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수]에서 1인 2역으로 열연한 배우 지진희가, 최양일 감독을 처음 봤을 때 [야쿠자 같았다]라고 말했다. 맞다. 최양일 감독은 야쿠자처럼 무섭게 생겼다.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산적처럼 생긴 크고 장대한 몸집에 얼굴에는 턱수염과 구레나룻까지 까칠까칠하다. 눈빛도 사납고 무섭다. 깊은 산속에 떨어트려도 억센 생존본능으로 혼자 살아서 걸어 내려올 것 같은 이 남자 최양일.
[수]의 시사회에서 감독과 배우의 무대 인사를 기다리고 있는 데, 주최 측에서 조금 늦는다고 양해를 바란다고 했다. 최양일 감독이 일본어로 말하기 때문에 통역 때문에 더 시간이 걸린다고 덧붙였다. 15분쯤 지나서 [수]의 감독과 배우들이 무대로 들어왔다. 먼저 최양일 감독부터 무대 인사를 했다. 그러나 주최 측과는 다르게 그는 한국어로 말을 했다. 능숙하지는 않았지만 같이 일한 스텝과 배우들에게 한국어로 고마움을 표했고 시사회 참석자들에게도 재미있게 봐달라고 우리말로 인사를 했다.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활동하면서 일본 국적이 아닌데도 일본감독협회이사장을 두 번이나 역임하고 있는 최양일 감독이 한국어를 크게 불편하지 않게 구사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재일 조선학교를 나오기도 했지만 몇 년 전 한국에 와서 한국어를 공부했기 때문이다. 최양일 감독이 한국에서 한국말을 공부한 것은 이유가 있다.
맨 마지막에 무대 인사를 한 문성근은, 10여년전 부터 한국 영화계에서 최양일 감독에게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을 했는데 이번에 이루어지게 되었다면서 앞으로도 최양일 감독이 한국에서 다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왔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역시 문성근은 말을 잘 한다. 같은 내용이라고 해도 그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화술을 구사한다.
최양일 감독은 1949년 일본의 나가노현에서 태어났다. 우리 나이로 예순이 다 된 그는 재일교포 2세인 셈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을 방문하기 시작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는 도쿄의 조선 중고급 학교를 졸업했다. 재일 조선학교에 관한 다큐멘타리 [우리 학교]를 보면 일본 내의 소수자로 재일 한국인들이 어떤 차별 대우를 받고 살아가는가를 잘 알 수 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민단 계열이 아니라 조총련계 학교를 나온 최양일 감독은, 학창시절 전투를 하며 살았다. [우리 학교]를 보면 여학생들이 검은 치마 저고리를 입고 등교할 때 남학생들은 일본 우익들로부터 여학생들을 지키기 위해 항상 긴장해야 했고, 학교를 사수하기 위해 몽둥이를 들고 언제나 싸워야만 했다는 술회가 있다. 최양일 감독이 조선 학교를 다녔을 때는 일본 사회가 정치적으로 가장 요동쳤을 때였다.
반미 반제국주의 투쟁이 격렬하던 1968년, 최양일 감독은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영화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무라카미 류의 소설 [69](이 소설은 2005년, 역시 조선학교를 졸업한 재일교포 감독 이상일에 의해 영화화되었다)의 배경이 되는 1969년을 봐도 전공투 사건 등으로 당시 일본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나를 알 수 있다. 최양일 감독은 그 시절, 선배를 따라 영화 현장에서 일을 했다. 조명 조수였고 소도구 담당이었다. 1972년부터는 TV 프로그램의 조감독 일을 했다.
태평양 전쟁 직후, 아베 사다라는 이름의 매춘부가 남자의 성기를 절단한 실제 사건을 소재로 한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감각의 제국]에서 최양일 감독은 조감독을 맡았다. 주연 남녀 배우의 실제 섹스가 등장하고 특히 남자의 성기를 자르는 마지막 씬이 국제 영화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던 작품이다. 최양일 감독의 회고에 의하면 오시마 나기사 감독은 [성질이 불같은 사람]이고 자신도 수없이 야단을 맞았는데, 드디어 촬영 막바지에는 오시마 나기사 감독의 지적에 자신도 상을 엎어버리며 들이댔다고 했다.
1983년 최양일 감독은 [10층의 모기]를 찍었다. 데뷔작이다. 그는 이 데뷔작으로 마이니치 신인감독상과 요코하마 영화제 신인감독상을 받았다. 흥행에서도 성공을 했다. 하드보일드 야쿠자영화였다. 기타노 다케시가 비트 다케시라는 이름으로 출연한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사이 요오이치라고 불리는 최양일 감독의 이름이 국내 언론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0년 뒤인 1993년 무렵부터였다.
최양일 감독의 영화중에서 가장 흥행에 성공한 코미디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재일교포 택시 운전수를 소재로 한 영화다. 데뷔작 이후 [언젠가 누군가 살해당한다](1984년)[친구여, 조용히 잠들라](1985년)[검은 드레스의 여자](1987년)[A사인 데이즈](1989년) 등의 영화에서 하드 보일드 스타일을 밀어붙이던 최양일 감독은 1993년, 동경의 밤거리를 운행하는 심야 택시 운전수를 주인공으로 재일교포 문제를 제기한 사회 코미디를 만들었다. 그러나 다시 [막스의 산](1995년) 그리고 국내에도 소개된 [개 달리다](1998년) 등에서 예전의 스타일로 복귀했지만 확실히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 이후는 조금 다르다.
[나는 학생 때 운동권으로 살았다. 나도 청춘의 기억에서 해방되고 싶다. 정치적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니까 모든 게 별 것 아닌 것으로 보인다.]
2004년 한국에서 최양일 감독의 회고전이 열렸다. 일본에서 개봉된 최양일 감독의 영화들을 한꺼번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였다. 그리고 2006년 최양일 감독이 직접 각본 작업에 참여한 [수]의 촬영이 시작되었다. [수]는 한국 관객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영화가 될 것이다. [수]는 복수의 이야기이다. 동시에 [수]는 [수]라고 불리던 암흑가의 해결사인 장태수(지진희 분)를 뜻하기도 한다. 장태수는 19년 전 헤어진 쌍둥이 동생 장태진(지진희 분)과 재회하는 순간, 킬러가 쏜 총에 머리를 관통당하며 동생 태진이 죽어가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다. 태수의 복수의 상대는 19년전 그들 형제를 헤어지게 했던 마약 보스 구양원(문성근 분)이다.
손으로 귀를 잡아 뜯고 눈알을 뽑는 잔혹한 액션, 양동이로 쏟아 부은 듯 흥건하게 고이는 검붉은 피로 물든 화면은 원초적 생명력을 갖고 있다. 서사적 전개에 있어서 큰 얼개는 있지만 각 장면들이 갖고 있는 미시적 정치함은 부족하다. 중요한 것은, 세밀한 인간관계나 섬세한 감정묘사가 아니라 액션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공중을 날아 멋진 이단 옆차기를 한다거나 벽을 타고 점프해서 두세명의 적들을 한번에 쓰러트리는 장쾌한 액션은 아니다. 서로의 목을 조르고 엉겨 붙는 본능적 개싸움 같은 육탄전이 화면을 가득 메운다.
[수]의 [복잡한 문제]는 오랫동안 일본이라는 토양에서 처절하게 싸워 가며 생존을 해야 했던 한국인 감독이, 처음으로 한국 영화인들과 만나 한국어로 영화를 만드는 데서 오는 시차에서 발생한다. [수]에는 지금까지의 어떤 한국 영화에서도 볼 수 없는 처절한 액션이 등장하고 엄청난 피 비린내가 진동하지만, 이상하게 그런 것들이 현실감을 갖고 정서적 울림을 전해주지 못한다. 왜 그럴까? 나는 그것이 최양일 감독의 시차 적응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최양일 감독은 아직 한국어로 사고하고 한국어로 발성하는 방법과 자신의 코드를 일치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일상적 삶을 살고 있는 문화권을 벗어나 다른 문화권에서 영화를 감독한다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다. 무대 인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듯이, 최양일 감독의 한국말 소통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달은 지금 어디에 떠 있는가?]나 [개 달리다][피와 뼈] 같은 작품과는 다르게, [수]가 입천장에 척척 달라붙지 않는 것은 무엇일까? 작품을 바라보는, 그리고 캐릭터를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설명하기 힘든, 아주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 그런 것들이 감독과 배우 혹은 감독과 스텝 그리고 감독과 한국 관객 사이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한국 영화의 도전정신이 좋았다. 아시아 여러 나라에서 영화를 만드는 게 꿈이었고 그 출발점이 서울이기를 바랬다]
최양일 감독의 오랜 소원은 제주도의 4.3 사태를 소재로 영화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한국 내에서는 잊혀진 한국사의 거대한 비극을 연출하기 위해 조선학교 졸업 후 거의 쓰지 않은 한국어를 다시 배웠다. 최양일 감독이 4.3 사태를 소재로 한국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수]의 흥행이 말해줄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