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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선과 마이클의 인연 부분을 읽으면서
얼마나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는지... 마이클이 한국을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사랑하는지 몰랐어요!
최규선이라는 사람, 부럽기가 그지 없습니다.
대양이를 부러워해야하나?
전생에 어떤 일을 했길래...
마이클에 대한 부분만 퍼 온 것입니다.
마이클의 섬세한 마음 씀씀이와 세계적 명배우들이 참석한 마이클의 생일파티!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 거립니다.
근데 왜왜! 마이클과 절교를 해가지고...우리 마이클 분명, 마음 아파했을거예요.
중복이면 지울께요^^
그러나 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방식, 라이프스타일, 상류·중류·하류사회는 어떤 성격을 띠는지, 미국의 주류문화(main stream)는 무엇인지, 하위문화(surve stream)는 무엇인지(미국은 주류문화 외의 이 하위문화가 굉장히 다양하고 풍부해 용광로라고 불린다) 하는 것들에 굉장히 관심이 많았다.
나의 관심사가 이러하다 보니 버클리에서도 한국 학생보다 미국 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리고 한국인 최초로 마약퇴치운동 프로그램(D.A.R.E.)에 들어가 활동하게 되었다. 미국은 사회적 이슈가 되는 운동에 대해서는 각계 유명인사, 특히 할리우드의 유명 스타들이 적극 참여해 사회에 이바지하는 문화가 활성화되어 있다. 이 마약퇴치운동 프로그램은 당시 미국 정부가 남미·파나마·콜롬비아를 상대로 마약과의 전쟁을 강력히 추진중에 있었던 사회 분위기에 힘입어 대대적인 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 운동에 활발하게 참여했던 유명인사들로는 마이클 잭슨·스티븐 스필버그·엘리자베스 테일러·조지 루카스·말론 브란도·마이클 아이즈너(월트 디즈니사 회장) 같은 할리우드 스타들이 있었다.
마이클 잭슨과의 만남
때마침 로스앤젤레스에서 마약퇴치운동을 위한 자선기금모금 파티가 열렸다. 로스앤젤레스의 센트럴시티에서 열린 이 파티에는 그동안 내가 만나보고 싶었던 미국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다 모여 있었다. 이 파티에 나는 버클리대학 학생대표로 참가하게 되어 마이클 잭슨과 만나게 된다. 마이클 잭슨은 그 당시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신비의 팝스타였다. 그는 그곳에서도 어떤 유명인사보다 삼엄한 경호를 받고 있었다.
마침 마이클 잭슨은 바로 나의 옆 테이블에 있었고, 나는 주저없이 그에게 다가갔다(어떤 상황에서도 주눅들거나 위축되지 않는 것, 이것 하나는 내가 타고난 재능인 것이 분명하다. 어머니께서는 한없이 자식의 기를 키워 주고 자신감을 키워 주는 분이었는데, 나의 이런 재능은 전적으로 어머님의 교육철학에 힘입은 것이리라. 나는 운이 지극히 좋았던 듯).
경호원들이 바로 나를 제지했으나, 마이클 잭슨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경호원의 제지를 뿌리치고 나를 자신의 옆자리로 불러들였다. 나는 한국에서 온 아무개이며 당신의 팬이라 말했다(실제로 내가 맨처음 내 용돈으로 구입한 LP 음반이 잭슨파이브 시절 그가 불렀던 ‘Maria’라는 곡이 수록된 앨범이었다).
내가 한국인이라는 소리에 마이클 잭슨은 깜짝 놀라며 반가워했다. 알고 봤더니 그의 맏형인 재키 잭슨의 부인이 6·25때 미국에 입양된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것이었다.
이 형수는 어린 마이클 잭슨을 끔찍이 아꼈고 그 또한 형수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그는 내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그토록 반색하며, “You know Kim-Chi?” 하고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자신의 형수 이야기며, 그래서 평소에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는 이야기들을 건네며 옆자리에 앉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서울의 영어 스펠링을 아느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보통 서울은 soul로 표기하는데 seoul로 써야 맞다고 해서 다들 웃었다).
행사장이었던 만큼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던 터라, 그는 내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우리 가족이 살고 있던 방 2개짜리 25평의 버클리 대학원생 기혼자 아파트(알바니 빌리지 albany village)의 전화번호를 불러주면서도 그가 정말 나에게 전화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있었다. 집에 돌아와 마이클 잭슨을 만났다고 하니 아내도 반신반의했다. 거기에 한술 더 떠 그가 조만간 우리 집으로 전화를 걸어올 것이라고 했더니 꿈 깨라고 충고하는 것 아닌가. 그를 만난 후 두어달이 지나가자 아내는 그것 보라며 나를 아주 실없는 사람 취급했다.
머쓱해진 내가 마음속으로 포기할 무렵, 그를 만난 지 세달째가 되던 8월 중순경 드디어 그의 전화가 걸려왔다. 마침 일요일이어서 집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전화를 받은 아내가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여보, 마이클 잭슨이 당신을 바꿔 달래” 하는 것 아닌가. 전화의 내용은 8월29일 자신의 생일에 우리 가족을 초대하고 싶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는 산타바바라행 퍼스트클래스 왕복 항공권을 보내왔다. 그리하여 나는 아내와 생후 6개월 된 아들(89년 2월생) 대양(큰바다: 한국과 미국을 잇는 큰 인물이 되라는 뜻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지어주신 이름)과 함께 마이클 잭슨의 저택에서 열린 생일파티에 참석하게 된다.
평범한 한국 유학생 신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 벌어진 것이다.
마이클 잭슨의 손님맞이는 한치의 빈틈도 없었다. 산타바바라 공항에서는 운전기사와 여비서가 딸린 리무진이 우리 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통령 등 국빈 영접에나 쓰일 법한 대형 리무진을 타고 공항에서 약 30분 가량 떨어진 산타이네즈 마을의 저택으로 향했다. 산타이네즈는 레이건 대통령의 별장을 비롯해 미국의 거부들의 별장이 모여 있는 곳이다. 마이클 잭슨의 저택에는 ‘네버랜드’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고 전세계에서 모여든 수백명의 팬들이 네버랜드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 위해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
네버랜드라는 이름에 걸맞게 크기만 해도 200만평이 넘는 그의 집 안에는 산이 3개가 있고, 백조가 떠 있는 커다란 호수와 코끼리 수십마리와 사자·기린·악어·파충류까지 갖춘 대형 동물원에다 영화관이 포함되어 있었다. 너무나 넓다 보니 골프장에서 쓰는 카트를 타고 이동하거나 집안에 설치된 기차를 타야 했다. 마이클 잭슨은 한마디로 동화 속의 네버랜드를 자신의 현실 속에 그대로 구현해 놓고 동화처럼 살기를 꿈꾸는 피터팬과 같은 사람이었다. 그 스스로 피터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생일 파티에는 엘리자베스 테일러·소피아 로렌·말론 브란도·조지 루카스와 그 외 미국의 대표적’ 음반제작자, 영화제작자 등 50여명이 초대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 아시아 출신은 우리 가족이 유일했다. 뒤뜰에서 파티가 열렸는데, 이들과 한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흥분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 지경이었다. ‘할리우드의 실력가들’ (Rich & Famous·미국의 엔터테인먼트사업은 미국 국력의 상징이라 할 만큼 중요한 분야이고 이들의 사회적 영향력과 부의 크기도 어마어마해서 할리우드의 파워를 다루는 ‘Rich & Famous’라는 TV 프로그램이 따로 있을 정도다)이 한자리에 모두 모인 셈이었고, 그중에서도 마이클 잭슨은 으뜸이라 할 만했다.
이런 스타 중의 스타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일한 동양인에 유일한 아기였던 아들 대양이는 모두의 귀여움과 관심을 독차지했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말론 브란도 할 것 없이 모두들 돌아가며 우리 대양이를 안아주고 예뻐했다. 나는 마이클 잭슨의 초대가 내가 미국의 주류사회에 파고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우리 가족은 그의 특별한 배려로 파티가 끝난 후에도 저택 내에 마련된 게스트하우스에서 묵게 되었다. 파티 다음날 나는 대형 피아노가 놓인 그의 거실에서 2시간 정도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는 나에게 너의 꿈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디즈니랜드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의 집에서 나는 넓은 세상으로 오고 싶어 유학을 오게 되었고 미국을 알고 싶고, 미국 주류사회를 알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내 꿈을 실현하는 데 큰 힘이 되어 주겠노라고 약속했다. 미국 대통령을 포함하여 누구라도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자신이 주선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처음 대면한 자리에서 자신의 테이블로 돌진하던 나의 도전정신(guts)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는 얘기도 했다. 처음에는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중국인인지 구분할 수 없었으나 한국인이라는 말에(그는 한국인 형수를 두었던 탓에 한국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더욱 친밀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날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도 생일파티에 초대하기 위함이었다고 했다.
또 유학생 생활에 대해서도 세심하게 물어보더니 내게 장학금으로 수표 5만달러를 건넸다. 우리 한 가족의 생활비와 나의 학비로 1년에 얼마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약 2만달러에서 3만달러 정도가 든다고 했더니 그는 2년치를 선뜻 내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렇듯 우연한 기회에 시작된 그와 나의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 이어져 왔고, 그는 이날 내게 한 약속을 충실히 이행해주었다.
마이클 잭슨의 집에는 항상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대외활동때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다시피한 화려한 의상을 입었으나 집안에서의 그는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소탈한 모습이었다. 헐렁한 면스판 계열의 바지에 흰색 면티와 헐렁한 셔츠를 받쳐입는 것이 전부였다. 그의 음악과 사람을 매혹시키는 힘은 바로 이 무한히 자유롭고 얽매이지 않는 생각의 유연함에서 비롯됨을 알 수 있었다. 억압된 사회에서는 훌륭한 음악이 나오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거실에는 가운데 탁자는 두지 않고 소파만 ‘ㄴ’자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와 나는 ‘ㄴ’자의 한쪽씩을 각각 차지하고 앉았고, 아내는 내 옆에, 대양이는 유모차에 누워 있었다. 좀 특이했던 점은, 그는 집에서도 빌리진을 부를 때 신었던 검정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구두는 아주 낡아 밑창이 다 해져 있었는데, 그는 무대에서도 그 구두만 신었다. 무대에서 편하게 춤추고 노래하려면 구두가 편해야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는 절대 새 신을 신고 무대에 올라가지 않았다. 무대에서는 반드시 오래 신어 편해진 신발만 신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아기 기저귀, 약품류까지 구비되어 있을 정도로 세심하게 배려했다.
마이클 잭슨 저택의 불가사의한 위용
그의 거실 옆에는 백악관 라이브러리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대형 라이브러리가 있었는데 그의 독서량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의 옆에는 항상 세계적인 매거진과 저널들이 놓여 있어 그가 세상의 변화를 주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어떤 분야에서든 세계 정상이 되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그를 통해 확인했다. Super Power, Super Energy, Super Effort가 있어야만 최고가 될 수 있음을 팝가수 마이클 잭슨을 통해 배운 것이다.
미국의 억만장자의 삶이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의 저택 안에는 종업원 숙소로 쓰는 아파트가 있을 정도였다. 광주 사직동물원의 세배는 됨직한 동물원에서 일하는 사람만 해도 수십명이었고 기차 운행에 필요한 인원, 정원사, 유리창 닦는 사람, 요리사 등을 꼽아보면 왜 아파트형 숙소가 필요한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대중적 이미지와는 너무나 상반된 사람이었다. 산소마스크를 낀 채 생활한다는 둥, 결벽증 때문에 항상 장갑을 끼고 있다는 둥의 소문과 과도한 성형수술과 사생활, 어린이 성추행 사건 등으로 그를 사치스럽고 부도덕한 사람으로 생각하기 쉽겠지만, 내가 만난 마이클 잭슨은 한마디로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이었다. 너무나 섬세하고 다정다감하고 장난기로 가득한 어린아이, 오직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지미 카터나 만델라 대통령 등과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세계 평화에도 관심 많은 이유도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가 이상한 취미와 변태적인 성향을 가진 비뚤어진 사람이었면 어떻게 그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미국의 언론에서는 ‘The Weird’ 즉, 이상하고 기묘한 사람이라고 불렀지만 그는 무수한 대중의 오해와 언론의 입방아 속에서도 의연할 수 있는 철학과 깊이 있는 사고와 특별한 매력을 갖춘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는 대중의 이런 반응을 즐기는 듯했고, 정상의 자리는 외로운 것이라고 말했다. 또 인종차별에 대해서는 분노에 가득차 있기도 해서 흑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도 뚜렷이 갖고 있었다.
그런데 놀라웠던 것은, 그가 나에게 자신과 나는 한 핏줄이라고 하는 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아메리칸 인디언이었는데 “인디언은 아시아에서 몽골리안 루트를 타고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몽고족이므로 너와 나는 형제”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는 미국사회는 흑인 피가 한방울이라도 섞이면 혼혈이 아니라 흑인이라고 부르는 사회라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를 통해 알게 된 인디언 문화와 우리 문화는 비슷한 면이 많았다. 사람이 죽으면 상여를 메고 곡을 하는 것도 그러한 유사점 중 하나였다. 그의 할아버지는 바로 이 곡소리, 즉 진혼가를 부르는 가수였다. 우리로 치면 상두꾼 대장쯤이라 볼 수 있겠다.
그의 할아버지는 돌아가실 때까지 애리조나 피닉스에 살기를 고집하며 할리우드의 화려한 저택에는 오시지 않은 강직한 분이었다.
결국 할아버지의 장례식까지 애리조나 피닉스에서 치르게 되었는데, 그는 내게 함께 가주기를 바랐다. 그가 할아버지 장례식에서 보여준 사진을 보니 할아버지는 한국인의 얼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그가 한국을 방문한 적도 없고 한국인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면서(내가 그에게는 최초로 알게 된 한국인이었다) 한국인에 대해 이상하리만큼 애정을 갖게 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어린이 성추행 스캔들 때문에 시민단체에서 그의 공연을 반대해 몇차례 연기되기는 했으나 결국 나의 주선으로 마이클 잭슨은 1996년 서울에서 공연하게 된다.
그의 집에서 꿈같은 1박2일을 보내고 돌아오니 한참 동안이나 그곳에서 있었던 모든 일들이 현실이 아닌 듯 그저 멍할 뿐이었다. 물론 그날의 만남이 내 인생에 얼마나 큰 행운이 될 것인지는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다만 어머니 말씀대로 나는 정말 운 좋은 사주팔자를 타고 났구나 하는 정도였다. 결국 이날의 만남은 훗날 DJ가 대통령이 되는 데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되었고 IMF 위기 극복에도 크게 기여하게 된다. 또 미국 안에서 구축한 나의 휴먼 네트워크의 최초의 뿌리가 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거대한 성에 쌓여 있는 외로운 왕자와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한국에서 온 유학생에 지나지 않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지금도 불가사의한 일이다. 인디언 할아버지나 한국 출신 형수와 같은 그의 개인사를 감안하더라도 나에게 관심을 갖기에는 그는 이미 너무나 유명인사였고 억만장자였던 데다 전세계인의 스타가 아닌가 말이다.
1997년 대선 당시 나는 DJ의 옥중서신을 영문으로 번역해 그에게 보여준 적이 있었다. 그는 이 옥중서신을 보고 감동을 받아 울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선거 캠페인이 한창일 때 한국을 방문하여 DJ와 포옹하게 된 것이다.
그는 당시 그야말로 신비에 휩싸인 인물이었고, 대중들 사이에 외계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기인의 이미지를 갖고 있던 스타였다. 그런 그가 어찌나 섬세하고 다정하게 마음을 쓰던지, 파티 메뉴에 김치가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두손 두발 다 들고 말았다. 그는 다른 손님들에게도 김치의 시식을 권하며 자기가 너무나 좋아했던 한국인 형수가 담아주었던 바로 그 김치라고 소개하고는 나에게 김치 담그는 법을 설명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그의 저택에서 돌아온 나는 다시 유학생의 일상으로 돌아갔다. 마이클 잭슨과 만나게 해준 D.A.R.E. 프로그램 활동은 유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올 때까지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이 활동을 통해 나는 참 많은 것을 배웠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왔으나 마이클 잭슨과의 인연은 계속되었다. 심지어 그는 나의 영어선생 노릇까지 해주었는데, 밤에 잠이 없는 그는 툭하면 내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일상생활을 시시콜콜 얘기해 주었다. 한국 역사에 관한 책을 보내달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총영사관에 비치되어 있는 한국 안내책자들도 보내주었다. 한국관광공사가 펴낸 그 안내책자에는 탈춤에 대해 자세히 소개되어 있었는데, 거기에 묘사되어 있는 탈춤에 숨어있는 해학, 에로틱, 탈춤의 역사 등에 대해 내게 물어오기도 했다. 사실 탈춤에 대해 문외한이었던 내가 창피할 정도로 꼼꼼히 읽고 질문을 던져왔다. 미리 읽고 다이제스트해 주는 비서들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국내에 입국할 때 귀빈실에서 대기하는 동안에도 비치되어 있는 잡지를 뒤적일 정도의 책벌레였던 것이다.
스칼라피노 교수와 나의 96년 행적
스칼라피노 교수를 통해서는 미국의 학계 명사, 정치인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아내가 교수댁에 가 당시 휠체어를 타고 다니던 스칼라피노 교수 부인의 손발이 돼 주기도 했다. 나는 거의 교수의 양자 정도로 인식되었다. 마이클 잭슨과 스칼라피노 교수는 나의 대부(godfather)격이었다.
그는 타고난 건강 체질이었다. 뿐만 아니라 역대 한국의 정치지도자들과도 교분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세계가 인정하는 대석학이기는 했지만 한 개인으로 보면 역시 인간미가 철철 넘치는 사람이었다.
1996년 마이클 잭슨의 공연 관계로 귀국하게 된다. 그 이전인 1993년 마이클잭슨은 한국에서 공연해 보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다. 그런데 참 웃기는 일이 당시에 있었는데, 국내에서 최고의 인기였던 팝그룹 뉴키즈언더블록(New Kids on The Block)이 내한공연을 했다. 문제는 이 공연에서 공연을 관람하던 팬들이 한꺼번에 한곳으로 몰리면서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사고는 곧 미묘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런 와중에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추진하자마자 YS 정부에서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위싱턴포스트’지의 유명한 칼럼리스트는 YS와의 면담에서 한국사회에서 공자와 마이클 잭슨을 비교하며 이런 질문을 던진 적이 있다고 한다.
“안전 문제 때문에 마이클 잭슨의 공연을 거부한다면 한국은 대규모의 국제적인 행사를 개최할 수 없는 나라 아닌가. 한국보다 훨씬 안전 문제가 취약한 국가에서도 마이클 잭슨의 공연은 성공적으로 치러졌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조치다.”
결국 YS는 마이클의 공연을 다음 기회에 보장하는 것으로 언약했다고 한다. 이로부터 3년 뒤인 1996년 잠실 주경기장에서 마이클은 2회에 걸친 공연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된다. 이 공연은 태원엔터테인먼트에서 기획을 맡았는데 세계적인 공연이었고 이후 우리 나라 대중음악인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안다.
마이클의 내한공연이 끝난 뒤 나의 일상에는 조그마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마이클은 공연 관계자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에게 나를 자신의 아주 친한 친구로 소개했고 따라서 심심찮게 언론의 관심을 끌게 된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DJ의 호출을 받게 된다. 물론 그는 나와 마이클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DJ의 수행비서인 이재만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목동의 한 아파트로 갔다. 그곳은 이희호 여사의 이모부 명의로 되어 있었는데 DJ가 비밀리에 사람을 접촉하는 장소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던 곳이기도 했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이희호 여사님과 이모님이 계셨고 나는 안방으로 안내되었다. 침대 곁에 붙어 있는 작은 테이블에 앉기를 권유한 DJ는 내가 앉자마자 다짜고짜 용건을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자네가 나를 도와야겠네. 지난번처럼 외곽에서 나를 도울 것이 아니라 이번에는 내 비서로 들어와 나를 도와주어야겠어.”전혀 예상치 못한 제안에 나는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사람인가. 미국에서 처음 대면한 이후 나에게는 정치적 스승이기 전에 인생의 스승이었던 분 아닌가. 최루가스가 난무하던 시절 동교동의 담장을 넘어 들어가면서까지 뵙기를 갈망하던 분이 아니었던가 말이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뜻대로 하겠습니다.”
나로서는 당연한 대답이었다. 설사 그보다 더 어려운 부탁을 했더라도 당시의 나는 받아들였을 것이다. DJ의 얘기는 조금 길게 이어졌다.
“자네는 마이클 잭슨을 잘 알지 않는가. 그는 세계적인 사람이지. 이제는 서울에서, 한국 내에서만 정치하던 시대는 이미 지났네. 정치도 이제는 서울, 워싱턴·LA·도쿄(東京)·베이징(北京)·싱가포르 등 메이저 도시들과 맞물려가면서 돌아가는 시대가 되었어. 이런 내용은 대선공약에도 나오겠지만 국가 과제가 될 것이야. 이렇게 세계화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인 게야.”
나중에야 확실하게 드러나지만 DJ의 그런 관점에서 출발한 선거 캐치프레이즈가 바로 ‘준비된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된 대통령’을 위한 사전작업, 그중에서도 외국 저명인사와의 친교 형성을 위한 준비를 나에게 시킨 셈이었다.
중략!
1996년 어린이 성추행 사건 직후 마이클은 리사 마리 프레슬리와 결혼했다. 마이클은 어린이의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아주 좋아했을 뿐이다. 성추행 혐의는 마이클을 음해하려는 사람들의 음모였다. 월드 투어를 떠나던 날 아침에 터진 그 사건에서 마이클은 변호사팀에만 몇백만달러를 들였고 혼잣말처럼 “젠장, 또 백인 변호사들만 돈 많이 벌게 됐다”고 말했다. 할아버지가 인디언이었고 자신이 시련을 많이 당했기에 마이클은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상당히 많았다. 역사인식, 세계사에 대한 인식이 진보적이고 해박하다.
리사 마리가 먼저 프로포즈했던 결혼에서 ‘정략적 결혼’이라는 소문도 떠돌았지만 마이클은 그런 말에 거의 면역이 됐다. 심지어 내 아들을 예뻐한 마이클이 내 아들과 자주 만나자 ‘마이클이 아들을 입양했다’고 타블로이드 신문에 크게 보도된 적도 있었다. 얼굴은 아버지를 닮았지만 키가 작은 리사 마리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 둘이 있었고 마이클과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 않았던 것 같다. 마이클은 남성미가 있다기보다 동화 속의 아이같이 모성애를 자극해 리사 마리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나는 1993년 담배를 끊었는데 마이클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유일한 사람이었다. 내가 담배로 도넛 모양을 만드는 것을 마이클은 즐겁게 바라보았다. 그런데 마이클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경호원한테 혼찌검이 났다. 담배 연기는 성대에도 좋지 않고, 마이클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는 것은 무례한 행동이라는 것이었다.
공개석상에서 마이클은 크게 당황한 적이 없었다. 1996년 한국에서 공연했을 때 한 팬이 무대 위로 뛰어 올랐는데 마이클은 당황하지 않고 잘 대처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내가 마이클을 당황하게 한 적이 있다. 피부가 하얗게 번지는 병에 걸린 마이클은 흉해 보이는 피부를 가리기 위해 검은 피부 부분을 희게 화장하고 다녔다. 한번은 화장하지 않은 채 얼룩덜룩한 피부를 나에게 보여줬는데 나는 “검은 부분이 더 많은데 차라리 검게 화장하지 그러느냐”고 말했다가 마이클의 얼굴이 벌개지는 것을 보고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분위기는 서먹했다.
마이클은 브루스 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용쟁호투’ 등의 비디오를 보며 그의 발차기 하나 하나에도 환호했다. 마이클은 어른도 아이도 아니고, 흑인도 백인도 아니고, 남자도 여자도 아닌, 단순한 잣대로는 평가할 수 없는 인물이다.
1994년 마이클 잭슨의 소개로 알게 된 알 왈리드 왕자는 현 파드(?) 사우디 왕의 친조카다. 모계는 레바논이고 부계는 사우디아라비아다.
세련되고 서구적이며 키가 작고 왜소했다. 그러나 눈빛은 날카로웠다. 세계적인 인수 합병의 귀재다웠다. 알 왈리드는 중동 왕족들의 전형인 석유재벌 출신이 아니라 세계적 투자가다. 현재 씨티뱅크의 최대주주이며 1980년대말 남미 국가들이 모라토리엄에 처해 씨티뱅크가 파산 위기에 몰렸을 때 그는 씨티뱅크의 회생 능력을 믿고 5%라는 큰 투자를 했다. 그때를 계기로 세계적 거부이자 투자가로 명성을 날리게 된다. 그에게 나는 김대중의 ‘옥중서신’을 선물해 그는 김대중에 대해 큰 감동을 받고 있은 듯했다.
[출처] 최규선 거짓과 진실|작성자 최통
마이클 잭슨과 알 왈리드의 친분
마이클이 어느날 “알 왈리드 왕자가 내 별장을 찾아온다는데 네가 만나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전에 한국에도 서너번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한다”고 만남을 주선해 줬다. 알 왈리드 왕자에게 1남1녀가 있었는데 교통사고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긴 아들 칼리드 왕자에게 생일 선물로 어떤 엔터테이너를 초청하고 싶으냐고 묻자 칼리드 왕자가 마이클 잭슨을 꼽았다고 한다.
그러나 세계적인 팝스타 마이클은 돈을 받고 거부의 생일파티에 불려간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해 알 왈리드의 청을 계속 거절했다. 결국 알 왈리드 왕자가 미국으로 직접 찾아와 자신의 아들이 얼마나 열렬한 마이클의 팬인지, 자신이 아들에게 왜 그런 약속을 했는지 말해 주자 마이클은 개런티를 받지 않고 자비를 들여 칼리드 왕자의 생일파티에 참석하면서 알 왈리드와 둘도 없는 친구가 된다.
1994년 마이클이 대주주로 있는 Landmark라는 애니메이션 영화사에 알 왈리드와 공동투자를 하기 위해 마이클과 알 왈리드는 할리우드를 방문했다. 이때 나는 알 왈리드를 처음 만났다. 알 왈리드는 한국의 중동 붐을 통해 컨설팅을 해주며 현대·대림·동아 등 기업들에서 커미션을 많이 받았다고 털어놨다. 현대는 오늘날의 사우디를 만든 전설적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알 왈리드는 한국인 노동자들의 근면성, 술이 금지된 사우디에서 한국인들이 술을 마시다 낭패당한 일 등을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줬다. 그는 한국의 재벌가 자제도, 정계 권력자도 아닌 내가 마이클과 친하다는 사실을 놀라워 했다. 알 왈리드는 아직도 나와 친분을 유지하지만 마이클과는 1998년 투자에 이견을 보이며 사실상 절교를 선언했다.
1996년 마이클의 월드투어 참석차 네덜란드에 갔을 때 알 왈리드를 만났다. 그때 알 왈리드는 파운드화 평가절상으로 수십억달러를 벌었다는 소로스 얘기를 꺼냈다. 그때 나는 소로스라는 인물에 대해 처음 들었다. 소로스가 한국 증권에 투자해 큰 손해를 봤다는데 알 왈리드 자신은 직접 기업에 투자한다고 말했다. 알 왈리드는 철강과 반도체가 강세를 보이던 한국경제에 우려를 표명했다.
당시 한국은 주식시장이 활황을 이루고 환율은 안정됐으며 삼성반도체가 매일 몇십억원씩 순이익을 남기던 때여서 알 왈리드의 말이 피부에 와닿지 않았다. 나 역시 경제에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IMF가 터지자 알 왈리드를 떠올리게 됐다.
알 왈리드 왕자의 아시아 지역 한 투자자문역은 1970년대 씨티뱅크 한국지점장 시절 대우의 김우중 회장과 교분이 두터웠다. 그는 당시 김우중 회장과 개인적으로 만나면서 그의 인간성에 흠뻑 매료되어 있는 상태였다.
1997년 11월 선거전에서 경제문제 관련 화상회의를 할 때 알 왈리드를 세번째 만났다. 당시 서울-뉴욕-워싱턴의 시간을 맞췄으며 시간이 맞지 않아 알 왈리드는 대리인으로 뉴욕 Landmark의 사장을 내세웠다. 알 왈리드는 한국인의 근면성과 위기극복 정신을 높이 샀고 기반이 탄탄하다고 평가해 투자를 결심하게 된 것 같다. 외환위기가 외환 유동성 위기라고 보고 투자의 적기라 판단한 것이다.
그와 소로스는 환율을 낮추는 데만 급급한 한국의 관료들이 오히려 경제를 망친다고 비판했다.
알 왈리드는 노동시장이 유연해져야 하고 노조가 안정돼야 한다며 경제를 살리려면 DJ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국 대통령 후보들의 성향을 꿰뚫고 있었으며 DJ의 팬이 됐다. ‘전하’로 불리는 자신의 신분상 드러내놓고 도울 수는 없었지만 Landma rk의 사장을 내세우고 월가의 큰 손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 큰 힘이 돼 줬다.
‘옥중서신’을 읽으면서 한국의 정치상황을 간파하고 투자 적기를 노리던 알 왈리드와 나는 IMF를 계기로 아주 가깝게 됐다. 12월초 도쿄에서 그와 만나 3시간 정도 얘기했다. 그는 IMF 계약 준수와 천명, 시장경제의 신봉자임을 내세울 것, 노동시장의 유연성 등 몇가지를 주문했다. 도쿄 포시즌호텔의 대주주이기도 했던 알 왈리드가 보인 진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후 서로 정보를 교환하며 하루에도 몇차례씩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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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사람이 어제 마이클 이용한 거짓말쟁이라는 사람인가요????
저도 읽어보고 왔는데, 이게 자서전1편이라는 제목이고 이 사람 블로그에 2편, 3편까지 다 읽어보세요. 뉴스위크 기사를 그대로 따온거 같은데, 어느 정도 신뢰할 수 있는지 몰라도, 마지막에 3편에서 최규선이 왜 사기꾼인가에 대한 기사가 더해져있어요. 재미있게 읽었는데 김빠지네요. 마이클과 만난 부분은 그래도 진짜일거 같단 생각은 드네요
근데 딱 절반만 믿으세요. 사기꾼이에요 ㅋㅋㅋ 특히 최규선과 마이클의 관계부분에서는 오분의 일정도만 믿으세요. 근데 뭐 백프로 소설같진 않고 실화를 바탕으로쓴 소설이라서 저도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었고 암튼 마이클의 팬으로서는 최규선씨한테 고맙다는;;;;
최규선의말은 믿지않으리.
이사람 별명이 최사기라고 하던데요..-_-
거짓말 너무 잘해서 마이클한테도 의절당하고 김대중하고도 서먹했던것으로 과연 글에서도 최사기라 부릴만한 능력이 보이네요
음....마이클에 대한 것은 사실을 모르니 최규선이 위에 언급한 스칼라피노 교수의 사실만 이야기하지요. 최규선게이트가 터졌을때 그 사건을 수습하기 위해서 최규선씨가 스칼라피노 교수 얘기를 언급하면서 저렇게 대부나 마찬가지라고 했던 당시에 스칼라피노 교수의 반응은 한마디로 어이없다 였습니다. 자신은 최규선이 주장하는 만큼의 각별한 친분이 없는데 왜 자기의 이름을 자꾸 거명하는지 모르겠다는 인터뷰를 한 적도 있구요. 그 사실이 뉴스에 대대적으로 보도되면서 사기꾼 이라는 정체가 도리어 밝혀졌답니다. 그러니 마이클에 대한 회상도 분명 문제가 있었을꺼라고 봅니다, 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