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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堯)는 중국의 신화 속 군주이다.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하나이다. 다음 대의 군주인 순(舜)과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요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고, 다만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치세] 요는 제곡 고신의 아들로 이름은 방훈(放勳)이고 당요(唐堯) 또는 제요도당(帝堯陶唐)으로도 부른다. 이는 요가 당(唐) 지방을 다스렸기 때문에 붙은 칭호이다. 요는 도당씨(陶唐氏)라고도 부르는데, 요가 처음에 도(陶)라는 지역에 살다가 당(唐)이라는 지역으로 옮겨 살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기(史記)》와 여러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요는 20살에 왕위에 올라 덕으로 나라를 다스렸다. 요의 치세에는 가족들이 화합하고 백관의 직분이 공명정대하여 모든 제후국들이 화목하였다고 한다. 요는 희씨(羲氏)와 화씨(和氏) 일족에게 계절의 구분에 따라 농사의 적기를 가르쳐 주도록 하였으며, 1년을 366일로 정하고 백관들을 정비하였다. 또한 자신이 독단적인 정치를 할 것을 염려하여 궁전 입구에 감간고(敢諫鼓: 감히 간언드리는 북)를 달아 경계하도록 하였다. 요의 만년에는 황하가 범람하여 큰 홍수가 났으며, 요는 이를 다스리기 위하여 곤(鯀)을 시켜 9년 동안 치수공사를 하게 했지만, 실패하였다.
요가 왕위에 오른 지 70년 가까이 지난 후 요는 후계자를 찾아 신하들에게 추천할 것을 명하였다. 신하들은 전욱 고양의 후손이자, 효성이 지극한 순(舜)을 추천하였다. 요는 순에게 두 딸을 시집보내고 여러 가지 일을 맡겨 순의 사람됨과 능력을 시험하였으며, 3년 후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20년이 지나자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여 8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일부 학자들은 요 시대 쯤에 황하 유역에 중앙집권적인 정치세력이 형성되었다고 추정한다.
[관용표현] 순은 요와 함께 상고시대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하는 관용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뛰어난 군주의 치세를 일컬어 요순시대(堯舜時代)라 부르기도 한다.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의 관용 표현이기도 하다.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는 중국 역사상 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각종 시, 노래, 민요, 상소문 등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역성혁명을 꾀하던 자들이 요순임금의 예를 들며 자신이야말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순(舜)은 명군으로 알려진 중국의 신화 속 군주의 이름으로,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 신화 가운데 오제의 마지막 군주이다. 주로 선대의 요(堯)와 함께 성군(聖君)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현재까지 순의 역사적 실존성은 정확히 밝혀진 바는 없고, 다만 우왕과의 관계에서 하나라 이전에도 국가 비슷한 실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자료로 사용된다.
[생애]순은 전욱 고양의 후손으로 성은 우(虞), 이름은 중화(重華)이고 우순(虞舜) 또는 제순유우(帝舜有虞)로도 부른다. 제왕의 후손이나 여러 대를 거치면서 지위가 낮은 서민이 되어 가난하게 살았다. 부친인 고수(瞽叟)는 장님으로, 순의 모친이 사망한 후 계비를 들여 아들 상(象)을 낳았다. 고수는 상을 편애하여 순을 죽이고자 하였고 순은 부모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를 잘 피하면서 효도를 다하였다. 20세 때 효자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으며, 30세에 요가 순을 후계자로 삼고자 하고 순을 시험하기 위해 여러가지 임무를 맡기고 두 딸을 시집보냈다.
순이 여러 임무를 잘 수행하고 두 딸과의 가정생활도 원만하자, 요는 순을 등용하여 천하의 일을 맡겼다. 순은 선대 제왕들의 신하들의 후손을 찾아 적재적소에 임명하였으며 악한 후손들은 멀리 변방으로 유배하여 악인을 경계하였다. 순이 등용되어 20년이 지난 후, 요는 순을 섭정으로 삼고 은거하였다. 8년 후 요가 사망하자, 순은 요의 아들 단주(丹朱)에게 왕위를 양보하고 변방에 은거하였다. 그러나 백관과 백성들이 은거한 순을 찾아와 조회를 보고 재판을 치르자 천명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돌아와 왕이 되었다고 한다.
순은 왕위에 즉위한 이후 여러 신하들을 전문적인 직분에 따라 임명하였으며 사방의 오랑캐를 정벌하고 회유하여 넓은 강역에까지 통치가 미치게 되었다. 특히 홍수를 다스리기 위해 우(禹)를 등용하여 마침내 치수에 성공하였다. 우의 성공적인 치수로 농토가 증대되고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순왕의 뛰어난 인재 등용을 칭송하였다. 순왕은 우를 치하하며 그에게 구슬을 하사하였다. 우의 공로가 뛰어났고, 순의 아들 상균(商均)이 왕위에 적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순은 재위 22년 만에 우를 하늘에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았으며, 재위 39년에 남쪽을 순수하던 도중 사망하였다.
[관용표현] 순은 요와 함께 상고시대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으로 손꼽히고 있다. 그래서 중국 문화권에서는 훌륭한 군주를 가리켜 요순과 같다고 찬양하는 관용표현이 널리 사용되었다. 하나라의 우왕, 은나라의 탕왕을 합쳐 요순우탕(堯舜禹湯)이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뛰어난 군주의 치세를 일컬어 요순시대(堯舜時代)라 부르기도 한다. 요순시대는 태평성대와 같은 의미의 관용 표현이기도 하다. 요순 시절의 태평성대는 중국 역사상 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좋은 옛 시절”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었으며, 각종 시, 노래, 민요, 상소문 등에서 용례를 찾아볼 수 있다. 한편으로, 역성혁명을 꾀하던 자들이 요순임금의 예를 들며 자신이야말로 백성의 신망을 받는 지도자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선양전설]선양(禪讓)은 군주가 혈연관계가 없는 후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이다. 중국의 신화 시대에 성천자(聖天子)로 일컬어지는 요·순·우(禹)가 차례로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전설에서 탄생한 개념이다. 요가 아들 단주(丹朱)를 제치고 순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과, 순이 아들 상균(商均)을 제치고 능력을 갖춘 인재인 우를 후계자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었던 것이 선양 전설의 요체이다. 선양은 신화 속 태평성대의 군주들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칭송을 되었으며, 이상적인 군주 교체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한비자와 죽서기년에 따르면 요와 순의 선양은 허구였으며 순이 요를, 우는 순을 무력으로 몰아내거나 감금하고 자신들이 제왕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출신]맹자는 순(舜)을 동이족의 한 갈래로 파악하고, 헌원은 주족의 가계로 파악하였다. 오제의 가계가 실제로 연결된다고 파악하는 이론은 드물다. 실제 왕위을 세습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규성 성씨의 선조로 여기고 있고, 그 자손들이 후기 제나라 지역 명을 성으로 삼았다고 전한다.
우禹 (기원전 2070년경)는 중국 고대의 전설적인 군주로 하나라의 창시자이다. 아버지는 곤이며 곤의 아버지는 오제의 하나인 전욱이다. 따라서 우는 전욱의 손자이다. 또 전욱은 황제의 손자이므로 우는 황제의 고손자가 된다. 도산씨의 딸에게 장가가 계라는 아들을 두었다. 우는 인덕을 가져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또 탁월한 정치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자랑하지 않았다. 아마도 전설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이러한 성인으로서 그려지는 것으로 보인다.
[우의 치수사업] 요의 시대에 우는 치수 사업에 실패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순에게 천거되는 형태로 황하의 치수를 맡았다. 『열자』의 양주 제7에 따르면 이 때 일에 너무 몰두해서 아이도 기르지 않고, 가정도 돌보지 않았으며, 신체는 반신불수가 되었고 손발의 살갗이 텄다고 한다. 禹라는 문자는 본래 도마뱀이나 악어, 용의 모습을 그린 상형문자로, 우의 기원은 황하에 살던 물의 신이라고 보기도 한다.
[하왕조 창시] 우는 즉위 후에 한동안 무기의 생산을 중단하고 궁전의 재증축을 재고하였으며 관문이나 시장에 걸려있는 여러 세금을 면제하였다. 그리고 지방에 도시를 만들고 번잡한 제도를 폐지해 행정을 간략화했다. 그 결과 중국 안에서는 물론 밖에서까지도 조공을 요구해 오게 되었다. 또한 우는 많은 하천을 정비하였고 주변의 토지를 경작해 초목을 키웠으며 중앙과 동서남북의 차이를 기(旗)로써 사람들에게 나타냈고 옛 방식도 답습해 전국을 나누고 구주를 두었다. 우는 검약 정책을 취해 스스로 솔선해 행동했다.
근거는 알 수 없으나 사마천은 하왕조의 성을 사(姒)라고 기술 하였다, 우임금의 성은 하우(夏禹), 유하(有夏) 등 다양하게 전해지는데 기원전 2000년전의 구전이므로 확실하지 않다. 이름은 문명(文命), 대우(大禹), 하우(夏禹), 융우(戎禹) 등 다양하다. 중국에서는 우임금의 조상을 요임금으로 생각한다. 또는 유씨가 하왕조에서 계출되어 한고조 유방의 조상으로도 여긴다. 하(夏)가 망한 후 하(夏) 씨가 생기고 다시 기간공(杞簡公)의 아우 타(佗)가 노(魯)로 망명하여 후작(侯爵)을 받았으므로 다시 하후(夏侯) 씨가 생기게 되었다.
탕湯 (기원전 1600년경)은 은나라의 창시자이다. 이름은 리(履)이다. 천을(天乙), 대을(大乙), 태을(太乙), 성탕(成湯), 성당(成唐)이라고도 한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추방해 하 왕조를 멸망시켰다.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은 포학한 정치를 해 인심은 하로부터 멀어져 있었다. 하의 신하인 탕은 명신 이윤의 보좌를 받아 걸을 공격해 멸망시켰다. 서경에는 걸을 멸할 때에 제후를 향해 연설했다고 여겨지는 『탕서』가 있다. 탕은 하의 우, 주의 문왕, 무왕과 함께 성군으로서 후세에 숭상되고 있다.
주 문왕 희창(周 文王 姬昌,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11세기?)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주나라(周)의 창건자인 무왕(武王)의 아버지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창(昌). 서백(西伯)은 그의 직위이다.
[사적] 유리(羑里)라고 불리는 감옥에서 유교의 고전인 주역(周易)의 괘사(卦辭)를 지었으며, 복희 선천 팔괘를 연역(演易)하여 문왕 후천 팔괘를 지었다고 전해지나, 괘사나 효사는 점(占)의 전문가들 사이에서 생겨 고정된 것으로, 후대에 문왕을 찬미하기 위한 서술로 지적된다. 오늘날에는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문왕, 주공, 공자가 주역을 나누어 지었다는 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보고 있다.
서주 무왕 희발(西周 武王 姬發, ? ~ 기원전 1043년?)은 주나라(周)의 초대 군주로서, 성(姓)은 희(姬), 이름은 발(發)인데, 둘째였으므로 중발(仲發)이라고 불렀다. 다양한 문헌이 그의 죽음을 인용하는데 나이는 다르게 나오며 93세, 54세 또는 43세 때였다고 기록된다. 그는 정의롭고 유능한 지도자로 고려되었다. 주공 단은 그의 형제였다.
[생애] 주 무왕은 주 문왕(周文王)의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후에 그의 아버지의 유언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것은 상나라(商)의 격파였는데 무왕은 현명한 관료를 등용하였고, 특히 재상으로 강태공을 기용하였다. 그는 군사(軍師)였다. 결과적으로 주나라는 강대화되었다. 기원전 1048년 무왕은 맹진에서 제후들의 회합을 요청하고 800명 이상의 제후가 참석하였다. 기원전 1046년에는 상나라 정부가 파탄상태가 되고 무왕은 많은 인접 제후와 함께 공격을 시작하였다. 무예의 전투에서 상나라 군대는 파괴돠었고 상나라의 주왕(紂王, 제신)은 궁을 불태우고 분사하였다. 전쟁에서 승리하여 무왕은 중국을 통일했으며 그의 형제와 장군들의 많은 제후국을 세웠다. 그는 즉위 3년 후 기원전 1043년에 사망하였다.
주 문공 희단(周 文公 姬旦)은 주(周)의 정치가로 문왕(文王)의 아들이자 무왕(武王)의 동생이다. 성은 희(姬), 이름은 단(旦),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아들이 노(魯)의 제후로 봉해진 이래 노의 시조로서 받들어졌다. 통칭은 주공(周公)이라고 불린다.형인 무왕의 보좌를 하였고, 그의 어린아들인 성왕을 보좌하고 주나라 건국 이후의 불안한 정국을 안정시켰다. 강태공과 소공 석(召公奭)과 함께 주의 창업 공신의 한 사람이다.
[생애] 형왕(兄王)인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토벌한 공으로, 주의 성립 뒤에 곡부(曲阜)에 봉해져 노공이 되었다. 이때 봉토로 받을 땅이 남아있지 않아서 제(齊)로부터 땅을 떼어 받았다고 한다. 문공 자신은 천하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봉지로 가지 않고 대신 아들인 백금(伯禽)에게 주어 통치하게 하고 자신은 호경(鎬京)으로 돌아와 성왕(成王)을 보좌하여 주공이 되었다.
앞서 무왕이 주를 개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을 얻어 위독해졌을 때, 문공은 한탄하며 자신의 목숨을 내놓겠으니 무왕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하늘에 기원하였다고 한다. 무왕은 일시 병을 회복하는 듯 하다가 결국 사망하고, 무왕의 어린 아들이 성왕으로 즉위하자 형제인 연의 소공 석과 함께 섭정이 되었다.
이 와중에 옛 은의 제신(帝辛)의 아들 무경(武庚)이 문공의 형(문왕의 셋째 아들)인 관숙 선(管叔鮮)과 동생(문왕의 다섯째 아들)인 채숙 도(蔡叔度) 등을 꾀어 문공의 섭정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관채의 난). 문공은 난을 토벌하고 무경과 관숙 선을 주벌한 뒤, 채숙 도는 그의 아들 중호(仲胡)로 교체한 뒤 유배함으로서, 반란을 수습하였다.
7년 뒤 성인이 된 성왕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제후의 지위로 돌아간 후, 문공은 지금의 낙양인 낙읍(雒邑)에 자리를 잡고 주의 부도(副都)를 세웠다.
또한 문공은 예학의 기초를 만든 인물로 알려져 있다. 팔괘의 효(爻)를 창안하여 역경을 완성했으며 주의 의식과 의례를 정리해 《주례(周禮)》와 《의례(儀禮)》을 저술했으며, 문공의 시대에서 약 500년이 지난 춘추 시대의 인물로 유학을 정립한 공자(孔子)는 노의 수도였던 곡부 출신으로서 문공을 이상적인 성인으로서 꿈에서도 그를 보고 싶어할 정도로 경모하여, "오랫동안 꿈에서 주공을 뵙지 못했다(吾不復夢見周公)"고 말하며 "나도 이제 늙어버렸다"고 탄식했다(논어 술이편)고 한다. 현대의 학자들은 주역이 기원전 403년 이후 사이에 체제가 갖추어진 것으로 보고 주례를 익명의 다른 사람이 쓴 것으로 보고 있다.
주공(周公)이라는 칭호는 문공 자신이 주의 옛 땅이었던 기산(岐山)에 봉해진 데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으며, 무왕이 사망한 뒤 문공은 실제로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가 뒤에 조카 성왕에게 왕위를 돌려주었다는 설도 있다. 문공의 묘에 대해서는 그 위치가 불확실하였으나 2004년에 중국 산시 성(陝西省) 바오지 시(宝鶏市)의 주공묘(周公廟) 부근에서 발견된 무덤을 문공의 것으로 보고 있다.
[주공의 후예] 주공의 맏아들 노후 백금은 노나라의 제후가 되었고, 차남 군진은 주나라에 남아 경사를 세습했다. 이외에도 범 · 형 · 모 · 작 · 채 등의 제후국이 주공의 계통이라 한다.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 기원전 551년 ~ 기원전 479년)는 유교의 시조(始祖)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치가 · 사상가 · 교육자이고, 주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히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 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요순우 삼황 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나라 주공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유를 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 말기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魯)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다. 이름은 구(丘), 자는 중니(仲尼)이다.
"공자(孔子)" 또는 "공부자(孔夫子)"로 불린다. "공자(孔子)"의 호칭에서 "자(子)"는 성인(聖人)인 공자를 높여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증되어 대성지성문선왕(大聖至聖文宣王)에 추봉되었다.
[생애초반]
탄생과 가계/
공자는 기원전 551년 9월 28일 노나라 곡부(曲阜)에서 떨어진 시골인 창평향(昌平鄕) 추읍(郰邑)에서 부친 숙량흘이 그의 노년에 모친 안씨(이름은 징재)를 맞아 공자를 낳았으나, 부친인 숙량흘(叔梁紇)과 모친인 안징재(顔徵在, 옌쩡짜이)는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었다.
안징재는 숙량흘의 동료 무사이자 친구였던 안양(顔襄)의 셋째 딸이었다. 숙량흘이 안징재를 만났을 당시 숙량흘은 70대였고 안징재는 13세의 소녀였다는 설도 있으나, 이는 후세에 호사가들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의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 받은 송나라의 공족(소국의 왕에 해당)이었으며 공자의 3대 전에 노나라로 옮겨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게 되었으며, 부친 숙량흘은 시골 무사였다. 부친과 그의 본처 시씨(施氏) 사이에는 딸만 아홉이었고 아들은 하나 뿐이었다.
공자의 자(字)가 중니(仲尼)가 된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되는 공자의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숙까지 언급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소년시절/
《사기》의 '공자세가'에는 공자의 키가 9척6촌에 달하여 '장인(꺽다리)'으로 불렸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받지 못 했다.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징재가 궐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부친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 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다.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모친마저 눈이 멀어 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이 결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기원전 536년]에 혼인하였으며, [기원전 535년] 공자 24세에 모친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공자는 3년상을 마친 뒤 부친 묘소 옆에 안장하였다. [기원전 533년] 19세에 [[송 (춘추 전국)(宋)나라의 병관(幷官)씨의 딸과 결혼하여 20세에 아들 리(鯉)를 얻었다.[2]
사생아였던 공자에게는 자신이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다고 하며, 고실(故實), 즉 예부터 내려 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제도·관습 등에 밝았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다.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웠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사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고 술회한다. 서른 살에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선 것이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된다. 그는 학원을 열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束脩)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시경> <서경> <주역>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周公)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하게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관료생활과 교육활동]
관료생활/
회계 출납직인 위리(委吏)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司直)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다.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의 지위도 얻고, 학문적으로도 많은 진전을 보였다.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써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본국인 주나라(周)의 낙읍(洛邑)을 돌아 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망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3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魯)나라의 왕 소공(昭公)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다.
주유천하/
36세 때 소공(昭公) 25년 노나라에 '삼환(三桓, 맹손(孟孫)·숙손(叔孫)·계손(季孫) 등 당시 노나라의 권세가)의 난'이 일어나 노왕 소공이 신하인 계씨에게 쫓겨나 제나라로 도망치는 일이 벌어졌다. 공자도 그의 뒤를 따라 피난, 기원전 517년에 제(齊)나라에 갔다.
공자는 제나라의 왕 경공(景公)과 신하들에게 여러 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공에게 정명주의(正名主義)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경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와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영(晏嬰)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로 인해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 왕의 측근 배신(陪臣)인 양호(楊虎)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재(中道宰)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구(大司寇)로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 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시켰으며, 난신대부 소정묘(少正卯)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고도 한다(기원전 496년.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이 없다는 주장도 있다.).
이 때 제나라에서는 밀자(密者)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으나 공자가 이를 꿰뚫어 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는 의심쩍은 사내를 붙잡아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삼환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大夫)인 계환자가 제나라의 흉계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들과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송·조·정·진·태 등 여러 나라를 주유하였다.
정치활동/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구(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고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당시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 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게 간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공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 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씨의 횡포를 꺽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三城)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손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계손사는 노나라 삼환 계손, 맹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이 무렵, 공산불뉴는 삼환과 계손사의 전횡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 역시 삼환 등의 무리를 몰아내 어지럽혀진 노나라를 바로 잡으려고 이미 일을 꾀했던 데다 도덕 정치 구현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반역자 공산불뉴가 하극상을 벌인 처지임에도 그가 초빙했을 때 이에 응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노나라 출신 제자였던 맹의자, 남궁도등의 만류와 때마침 벌어진 상황 여건의 괴이한 변화로 인해 결국 단념하였다.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손사를 타도하려고 여러 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손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 정치에서 실현시켜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周遊列國)의 기간은 성인(聖人)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해 여행 도중 만난 은자(隱者)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정치는 어느 나라에서도 외면 당했다. 당시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 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생애후반]
교육 활동/
인(仁)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주유하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으나,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또 노나라에 전해 내려 오던 역사서를 다시금 새로 엮어 《춘추》를 편찬했다.
공자의 만년에 아들인 백어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 때 공자는 "하늘이 나를 버렸다"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백어가 사망하자 공자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제자들]
공자의 문하(門下)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六經)에 통달한 이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七十子)'라고 한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십철(孔門十哲)'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顔回), 민자건(閔子騫), 염백우(冉伯牛), 중궁(仲弓), 재아(宰我), 자공(子貢), 염유(冉有), 자로(子路), 자유(子有), 자하(子夏) 등이었다.
공문의 많은 제자들 중 안회(顔回)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子弓)이었다.
덕행(德行)으로는 안회(顔回), 민손(閔損), 재백우(再伯牛), 중궁(仲弓)이며, 언행은 재예(宰豫), 자공(子貢)이며, 정사(政事)에는 재구(再求, 자유(子有)의 본명), 중전(仲田, 자로(子路)의 본명)이고, 문학(文學)에는 자유(子游)·자하(子夏)이다. 그 외에도 증자(曾子), 자장(子張), 자궁(子弓), 유자(有子) 등이 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孟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와 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만년]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따라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곡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만년을 보냈다.
공자는 만년 들어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말하기를, "나이 열다섯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 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吾十有五而志于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고 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된 해인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씀들을 모아서 《논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그리하여 공자의 가르침은 그의 사후에도 수 천년 동안이나 이어지며 중국을 비롯하여 이른바 '중화(中華)'의 국제 질서에 속한 동아시아 대부분 국가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종범(宗範)이 되었다. 또 공자는 세계 4대 성인 중 한 사람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동,서양을 막론한 세계 각국에서 인류의 영원한 스승으로 추앙되고 있다.
[사후]
공자의 승하 후 노성 북쪽(魯城北 曲阜 洙上, 현재의 산동성 곡비현 북쪽)에서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제자들은 증자를 상주로 하고, 부모의 장례에 준하는 예로써 상복을 입고 그의 묘소 앞에서 3년상을 마친 뒤, 각자 고향에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였다.
이후 증자의 문인들과 증자의 제자이자 친손자인 자사의 문인들, 자사학파에서 갈려 나온 맹자의 학파, 자궁의 학파, 자궁의 학파에서 분파된 순자의 학파가 크게 융성하였다. 이후 유학의 사상은 인간의 본성은 선하므로 교육을 통해 선한 본성을 보존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맹자의 성선설과, 인간의 본성은 악하므로 예로써 악한 본성을 억제하여야 한다는 순자의 성악설로 나뉘어 발전하게 된다.
738년 당나라 현종은 공자를 왕으로 추봉하여 '문선왕'(文宣王)의 시호를 내렸다. 1008년 송나라 진종은 시호 지성(至聖)을 추시하여 '지성문선왕'(至聖文宣王)이 되었다. 원나라에와서는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 되었다. 명나라 건국 이후에는 '지성선사'(至聖先師)라는 다른 별칭도 수여되었다. 1645년 '대성지성문선선사'(大成至聖文宣先師)의 칭호가 수여되었다.
한편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후 중화인민공화국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면서 공자와 그의 사상은 중국 공산당에 의해 '악의 표상'으로 규정되었고, 이에 따라 공자묘와 비석 등이 파괴되었다. 유학서 및 다량의 공자 관련 유물 등도 무더기로 불에 타 사라지는 참화를 겪었다.
[사상]
공자의 중심 사상은 그가 제자들과 나눈 문답 형식의 언행집인 '논어(論語)'에 들어 있다. 이를 요약하면 인간이 취하여야 할 모든 행동의 궁극적 지향점은 인(仁)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대체로는 지덕(至德), 지선(至善)의 뜻을 지니고 있는 인도주의(人道主義)로서, 정치적으로는 명분을 바르게 하고(必也正名乎),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君君臣臣), 부모는 부모답게, 자식은 자식답게(父父子子) 각자가 본분을 지킴으로써 국가와 가정의 질서를 유지시키며, 사회적으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盡己), 남을 부축하며(推己), 자기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악(强惡)하지 않는 것(己所不欲勿施於人)을 비롯한 제덕(諸德)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그는 자신이 하기 싫은 것,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을 강악(强惡)이라 하여 악으로 간주했다.
인(仁)을 지향하고 예(禮)에 정진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소인이자 악인으로서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악인은 타인에게 해를 끼쳐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행한다. 또한 그는 군자가 보편적이고 비상대적인데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고 비보편적이다(君子周而不比 小人比而不周)라 설파하였다.
인간은 성인과 군자 외에도 인간적으로 범인과 소인, 악인으로 구분하여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仁)은 성인만이 능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자신도 외경(畏敬)할 만큼 이루기 어렵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자신은 예(禮)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으며, 성품은 엄숙·온화·원만하였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현세적이었으며, 실용적, 합리적, 상식적이었다. 제자를 교육함에 있어서는 각인(各人)의 능력과 이해 정도에 따라 가장 적합한 방법으로 성품을 계발하도록 유도하였다.
[정치관]
공자가 교육에 있어 목표로 삼은 것은 국가와 사회를 이끌어 갈 지도층 인사로서 인격의 완성체인 이른바 군자(君子)의 양성이었다. 군자란 원래는 한 나라의 정치에 참여하는 능력과 자격을 겸비한 귀족 계층의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었으나, 공자는 그러한 지위에 어울리는 도덕적 인격 · 정치적 능력 ·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람으로 뜻을 확대하여 이러한 인재의 육성을 교육의 목표로 삼았다.
공자는 군자의 양성이라는 교육 목표를 위한 경전으로 춘추시대 이전의 여러 나라의 민요나 주나라의 조정에서 의식이나 제사를 지낼 때 부르던 가요 등을 편집한 《시경(詩經)》과 주나라가 천명(天命)을 받아 왕조를 창시할 시기의 왕조의 기록류를 정리한 《서경(書經)》 등 종래의 전통을 익히고 이어가는 데 마땅한 서책들을 교범으로 사용하였다.
한편 공자는 주나라의 권위가 쇠퇴하여 마침내 땅에 떨어지는 춘추시대에 속한 노나라의 연대기적 역사서인 《춘추(春秋)》를 편찬하는 동안 영고성쇠가 거듭되는 난세(亂世)를 지켜 본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다.
따라서 군자 양성을 목표로 한 공자식 교육의 내용이란 전통을 계승하는 데 적합한 교범의 숙달 및 난세로 치닫는 현실을 직시하고 통찰하는 눈이라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하였다.
[철학]
공자의 군자교육(君子敎育)에서 중심이 되는 것은 '인의예지'였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인(仁)'은 하나의 문장으로서 명백히 개념이 규정되지는 않았으나, 대체로 박애,도(道),덕,선 등의 뜻을 지니고 있는 심오한 휴머니즘으로서, 정치적으로는 이름을 바르게 하고, 이에 따라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책임과 본분을 다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사회 생활에 있어서는 자기의 도리를 다하고 남을 부축하며, 내가 싫은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가지 덕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인을 지향하고 예에 정진하는 사람이 군자요, 그렇지 못한 사람은 소인으로 규정했다. 군자가 덕을 생각할 때 소인은 이익만을 생각하며, 군자가 보편적임에 비하여 소인은 상대적이라고 역설, 인간을 인간적으로 구분하였다.
'인'은 공자가 생각하는 인간의 최고 도,덕(德)이었다. 덕이란 인간에게서 기대되는 개개인의 훌륭한 자질이라고 중국인은 생각하며, 동시에 그것은 영향력 내지는 인격력으로서 남에게 감화를 미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중국인의 정치사상에서 근간을 이루는 덕치주의(德治主義) 내지 정치에서의 도덕중심주의의 근거라고 하겠으며, 공자의 정치사상 근저에도 이 같은 기대가 있었다.
그는 당초 위정자 특히 최고 권력자인 군주에게 기대를 걸어 각국을 편력하면서 자기의 사상을 설명했다. 군주가 덕(德)으로써 백성을 다스리고 이에 따라 백성의 덕도 높아져 그 결과로서 도덕이 고루 퍼진다면 온세상이 저절로 평화로와진다는 것이 공자의 정치사상이었다. 그러나 이 사고방식은 난세(亂世) 아래의 제후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제자들에게 '인'을 터득하게 함으로써 학식과 함께 인격적인 '덕'을 겸비하는 군자가 되도록 하고, 그들을 장래 정치의 요직에 나아가게 함으로써 난세를 전쟁이 아니라 평화적 방법으로 평정하려 했던 것이다. 사상이 현실적이고 상식적인 듯하면서도 매우 심오하며, 제자들을 교육하는 데 있어서도 개인의 능력과 이해도에 따라 적합한 방법으로 유도하여 성품을 개발시켰다. 또한 그 자신은 예에 엄격하여 절도가 있었고, 엄숙, 온화, 원만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다.
백성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미적 부분을 존중하는 것은 유교가 공자 사상의 장점이다. 반면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예을 들면 유가의 삼년상이 대표적인 예이다. 공자는 부모을 사랑하는 마음을 다하기 위해 삼년상을 치르는 것이 사람의 도에 맞다고 여겼는데, 묵자의 사상을 지지하는 비판자들은 삼년상이 남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허례허식이며, 그와 같은 관념이 백성들의 이익을 저해한다고 주장하였다.
공자, 사상과 묵자 이론은 존비친소(尊卑親疎)적 규범에 관한 부분은 차이가 있으나, 본질적 이상의 차이라기 보다는 방법론적 차이이다. 공자, 묵자의 사상을 서양 철학으로 분류하면 유심론에 가깝기 때문에 공유되는 부분도 존재한다.
공자의 사상은 생시에 실현되지 못한 채 증자(曾子)·자사(子思)를 거쳐 맹자(孟子)에 이르러 활기를 띠고, 한(漢)의 무제(武帝)이후 중국의 사상계를 지배한 가장 커다란 조류를 이루었으며, 또 한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기타]
[공자의 제자]
[가계와 친족]
[관련 인물]
증자(曾子, 기원전 505년~기원전 435년)는 중국 전국 시대의 유가(儒家) 사상가이다. 이름은 삼(參), 자는 자여(子輿)이며, 증자는 존칭이다. 남무성(南武城, 지금의 산둥 성) 출신이다.
공자의 만년의 제자로서 공자보다도 46세 연하이다. 공자 사후 유가의 유력한 일파를 형성하여 공자사상의 유심주의적 측면을 발전시켰다. 그의 언행은 《논어》에 몇 조목이 보이며, 또 《대대례기》(大戴禮記)의 증자 10편 및 《효경》은 그의 저작이라고 인정된다. 그는 당시 진행 중이던 봉건제의 붕괴를 제지하기 위하여 씨족제로부터 비롯된‘효(孝)’라는 덕목을 강조하였다. 또, “하루에 세 번 내 몸을 살펴본다”라고 하여 공자 사상의 근본을 충서(忠恕)라는 말로 표현했다. 공자 사상의 계승자로서의 역할을 했으며, 후에 증자의 학통은 자사, 맹자로 이어져 유가의 도통을 전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삼성오신(三省吾身) : 날마다 살필 세 가지는 다음과 같다. 남을 위해 일을 하는 데 있어서 정성을 다 하였는가. 벗들과 함께 서로 사귀는 데에 있어 신의를 다 하였는가. 전수 받은 가르침을 반복하여서 익혔는가.
안회(顔回, 기원전 521년 ~ 기원전 491년)는 중국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으로, 공자의 제자이다. 자는 자연(子淵)이다. 자를 따서 안연이라고도 부른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나 공자의 가장 촉망받는 제자였다. 그러나,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빈곤하고 불우하였으나 개의치 않고 성내거나 잘못한 일이 없으므로, 공자 다음가는 성인으로 받들어졌다. 그래서 안자(顔子)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자사(子思, 기원전 483년?~기원전 402년?)는 노나라(魯)의 유학자이다. 공자의 손자이자 공리(孔鯉)의 외아들이다. 할아버지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제자가 되어 유교의 학맥을 이어갔다. 보통 자사와 그의 학파에서 나온 맹자의 학맥을 유학의 정통 노선으로 간주한다.
생애/공자의 손자이며 사서(四書) 중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전한다. 이름은 급(伋), 자는 자사(子思)이며 공리(孔鯉)의 아들이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 손에 양육되었으나 할아버지 공자 역시 기원전 479년에 사망하였다. 공리에게는 두 부인이 있었고, 출처한 전처 외에 후처에게서 자사를 보았으나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예기의 단궁편에 서씨(庶氏)의 어머니 라고 언급되어 서씨 집안으로 재혼하고 아버지가 다른 동생이 있었던 것 정도만이 확인된다. 장성한 뒤에는 공자의 애제자 중 생존자였던 증자의 제자가 되어 수학하고, 학맥을 계승하였다. 뒤에 그의 제자의 제자 중의 한사람에게서 나온 문하생이 맹자로, 이로부터 공자-증자-자사-맹자로 이어지는 유교의 정통 학파가 구성되었다.
사상/ 증자의 유심주의 철학(唯心主義哲學)을 이어받았고, 그것이 맹자에게 이어져서 선진 유가(先秦儒家)의 유력한 한 학파를 형성하였다. 뒤에 주자학에서 공자, 증자, 자사, 맹자의 학통을 도통으로 존숭했다. 《중용》에 의하면 그는 ‘천(天)’이라는 주대 이래의 종교적 관념을 이어 발전시켰다. 특히 ‘성(誠)’이라는 생각을 도입해 그 체계의 중심을 두고 유심주의 철학을 구성하여 유가사상의 발전에 큰 역할을 하였다.
저서/ 《중용》은 그 자신 혹은 그의 학파의 저작으로 인정된다. 그 밖에 《자사자(子思子)》 23편이 그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으나 산실(散失)되어 현재는 그것이 어떠한 책인지 분명하지 않다.
기타/ 아버지 공리의 두 부인 역시 이름과 성씨, 친정에 대한 기록이 없다. 백어의 가정생활 역시 순탄치 못하여 첫 며느리를 출처하였고, 그 뒤에 얻은 며느리에게서 손자 공급을 본다. 그러나 백어가 사망하면서 새 며느리 역시 어린 손자를 그에게 남겨두고 서씨(庶氏) 집안으로 재혼하였다. 뒤에 위나라에서 자사의 생모가 사망하여 자사에게 부고 소식을 전하자 그는 복을 입고 곡을 하였다. 이후 자사의 한 제자가 그를 찾아와 서씨의 어머니가 사망했는데, 왜 공씨가 곡을 하느냐 라고 항의하자, 그는 공식 석상에서는 곡하지 않고 별실을 만들고 곡을 하였다 한다.
자사는 역시 이혼 후 재혼하였다. 본처에게서 아들 자상(공백)을 두었다. 자상의 생모가 사망하였으나 자상은 복상하지 않았고, 이를 이상하게 본 자사의 문인들이 자사에게 물었다. "옛날에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쫒겨난 어머니의 상을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그랬지." "선생님께서 흰둥이(=자상)한테는 상을 치르지 못하게 하신 것은 어째서입니까?" 하자 자사는 "옛날에 우리 아버지께서는 도리를 잃지 않으셨네. 도가 성하면 예도 함께 흥하고 도가 더러워지면 덩달아 더러워진다. 그러니 내가 어찌 할 수 있는가? 내 부인의 자상의 어머니이지 내 부인이 아닌 여자는 자상의 어머니가 될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맹자(孟子, 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는 공자의 사상을 이어 발전시킨 유학자이다.
전국 시대 추(鄒)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가(軻)이고, 자는 자여(子輿) 또는 자거(子車)이다. 어릴 때부터 공자를 숭배하고, 공자의 사상을 발전시켜 유교를 후세에 전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생애/
생몰 연대는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공자가 죽은 지 100년쯤 뒤에 산둥 성 쩌우청 시에서 태어났다. 그가 활약한 시기는 대체로 기원전 4세기 전반기이다.
가계 역시 확실하지는 않지만, 춘추 시대 노환공의 후예가 나뉜 삼환(맹손씨, 숙손씨, 계손씨) 가운데 맹손씨의 후대이었으나, 맹자의 가문이 추나라로 이주했을 무렵에는 삼환은 이미 몰락했다. 어머니 장(仉)씨는 맹자를 훌륭하게 키우기 위해 세 번 이사를 했다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로 유명한 현모로서, 어머니에게도 큰 감화를 받으며 학교의 수업을 마친 뒤, 공자의 고향인 노나라로 가서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의 문인에게서 공자가 편찬한 육경을 배웠다. 자사의 계통은 공자의 경우에는 별로 드러나지 않았던 '천(天)'의 신앙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제자백가 시대에 돌입한 당대에 묵적과 양주의 사상과 경쟁하며 유가 사상을 확립했다. 40세 이후에 인정(仁政)과 왕도정치를 주창하며 천하를 유력했다. 법가나 종횡가가 득세하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았으며 은퇴했다. 60세 이후의 삶은 알려진 바가 없다.
맹자의 사상/
저서로 맹자가 있다. <맹자> 7편은 만년의 저술이라고 하나 의문이며 실제로는 그의 제자들이 편찬한 것으로 봄이 옳을 것이다. 맹자의 사상은 하늘에 대한 숭경의 정념이라고 하겠다. 맹자는, 하늘은 인간을 포함한 만물을 낳고 그 피조물(被造物)을 지배하는 영원불변의 법칙을 정해 이를 만물창조의 목적으로 삼았다고 파악했다. 그리고 이 하늘과의 관련으로 인간 본연의 모습을 고찰하고 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는 하늘의 법칙성이 내재하고 있으며 하늘이 정한 법칙의 달성이 피조물인 인간의 목적이라는 것이 맹자의 기본적 인간관인 것이다.
공자가 인(仁)이라 부르고 '예(禮)'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에서 발견한 인간의 덕성(德性)을, 맹자는 인간이 갖추고 있는 하늘의 목적을 지닌 법칙성으로 생각하고 이를 인간의 본성이라 하여 인간의 성(性)은 선(善)이라고 하는 성선설(性善說)을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맹자는 은·주 이후의 전통적인 유산인 인간의 지각을 초월한 우주의 참된 실재자에 대한 숭경의 정조(情操)로 공자가 발견했던 인간의 실천적 계기를 종교적으로 기초를 닦았던 것이다.
맹자는 인간의 성은 선이라고 하는 주장을 증명하기 위해 인간의 마음에는 인(仁)·의(義)·예(禮)·지(智) 등 4덕(四德)의 4단(四端:싹)이 구비되어 있다고 했다. 여기서 말하는 인(仁)은 '측은(惻隱)의 마음' 혹은 '남의 어려운 처지를 그냥 보아넘길 수 없는 마음'이며, 의(義)는 불의불선(不義不善)을 부끄럽게 알고 증오하는 '수오(羞惡)의 마음', 예(禮)는 사람에게 양보하는 '사양의 마음', 그리고 지(智)는 선악시비를 판단하는 '시비(是非)의 마음'으로 설명되고 있다.
공자는 예를 실천하는 인간의 주체성을 '인'이라고 했으나 4단(四端)은 공자가 말하는 '인'의 세분화(細分化)라고 하겠다. 한편, 맹자는 '인(仁)이란 사람으로서의 덕'이라 하고 특히 그것이 위정자에 의해서 실현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즉 공자의 사고방식을 계승하는 면도 있다. 또한 맹자가 말하는 의에는 수오(羞惡)의 마음이라는 의미 이외에, 개개의 예가 적절타당하기 위해서의 원리라는 뜻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바로 그가 '예의'라고 병칭(竝稱)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 맹자는 공자의 '인'을 다시 한번 깊이 고찰했다고 하겠다. 이상과 같이 공자와 맹자로는 용어법에도 차이가 있고 또한 맹자 자신의 용어법에도 일관성이 결여되는 경우가 있으나 개괄적으로 말한다면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나름대로 발전시켰다고 말할 수 있겠다.
덕목(德目)의 정리라는 점에서는 '4단'설 외에 '오륜(五倫)'설이 유명하다. 이것은 인간관계를 다섯으로 정리한 것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군신유의(君臣有義)·부부유별(夫婦有別)·장유유서(長幼有序)·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고 한다. 맹자는 공자의 덕치주의 사상을 하늘이 만민을 낳고 그 통치자로서 유덕자(有德者)를 천자(天子)로 명한다는 <서경(書經)> 이후의 천명관(天命觀)으로 뒷받침했다. 하늘의 신앙에 의해 정치권력의 정통성에 기초를 주는 사상이다. 그리고 하늘의 의지는 민(民)의 소리와 천지의 제신(諸神)의 승인으로 알 수 있다 하여 민본주의(民本主義)의 요소가 부가되었다.
맹자는 농사의 방해가 되는 노역이나 전쟁을 하지 않고 우선 민생(民生)의 안정을 꾀하며 이어 도덕교육을 행하여 인륜(人倫)의 길을 가르치면 천하의 사람들은 기뻐하여 심복하고 귀일한다는 것으로 이것이 옛날 성왕(聖王)들의 정치, 즉 '인정(仁政)'이며 '왕도(王道)'라고 했다. 이 주장이 맹자의 '왕도론'이며 그는 또한 <서경>에 강조되고 있는 은·주 교체기(交替期)의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을 확인하고 있다. 그의 논법은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난 은나라 왕 주(紂)는 이미 군주가 아니라 한 평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은나라 신하였던 주의 무왕은 필부(匹夫)인 주를 토벌한 것이지 군(君)을 시역(弑逆)한 것은 아니라는 격렬한 것이었다. 이 점에 바로 군신의 의 이상의 것으로서 천명(天命)이 설정되어 있다. 맹자는 정치적 원리로서의 하늘을 설명하지 않았던 공자보다 여기서는 앞서고 있다.[1]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하고 공자가 수립한 인간의 실천적 주체성이나 덕에 의한 정치라는 사고방식을 전통적인 하늘의 신앙과 결부시킴으로써 이를 발전시켰다. 성선설이나 왕도론(王道論)에서 그 경위를 볼 수 있다. 그러나 맹자는 또한 5백년마다 성인이 출현한다고 하는 일종의 순환론적 역사관에 의거하여 공자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한다. 성인의 전형이라는 전설상의 제왕(帝王)인 요·순(堯·舜)부터 5백년쯤 지나 은의 탕왕(湯王)이 나오고, 탕왕에서 5백년쯤 지나 주나라의 문왕(文王), 문왕에서 5백년쯤 지나 공자가 나와서 선왕(先王)의 도(道)를 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맹자 자신은 공자부터 당시까지 1백년쯤,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아직 얼마 되지 않아서 자기는 공자의 길을 유지 확보하는 자로 위치가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주석/ 1.맹자는 주나라 제후국 노나라 출신으로 은·주 교체기(交替期)에 대한 그의 관점은 주나라 건국의 당위성을 강조하기 위한 부분이다. 민의(民意)를 배반하고 인의(仁義)에 어긋났다는 것은 주관적인 해석으로, 왕이 부도덕하다고 게으르다고 생각하는 모든 신하들에게 쿠테타에 명분이 되는 논리로서, 맹자 스스로가 주장한 군신유의(君臣有義)에 위배된다. 맹자는 논리라면 주공단이 명분없이 섭정 할 때 은나라 후예 무경에게 주나라가 망했어야 정의로운 것이며,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실현이다. 역성혁명(易姓革命) 사상은 쿠테타 세력에게 자기 합리화의 길을 열어 주었다.
주돈이(周敦頤: 1017년 ~ 1073년) 또는 주염계(周濂溪)는 중국 북송(960-1127)의 유교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존칭하여 주자(周子)라고도 한다. 송나라 시대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자는 무숙(茂叔), 호는 염계(濂溪), 시(諡)는 원공(元公)이다. 도주 영도(道州 營道: 현재의 허난 성 다오 현) 출신이다.
생애/
본명은 돈실(敦實)이라고 하였으나 그 때의 황제 북송 영종과 동명이었으므로 고쳐서 돈이(敦頤)라고 하였다. 부친인 보성(輔成)은 하주(賀州) 계령현(桂嶺縣)(현재의 黃西省에 속함)의 지사(知事)를 하고 있었다. 모친은 정씨(鄭氏)이다. 주돈이는 소년 시절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모친의 일가인 용도각(龍圖閣) 대학사(大學士) 정향(鄭向)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북송 인종(재위 1022-1063) 경우(景祐) 3년(1036년)에 그는 젊은 나이(20세)로 홍주(洪州) 분녕현(分寧縣)의 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이어서 남안(南安)에 사법관(司法官)으로 부임하였다. 그 후 주로 각 현(顯)의 지사를 역임하여 지남강군(知南康軍)을 최후로 57세에 타계했다.
그가 남안(南安)에 있을 때에 정향(程珦)이라는 사람이 같은 관리로서 부임했다. 정향은 주돈이의 인품과 학문에 경의를 품고 친하게 교제함과 동시에 자기의 두 아들을 주돈이에게 나아가 배우게 하였다. 이들이 정호(程顥: 1032-1085) · 정이(程頤: 1033-1107) 두 형제였다.
영향/
송나라 유학의 형이상학적 사유는 주돈이에 의하여 시작되었다고 말해지곤 한다. 비록 주돈이 이전에도 이러한 형이상적 사유의 싹이 보인다는 주장이 있지만, 동시대의 유학자 장재(張載: 1020-1077)의 사상과 더불어 주돈이의 저술인 《태극도설》(太極圖說)이나 《통서》(通書)에 보이는 깊은 사색은 주돈이의 제자인 정호(程顥: 1032-1085) · 정이(程頤: 1033-1107)의 2정자(二程子)를 통해 계속 이어져 나간 송나라 시대 도학(道學)의 방향을 설정하는 단초가 되었다.《주자전서》(周子全書) 7권은 모두 주돈이의 저술을 모은 것이다.(《주자전서》(朱子全書) 27권과 혼동하지 않아야 한다.)
저서/
주돈이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태극도설》과 《통서》가 있다.
주자의 설에 의하면 《통서》는 본래 《역통》(易通)이라고 호칭되어 《태극도설》과 병행하여 쓰여졌다고 한다. 주돈이는 《태극도설》에서 우주론을 논술하고 있으며 《통서》에서는 도덕론을 설명하고 있다.
《태극도설》은 태극도와 도면의 설명으로 되어 있다. 《태극도설》은 송대의 도학에 있어서 형이상학적 사유와 도덕론의 기본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그 후의 학자는 거의 이 책을 읽고 여러 가지의 해석이나 사색을 하고 있다. 주자와 육상산(陸象山)의 논쟁도 《태극도설》의 맨 처음에 나오는 문장인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 무극이면서 태극)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에 기반하여 자신들의 사상을 집약하여 이루어졌다.
도덕론으로서의 《통서》 전체를 일관하고 있는 것은 성(誠)이다. 주돈이는 성을 현상(現象) 세계의 모든 변화 교체에 잠재하는 참된 기능이라고 하는 동시에 그것을 인간에 있어서의 도덕의 근본 규범으로 간주하였다. 《통서》는 주자에 의해 주해되면서 송대 성리학의 준거해야 할 고전이 되었다.
장재(張載: 1020~1077)는 중국 송나라 시대의 사상가이다. 성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자는 자후(子厚)이다. 봉상미현의 횡거진(橫渠鎭) 출신이었기 때문에 횡거 선생(橫渠先生)이라고 호칭된다. 존칭하여 장자(張子)라고 불린다.
생애/
어렸을 때에 현의 지사직(知事職)으로 있던 부친을 잃었다.[1] 젊었을 때 범중엄을 회견하고 병사(兵事)에 대해 말하였다.그때 범중엄은 "유자(儒者)에게는 자연히 명교(名敎: 인륜의 명분에 대한 가르침)를 즐길 만한 것이 있다. 어찌하여 병담(兵談) 같은 것을 좋아하는가"라고 하면서 《중용(中庸)》을 그에게 주었다. 횡거는 거기서 비로소 도(道)를 구할 것을 결심하고 한때 불교 · 노장사상에 들어갔으나 오래지 않아 6경(六經)의 학문으로 돌아왔다. 진사시험에 합격한 후에 지방관으로서 여러 가지 공적을 쌓았다. 그때의 황제인 북송의 신종은 그를 크게 등용하려고 하였으나 당시의 집정(執政: 내각의 최고 책임자)이었던 왕안석과 의견이 맞지 않아서 신병을 이유로 향리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을 다하였다.
사상/
장재에 의하여 세워진 기(氣)의 우주론(宇宙論) 또는 기의 철학은 당시의 제가들의 사상과 비교하여 매우 특색있는 것이었다. 장재의 철저한 "유(有)의 이론"은 언뜻 보기에는 주돈이 · 소옹 · 2정자(二程子)의 사상이 《역(易)》의 정신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으며, 장재의 "유의 이론"의 근저에는 《역(易)》의 "1음(一陰) 1양(一陽),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를 중심으로 하는 《역(易)》의 사고방식이 있다.
장재는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실제로는 기 뿐이며 현상의 개체는 기가 응취한 객감(客感) 또는 객형(客形)이라고 주장하였다.또한 기의 본래의 모양, 즉 자(姿: 아직 개체를 형성하지 않은 상태의 기)는 태화(太和) 또는 태허(太虛)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 태화(太和) 또는 태허(太虛)는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는 것, 즉 유(幽)로, 기의 지정한(至靜: 지극히 고요한) 상태라고 하였다.
장재의 저술은 《장자전서(張子全書)》에 수록되어 있는데, 《동명(東銘)》·《서명(西銘)》 · 《정몽(正蒙)》 · 《경학이굴(經學理窟)》 · 《역설(易說)》 · 문집 · 어록 등이 이 속에 들어 있다.
저서/
《정몽(正蒙)》은 장재가 향리로 내려간 후의 저작으로, 그의 만년인 50세 이후의 것으로 추정된다.[2] 《장자전서(張子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전 9권이며 각권은 2편으로 되어 있다.[2] 전체를 통하여 가장 중요한 편은 1권에서 4권 정도까지인데, 그 중에서도 〈태화편(太和篇)〉·〈성명편(誠明篇)〉은 그의 사상의 핵심이다.
일반적으로 장재의 우주론(宇宙論, 형이상학적 사유)이 기일원론(氣一元論)이라고 명명되고 있는 것은 노자의 "유(有)는 무(無)에서 생(生)한다"라고 하는 말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有)가 무(無)에서 생(生)하지 않는다고 하면 유(有)는 유(有)에서 생(生)하는 것인데, 장재는 이와 같은 생각으로 철저한 유(有)의 우주론을 전개하였다. 그에 의하면 현상 세계의 모든 개체는, 사람까지도 음양 2기(陰陽二氣)의 동정(動靜) · 승강(昇降) · 부침(浮沈) 등에 의한 운동의 결과로 해서 생성된 것이다. 그 음양 2기도 실제는 기(氣), 즉 1기(一氣)이므로 이 기가 객감(客感) · 객형(客形)을 취한다고 하는 것이 현상의 성립이며, 이 세계의 만변만화가 생하는 까닭이라고 장재는 보았다. 이와는 반대로, 기(氣)가 흩어지면 무형무감이어서 사람에게 감각되지 않게 된다고 하였다.
이런 기(氣)의 무형무감의 상태가 기의 신이요, 또 그것을 태허(太虛) 또는 태화(太和)라고 하였다.따라서 태허 · 태화는, 기가 현상으로서의 객감 · 객형을 취하면서 변화하기 이전 근본의 온전한 정(靜)의 상태이므로 이 세계의 모든 것의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문제, 즉 도덕론에 전화되면 "허(虛)와 기(氣)가 합하여 성(性) 명(名)이 있다"고 한 것같이 태허 · 태화는 또 사람 본래의 자태의 성(性)이 된다. 성은 사람에게 일반적인 것이요, 구체적으로는 지성(至誠)이다. 그래서 성(誠)을 얻는다는 것, 즉 지성(至誠)에 이른다는 것이 성(性)을 얻는 것이며 성(性)을 다하는 것이 된다고 하였다.
《정몽》은 주자가 중요시한 문헌이었으며,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왕선산(王船山)이 《장자정몽주(張子正蒙註)》을 지었다. 《정몽》은 이러한 이력이 있는 저서로, 중국의 사상사에서 있어서 이색적인 저서들 중 하나이다.
《서명(西銘)》은 《정몽》과 같이 장재의 만년의 저작일 것으로 여겨진다. 《서명》은 《동명(東銘)》과 함께 대단히 짧은 문장이지만, 《서명》에 담긴 사상적 내용은 심오하여 2정자(二程子)는 《서명》을 매우 칭송하였다.
《서명》의 글 전체는 겨우 253자(한편 《동명(東銘)》은 112자 이다)에 지나지 않지만 담겨진 주제는 요컨대 "천지만물"과 "나"라는 존재와의 일체에서 얻어지는 "인(仁)"이다. 《서명》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
건(乾)은 나의 부(父)이며 곤(坤)은 나의 모(母)이다. 나는 천지(天地)의 자(子)로서 천지(天地)의 중간에 만물과 함께 있다.그런 까닭으로 나의 체(體)는 단지 나의 형체(形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람 · 산천 · 초목 · 금수 · 곤충에 이르기까지 무릇 천지의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전부 나의 체이다.나의 성(性)도 또한 만물의 성이다. 천지는 나와 그리고 만물도 생성하기 때문에 나와 마찬가지로 천지 사이에 있는 것은 모두 나의 동포다.천지가 만물을 양육하는 것은 천지의 인덕(人德)이요, 천지의 이 운행을 본받고 천지의 존재형식에 복종하면 천지의 인덕을 나의 마음의 덕으로 삼을 수가 있다.천지의 작용은 "화(化)한다"고 하는 것이며, 천지 운행의 뜻(志)은 헤아려 알 수가 없다. 그런 까닭으로 "화(化)"를 알고 신(神)을 궁통(窮通)하면 천지의 운용과 그 향하는 바 뜻을 밝혀 이것을 계승할 수가 있다. 이렇게 해야 비로소 천지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고 천지의 성을 나의 성으로 삼을 수가 있어 천지의 인덕과 나의 인덕이 하나가 된다.
주자의 《서명해(西銘解)》가 있다. 주자에 의하면 "정자(程子) 학파는 대체로 《서명(西銘)》으로 학자에게 개시(開示)하였다"고 했는데, 그만큼 《서명(西銘)》에 담긴 사상은 2정자(二程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정호(程顥, 1032년~1085년)는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자는 백순(伯淳), 시호(諡號)는 순공(純公). 명도 선생(明道先生)으로 호칭되었다. 대대로 중산(中山)에 거주하였으나 후에 하남(河南)에 이주하였다. 정이가 그의 동생이다.
부친 향(珦)은 지방관이었을 당시 주돈이를 알아 명도, 이천 형제를 그에게 배우게 하였다고 한다. 진사에 급제한 후 지방관으로 활약하였다. 1070년경에 여공저(呂公著)의 추천으로 중앙정부에 들어 갔다. 왕안석의 신법(新法)이 거론되자 의견을 달리하여 직을 떠나 지방관으로 지냈다. 그 성격은 온후관대하여 동생 이천이 이론적이며 준엄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명도 사상(明道思想)의 특색은 인설(仁說)·성론(性論)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역적 논리(易的論理)의 전개로서의 형이상적 사유이다. 그에 의하며 현상의 세계는 결국 음양 2기(陰陽二氣)의 대대(對待)에 의해 생성소멸하는 것으로 그것은 ‘자연적으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바로 역(易)에 “1음 1양(一陰一陽), 이를 도(道)라고 한다”고 하는 도(道)이며, 천지만물의 이(理)나 도(道)는 사람에 있어 묵식심통(默識心通-사람의 마음에 개우쳐지는 것)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인설(仁說)은 이 논리를 기저로 하여 천지자연의 이(理)와 사람의 이(理-일반적인 性)와의 일체관에서 논술된다. 〈식인편(識仁篇)〉에서 “인(仁)은 혼연히 물(物)과 동체요 의례지신(義禮智信) 모두 인(仁)이다. 이 이(理)를 알아서 성경(誠敬)으로써 이것을 보존(存)할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인(仁)은 ‘저절로 그러한’ 천지만물의 이(理)·도(道)인 동시에 사람의 마음의 이(理)라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인(仁)을 체득하면 이미 나는 천지만물과 일체요 일신인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이 발전하여 성(性)은 곧 기(氣)요, 기(氣)는 곧 성(性)으로서 생겨나면서 지닌 그대로 성(性)이라고 하는 논리가 전개된다. 그의 〈진치법 10사(陳治法 十事)〉는 반신법당(反新法黨)의 처지에서 당시의 정치사회 상태를 잘 통찰하여 그 폐단을 찌른 예리한 정치 논문이다. 정호의 사상은 남송의 육상산을 거쳐서 명의 왕양명의 사상으로 계승·전개된다. 어록·저술은 《2정전서(二程全書)》에 수록되어 있다.
정이(程頤, 1033년~1107년)는 중국 송나라 도학의 대표적인 학자의 한 사람이다. 형 명도(明道) 정호와 더불어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의 한 사람이다.
자는 정숙(正叔). 형인 명도보다 1년 늦게 하남(河南, 현재의 허난 성에 속함)에서 출생하여 이천선생(伊川先生)으로 호칭되었다.
생애/
송학(宋學)의 선구자 호안정(胡安定)을 통하여 대학(大學)에서 배우고, 서경국자감(西京國子監)의 교수에 서임되었으나 사퇴하였고, 후에 숭전전설서(崇政殿說書)에 발탁되었다. 이때 많은 문사들은 정부부내에 있는 소동파를 따르면서 이천의 학문은 우원(迂遠)하다 하여 배제했다. 여기에서 소위 낙촉(洛蜀)의 당쟁이 생겨 이천은 축출되었다. 휘종 황제 때가 되어서야 겨우 복관(復官)되어 경사(京師)에 돌아왔다. 이천의 학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적 논리(易的論理)의 전개로서의 형이상적인 사유이다. 즉 이천은 《역(易)》의 “1음(一陰) 1양(一陽), 이것을 도(道)라고 한다”에 도(道)라는 것은 ‘음양(陰陽)으로 되는 소이인 것’ 즉 음양(陰陽)이 개합(開合)하는 소이라고 한다. ‘소이(所以)’라고 하는 것은 ‘까닭’이며 ‘이유’이며 ‘원인’이다. 따라서 1음(一陰) 1양(一陽)과 도(道)는 이론적으로 상이한 것이다. 현상이 1음(一陰)하고 1양(一陽)하여 생성·변화·소멸(生成變化消滅)하는 그 원인·이유가 도(道)이다. 더욱이 음양과 도는 어제 음양이 있고 오늘 도가 있다고 하는 논리가 아니고, 도는 음양에 즉(卽)하고 음양은 도에 처하여 있다고 하는 형이상하(形而上下)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 사고방식은 1신(一身)의 마음(心)은 곧 천지(天地)의 마음(心)이고, 1물(一物)의 이(理)가 곧 만물(萬物)의 이(理)라고 하는 얼핏 보면 명도(明道)의 논리와 같은 형(型)으로 전개되는 것 같다. 그러나 명도가 ‘성즉기(性卽氣), 기즉성(氣卽性)’이라 한 데 반하여 그는 성즉리(性卽理)라고 하면서 성즉기(性卽氣)의 설은 취하지 않았다. 또 이천은 실천을 중시하면서 거경궁리(居敬窮理:마음을 純一하게 하여 오로지 자기의 본래 성에 순응하는 것에서 사물의 이치를 궁구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사사물물에 즉하여 그 이를 궁구하여 지(知)를 명확히 한다)를 설파하였다. 이천의 사상은 남송의 주자에게 받아들여져서 전개되었다.
저서/《이천역전(伊川易傳)》
서문에 원부(元符) 2년 정월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1099년에 완성된 것이라고 짐작된다. 그러나 제자인 양구산(楊龜山, 1053∼1135)에 의하면, 이것은 미완성인 채로 문인에게 보인 것이며 얼마 후 산일된 것을 구산이 수집하여 교합하였다고 한다. 이 저서는 역(易)의 상경·하경·단전(彖傳)·상전(象傳) 및 문언편(文言篇)을 해석하였을 뿐이며, 계사(繫辭)·설괘(說卦)·잡괘(雜卦)의 제전(諸傳)에는 주(註)가 없다. 이렇게 된 것은 왕필의 역주(易註)를 모방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양구산의 말과 같이 미완성 작품이라는 것이 타당하다고 《4고전서 총목체요(四庫全書總目提要)》(《사고전서》의 내용 해설서)는 기술하고 있다. 어떻든 왕필의 역주를 채용한 이천이 역(易)을 논리적으로 해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역의 도리는 지극히 미묘하고 역이 나타내는 상(象)도 지극히 분명하나, 체용(體用)은 일원(一源)하며 현미(顯微)는 무간(無間)한 것이라 한다. 체용일원(體用一源), 현미무간(顯微無間)이라는 것은 무릇 존재하는 것(現象·易象)과 그것의 존재의 방식(道·易理)과는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물건이 있으면 거기에 물건의 이치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양자가 상즉(相卽)하여 있음을 보이는 의미깊은 말이다. 주자의 《역본의(易本義)》가 그 자신이 말한 바와 같이 매우 불만족했던 것에 비해서 《이천역전》은 주(註)가 결여된 부분도 있으나 송대(宋代) 역학의 정통을 확보하고 있다.
주희(朱熹, 1130년 ~ 1200년)는 중국 남송의 유학자로, 주자(朱子)라는 존칭으로도 불린다. 자(字)는 원회(元晦), 중회(仲晦)이다. 호(号)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노인(雲谷老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등 여러가지가 있다. 중국 복건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으며 19세에 진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지내면서 맹자, 공자 등의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주돈이, 정호, 정이등의 유학 사상을 이어받았다. 그는 유학을 집대성하였으며 오경의 진의를 밝히고 주자학을 창시하여 완성시켰다.
주희는 주렴계, 정주로 대표되는 이전 송학의 흐름을 이어받아 이를 집대성하고 종래 유교가 불,도에 비해 사상적인 약점이었던 이론적 결여를 보완하는 우주론적, 인간론적 형이상학을 수립하게 된다. 이로써 한당의 훈고학적인 한계에서 벗어나 윤리학으로서의 본래성을 되찾는 한편 그것을 우주론적인 체계 속에 자리잡게 하고자 했다.
이후 주자의 철학은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를 지배하는 주도 이념으로 자리잡는다. 사후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다시 휘국공(徽國公)에 추봉되었다. 주돈이의 학통을 계승한 연평(延平) 이동(李侗)의 문인이다.
생애
중국 송나라(宋)의 휘주(徽州)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성격이 총혜근엄(聰慧謹嚴)하고 말수가 적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주돈이와 정호 등의 학통을 이은 연평(延平) 이동(李侗)을 찾아가 사사(師事)하였으며 명도(明道) 이천(伊川)을 사숙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이후 고대 경전을 탐독하고 풀이, 주해를 편집하고 공자, 맹자 등의 사상을 풀이하였는데 이것이 하나의 학문이 되어 성리학으로 발전하였다. 그 뒤 과거 시험에 등제하여 관직에 나갔으며, 관직에 나가서는 황제에게 요순(堯舜)의 덕치(德治)를 설명하며 봉사(封事)와 상서(上書)로 누천만언(屢千萬言)을 개진하였으나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하고 관료들의 미움을 받아 만년에는 모함을 당하고 기인으로 몰리는 등 많은 고생을 겪었다.
그의 학문을 주자학(朱子學)이라 하는데 고대 경전의 주해 외에 유교의 주류인 이기심성(理氣心性), 거경궁리(居敬窮理)의 학설을 제창하여 그 성리학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저서로는 주역본의계몽(周易本義啓蒙)·시집전(詩集傳)·대학중용장구혹문(大學中庸章句或問)·논어맹자집주(論語孟子集註)가 있고, 소편(所編)에는 논맹집의(論孟集義)·중용집략(中庸集略)·효경간오(孝經刊誤)·소학서(小學書)·통감강목(通鑑綱目)·근사록(近思錄)·주자집(朱子集) 등을 남겼다. 1200년에 졸하니 사망당시 향년 70세였다. 송 영종(寧宗) 때 문공(文公)의 시호가 내려지고, 하고 후에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하고 휘국공(徽國公)에 추봉되었다.
[사상]
이기이원론과 태극도설/
우주만물을 형이상학적인 이(理)와 형이하학적인 기(氣)로서 구성되어있다고 보고, 인간의 본성은 선한 이가 발하여 나타나는 것이나 불순한 기로 인하여 악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이와 기로 이뤄진 우주와 만물이 생성되고 움직이는 운동법칙, 원리로서 태극을 제시한다.
이상의 개념들을 통해 주자는 주렴계(周濂溪)의 태극도설(太極圖說), 정이(程頤)의 성즉리,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주자는 동시에 젊은 시절 탐독했던 불교와 도교의 사상에서 받았던 영향에서 착안하여 유학의 사상적 이학적 내용을 풍성하게 하는 것에 기여했다.
저서/
《주자문집》
주자문집(朱子文集)은 주희(朱憙)가 쓴 문장(文章)을 집록(集錄)한 100권의 서(書)이다. 여기에 수록된 주자의 글은 실로 다종다양하다. 특히 그의 상주문(上奏文) · 사면문(辭免文) · 기(記) · 공이(公移) 등등은 주자의 구체적인 정치활동이나 정치사상을 아는 데 지극히 중요한 자료이다. 또 서간문(書簡文) · 잡저(雜著) · 기(記) 등은 주자의 학문사상을 아는 데 있어 《어류(語類)》와 함께 필독해야 할 부분이다. 기타 이 문집(文集) 100권은 별집(別集) · 속집(續集)을 합하여 주자의 사상이나 역사적 성격을 전체적으로 규정하는 점에서 필요 불가결한 자료이나, 종래 주자를 논하는 사람 가운데서 문집을 자세히 읽은 사람은 거의 없다. 주자 연구에 있어서 새로운 설이나 해석을 제공할 수 있는 자료적 보고(寶庫)라 해도 무방하다.
《사서집주》
오경(五經) 뿐만 아니라 사서(四書)를 존중하고 유학의 핵심 경전으로 삼고자 했다. 이에 사서집주(四書集注)를 저술하였고 이후에 유교의 기본 경전으로서 귄위를 부여받게 된다.
[출처] 요순에서 주자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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