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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그것은 한 마디로 충격이었다.
'이럴 수가......!'
삼안수사 호불위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바퀴의자에 앉아 나타난 백발의 괴노인은 과연 남천신도의 도주(島主) 남천대제(南天大帝) 송일기였다.
그는 단상으로 올라갔다. 초초는 조심스럽게 그의 의자를 밀었다. 그리고 남천대제 송일기는 태사의에 옮겨앉았다. 그는 오랜 병마에도 불구하고 온몸에서 영웅의 풍모를 풍기고 있었다.
하나 그의 얼굴은 고목나무 껍질을 연상케 했다. 오랜 병 아닌 병고에 시달린 탓이었다.
송일기는 원로원의 칠대원로를 둘러보았다.
"너희들은 본좌를 보고서도 무릎을 꿇지 않느냐?"
추상같은 호령이 떨어졌다. 모두 자신들이 보고 있는 광경이 믿기지 않는 듯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서 있었던 것이었다.
"도... 도주......!"
"도주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칠대원로는 쓰러지듯 모두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상황은 놀랄 정도로 급변해 오백여 명의 도인들도 모두 일제히 바닥에 엎드렸다.
송일기는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은 눈이 있으되 보지 못했고, 귀가 있으되 듣지 못했다. 본좌 그 죄를 추후에 묻겠노라!""주... 죽을죄를......."
"도주......."
칠대원로의 얼굴에 공포가 떠올랐다. 남천대제 송일기, 그가 누구인가? 남천신도에서는 그는 신(神)이었다. 그런 그가 회복한 것이다.
그들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머리가 텅 비었고 전신이 경직되고 있었다.
송일기는 만연령을 향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령아, 이리 오너라!"
"네, 도주님!"
만연령은 공손히 대답하며 그의 옆으로 다가갔다. 이어 송일기는 중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 아이가 본좌를 구했다. 허허... 만생우가 본좌를 이렇게 만들었고 또 그의 손녀가 본좌를 구해 냈으니 결국 피장파장인 셈이군, 그래. 허허허헛......!"결국 도인들의 궁금증은 모두 밝혀진 셈이다. 도주의 입으로 직접 증명이 된 것이다.
중인들의 가슴에는 의혹이 치밀어 올랐다.
'그렇다면 만생우를 암살한 흉수는 누구란 말인가?'
송일기는 이번에는 천우를 향해 한없이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우(羽)야, 이리 오너라!"
천우는 몸을 일으켜 소리 없이 송일기의 옆에 섰다. 그런 천우를 송일기는 대견한 듯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본 후 중인들에게 엄중하게 말했다.
"이 아이는 노부의 외손자가 틀림없소. 왜냐면 노부만이 알아볼 수 있는 뚜렷한 방도가 있기 때문이오."그 말에 중인들은 아무도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송일기는 감회 깊은 음성으로 재차 말했다.
"이제 노부는 여한이 없소. 신목가의 모든 것을 떠 받힐 든든한 기둥이 생겼으니 노부는 이제 그만 쉬어야 겠다는 생각이 드오."중인들은 숙연해 졌다. 문득 송일기의 음성에 분노가 일었다.
"그 전에 노부를 배신한 대가를 치루어야 겠소."
"......!"
중인들은 바짝 긴장을 느꼈다.
"그 놈은 바로......."
송일기의 손이 쳐 들려졌고 손은 천에 칭칭 감겨져 있었다. 그의 손이 움직임에 따라 중인들의 시선이 불안과 의혹을 띤 채 집중되었다.
이윽고 그 손이 멈춘 곳은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 그럴 리가......!"
"아아......!"
중인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했다.
"바로 저 놈이오!"
송일기의 분노 깔린 음성이 떨어졌다. 그 순간 그의 손이 가리켜진 방향에 있던 인물이 몸을 스스로 일으켰다.
"흐흐흐흐... 그렇소. 바로 나 호불위요. 내가 모든 일을 해냈소."삼안수사 호불위였다. 그의 미간에서 붉은 눈이 으스스한 마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중인들은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모두들 득달같이 호불위에게 달려들 태세였다. 하나 호불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좌중을 압도하는 기세로 말했다.
"흐흐흐흣...! 나 호불위는 신목가가 너무도 오랜 이곳을 지배했다는 사실에 염증을 느꼈소. 후후... 이제 주인이 바뀔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오."송일기의 노안에 분노가 어렸다.
"배은망덕한 놈! 옛날 곤궁한 시절에 너를 거두어들인 것이 누구였더냐? 이런 짐승만도 못한 놈.......""흐흐흐... 당신은 단지 나의 자질이 탐났을 뿐이 아니오? 하나 언제고 당신의 직계가 나타나면 나는 버림받을 운명이었소."일리 있는 말이었다.
문득 낭랑한 음성이 들려 왔다.
"호불위, 너는 그 방법이 너무나 비열하다고 느껴지지 않느냐?"천우였다. 그는 늠연하게 그의 앞으로 걸어오며 깊이를 모를 눈으로 호불위의 마안을 쏘아보며 단호하고 진중하게 꾸짖었다.
"영웅은 시대의 흐름을 탈줄 안다. 그런데 너는 그것을 역행(逆行)하려고 했다. 그것이 너의 치명적인 실수였다.""흐흐흐흐... 애송이 놈! 나에게 훈계하는 것이냐?"
"호불위, 너는 이미 설 땅을 잃었다. 아직도 발버둥칠 셈인가?""으하하하... 핫핫핫......!"
느닷없이 호불위는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내가 설 땅을 잃었다고? 나 호불위가 이 따위 손바닥만한 좁은 섬에 연연할 줄 알았느냐? 핫핫핫...! 추호의 미련도 없다. 하나 이 애송이 놈, 그런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다만 네놈에게 돌려 받을 것이 있다!"그는 이글이글 증오에 불타는 삼안(三眼)을 번뜩였다. 그의 엉뚱한 말에 천우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자네가 나에게 돌려 받을 것이 있다고?"
"그렇다. 너는 나에게서 내 인생의 모든 것을...! 그리고 자존심을 훔쳐 갔다.""......?"
천우는 그의 말뜻을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흐흐흐...... 모르겠느냐? 그럼 내가 가르쳐 주지."
그는 돌아서 송일기의 옆에 서 있는 마의여인(麻衣女人)을 가리켰다.
"연령, 내게 연령을 돌려 다오! 그녀는 내 여자다. 만약 그녀를 순순히 내게 돌려준다면 오늘은 이대로 물러가겠다.""......!"
천우는 너무도 뜻밖의 말에 흠칫 놀랐고 만연령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 호불위는 그런 말을 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죄를 속죄하고 목숨을 구걸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만연령을 내놓으라니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녀는 전신을 떨며 저주스러운 듯 말했다.
"이 악마! 더러운 입을 함부로 놀리지 마라! 이 연령이 어째서 너의......."그녀는 다음 말을 더 하지 못하고 증오와 분노에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녀는 많은 군중들 앞에서 그런 어처구니 없는 말을 듣고 심한 모욕감을 느낀 것이었다.
하나 호불위의 태도는 더더욱 가관이었다.
"연령... 내 마음을 모르겠소? 이 호불위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소. 오직 연령 그대만을.......""닥쳐요!"
만연령은 너무나 분노해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호불위는 안면 근육을 한 차례 씰룩이더니 이윽고 돌아섰다.
"흐흐... 천가 놈! 그 동안 네놈이 나의 연령을 어떻게 했기에... 흐흐... 죽여주마!"우우웅!
말을 마치자마자 호불위의 전신에서 짙은 홍무가 피어올랐다. 그것을 본 순간 남천대제 송일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침음성을 터뜨렸다.
"유... 유령혈단마공(幽靈血湍魔功)이다. 그가 어떻게 유령마제(幽靈魔帝)의 마공을 익혔단 말인가?"- 유령마제!
그는 공포의 마왕이었다.
오백년 전 그는 유령단(幽靈團)을 조직하여 새북(塞北) 일대를 휩쓴 적이 있었다. 그의 존재는 극히 신비하여 알려진 바가 거의 없었으며 다만 그의 마공이 극히 음독무비하다는 것만이 전해질뿐이었다.
번-- 쩍!
"크핫핫핫핫!"
혈광이 뻗음과 동시에 일진 마소(魔笑)가 장내를 흔들었다.
천우는 일장을 부딪친 순간 기혈이 거꾸로 역류하는 것을 느꼈다.
'무서운... 마공이군......!'
그는 상대의 공력이 가공무쌍함에 놀랐다. 하나 다시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크하하하하......."
귓전을 어지럽히는 광소는 전신을 혼란 속으로 빠뜨리는 마력이 있었다. 재차 시뻘건 강기가 무섭게 그를 향해 날아왔고 천우는 그때마다 호흡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그는 순간적으로 호불위의 무공이 너무도 괴이하다고 판단했다.
'정상적인 무공과는 틀리다. 역천마공(逆天魔功)......!'그는 삽시에 십여 초가 흐르는 사이 무려 열두 걸음이나 밀려났다. 호불위는 온몸이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마령안은 더욱 사이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그것은 흡사 지옥사자의 눈과 같았다. 죽음을 부르는 안광이었다.
"크핫핫핫핫...! 네놈을 핏물로 만들어 주마!"
꽈르릉!
핏빛 돌풍이 일었다.
호불위는 하나의 핏빛 덩어리로 화해 미친 듯이 달려들었다.
천우는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쓰지 않으려 했으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천염일기공(天焰一氣功)만이 놈을 제압할 수 있겠다.'천염일기공. 그것은 제왕오대신가 중 천화신가(天火神家) 독문의 절공이었다.
그는 아직 오대가로들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혈정원단신주의 내력을 자신의 것으로 완전히 흡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고 천타의 유명(遺命)에 의하자면 최후의 순간까지는 천화신가의 무공을 사용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는가?하나 그는 다른 어떤 무공보다 천화신가의 절기만이 호불위의 역천마공을 꺾을 수 있겠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 역천마공의 극성까지 연공했다 해도 무쇠도 녹여버리는 태양화염처럼 뜨거운 진기를 그대로 흡수할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발출되는 화염진기를 그대로 흡수하다가는 전신이 숯처럼 타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천우의 모습은 호불위의 핏빛 강영( 影)에 뒤덮였다. 실로 아슬한 순간이었다.
"앗, 소도주......!"
중인들의 안색의 변했다. 그들은 천우가 당했다고 생각했고 심지어는 송일기의 노안도 딱딱하게 굳어지고 말았다.
천우는 섬전처럼 쏘아져오는 호불위의 얼굴을 보았다.
세 개의 눈은 시뻘건 혈광을 뿌리며 무서운 광채를 발하고 있었고 그 눈을 보는 순간 그는 머릿속의 터져나가는 듯한 충격을 느꼈다.
욕망화까지도 꺾은 천우가 아닌가? 하나 이런 마공은 정사를 통틀어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만큼 사이한 것이었다. 딱하나 있다면 그것은 마물 사영환의 흡천대법과 흡사했다.
상대방의 내공이 고강하면 할수록 흡천대법은 위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호불위의 마령안도 그와 유사한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것이었다.
천우가 내공진기를 끌어올리면 올릴수록 호불위의 마령안은 더욱 막강해졌다. 천우는 자신의 진기가 모두 빨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바로 그때 호불위의 우장(右掌)이 그의 가슴을 짓눌러 왔다. 그의 손은 완전히 혈수(血手)였다. 천우의 좌장(左掌)이 무의식중에 마주쳐 갔다.
장심(掌心) 한가운데에 문득 담홍색(淡紅色) 반점이 나타났고 곧 그 반점으로부터 밝은 청록색 꽃이 일어났다.
'천염일기공!'
팍......!
손바닥이 마주친 순간 가벼운 음향이 일어났다. 그 순간 천우는 전신의 피가 역류함을 느꼈다.
'음......!'
그는 전신의 공력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렸다. 하나 그 순간 공력이 무섭게 손바닥을 통해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윽... 무서운 흡력......!'
이때 호불위의 얼굴이 그의 얼굴에 다가왔다. 그것은 마면(魔面)이었다. 그의 세 개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악마의 광채가 뻗치고 있었다.
"흐흐흐... 마령이 너의 피를 원한다......."
천우는 아찔한 느낌과 일시에 공력이 빠져나가 그는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마령안에 걸려든 것이었다.
'끝장이다.......'
그는 눈을 감았다. 하나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돌연 텅 비어 버린 단전(丹田)으로부터 뜨거운 열기가 일어나더니 갑자기 그것은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다.
폭발!
작은 폭발이 연쇄적으로 일어났다. 그의 생사현관이 극적으로 타동되는 순간이었다. 그러자 천우의 몸에서는 믿을 수 없는 힘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화르륵!
그의 장심에서 청백색(靑白色) 화염이 일어나며 삽시에 호불위의 전신을 뒤덮었다. 실로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크아아아악--!"
천우와 호불위의 숨막히는 싸움을 완전히 간파한 사람은 없었고 다만 그들은 혈무와 순식간에 일어난 어마어마한 불길 속에서 처절한 단말마를 들었을 뿐이었다.
다음 순간 벌어진 광경에 중인들은 눈을 크게 떴다. 화염(火焰)에 휩싸인 채 마구 비명을 토해내는 한 인영을 목격한 것이었다.
호불위의 전신은 불덩이에 덮여 있었다.
"크아아악--!"
그는 소름이 끼치는 구슬픈 비명을 지르며 신형을 날렸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그는 중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어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벌어진 일이었고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기에 아무도 그를 저지하지 못했다.
한편 천우는 무엇인가 골몰한 생각에 빠진 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혈정원단신주(血精元丹神珠)의 신비한 힘이었다... 단주의 힘은 아직도 완전히 녹아 융화되지 않는 상태였다. 그것이 격발되어 그 중 일부가 다시 녹은 것이다!'그의 체내에는 천화신가의 오대가신이 죽음으로 연단한 원단신주가 있었다. 서서히 시간과 함께 그의 본신 내력과 어울려야 하는 것이었다.
호불위와의 일전에서 원단신주는 다시 녹은 것이었다. 그것은 외부의 충격에 의해 속성으로 격발된 것이었고 그로 인해 천우는 최후의 순간에 호불위를 물리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내공이 몰라보게 증진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사현관이 타동되면 무공의 성취는 몇 배로 고강해지게 된다. 그리하여 생사현관의 타동이야말로 모든 무림인들의 공통된 열망이 되었다.
천우는 호불위와의 일전에서 자신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연과 만나게 된 것이었다. 혈정원단신주의 진정한 내력은 아직 십분지 일도 드러나지 않은 상태였다.
천우는 일전이 끝나자마자 짧은 시간에 운기를 해보았다. 단전에서 백회열로, 다시 백회혈에서 회음혈까지 거침없이 흘러 다니는 장대한 기의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콰콰쾅!
뇌성벽력이 천지를 뒤흔들고 폭우가 광란하는 파도를 친다.
"크아아아--!"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한 개의 불덩이가 해안의 절벽으로 미친 듯이 질주해 갔다.
"으으... 으... 돌아온다... 반드시... 크흐흐흐......."그것은 사람의 음성이 아니었다. 흡혈악마의 저주스런 주문이었으며 악령의 신음소리였다.
"크아아아--!"
악귀의 저주 같은 신음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의 최후는 실로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그는 지독한 마공을 연공하여 사악한 마성을 지니게 되었지만 선천적인 심성은 본시 선했을 것이다. 그것은 만연령에 대한 그의 모순된 연심을 보면 알 수 있다.
최고의 인물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어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하나 호불위는 그 방법에 있어 잘못된 길을 선택한 것이다.
그는 지금 세상을 저주하며 죽어갔을 것이다. 그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아쉬워했을 것이다. 하나 결코 만연령에 대한 원한은 갖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진실로, 아니 자신만의 방식으로 만연령을 지독하게 사랑했기 때문이다.
섬광이 작렬한 순간 불덩이에 싸인 형체가 드러났다. 끔찍하게 타버린 얼굴과 옷은 그야말로 처참했다. 호불위의 최후를 뇌전과 폭우가 지켜보고 있었다.
휘-- 익!
천지가 다시 암흑에 잠기기 직전 그는 신형을 악마의 머리칼처럼 미친 듯이 광란하고 있는 바다 위로 던졌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다.
캄캄한 암흑은 철문처럼 빗장을 단단히 닫아 걸었다. 절벽 밑으로 떨어진 불덩어리는 바다 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용암처럼 바다는 붉게 물들었다.
다시 한 번 천지를 찢어놓을 듯한 천둥이 일었다. 그리곤 끝이었다. 육중하게 하늘을 덮고 있던 먹구름이 일제히 걷히기 시작했다.
무서운 밤이었다.
오년에 걸친 남천신도의 먹구름은 사라졌다.
삼안수사 호불위의 무섭고 치밀한 음모는 백일하(白日下)에 드러났으며 두 개로 갈라졌던 도인들도 마침내 하나가 되었다.
원로원주 하순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도주의 명으로 다시 개최된 원로회전에서 만기서군 천인보가 하순영의 뒤를 이어 원주로 임명되었다. 원로원은 만기서군에 의해 다시 구성되었고 남천신도는 새롭게 탄생되었다.
전화위복이랄까?
남천대제는 섬의 모든 일을 천우에게 이양했다. 천우는 만기서군과 십무광사를 쌍호법(雙護法)으로 임명했으며 섬의 체제를 강화시켰다.
혁신의 바람이 불었다.
남천선도는 새로운 희망에 부풀었고 새로운 도주(島主)는 젊고 강했다. 천우는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도인들의 마음에 깊이 신뢰와 존경의 뿌리를 내렸으며 그의 판단력과 모든 처사는 도인들을 만족시켰다.
짧은 보름 사이 남천신도는 완전히 개조되었다.
신풍(新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무엇보다 천우가 도인들의 숙원인 봉도(封島)의 해금(解禁)을 결행한 결단은 도인들로 하여금 무한한 새로운 출발의 의지를 심어 주었다.
천우는 수 백년에 걸친 기나긴 도인들의 숙원을 풀어 준 것이었다. 도인들은 가슴을 펴고 걸었으며 두 눈에서는 새로운 활기와 희망이 빛나고 있었다.
- 태을천목단경(太乙天木丹經).
- 신단수(神檀樹).
제왕오대신가의 하나인 남천신목가(南天神木家)의 정화(精華)인 이대지보를 취해야만 신목가를 이을 수가 있었다. 실상 호불위가 오년 간이나 송일기를 죽이지 않고 기다렸던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그는 그의 마령안을 극성으로 연공하면 천하의 송일기라도 자신의 수하처럼 부릴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태을천목단경과 신단수는 저절로 자신의 수중으로 굴러들어오게 될 것이고 자신이 도주가 되어 만연령과 살고 싶었다.
하나 문제는 호불위 자신만이 그렇게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이다. 그의 잘못된 탐심은 자신이 그렇게 사랑하는 만연령까지도 자신의 방식대로 취하려고 했다.
자고로 무림지보나 희대의 영약, 신화적인 동물들은 모두 자신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만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주인을 택하기도 한다고 전해져 온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더래도 호불위는 신목가 이대지보의 진정한 주인의 자질이 부족했다.
아무리 사소한 물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일단 그 물건에 탐심이 품은 자는 벌써 그것의 주인될 자격을 스스로 차버리는 격이다. 하물며 천하를 내어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을 신단수와 천목단경은 더 말할 나위가 없는 것이다.
장구한 무림의 역사도 그것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악을 이기는 것은 오직 의(義)뿐이다. 거짓은 진실을 뛰어 넘을 수 없고 탐심은 무소유를 거느릴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모든 무공의 근원인 자연의 이치이다.
이제 이대지보의 진정한 주인이 나타난 것이다.
천우는 섬의 대소사(大小事)를 만기서군 천인보에게 비밀리에 이양했고 모습을 감추었다. 그는 노도주 송일기의 명에 따라 도주만이 들어갈 수 있는 비밀 동굴에 든 것이었다. 그곳은 신목가(神木家)의 비역(秘域)이었다.
운무에 휩싸인 한 인영.
전신에서는 신성한 기운이 막중한 기세로 뻗어 나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촘촘하게 박힌 야명주가 사방 오십 장에 달하는 거대한 지하 석실을 비추고 있어 동굴 안에 만들어진 이곳은 마치 대낮처럼 환했다.
좌정을 한 그의 앞에는 옥으로 깎아 만든 작은 탁자 모양의 석대가 있었다. 그 위에 심하게 낡은 서책이 한 권 놓여져 있는 걸로 보건데 그는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 듯했다.
몇 번이나 그의 코와 입으로 운무가 뭉클뭉클 피어났다가 사방을 가득 메우더니 다시 그의 입과 코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지금 다섯 시진을 미동도 않고 있는 것이었다.
석회동굴인 듯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石筍)들이 천정과 바닥에 돌출되어 있었고 그것들이 맞붙어 만들어진 석주는 동굴을 미로처럼 만들었다.
주위로 삼장 가량 떨어진 곳에는 동굴 속인데도 불구하고 작은 연못 주위로 나무와 풀들이 자라고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나무엔 붉고 탐스런 열매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것은 바로 천 년만에 한 번 열린다는 천지신단영과였다. 비록 동굴 안이었지만 천지신단연과가 내뿜는 은은한 향기와 신령스런 기운은 마치 이곳이 무릉도원이라는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석실 한 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운공조식을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천우였다.
그런데 운무가 처음에는 백색이었다가 한 번씩 전신 경락을 타고 일주천할 때마다 청(靑), 적(赤), 황(黃)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운무의 색에 따라 천정과 바닥에 달려 있는 종유석과 석순(石筍)들도 같은 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조금만 더 자세히 원추형의 종유석과 석순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자신의 두 눈으로 직접 본다해도 머리를 흔들며 부정할 것이다.
종유석이 조금씩 자라다 줄어들었다가를 반복하는 것이다. 그것은 원래 오랜 세월을 걸쳐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한 인간의 힘으로 그것을 자라게 할 수 있을까? 그가 동굴의 든 지도 벌써 사십 여일이 지났다. 그동안 그의 무공은 범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신목가의 무공은 오행(五行)의 목(木)에 해당했으며 태을천목단경의 최대 기공을 연성하기 위해서는 목의 영기를 띤 천지신단영과가 필수적이었던 것이다.
천우는 그곳에서 비로소 신목가가 수백 년 간 봉도(封島)한 이유를 알아낸다. 또한 수십 년 전 천재지변이라 알고 있던 지진의 발생도 다 이유가 있었음을 발견한다.
전설의 신수(神樹)로 인한 지맥(地脈)의 변동 때문이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는 일천년 만에 열린다는 천지신단영과(天地神丹靈果)가 숙성되면서 한순간 지맥을 튀틀리게 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천우는 점점 무(武)의 지극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벌써 세 개의 오행신주와 연이 닿은 것이었다. 그 구슬들은 천우의 무공을 일취월장시키는 놀라운 힘이 숨어 있었다.
'후후... 지금쯤 만연령과 초초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보고 싶구나. 여기 들어온 지도 시일이 꽤 지난 것 같은데.......'그는 운기조식을 마친 듯 눈을 떴다. 그런데 그의 눈빛은 너무나 평범했다. 흡사 무공을 전혀 모르는 사람의 눈빛 같았다. 하나 그것이야말로 신화경(神化境)에 든 선인의 심안(深眼)이었다. 그는 태을신목단경을 구성까지 성취했다. 수백 년 전통의 신목가에서도 그것은 유일한 것이다. 그런데 신목단경 하나만으로는 신이 아니고선 극성의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실로 불가능하다.
그가 가지고 있는 천목신주 뿐만 아니라 천화신주, 토행신주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태을신목단경을 극성까지 성취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두 개 이상의 오행신주를 가지고 있어야 했다.
물론 천우는 천화신주와 천목신주, 그리고 토행신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들이 서로 상생(相生)의 기운을 일으키며 그의 성취를 도왔다. 그러던 중 천우는 오행신주와 지극천단의 비밀을 어느 정도 풀게 되었고 그의 무공은 가히 입신의 경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 노부는 무림맹을 이끌고 마물 사영환을 척살했다. 하나 그 자는 노부에게 반드시 전인을 남겨 복수를 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노부는 그 자에겐 충분히 그럴 힘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안배는 그로부터 삼백 년 후에 완성될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는 스스로 천령개를 찍어 자결하고 만 것이다. 노부는 점목(占木)을 만들어 점을 치고 천리(天理)를 살핀 결과 정말 삼백 년 후에 가공할 혈겁을 일으킬 마성을 지닌 자가 태어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하나 노부는 세성(歲星)과 화성(火星)과 일곱 개의 조성좌(鳥星座)를 찬찬히 살핀 연후에야 비로소 천년 무림안위에 대한 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시기에 오행신주가 합쳐져 지극천단의 전설을 완성할 신골(神骨)이 태어남을 말해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노부는 남천신도에 본가를 세우고 그를 도울 초정예 고수를 키우기 위해 삼백 년 동안의 봉도(封島)을 명했노라... 만일 이 서신을 읽고 있는 후예가 오행신주를 두 개 이상 지니고 있다면 필시 그대는 천인이 되어 무림의 천년안위를 이룩할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이제 분명해졌군.......'
천우는 동굴에 들어와서 태을신목단경 속에 들어 있던 서신의 내용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삼백 년 전 희대의 마물 사영환을 척살한 장본인이 바로 천우의 육대조 무종선사(武林禪師) 송영(宋零)이었다.
그는 운공조식을 마치고 천천히 동굴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 앞에서 눈부신 햇살이 그를 반기고 있었다. 과연 그에게서 지극천단의 전설이 이루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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