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7월 1일 병인 1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충청도 홍산의 서인 이몽학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키다
충청도 홍산(鴻山)의 서인(庶人)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모아 난을 일으켰다.
몽학은 종성(宗姓)의 서족으로서, 호서(湖西)에서 종군할 적에 조련 장관(操練將官)이 되어 홍산 무량사(無量寺)에 우거하면서 선봉장 한현(韓絢) 등과 친교를 맺었다. 몽학은 어리석고 아무 재능이 없었으나 한현은 교활하고 일에 밝았다.
당시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을 가지고 군사를 배치하고 기량을 훈련시켰는데 한현은 권인룡(權仁龍)·김시약(金時約) 등과 함께 모두 서인으로 응모하여 함께 선봉장이라 호칭하면서 어사 이시발(李時發)에 소속되어 호서의 군사조련을 관할하였는데 민심은 탄식과 원망으로 차 있었고 크고 작은 고을에 모두 방비가 없음을 보고 이 틈을 타서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다. 이때 현이 마침 부친상을 당하여 홍주(洪州)에 있다가 우선 몽학을 시켜 거사하도록 하고 자신은 내포(內浦)에서 서로 호응하기로 약속을 정하였다.
몽학은 무량사의 굴속으로 잠입하여 중들과 더불어 기치(旗幟)와 기장(器杖)을 만들었다. 호서의 풍속에 흔히 늘 동갑회(同甲會)를 만들었는데, 이에 그 패거리를 시켜 계(契)를 만든다고 선전하고 동네 어귀 들판으로 모이게 했다. 【갑회(甲會)란 노소 귀천을 막론하고 동갑마다 깃발을 세우고 그 갑년을 써 놓으면 무리들은 각자 그 동갑을 찾아 모여 들어 술을 마시며 즐기는 것이다.】
몽학은 절에서 출병(出兵)하여 마을 안으로 들어왔다. 깃발을 세우고 걸상에 앉아 각(角)을 불고 북을 치면서 큰소리로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동갑 모임 중에서 공모한 장정이 먼저 나와 칼을 뽑아 들고 무리를 데리고 달려나갔다. 몽학은 그들에게 속임수로 꾀기를 ‘이번에 일으킨 의거는 백성을 편안히 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일이다. 거역하는 자는 죽음을 당할 것이고 순종하는 자는 상을 받으리라.’고 하니 모두들 좋다고 떠들면서 그를 따랐으며, 사람마다 스스로 고관대작이 될 것으로 여기고 성불(聖佛)이 세상에 나왔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승려와 속인을 장군으로 나누어 배치하고 문관과 무관 등의 청현직으로 가칭하니 사족 자제와 무뢰배들이 많이 그들에게 붙었다.
그날 밤에 홍산현(鴻山縣)을 습격하여 현감 윤영현(尹英賢)을 사로잡고 【영현은 무자년에 생원시에 장원하여 왕자 사부(王子師傅)가 되어 광해군(光海君)이 그에게 배웠으며 그 뒤에 지금의 관직으로 전직되었다.】 또 임천 군수(林川郡守) 박진국(朴振國)을 【문과 출신이다.】 사로잡았다. 다 항복하여 몽학에게 붙으니 상빈(上賓)으로 대우했다.
잇따라 청양(靑陽)·정산(定山) 등 6개 고을을 함락시켰다. 수령들은 모두 먼저 도망치고 아전과 백성들은 적들의 호령에 따랐고 술과 음식을 차려서 맞이하였으며 군사를 뽑아 그들에게 가세하였다. 이에 소문만 듣고도 호미를 던지고 그들에게 투항하는 자가 줄을 이어 군사가 수만 명에 달하자 소문을 퍼뜨리기를 ‘충용장(忠勇將) 김덕령(金德齡)과 의병장 곽재우(郭再祐)·홍계남(洪季男) 등이 모두 군대를 연합하여 도우며, 병조 판서 이덕형(李德馨)이 내응한다.’ 하니, 중외(中外)가 놀라 민심이 술렁거렸다.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7월 1일 병인 2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이몽학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적의 무리는 해산되다
이몽학은 그 부하에게 살해당하고 적의 무리는 해산되었다.
처음에 몽학은 곧장 서울로 향한다고 말했다. 나중에 무리들이 질서를 잃게 되자 몽학은 그들을 통솔할 능력이 없어서 홍주(洪州)로 한현(韓絢)을 찾아가려고 했으나 한현이 이미 면천 군수(沔川郡守) 이원(李瑗)에게 체포되었으므로 드디어 홍주로 전진 공격하였다. 홍주 목사 홍가신(洪可臣)은 민병(民兵)을 모으는 한편 홍주에 사는 무장 임득의(林得義)·박명현(朴名賢)과 전 병사(兵使) 신경항(辛景恒) 등을 불러서 성을 지킬 계책을 논의하고는 성 밖에 연이어 있는 민간 초가집들을 그대로 놓아두면 적들이 비를 피하고 밥을 해먹기에 편리하다고 하여 밤에 불화살을 쏘아 모두 태워버렸다. 이때 남포 현감(藍浦縣監) 박동선(朴東善)이 변란의 소문을 듣고 수사(水使) 최호(崔浩)에게 급히 알리고 군병을 동원하여 홍주로 나아가 홍주를 구원하자고 하니, 수사는 동선에게, 자기에게 와서 상의하라고 했다. 동선은 즉시 군병을 모아 달려가서 곧장 홍주로 진군하자고 하자, 수사 최호가 ‘수군(水軍)은 육지에서 싸우는 병사가 아니다.’ 하면서 난색을 표했다. 동선은 큰소리로 ‘지금이 정말 어느 때인데 수군과 육군의 다른 점을 계교하는가.’ 하였다. 드디어 수영(水營)에 있는 군병을 모두 동원하였고 보령 현감(保寧縣監) 황응성(黃應聖)을 【평양 사람이며 문신(文臣)이다. 그 뒤 아들 황윤후(黃胤後)도 문과에 올랐다.】 시켜 본현(本縣)의 군사를 소집하여 함께 홍주성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홍주성은 원병을 얻어 크게 기뻐하여 성 머리로 나와 서고, 밤이 되자 성가퀴에 횃불을 벌려 세우자 성 안팎이 환히 밝아지니 성세가 크게 확장되었다. 그리하여 적의 무리가 어둠을 타고 도망치니 성을 함락시킬 수 없음을 안 몽학은 이튿날 군대를 이끌고 덕산(德山) 길로 향하면서 장차 김덕령, 홍계남의 군대와 합류하여 곧장 서울로 들어가겠다고 떠벌였는데 따르던 무리들이 비로소 불신하기 시작하고 도중에서 도망치는 자가 속출하였다.
당시 본도 병사 이시언(李時言)은 군사들을 온양(溫陽)에 주둔시킨 채 감히 진격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호남에 구원병을 요구했다.
도원수 권율이 충용장 김덕령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군사를 이끌고 오게 했는데 호남 군사가 석성(石城)003) 에 이르렀을 때 적도들은 몽학의 머리에 현상금이 걸려 있다는 말을 듣고 있던 터라 밤에 몽학의 진영으로 가서 그의 머리를 베어 가지고 투항해 왔다. 박명현 등이 성문을 나가서 추격하니 적도들은 모두 흩어졌다. 도원수 권율이 수색 명령을 내리니 각 고을에서 잡아 가두었고 권율은 즉시 신문하여 자복을 얻어낸 뒤 모두 서울 옥(獄)으로 압송하였다.
상은 동지의금부사 윤승훈(尹承勳)을 직산(稷山)으로 보내어 죄인들을 심문해서 경중을 가리도록 했고 꼬임을 당했거나 위협을 못 이겨 가담한 어리석은 백성들은 가벼운 법을 적용해서 석방했다. 서울로 송치된 자는 1백여 명이었고 정형(正刑)된 자들은 법에 따라 연좌시키고 가산을 적몰하였다.
선조수정실록 30권, 선조 29년 7월 1일 병인 3번째기사 1596년 명 만력(萬曆) 24년
역적 이몽학의 모주 한현을 잡아 홍주에 이감하다
한현이란 자는 본시 서얼(庶孽) 출신으로서 영악스럽고 꾀가 많았다. 이몽학의 모주(謀主)가 되어 약속하기를, 군사들의 예리한 세력을 타고 곧장 서울로 가는 것이 상책이요, 곁으로 성곽 없는 고을을 공격하는 것이 중책이요, 홍주를 진격하는 것이 하책이라고 하였는데, 한현이 초상을 당하고 홍주로 간 이후로 몽학은 그 계책을 쓰지 않고 곧장 홍주를 공격한 것이다.
한현은 기미를 미리 알고 몰래 면천(沔川)으로 도망쳤다가 면천 군수 이원(李瑗)에게 잡혀서 옥에 갇혔던 것이다. 적이 패해 도망친 후에 한현을 홍주로 이감하고 국문하여 승복을 받았다. 그는 자백에서 많은 무리들을 끌어들였는데 당시의 명장 김덕령·곽재우·고언백·홍계남 등이 연루되었다. 상은 모두 불문에 붙일 것을 명하고 김덕령만을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