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ne(칸나)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주도 바리(Bari) 북쪽 폿지아(Foggia) 지역에 칸나 유적지가 있다. 찾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은 곳이지만 이곳은 고대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칸나 유적지 입구
한니발의 이동 경로
명장 한니발을 자마 전투에서 승리한 로마 장군 스키피오가 전쟁이 끝난 9년 후 우연히 로도스 섬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이미 잘 아는 사이였기에 비록 전쟁터에선 맞서 싸웠지만 서로를 존중하고 있었다. 스키피오는 한니발에게 경의를 표하고 정중히 물었다.
“우리 시대 가장 뛰어난 장수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한니발은 즉석에서 대답했다.
“마케도니아 왕 알렉산더요. 그는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경계를 훨씬 넘어 정복한 업적은 실로 위대하다고밖에…”
스키피오가 다시 물었다.
“그럼 두번째로 뛰어난 장수는 누구입니까?”
한니발은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에페이로스 왕 피로스요. 그는 병법의 천재이고 숙영지 건설의 중요성을 처음으로 인식한 사람이기도 하오.”
스피키오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세번째는?”
이에 한니발은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물론 나 자신이오.”
자마 전투에서 한니발을 이긴 스피키오가 이 말에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만약 장군이 자마에서 나를 이겼다면?”
한니발이 당연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내 순위는 피로스를 앞지르고 알렉산더도 앞질렀을 것이요.”
1.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다.
기원전 218년.
75만명의 동원력을 가지고 있던 로마에 대항하여 2만 6천명의 병력으로 쳐들어온 한니발은 숫자로만 보아도 무모한 감행이었다.
그러나 그는 스페인 피레네 산맥을 넘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에 진입한 후 파죽지세로 남하하였다.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병력이 5만 9천이었고 갈리아를 지나 론강 건널 때 4만6천이었으니 1만 3천을 잃은 것이고 그 후 보름간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 땅에 내려선 지점에선 보병 2만과 기병 6천이었으니 알프스에서 잃은 손실된 병력은 무려 2만이 넘는다. 출발 당시 생각할 때 무려 3만3천 병력을 잃은 셈이다. 하지만 29살의 젊은 한니발에 머리엔 이것까지 계산을 다 넣고 있었다.
2.트라시메노 전투
로마군대는 트레비아 패전으로 북쪽을 상실하면서 한니발의 남하를 저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승전을 올리며 남하하던 한니발 부대는 기원전 217년 트라시메노에서 역사의 한 페이지를 남겼다.
지금도 이탈리아 움부리아 지방의 트라시메노 호수에 가면 페루지아로 넘어가는 준고속도로를 옆으로 동북쪽에 긴 구릉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바로 2200년 전 한니발의 군대가 이곳에 매복하고 있었다.
야간 습격을 두려워한 로마군대는 이른 아침 그곳을 통과했다. 카르타고 군대가 이미 페루지아로 넘어갔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짙은 안개속에 한치 앞도 분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니발군대는 남쪽 호수부분만 남겨 놓고는 로마군을 사면초가로 만들어 버렸다.
지금도 그곳의 안개가 끼면 운전이 매우 힘든데 이 자연기상까지 한니발이 예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의 기상은 그랬던 것이다.
그날 전투는 전투가 아니라 살륙이었다. 그날 단 3시간만에 로마 2만 5천명 병력 가운데 1만7천명이 전사했다. 이에 반해 한니발의 전사자는 2천명에 불과 했고 그것도 대부분 그들이 데려온 용병 갈리아인들이었다. 그날 로마 총사령관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했다.
이 전투 이후 당시 로마에선 한니발이 온다고 하면 우는 아이들도 울음을 그칠 정도였다.
트라시메노 전투로 토스카나 지방을 잃어버린 로마인들은 이제 그곳으로부터 불과 사흘이면 당도할 수 있는 한니발의 군대를 생각하며 떨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로마는 이제 보병 2군단과 기병 2군단의 병력으로 한니발과 엇비슷한 병력으로 대치할 상황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의 행동은 항상 예측을 빗나갔다. 한니발은 로마를 바로 공격하기보다 우선 주변을 정리한 다음 로마를 궤멸시키고자 하였다. 이것은 1차 포에니 전쟁으로부터 얻은 교훈이었다. 주변 로마 동맹국들을 로마로부터 등을 돌리게 하지 않으면 로마를 정복해도 그들의 공격에 대항하기 힘들다는 결론이었다. 역사엔 ‘단’이란 가정이 없다고 하지만 그때 바로 로마를 공격했더라면 물론 역사는 뒤바뀌었을 것이다.
3. 칸나 전투
이탈리아 남부로 기수를 돌린 한니발에게 로마의 대항법은 그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투력을 증강시킨 로마는 1년 후인 216년 로마 보병 4만과 기병 2천4백, 그리고 동맹국 보병 4만과 기병 4천8백 총 8만7천의 병력으로 한니발을 추격하였다.
한니발의 병력은 보병 2만 기병 6천으로 출발 당시 군사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고 흡수한 갈리아 병력 보병 2만과 기병 4천으로 총 5만의 병력을 소유하고 있었다.
추격하는 로마군에 달아나듯 남하하던 한니발 군대는 칸나(Canne) 에 멈추었다. 이곳은 지금도 대평원으로 당시 식량 저장지의 하나였고 그래서 겨우 열흘치의 식량밖에 없었던 한니발의 군대는 이곳에서 식량을 조달한 뒤 더 이상 이동하지 않고 언덕에 진을 치고 로마군을 기다렸다.
한니발군대가 진쳤던 칸나언덕
그들은 오판토강을 경계로 두 달간 대치하며 소규모 전투를 벌였다. 그런데 대부분 로마인들이 이겨 로마인의 사기가 높아졌다. 그러나 고수의 수법은 따로 있었다. 마치 처음에는 일부러 져주다 나중 몽땅 터는 수법을 쓴 것이다. 전투욕에 불탄 로마군은 접근 거리 10키로를 유지하다 2키로까지 접근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마치 낙심한 듯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날 역사상 가장 획기적인 칸나 전투가 벌어졌다.
먼저 로마의 전면 공격이 시작되었다. 한니발 군대(지도상 파랑 색)의 전방에 나서 로마군(지도상 붉은 색)을 막던 갈리아 부대는 로마군에게 밀리다 결국은 이탈하였다. 이로 뒤에 배치되었던 한니발의 정예 부대가 로마군과 정면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갈리아 부대의 이탈은 고의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이탈하여 후진해 있던 로마군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한니발의 소수 정예 부대가 물밀듯 밀려오는 로마군을 악전고투로 막고 있는 사이 주변을 정리한 갈리아 부대가 로마군대 뒤로 협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로마군대는 독안에 든 쥐가 되어버렸다. 이것은 한니발의 주특기 작전인 포위작전이었으며 섬멸작전이었다.
로마병사의 희생자는 8만에 가까웠다. 반면 한니발의 전사자는 불과 5천5백명이었고 그나마 3분의2는 갈리아 병력이었다. 당시 로마병사들의 손에서 빼낸 금반지(도장)를 쌓았는데 마치 산과 같았다.
로마군대 총사령관 집정관 바로는 기병 50기만 이끌고 도망하였고 살아남은 자는 겨우 보병 4천과 기병 200에 불과했다. 전부 합쳐도 1만명이 채 안되는 숫자였다.
군장들은 한니발에게 때를 놓치지 말고 바로 로마를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한니발은 아직도 시기상조로 생각하였다. 그는 로마의 붕괴를 로마 연합의 붕괴로만 이뤄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의 생각은 결국 눈 앞에 둔 로마를 영원한 시간으로 뒤돌려 보낸 것이다.
4. 한니발의 종말
로마의 명장 스피키오에 의해 역으로 본토 카르타고가 침략을 당하자 한니발은 거의 점령한 이탈리아를 두고 본국으로 철수할 수 밖에 없었다.
15년이 지난 기원전 201년.
카르타고 본토 자마에서 일대 마지막 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로마 스피키오의 병력은 4만이었고 한니발의 군대는 5만으로 우위에 있었고 어디까지나 홈 경기였다. 그러나 이미 한니발의 전법을 3번의 전투에 걸쳐 읽은 스피키오는 처음 돌진하는 코끼리 부대를 무력화시킴으로(전열을 넓게 잡았다가 코끼리 돌진 시 전열을 일직선 부대로 좁혀 통로를 만들어 일단 돌진하면 직진하는 코끼리를 그냥 통과하게 하였다) 전투의 양상을 완전히 바꾸어 오히려 로마군을 포위하려던 카르타고 군대가 역으로 포위당하여 전멸당하고 말았다. 5만 병력 중 살아남은 자가 겨우 4천에 불과했다.
패전 이후 한니발은 시리아로 망명하여 재기를 노렸으나 결국 기원전 183년 천추의 한을 풀지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이 후 기원전 146년, 3차 포에니 전쟁속에서 700년의 화려했던 고도 카르타고는 로마군의 공격에 불타며 영원히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칸나 지역
칸나에서 바라본 평야
평야 중간에 오판토 강이(아주 작은 강) 흐른다.
2200여년전 이곳에서 그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