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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6장 강해 9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 60-65
요절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넷플릭스에 피지컬 100이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가장 완벽한 피지컬을 가진 최고의 ‘몸’을 찾기 위해 최강 피지컬이라 자부하는 100인이 펼치는 극강의 서바이벌 예능게임입니다. 이것은 육체를 지나치게 중시하는 요즘의 세태를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잘못 이해하면 육을 아주 무익하다는 생각하기 쉽습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영의 입장에서 보면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입니다. 영 안에 있을 때 육은 무익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그렇다고 요즘 세태와 같이 영에는 관심이 없고 육을 지나치게 중시하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인에게 영과 육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할까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영과 육의 바른 관계를 알고 균형 잡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1) 때가 되면 예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62. 그러면 너희는 인자가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본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니 예수님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라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어려워서 들을 수 없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수군거리는 줄을 아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시 못하는 것을 아셨습니다. 당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입니다. 아직 성령이 오시기 전입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아서 그들이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예수님이 이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말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이전에 있던 곳은 하나님 우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서 육신을 입고 세상에 내려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하늘나라에 올라가는 것을 보면 그 때도 믿지 않겠느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는 예수님이 생명의 떡임을 이해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음 유월절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셔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여 하나님 우편에 가셔서 우리의 그리스도가 되십니다. 하나님 우편에 계신 예수님은 성령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찢기신 살과 피의 의미를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고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라는 말을 이해할 것입니다.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사람들, 그들의 말씀을 들은 남자만 3천명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의 의미를 이해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난 후에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남자만 5천명의 무리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으라는 말씀을 영접하였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많은 사람들이 성령의 깨우침을 받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알고 깨닫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살이 참된 양식이요. 예수님의 피가 참된 음료라는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묵상하고 그 십자가로 과거를 해석하고 십자가를 배우고자 살고 있습니다.
작년도는 3.13일 개나리 꽃이 피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3.13일 개나리 꽃이 피었습니다. 개나리 꽃이 때가 되면 피듯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때가 되면 예수님의 살과 피를 이해합니다. 구원역사가 완성되기 전에는 이해되지 않지만 구원역사가 완성되면 이해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때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믿음이 생길 때까지 비신자들을 기다려주어야 합니다. 우리 자신을 보아도 처음 복음을 들을 때 영접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때가 되어 영접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나도 어려서 복음을 들었지만 영접한 것은 대학교 들어와서입니다. 처음에는 창조주를, 다음에는 부활의 예수님을, 그 다음에는 십자가의 예수님을, 그리고 한참 되어서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면 섣부르게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까지 기다려 주어야 합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때가 되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우리의 몸이 변화되어 휴거되는 것을 잘 이해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늘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생기는 것을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우리의 몸이 썩지 않고 영광스럽고 강하고 신령한 몸이 된다는 것을 잘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완전히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아직 완성되지 않아서 이해할 수 없는 그것을 어렵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지금까지 우리에게 죄사함을 주시고 성령을 주신 것을 신뢰한다면 그 날 이루어질 것도 말씀대로 될 것을 믿고 그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아멘!
(2) 육도 중요하지만 영이 더 중요합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오늘의 요절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떡을 요구하는 무리들에게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영어성경에 “The Spirit gives life; the flesh counts for nothing”으로 나옵니다. 육이 무익하다는 것은 육은 nothing으로 전혀 생명을 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전제가 없이 이해하면 육을 완전 부정하는 말씀으로 오해합니다. 영이 없다면 육은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육을 부정하는 것은 영지주의 이단입니다. 요한일서에 보면 예수님이 육으로 온 것을 부정하는 자마다 적그리스도라고 나옵니다. 요한복음이나 골로새서나 빌립보서는 영지주의 이단을 경계하기 위해서 쓴 서신입니다. 영지주의는 금욕주의나 쾌락주의에 빠집니다. 금욕주의와 쾌락주의는 서로 반대되는 것 같지만 서로 동전의 양면과 같이 같은 것입니다. 금욕주의는 육의 소욕을 억제하다가 자기를 학대하는 것입니다. 스님들은 금욕주의로 결혼도 하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런 분들이 쾌락주의로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성철 스님의 제자 혜국 스님은 자신의 육신의 소욕을 절제하지 못하여 손가락 세 개를 불에 태웠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면 자꾸 생각이 나니까, 절에 돌아와서도 생각이 나니까. 그래서 태웠다”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쁜 여자를 보면 생각나는 것이 죄입니까? 건강한 남자의 정상적인 심리입니다. 다만 음심을 품지만 안으면 됩니다. 예쁜 여자를 보고 생각나는 것을 죄로 여기는 것이 금욕주의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지주의 속에 있는 스님들이 죄를 짓는 경우가 많습니다. 고려 속요에 보면 스님들이 여자들과 죄 짓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이것은 스님들만 그렇지 않습니다. 신부들도 금욕주의로 결혼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사에 보면 신부들이 동성애의 죄에 빠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제가 학생 때 한 여학생이 임신한 신혼 신부를 보고 더럽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나중에 보니 음란 죄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금욕주의도 쾌락주의도 아니고 육신을 긍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긍정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먹고 마시고 결혼하는 것을 긍정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결혼을 폐하고 음식을 폐하는 사람을 책망하였습니다. 음란죄에 빠진다면 차라리 결혼하여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낫다고 하였습니다. 부부가 사랑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가 맛있게 먹고 마시는 것은 죄가 아니라 건강한 것이요 아름다운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육신을 긍정하고 육을 소중히 여기고 육신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교회도 거룩하지만 우리의 육신을 가지고 생활하는 가정이나 직장도 교회와 같이 거룩한 곳입니다. 가정은 가정교회이고 직장은 사명의 땅인 것입니다. 우리는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사도요한은 영지주의자들에게 육신을 긍정하라고 요한 삼서에서 말씀하십니다.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먼저 잘 되어야 합니다. 그 전제 아래서 영적인 축복만 축복이 아니라 육신이 건강하고 물질적으로 복을 받는 것도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뿐 아니라 육신과 물질도 복을 주십니다.
그렇다고 영은 관심이 없고 육신을 지나치게 긍정한다고 중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것은 영적인 것을 소홀히 여기고 세속주의로 빠집니다. 이들은 무리들처럼 영적인 것은 추구하지 않고 육적인 것만 추구합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세상에서 번영과 축복과 성공에 대해서만 관심을 갖습니다. 가장 좋은 예가 조엘오스틴의 ‘긍정의 힘’입니다. 이런 부류의 책이 많습니다. ‘정상에서 만납시다.’ ‘정신력의 기적’과 같은 책들입니다. 이들처럼 세상에 소망을 둔 자들은 결국 육적인 축복을 받지 않으면 무리들처럼 미련 없이 예수님을 떠납니다. 이것은 복음서에 나오는 무리들의 잘못된 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치지만 병 고치러 나오는 사람들을 피하여 다른 마을로 가는 이유가 세속주의를 경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한 번 떡을 주셨지만 계속하여 떡을 주지 않는 이유가 이런 세속주의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다고 말씀하신 것은 이런 세속주의 신자를 책망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육신을 긍정해야 하지만 육신보다 영을 훨씬 더 중시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이 육보다 얼마나 중요하냐면 영에 비하면 육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데 육은 nothing입니다. 우리의 육은 죽으면 없어지는 무익한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잘 먹고 마십니다. 높은 지위에 올라가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기도 합니다. 돈을 많이 벌기도 합니다. 학위를 따기도 합니다. 새로운 과학기술이나 의학기술을 발견하여 노벨상을 타기도합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것이 우리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합니다. 이런 것은 천국을 가는데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영은 영이요 육은 육이라고 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공회원이요, 부자요, 이스라엘의 지도자요, 종교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갈 수 없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육이 천국 가는데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돈으로도, 벼슬로도, 어여뻐도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살리는 것은 영입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성령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성령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은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가 진정 행복하게 살게 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거지로 살아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병이 나도 거듭나야 합니다. 우리가 비천한 직장을 갖더라도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만이 하나님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 거듭난 사람은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디나 하나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들에게도 예수님의 살과 피를 통해서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거듭나 하나님 나라에 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영적인 것으로 받을 때 우리는 거듭나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처럼 영을 중시하며 하나님 나라를 먼저 구하면 하나님은 육도 복을 주십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도 축복하여주십니다.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도 진정 행복하게 살 수 있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3) 가룟유다는 살리는 것은 육이니 영은 무익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65. 또 이르시되 그러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따르던 무리들이 다 떠났습니다. 70 제자들도 떠났습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다 떠났습니다. 12제자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남은 자 중에도 믿지 않는 믿지 않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가룟유다였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을 팔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가룟유다의 마음을 아시고 가룟유다에게 하나님이 이끌지 않으면 올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듣고 배우는 사람만이 올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가룟유다가 믿지 않는 이유는 듣고 배우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는 교만하였습니다. 그도 관심이 육적인데 있었고 영적인 데 없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이 없고 땅에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독립을 이루고 그 나라에서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돈을 벌고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고 싶었습니다. 그는 재정부장을 하면서 돈을 훔쳐갔습니다. 그의 사진을 보면 돈주머니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살리는 것은 육이니 영은 무익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룟유다에게 세상에 둔 소망을 회개하도록 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교만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대한 욕심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결국 자살하여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론 과연 살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가룟유다가 생각하듯이 살리는 것이 육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이 생각하듯이 살리는 것은 영입니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가룟유다와 같이 육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물질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이들은 죽어서 심판을 받습니다. 살리는 것은 육이 아니라 영입니다. 우리는 성령에 관심을 갖고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영안에서 육을 긍정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갖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하나님이 육적인 것도 은혜를 주십니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게 하십니다. 아멘!
요한복음 6장 강해 9부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요한복음 6장 60-65
요절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요한복음 6장 강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