔습니다. 변호사 자격증을 딴 후 오하이오의 술집반대연맹의 회장이 된 그는 전 미국에서 점차 술 추방 전도사로써 그 명성을 떨치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술을 추방해야 가난, 이혼, 소득 상실, 현대의 모든 사회악의 근원을 해결할 수 있다고 거품을 물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술집반대연맹이 내걸은 이른바 휠러주의에 따라서 미국의 대부분 지역은 금주법 시행 오래 전부터 술을 추방했습니다. 1917년이 되자 27개 주가 완전히 금주 조치를 시행했고 이는 점차 다른 주로 번져나갈 조짐을 보였습니다.
술을 마실 수 없는 지역을 단 한 곳도 통과하지 않고 텍사스에서 남북 다코타까지, 유타에서 동부 해안까지 대부분 지역을 여행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대규모로 모여 사는 몇몇 도시와 산업지대에서는 여전히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었습니다. 술집반대연맹이 아무리 난리를 쳐도 이런 곳에서는 음주의 전통이 완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어 호락호락 뽑히지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발발한 1차 세계대전이 휠러에게 뜻밖의 힘을 안겨주게 됩니다. 적대국 독일에 동정적일 것으로 보이는 독일계 시민들이 미국의 양조장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한 것입니다. 하여튼 반독일 정서가 고조됨에 따라 금주운동이 엄청난 추진력을 얻게 되었습니다.
* 가차없는 술 단속...그러나
드디어 1919년 10월 28일 볼스테드 법으로 알려진 전국금주법이 제정되고 이듬해 발효되면서 미국 내에서 술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물론 모든 주가 금주법을 통과시킨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의 주에서 금주법이 발효되었고 이때부터 미국인들은 하루하루 경건한 삶을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일이 그런 방식으로 통제될 수 있다면 오늘날 무슨 사회 문제가 존재할까요?
술의 합법적 생산이 금지되면서 제한적으로 유통되는 술의 가격이 급등했고, 이는 당연히 서민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가짜 술을 만드는 움직임이 확산되었고, 그 과정에서 저질 술(가짜 술이라고 해도 무방하다)을 마시다가 건강을 잃고 심지어 목숨을 잃는 사람까지 속출했습니다. 물론 모두 서민들이었습니다.
반면에 금주법을 추진한 사회 지배층은 약간의 돈이 더 드는 불편을 겪었지만 술을 마시는 데는 썩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으니 갱단이 밀주(密酒) 제조에 나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알 카포네라는 전설적인 이름이 두각을 나타낸 것도 이 무렵이었습니다.
그러나 술을 추방하여 사회가 경건해지고 맑아지면 각종 사회악이 뿌리를 뽑힐 거라는 순진한 예상과는 달리 각종 부작용이 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금주법 시행 이후 전국의 살인사건이 3분의 1가량이 증가했습니다. 시행 이후 처음 2년 반 동안 30명의 금주 단속요원이 근무 중에 살해당했습니다. 이에 따라 요원들도 마구잡이로 총을 쏘아대는 바람에 무고한 민간인도 23명이나 총격을 당했습니다.
또한 가짜 알코올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습니다. 음주법이 알코올이 음주 외에 온갖 분야에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알코올은 페인트 희석제, 빙결 방지제, 로션 방부제, 시체 방부 처리액 등 수많은 분야에 사용됩니다. 따라서 합법적으로 생산되는 알코올의 지속적인 생산을 허용되었습니다. 그런 알코올이 밀주 거래용으로 전용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공업용 알코올을 음주에 부적합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정부는 수은 같은 독극물을 섞어 변성시켰습니다. 이런 독극물은 마시는 사람의 시력 상실, 신체 불구, 사망을 초래하는 위력을 가졌습니다. 변성된 알코올이 “미국의 새로운 국민 음료수”가 되었다고 한 금주령 시행 요원이 신나게 떠들어댔습니다.
변성 알코올을 마시고 비참하게 죽은 사람들의 숫자는 1927년 한 해에만 1만7천 명에 이르렀습니다. 휠러와 같은 금주법 지지자들은 독성물질을 탄 알코올을 마시는 사람들이 응분의 대가를 받는 것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인간들(술을 마시는)은 죽어도 싸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 술을 쏟아버리는 단속요원들
또한 박봉에 시달리는 금주 단속 요원들의 부패도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요원들은 독주를 압수한 다음에 원래 소유자에게 되파는 수법으로 주머니를 채웠고 뇌물도 다반사가 되었습니다. 뉴욕 시에서만 1년 동안 건네진 뇌물의 합계가 대략 1억5천만 달러에 이르렀습니다.
1926년 여름 북부 캘리포니아의 금주법 집행관인 그린 소령은 샌프란시스코의 금주 단속국 사무실에서 칵테일 파티를 벌인 사실이 들통 난 후에 정직 처분을 받았습니다. 그는 기자들에게 “나는 오래 전에 정직을 당했어야 했다”고 쾌활하게 지껄여댔습니다.
시카고에서는 1920년 여름, 67만 병에 해당하는 위스키가 압수되어 보관되어 있던 창고에서 깜쪽같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야간 경비 업무를 담당했던 직원들은 전혀 이런 낌새를 알 수가 없었다고 진술했으나 누구도 이를 믿지 않았습니다.
금주법은 너무나 허점이 많아 아예 시행이 불가능했습니다. 의사들은 환자들에게 위스키를 합법적으로 처방해줄 수 있었습니다. 1920년대 말에 의사들은 매우 열심히 위스키를 합법적으로 처방해준 덕분에 연간 4천만 달러의 소득을 올렸습니다. 성당과 같은 종교단체들은 성스러운 의식을 목적으로 한 무진장 알코올을 비축할 수 있도록 허용되었습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금주법 시행 이후 처음 5년 동안 포도재배 면적이 10만 에이커에서 70만 에이커로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이는 사람들이 갑자기 건포도를 대량으로 먹기 시작해서가 아니라 포도주 수입을 금지함에 따라 포도주 시장이 급격히 늘어났기 때문이었습니다.
* 술은 가차없이 하수구로...
포도농장 소유자들은 포도 농축액을 판매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포도 농축액 용기에 커다란 경고문을 써붙였습니다. “주의:발효되면 60일 이내에 포도주로 변함.”
술을 판매하지 못함에 따라 많은 레스토랑이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을 마시기 위해 주류 밀매점을 찾았습니다. 이런 주류 밀매점을 단속하기 위하여 요원들을 급히 투입하기도 했으나 대부분 헛발질을 하기가 일쑤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뒷돈을 챙기면서 눈을 감아주기도 했습니다.
비밀 클럽들은 앞문을 봉쇄한 다음 뒤쪽의 허름한 문으로 손님을 받았습니다. 클럽들은 언제 영업정지를 당할지 몰랐기 때문에 시설과 실내장식에 지출되는 돈은 최소한에 그쳤습니다. 그러나 손님들은 술만 마실 수만 있다면 내부시설이 지저분해도 전혀 구애받지 않는 눈치들이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금주법이 참담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국가는 무려 13년간이나 금주법을 유지했습니다. 아래와 같은 시 한 편이 금주법에 대해 이렇게 풍자해주고 있었습니다.
금주법은 참담하게 실패한다.
우리는 금주법을 좋아한다.
금주법은 멈추려는 대상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금주법을 좋아한다.
급주법은 뇌물과 오물을 길게 남긴다.
금주법은 미국을 악과 범죄로 가득 채웠다.
금주법의 단속은 한 푼의 가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주법을 지지한다.
뉴욕의 무시무시한 금주 단속관으로 애주가들과 주류 공급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던 버크너 검사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금주법으로 인해서 심각한 범죄 상황이 초래되었다. 위증, 살인, 공무원들의 심각한 도덕적 부패, 폭력행위, 절도, 온갖 형태의 범법행위가 자행되었다. 금주법 때문에 매일 일어나는 중범죄에 비하면 법 집행으로 거둔 소득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결국 1929년 대공황을 겪으면서 미국 전역이 혼란에 빠져 들었고 이후 대통령에 출마한 루스벨트는 금주법의 폐지를 공약했습니다. 그리고 1932년 선거에서 승리한 그는 1933년 이 법의 폐지안에 서명했습니다.
물론 이로써 미국 전역에서 금주법이 폐지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연방국가인 만큼 각 주 정부의 결정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미국 전역에서 금주법이 완전히 철폐되는 데는 1966년까지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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