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度遼將軍, 遼水 渡河軍의 總司令官이다. [제1편]
〈요동(遼東), 요서(遼西)〉란, 땅 이름(地名)이다.
○ 한국사(韓國史)를 논(論)하면서,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라는 ‘땅 이름’을 쏙 빼버리고 나면, 조선사(朝鮮史)와 소위(所謂) 말하는 중국사(中國史)를 논(論)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두 지방(地方)을 빼버리고 나면 ‘역사얘기’는 빈껍데기만 남기 때문이다.
【소위(所謂) 중국사(中國史)라는 것은, 그 실체(實體)가 20세기(世紀) 초(初) ‘손문(孫文)’의 신해혁명(辛亥革命)으로 탄생(誕生)한 나라이름(國名)에서 출발(出發)하기 때문에, 중국사(中國史)라고 한다면 : 20세기(世紀) 초(初)부터 시작(始作)된 현대사(現代史)를 말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은, 옛 상고시대(上古時代)로부터 청(淸) 왕조(王朝)까지 모두를 중국사(中國史)라고 한다. 이는 절대적(絶對的) 모순(矛盾)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중국(中國)이란 나라 이름은, 20세기(世紀) 초(初)에 처음 사용(使用)된 것이기 때문이다.】
〈요동(遼東), 요서(遼西)〉란 ‘요수(遼水)’를 기준(基準)하여, 그 동(東)쪽을 “요동지방(遼東地方)”이라 하고, 그 서(西)쪽을 “요서지방(遼西地方)”이라고 한다. 이걸 모르는 역사학도(歷史學徒)는 없다. 역사(歷史)에 조금이라도 관심(關心)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는 흔하디흔한 내용(內容)이다.
그런데 여기서… … 「그렇다면 ‘요수(遼水)’는 어떤 하천(河川)을 말하는가?」 하는 질문(質問)에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역사학계(歷史學界)에서 말하는 요수(遼水)는, 확정적(確定的) 논거(論據)를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이 강(江)이다. 저 강(江)이다.” 라고 말로만 떠들고, 설(說)만이 파다(頗多)하기 때문이다.
강단(講壇)이나 재야(在野)나 할 것 없이 똑같다. 하북성(河北省)의 영정하(永定河)로부터 난하(灤河), 요녕성(遼寧省)의 주류하(周流河) 또는 요하(遼河), 또는 압록강(鴨綠江)등등 설(說)만이 난무(亂舞)할 뿐이다.
○ 〈요동(遼東), 요서(遼西)〉는 조선사(朝鮮史)의 근간지지(根幹之地)이다. 오늘은 소위 정사(正史)라고 자타(自他)가 인정(認定)하고 있는 「전한서(前漢書)와 후한서(後漢書) 및 위략(魏略), 자치통감(資治通鑑)」등을 위주(爲主)로, “요하(遼河)=요수(遼水)”와 이에 따른 “도요장군(度遼將軍)”에 대한 역사서(歷史書) 기록(記錄)을 살펴보기로 하자.
➊〈도요장군(度遼將軍) : 전한(前漢) 소제(昭帝) 원봉(元鳳)3년【BC78】때 처음으로 만들어진 장군(將軍)의 직책(職責) 이름(名)으로, ‘요하(遼河)=요수(遼水)’를 도하(渡河)하는 군대(軍隊)를 총(總) 지휘(指揮)하는 사령관(司令官)의 직책(職責)이다.〉 라고 설명(說明)한다.
이게 핵심(核心)적인 내용(內容)이다. 고전(古典) 원문(原文)과 옛 학자(學者)들이 주석(註釋)을 통해 다 설명(說明)해주고 있는데, 후대인(後代人)들이 이를 정치적(政治的)으로 악용(惡用)하면서, 왜곡(歪曲)과 조작(造作)이 된 것이다.
➋ ➨〈遼東(요동)과 遼西(요서)를 가르는 요수(遼水)의 동(東)쪽은 조선(朝鮮) 땅이다. 따라서 “도요장군(度遼將軍)”이란 조선왕조(朝鮮王朝)【총칭(總稱)】의 요서지방(遼西地方) 진출(進出)을 막고,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을 막고자 설치(設置)했었다.〉고 밖에 해석(解釋)될 수밖에 없는 상황(狀況)이다.
➨ 그러나 실제(實題) “도요장군(度遼將軍)”은 : 동(東)쪽 지방이 아닌 : 서북방(西北方)지대(地帶)의 흉노(匈奴)【총칭(總稱)】의 침략(侵略)과 약탈(掠奪)을 막고, 이들을 토벌(討伐)하는 기록(記錄)을 보면, 동(東)쪽의 조선(朝鮮)과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➌ 「度 遼 將 軍」 : 〈도요장군(度遼將軍)이란, 장군(將軍)의 호칭(呼稱)으로, 쉽게 말하면, 북부(北部) 변방(邊方)사령관(司令官)이다. “도요(度遼)”는 “요수(遼水)를 건넌다.”는 뜻이며, 요수(遼水)를 건너 적(敵)을 토벌(討伐)하러 출정(出征)하는 군대(軍隊)의 총사령관(總司令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제도(制度)는, 전한(前漢)의 소제(昭帝)때 처음 실시(實施)했는데, 범명우(范 朋友)가 도요장군(度遼將軍)에 임명(任命)되었고, 후한(後漢) 역시 이 제도(制度)를 답습(踏襲)하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➍ 「度 遼 營」 : 도요영(度遼營)이란, 진지(陣地)를 말하는 것으로, 요수(遼水)를 건넌 병사(兵士)들이 주둔(駐屯)하고 있으며, 휴식(休息)을 취하고, 병사(兵士)들의 훈련(訓練)과 보급(補給)등을 위해 설치(設置)한 전방(前方)의 군사기지(軍事基地)를 말한다.
역사통설(歷史通說)에서는 : 현재(現在)의 내몽고(內蒙古) 황하(黃河) 북안(北岸)에 있는 오원(五原)의 서북방(西北方)에 있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장안(長安)에서 북(北) 또는 서북(西北) 800km∼1,00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고 말한다.
「요수(遼水)를 건너, 적(敵)을 치러간다」는 장군(將軍)의 명칭(名稱)이, 생길 정도(程度)라면, 아주 큰 하천(河川)이었기 때문에 강(江)을 건너가는 것이 매우 험난(險難)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에는, 많은 적(敵)들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➎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요수(遼水)”는, 소위(所謂) 말하는 역사통설(歷史通說)의 중국사(中國史)와 조선사(朝鮮史)의 경계점(境界點)과 같다. 곧 요수(遼水)를 건너… …
… 그 동(東)쪽은,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역(領域)이다.
… 그 서(西)쪽은, 중원왕조(中原王朝)의 영역(領域)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觀點)은, 「역사서(歷史書) 원전(原典)에 의하면 : 전혀 다르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상식(歷史常識)과 원전(原典)의 기록(記錄)이 다르다는 것은, 우리들이 알고 있는 역사상식(歷史常識)은, 소위(所謂) 공교육(公敎育)으로부터 시작(始作)된 것이고, 공교육(公敎育)은 왜곡(歪曲)되고, 조작(造作)된 역사상식(歷史常識)을 교육(敎育)시켰다는 얘기다. 쉽게 말하면 말이다.
오늘날 세계인(世界人)들이, 한국인(韓國人)들이 알고 있는 역사(歷史)지식(知識)이란 것들은, 대부분 1,910년 이후(以後)로부터 공교육(公敎育) 현장(現場)에서 세뇌(洗腦)된 것들이다. 1,910년 이후 지금(只今) 이 순간(瞬間)까지 그 교육(敎育)은 계속되고 있다.
○ 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活動)영역(領域)에 대해, 하나하나 들여 다 보기로 하자. 【여러 차례에 걸쳐 우리 카페에서 논의(論議)되고 게재(揭載)된 내용이나, 이를 보완(補完), 보충(補充)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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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요장군(度遼將軍)의 활동(活動)영역(領域)
(1) 資治通鑑 漢紀15 孝昭皇帝上.元鳳三年.癸卯,公元前七八年.
《冬,遼東烏桓反.初,冒頓破東胡,東胡餘衆散保烏桓及鮮卑山為二族,世役屬匈奴.: 겨울, 요동(遼東)의 오환(烏桓)이 반(反)했다. 처음, 모돈(冒頓)이 동호(東胡)를 깨뜨리자, 동호(東胡)의 남은 무리들이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에 흩어져 두 종족이 보존(保存)했는데, 대대로 흉노(匈奴)에게 부역하였다. 【注 :遼東郡屬幽州,唐嘗置安東都護府於其地.東胡破見十一卷高祖六年.: 요동군(遼東郡)은 유주(幽州)에 속했다. 당(唐)이 일찍이 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 그 땅이다. 동호(東胡)를 깨뜨린 것은 11권 한고조(漢高祖) 6년 조를 보라.】 後 漢 書 : 烏 桓 之 地 在 丁 零 西 南、烏 孫 東 北。: 후한서(後漢書)에서 이르기를 : 오환(烏桓)의 땅은, 정령(丁零)의 서남(西南),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에 있다. 【武帝遣霍去病擊破匈奴左地,因徙烏桓於上谷,漁陽,右北平,遼東,遼西五郡塞外,為漢偵察匈奴動靜.: 무제(武帝)가 보낸 곽거병(霍去病)이 흉노좌지의 땅을 깨뜨리니, 이로 인하여 오환(烏桓)은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동(遼東), 요서(遼西)등 5군의 변경 밖으로 옮겨가니, 한(漢)나라에서는 흉노(匈奴)의 동정(動靜)을 정찰(偵察)하였다. 其大人歲一朝見,於是始置護烏桓校尉,秩比二千石.鮮卑先遠竄於遼東塞外,與烏桓相接,未嘗通中國:至後漢稍徙遼西塞外,始為中國患. : 그 대인(大人)이 한 해에 한 번 조정(朝廷)에 왔다. 이때 처음으로 오환(烏桓)교위(校尉)를 두었는데, 녹봉이 2천석이다. 선비가 먼저 요동(遼東) 새외(塞外)로 스며들었는데, 오환(烏桓)과 서로 접하고, 중국과는 일찍이 통하지 못했다 :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점점 요서(遼西)새외(塞外)로 오니, 처음으로 중국(中國)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중략(中略). 霍光更問中郎將范明友,明友言可擊,於是拜明友為度遼將軍. : 곽광(霍光)이 재차 중랑장(中郎將) 범명우(范明友)에게 묻자, 범명우(范明友)가 공격하는 것이 옳다고 말하자, 이에 범명우(范明友)에게 도요장군(度遼將軍)을 내렸다.【度遼將軍,蓋使之度遼水以伐烏桓.至後漢,遂以為將軍之號以護匈奴.: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너 오환(烏桓)을 정벌(征伐)하는 사신이다.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장군(將軍)의 이름으로 흉노(匈奴)를 아우르는 것이다.】》
위의 내용(內容)은, 기원전(紀元前:BC) 78년의 이야기다.
➊ 흉노(匈奴)가 동호(東胡)를 공격(攻擊) 격파(擊破)하자, 선비(鮮卑) 부족(部族)들은 흩어져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으로 숨어 들어가 보존(保存)했는데, 이 산(山)의 이름으로 인하여, ‘오환(烏桓)과 선비(鮮卑)’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重要)한 것은, “오환산(烏桓山)과 선비산(鮮卑山)”인데, 이 두 산(山)을 찾을 수 있는 단서(端緖)가 너무 부족(不足)하다.
➋ 오손(烏孫) : 오손(烏孫)은, “푸른 눈(靑眼)과 붉은 수염을 가진 종족(種族)으로, 그 형상(形相)이 미후(獼猴)와 같다.” 고 하였는데, 일천(一千) 5,6백년 뒤의 조선(朝鮮) 연행사신(燕行使臣)들이 몽고인(蒙古人)을 보고, 기록(記錄)한 바에 따르면, 이들과 똑같은 형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다. 전한서(前漢書)에 의하면 : 장안(長安)으로부터 8,900 리 떨어져 있다고 하였는데, 이들은 오늘날의 “러시아(Russia) 및 타타르(Tatar) 백인계열(白人系列)”의 종족(種族)이다.
인종적(人種的)으로 보면 : 당시(當時)의 “오손(烏孫)족과 몽고족(蒙古族)”은 동일(同一)혈통(血統)일 가능성(可能性)이 매우 크다. 그 형상(形相)이 똑같았기 때문이다.
장안(長安)으로부터 8,900 리라면 : 주척(周尺)의 180장이 1리(415.8m)로 보면, 대략(大略) 오늘날의 〈우랄산맥(Ural 山脈)까지에 이른다.〉
➌ 《度遼將軍,蓋使之度遼水以伐烏桓.至後漢,遂以為將軍之號以護匈奴. :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요수(遼水)를 건너 오환(烏桓)을 정벌(征伐)하는 사신이다. 후한(後漢) 때에 이르러, 장군(將軍)의 이름으로 흉노(匈奴)를 아우르는 것이다.》 여기서 보다시피, 요수(遼水)를 건너, 조선(朝鮮)이 아닌 흉노(匈奴)를 토벌하기 위한 것이다. 특히 오환(烏桓)족을 토벌하기 위함이다.
➍ 위의 설명(說明)에 따른 “요수(遼水)”는 수경(水經)에 기록(記錄)된 하천(河川)이름이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요수(遼水)”는,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 또는 반도(半島) 북방(北方)과는 전혀 관계(關係)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런 곳에서 “요수(遼水)”를 찾으려하는 어리석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또 하나, 요수(遼水)를 기준(基準)하여, 요동(遼東)과 요서(遼西)가 나누어지고, 요동(遼東) 땅은 조선(朝鮮)의 근간지지(根幹之地)였다고 하며, 「맥(貊) 또는 예맥(穢貊) 또는 마한(馬韓)과 구려(駒驪)」는 때때로, 요서(遼西)지방의 군현(郡縣)들을 침략(侵略), 약탈(掠奪)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말한다.
요동(遼東) 땅엔 이미 구려(駒驪)가 자리 잡고 있었을 시기(時期)에, 오환(烏桓)이 요동요서(遼東遼西) 새외(塞外)지역으로 스며들어 약탈(掠奪)했다고 하는데, 이들이 구려(駒驪)를 침략(侵略) 또는 약탈(掠奪)했다는 기록(記錄)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요동지방(遼東地方)은, 이미 “구려(駒驪)”가 자리 잡고 있었고,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하여, 요서(遼西)지방을 공략(攻掠), 태원(太原)【오늘날의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이다.】 까지도 진출(進出)했었다고 한다면, 전한(前漢)이나 후한(後漢)등의 입장(立場)에서는, 오환(烏桓)보다도 오히려 “구려(駒驪)”가 더 골치 아픈 존재(存在)였을 것이고, 일차(一次) 토벌(討伐) 대상(對象)은 ‘오환(烏桓)’이 아니라 ‘구려(駒驪)’였다는 말이다.
➨ 요동(遼東)의 새외(塞外)지역을 오환(烏桓)이 스며들어 괴롭혔다면, 오히려 구려(駒驪) 또는 맥(貊)등이 이들을 토벌(討伐)해야 한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구려(駒驪)도, 맥(貊)도, 오환(烏桓)도 서로 간에, 침략(侵略)했다거나 약탈(掠奪)했다는 어떤 기록(記錄)도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 조선사(朝鮮史)의 진실(眞實)이 담겨져 있다고 보는 것이다.
중국(中國)측에서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하면 : 가장 먼저 맞이하는 것이 요수(遼水)변에 주둔(駐屯)하고 있던 “구려(駒驪) 병사(兵士)” 일 것이다. 【이건 후대(後代)의 수양제(隋煬帝)나 당태종(唐太宗)때의 요수(遼水)를 건너, 고려군(高驪軍)과 접전(接戰)을 벌여 많은 사상자(死傷者)가 생겼다는 것으로 증명(證明)된다.】 그런데 요수(遼水)를 건너가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하러 가는 장군(將軍)의 직책(職責) 이름이라는 설명(說明)은 뭔가?
“요서(遼西) 새외(塞外)”는, 요수(遼水)의 서(西)쪽에 있는 땅이므로,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할 필요(必要)가 없다. 그러나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했다면, 그곳은 “요동(遼東) 땅”이다. 「도요장군(度遼將軍)이 요수(遼水)를 건너는 군대(軍隊)의 총책임자(總責任者)」라는 말은, 곧 그곳(요수:遼水)을 건너면, 요동(遼東) 땅이란 이야기다. 이게 중요(重要)한 사실(事實)이다.
➎ 「요동(遼東)」땅에는, 이미 구려(駒驪)가 터전을 잡고, 맥(貊) 또는 예맥(穢貊)【이들은 융적(戎狄)이라 했고, 북맥(北貊)이라고도 했음】 과 마한(馬韓)등의 기마(騎馬)를 징발(徵發)하여, 전한(前漢:西漢)과 후한(後漢:東漢)의 “요서(遼西)” 땅을 침략(侵略), 약탈(掠奪)하고 관리(官吏)를 살해(殺害)하고, 인민(人民)들을 잡아갔으며, 요서(遼西) 땅을 지나, 태행산맥(太行山脈)을 넘어, 산서성(山西省) 태원(太原)까지 진출(進出)했다고 역사서(歷史書)는 전한다.
이러한 중차대(重且大)한 사건(事件)이 조정(朝庭)을 압박(壓迫)하고 있을 시기(時期)에, 구려(句驪)에 토벌대(討伐隊)를 보내지 않고,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한다는 이야기는 뭐냐? 무슨 재주로 “구려(句驪) 군대(軍隊)를 피해,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하여, 오환(烏桓)을 토벌(討伐)할 수 있었겠는가?” 하는 거다.
또 웃기는 이야기는 : 오환(烏桓)은 ‘요서(遼西) 새외(塞外)’지방에 있었으며, 그 후대(後代)의 후한(後漢) 말에도, 조조(曹操)는, 요서(遼西) 땅인 유성(柳城)의 서(西)쪽에서, 오환(烏桓)을 크게 깨뜨렸다고 역사서(歷史書)는 말하고 있다. 요수(遼水)를 건널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오환(烏桓)이 있는 곳이 “요수(遼水)의 서(西)쪽 요서지방(遼西地方)”이기 때문이다.
➏ 이건 ‘조선(朝鮮)’을 숨기기 위한 ‘왜곡(歪曲)의 산물(産物)’이다. 요수(遼水)가 조선왕조(朝鮮王朝)와 중국사(中國史)를 가르는 선(線)임은 분명(分明)하다. 그러나 “요동지방(遼東地方)이란 곳이, 어디냐? 이에 따라 〈조선왕조(朝鮮王朝)가 대륙왕조(大陸王朝)였다〉는 것을 증거(證據)하게 되는 거다.
“요수(遼水)”는 수경(水經)에 기록(記錄)된 하천(河川)이니, 반도(半島)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련(關聯)이 없다.
“요수(遼水)”는 오환(烏桓)이 있었던 곳을 흐르는 하천(河川)이었다는 거다. 곧 요동(遼東)새외(塞外) 또는 요서(遼西)새외(塞外)로 스며들어 강성(强盛)해졌다고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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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漢書 卷 96 下 / 西域傳 第 66 下 烏孫國
《烏孫國,大昆彌治赤谷城,去長安八千九百里.戶十二萬,口六十三萬,勝兵十八萬八千八百人. : 오손국(烏孫國)은, 대곤미(大昆彌)가 적곡성(赤谷城)에서 다스리는데, 장안(長安)에서 8,900 리를 간다. 12만 호(戶)에, 백성(百姓)은 63만이고, 승병이 18만8천8백인이다. 師古曰:烏孫於西域諸戎其形最異.今之胡人青眼,赤須,狀類彌猴者,本其種也. : 사고(師古)가 이르기를 ; 오손(烏孫)은 서역(西域)의 여러 오랑캐(戎)들과는 그 형상이 매우 다르다. 지금의 호인(胡人)과 같이 푸른 눈(靑眼)이며, 붉은 수염과 여러 종류의 원숭이(獼猴) 형상이다. 본래 그런 종족이다.》라고 하였다.
장안(長安)으로부터 8,900리라면 : 「대략(大略) 우랄산맥(Ural 山脈)까지에 이른다.」 특히 이들 종족(種族)의 특이(特異)함은, 여타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인종(人種)과 또 다른 “색목인(色目人)이었으며, 붉은 수염과 구렛나루등이 미후(獼猴)와 같다”고 할 정도(程度)였다는 것인데, 이들은 오늘날의 “러시아(Russia) 및 북(北) 구라파(歐羅巴)의 일부(一部) 종족(種族)과 매우 유사(類似)하다.” 우린 이러한 점에 유의(留意)해야 한다.
이러한 특이(特異)함과 강역(疆域) 또는 거점지(據點地)는, “오환(烏桓)”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를 찾는데, 많은 도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인데, 오손(烏孫)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도 재설(再說)이 필요(必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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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三國志. 魏書 魏略 西戎傳
《三國志.魏略西戎傳曰:西域諸國:丁令國:丁令國在康居北,中略. : 삼국지(三國志) 위략(魏略)서융(西戎)전에서 이르기를 : 서역(西域)의 여러 나라 : 정령국(丁令國) : 정령국(丁令國)은 강거(康居) 북(北)쪽에 있다. 중략(中略). 俱去匈奴單于庭安習水七千里,南去車師六國五千里,西南去康居界三千里,西去康居王治八千里.或以為此丁令即匈奴北丁令也.而北丁令在烏孫西,似其種別也.又匈奴北有渾窳國,有屈射國,有丁令國,有隔昆國,有新梨國,明北海之南自復有丁令,非此烏孫之西丁令也.中略.》
강거(康居)는 : 전한서(前漢書) 서역전(西域傳)에 의하면 : 강거국(康居國)은, 장안(長安)에서 ‘1만2천3백리’를 가야 한다고 하였다.【康居國,王冬治樂越匿地.到卑闐城.去長安萬二千三百里.】“구글어스” 직선거리(直線距離)로 보면 : 흑해(黑海)와 카스피Caspian)해(海) 사이로 볼 수 있다.
정령국(丁零國)의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는 두 곳으로 압축(壓縮)되는데,
첫 번째는 : 강거국(康居國)【장안(長安)으로부터 ‘1만2천3백리’ 떨어져 있다.】의 북(北)쪽에 정령(丁零)이 있었다고 하였으니, 곧 우랄산맥(Ural山脈) 서(西)쪽이다.
두 번째는 : “남(南)쪽으로 거사6국까지 5천리(南去車師六國五千里)”라고 했을 때는, 오비강(Ob R)과 예니세이 강(Enisei R) 사이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 이런 두 곳을 지리적(地理的) 위치(位置)로 보아, 그 서남(西南)쪽에 “오환(烏桓)이 있다.【地無山,有沙漠,流水,草木,多蝮蛇,在丁令之西南,烏孫之東北,以窮困之. : 땅에는 산(山)이 없고, 사막(沙漠)과 흐르는 물, 초목(草木)은 있다. 살모사(殺母蛇)가 많다. 정령(丁零)의 서남(西南), 오손(烏孫)의 동북(東北)에 있는데, 궁벽진 곳이다.】고 하였으니,
「“아랄 해(Aral 海)∼발하슈 호(Balkhash 湖)∼준갈이(準喝爾:중가리아) 분지(盆地) 사이의 땅”에 “오환(烏桓)=오환(烏丸)”족들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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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漢書卷七. 昭帝紀第七 :《三年.中略.冬,遼東烏桓反,以中郞將范明友為度遼將軍,將北邊七郡二千騎擊之.應劭曰:當度遼水往擊之故以度遼為官號. : 한서 7권, 소제기(昭帝紀) 7 : 3년, 중략(中略), 겨울에, 요동(遼東)오환(烏桓)이 반하자, 중랑장(中郎將) 범명우(范明友)가 도요장군(度遼將軍)이 되어, 북변(北邊) 7군(郡) 2천기로 쳤다. 응소(應劭)가 이르기를 : 도요(度遼)는 관호(官號)인데 요수(遼水)를 건너가서 적을 치는 것이다.》
《六年春正月,募郡國徒築遼東玄菟城.烏桓復犯塞,遣度遼將軍范明友擊之. : 6년 봄 정월(正月), 요동(遼東)의 현토성(玄菟城)을 쌓기 위해 군국(郡國)에서 무리들을 모았는데, 오환(烏桓)이 다시 변경을 범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를 보내 쳤다.》
요동(遼東)오환(烏桓)이 배반(背叛)하여, 변경(邊境)을 범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를 보내어 이들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요동(遼東)”은 이미 구려(句驪) 천하(天下)였다. 구려(句驪)는 이때, 융적(戎狄)이라고 일컫고, 북맥(北貊)이라고도 일컬었던 ‘맥(貊)=맥(貉)’과 ‘예(穢) 또는 예맥(穢貊)’과 ‘마한(馬韓)’의 속국(屬國)에서 기마(騎馬)를 징발(徵發)하여 요서(遼西)지방을 침략(侵略), 약탈(掠奪)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오환(烏桓)”은 뭐냐? 하는 거다.
만약(萬若) 요동지방(遼東地方)에 오환(烏桓)이 자리 잡고 있었다면, 구려(句驪)쪽에서 먼저 이들을 토벌(討伐), 쳤을 거라는 이야기다.
또 요동(遼東) 오환(烏桓)이 ‘전한(前漢)=서한(西漢)’의 변경(邊境)을 쳤다면 : 오환(烏桓)들도 당연(當然)히 요수(遼水)를 도하(渡河)했을 것이다. 이들이 도하(渡河)하여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약탈(掠奪)하는 것을 방비(防備)하기 위한 자(者)들이 바로 도요장군(度遼將軍)과 그 휘하(麾下)병사(兵士)들이다. 그들 모두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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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漢書卷八, 宣帝紀第八:《二年,中略:匈奴數侵邊,又西烏孫.秋,大發興調關東輕車銳卒,選郡國吏三百石伉健習騎射者,皆從軍. : 2년, 중략(中略), 흉노(匈奴)가 수차(數次) 변경(邊境)을 침략(侵略)하고, 또 서쪽 오손(烏孫)을 침략하였다. 가을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관동(關東)의 경거정예병과 군국에서 선발한 관리 3백석의 말을 타고 활을 쏘는 자, 모두 종군(從軍)하였다. 御史大夫田廣明為祁連將軍,後將軍趙充國為蒲類將軍,雲中太守田順為虎牙將軍,及度遼將軍范明友,前將軍韓增,凡五將軍,兵十五萬騎,校尉常惠持節護烏孫兵,咸擊匈奴. : 어서대부 전광명은 기련장군(祁連將軍), 후장군 조충국은 포류장군(蒲類將軍), 운중(雲中)태수 전순은 호아장군(虎牙將軍),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 전장군 한증(韓增)등, 무릇 5장군이, 병사 15만 기(騎)와, 교위(校尉) 상혜 지절(持節) 호(護) 오손(烏孫)병들과 함께 흉노(匈奴)를 도두 함께 쳤다.》
도요장군(度遼將軍)은 : 요수(遼水)의 서안(西岸)지대에, 진지(陣地)를 구축(構築)하고, 주둔(駐屯)하고 있었다.
위의 내용(內容)은 : 흉노(匈奴)가 수차(數次) 변경(邊境)을 범하고, 서(西)쪽에 있던 “오손(烏孫)”을 치니, 한(漢)에서는, 〈어서대부 전광명은 기련장군(祁連將軍), 후장군 조충국은 포류장군(蒲類將軍), 운중(雲中)태수 전순은 호아장군(虎牙將軍),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 전장군 한증(韓增)등, 무릇 5장군이, 병사 15만 기(騎)와, 교위(校尉) 상혜 지절(持節) 호(護) 오손(烏孫)병들과 함께 흉노(匈奴)를 도두 함께 쳤다.〉하였는데,
여기에 도요장군(度遼將軍)과 그 휘하(麾下)병력(兵力)이 포함(包含)되어 있다. 이들이 출정(出征)한 곳은 놀랍게도 “기련산(祁連山)【천산(天山)이다.】과 포류해(蒲類海)【언기(彦機)의 박사등호(博斯騰湖)이다.】 와 오손(烏孫)【장안에서 8,900리 떨어져 있다.】 병(兵)을 징발(徵發)하여 흉노(匈奴)를 쳤다.”는 이야기다. 이들이 간곳은 오늘날의 “신강성(新彊省) 언기회족자치구(焉耆回族自治區) 및 그 서(西)”쪽이다.
도요장군(度遼將軍) 범명우(范明友)와 그 휘하(麾下) 병사(兵士)들은 인간(人間)이 아닌 신(神)의 전사(戰士)였는가? 왜냐… …역사통설(歷史通說)의 “요수(遼水)”로부터 장안(長安)까지 5천리(千里)요, 장안(長安)으로부터 포류해(蒲類海), 천산(天山)까지 6-7천리(千里)이니, 1 만리(萬里)가 넘는 길을 행군(行軍)하고, 적(敵)을 쳤다는 얘기는 희극(戲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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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後漢書 卷二 . 顯宗孝明帝紀 第二 :《遣越騎司馬鄭眾報使北匈奴.初置度遼將軍,屯五原曼柏. : 후한서(後漢書)2, 현종효명제기2 : 월기사마 정중보가 북흉노(北匈奴)에 사신으로 갔다. 처음으로 도요장군을 두고, 오원(五原) 만백(曼柏)에 진을 쳤다. 注:(武)(昭)帝拜范明友為度遼將軍,至此復置焉.以中郎將吳常行度遼將軍.曼柏,縣,在今勝州銀城縣. : 소제(昭帝)가 범명우를 도요장군으로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다시 설치한 것이다. 중랑장(中郎將) 오상(吳常)을 행(行)도요장군(度遼將軍)으로 하였다. 만백(曼柏)은 현(縣)으로, 승주(勝州)은성현(銀城縣)에 있다.》
《是歲,遼東太守祭肜使鮮卑擊赤山烏桓,大破之,斬其渠帥.注:赤山在遼東西北數千里. : 이해에, 요동태수(遼東太守) 채융(祭肜)과 선비(鮮卑)가 적산(赤山)오환(烏桓)을 쳐서, 크게 깨뜨리고, 그 우두머리를 목 베었다. 주(注) : 적산(赤山)은 요동(遼東) 서북(西北) 수천(數千)리에 있다.》
➊〈도요장군(度遼將軍)〉은 오늘날의 하수(河水) 북방(北方) “만백현(曼柏縣)”에 주둔하고 있었다.
➋ 요동(遼東) 서북(西北) 수천(數千)리에 적산(赤山)이 있었고, 그곳에 오환(烏桓)이 있었다. 요동(遼東)에서 서북(西北)쪽으로 수천(數千)리라면, ‘삼(三),사(四)천리’라는 이야기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 논자(論者)들이 말하는 심양 서(西)쪽을 흐르는 강(江)이 “요수(遼水)”라고 할 때, “요동(遼東)서북(西北) 수천(數千)리는 몽골의 울란바토르(Ulaanbaator) 방향(方向)이다.” 이곳은 막외(漠外)지방이지, 요동지방(遼東地方)이 아니잖은가?
➌ 가장 중요(重要)한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주둔지(駐屯地)가 심양(瀋陽) 서(西)쪽을 흐르는 “요수(遼水)”가 아닌 서(西)쪽 4∼5천리에 있는, 「하(河)의 북안지대(北岸地帶)에 있었다.」는 말은 뭔가?
그렇다면 “도요장군(度遼將軍)의 주둔지(駐屯地)는 장안(長安) 북(北)쪽 1천리(千里) 쯤에 있는 하수(河水) 북안(北岸)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결국(結局) “요수(遼水)는, 하수(河水)를 말하는 거다.”라는 이야긴가! 이게 중요(重要)한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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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後漢書卷四.孝和孝殤帝紀第四 :《夏六月,車騎將軍竇憲出雞鹿塞,度遼將軍鄧鴻稒陽塞,南單于出滿夷谷,與北匈奴戰於稽落山,大破之,追至私渠北鞮海.竇憲遂登燕然山,刻石勒功而還. : 후한서(後漢書), 효화효상제기(孝和孝殤帝紀)4 : 여름 6월, 거기장군 두헌(竇憲)이 계록새를 나오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등홍(鄧鴻)이 고양새를, 남선우가 만이곡에서 나와, 북흉노와 계록산에서 싸워, 크게 깨뜨리고,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까지 쫓았다. 두헌(竇憲)이 연연산(燕然山)에 올라, 돌에 공적을 새기고 돌아왔다.》
《南匈奴右溫禺犢王叛,為寇.秋七月,行度遼將軍龐奮,越騎校尉馮柱追討之,斬右溫禺犢王. : 남흉노(南匈奴) 우온우독왕이 배반하고, 노략질하였다. 가을 7월, 행(行)도요장군(度遼將軍) 방분(龐奮), 월기교위(越騎校尉) 풍주(馮柱)가 쫓아 토벌하여, 우온우독왕의 목을 베었다.》
➊ 위의 글도 (7)과 같은 내용이라고 본다. 즉(卽) 도요장군(度遼將軍) 등홍(鄧鴻)이 고양새(稒陽塞)의 주둔지(駐屯地)를 나왔다고 하였는데, 고양새(稒陽塞) 역시(亦是) 하수(河水)의 북안(北岸)에 있는 지명(地名)이다.
➋〈거기장군 두헌(竇憲)이 계록새를 나오고, 도요장군(度遼將軍) 등홍(鄧鴻)이 고양새를, 남선우가 만이곡에서 나와, 북흉노와 계록산에서 싸워 이기고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까지 쫒았다.〉고 하였는데 :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는 곧 북해(北海)라고 하였다.【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사거북제해(私渠北鞮海)】 또한 천한(天漢)초에, 소무(蘇武)가 북해(北海)로 옮겨갔는데, 바로 이곳이라고 하였다. 이곳은 거연새(居延塞)로부터 북(北)쪽 수천(數千)리에 있다고 하였다.
➌ 도요장군(度遼將軍) 등홍(鄧鴻)이나, 방분(龐奮)등은 요녕성(遼寧省)의 요수(遼水) 서안(西岸)에 주둔(駐屯)치 않고, 4∼5천리(千里) 서(西)쪽의 하수(河水) 북안(北岸)에 있었으며, 그들은 왜 흉노(匈奴)를 토벌(討伐)키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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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後漢書卷五孝安帝紀第五 :《度遼將軍梁慬,遼東太守耿夔討破南單于於屬國故城. : 도요장군(度遼將軍) 양근(梁慬), 요동태수(遼東太守) 경기(耿夔)가 속국고성에서 남선우를 쳐 깨뜨렸다.》
후한서(後漢書)에서 말하는 남선우(南單于)는, 오늘날의 북방지대(北方地帶)와 서북방(西北方)의 새(塞)지역에 있던 흉노(匈奴)를 말하는 것으로,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과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癸酉,度遼將軍鄧遵率南匈奴擊先零羌於靈州,破之.注:靈州,縣名,屬北地郡,故城在今慶州馬領縣西北. : 계유(癸酉), 도요장군(度遼將軍) 등준(鄧遵)이 거느린 남흉노(南匈奴)가 선령강(先零羌)을 령주(靈州)에서, 깨뜨렸다. 주석(註釋) : 령주(靈州)는 현(縣)의 이름으로, 북지군(北地郡)에 속했는데, 경주(慶州) 마령현(馬領縣)서북(西北) 고성(故城)에 있다.》
이곳에도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중원(中原) 서북방(西北方)지대에서 강(羌)족을 쳐서, 깨뜨렸다고 하였다. 오늘날의 하북성(河北省)이나 요녕성(遼寧省)과는 하등(何等)의 관계(關係)도 없다.
《冬十二月,高句驪,馬韓,穢貊圍玄菟城,夫餘王遣子與州郡并力討破之. : 겨울 12월, 고구려(高句驪)와 마한(馬韓), 예맥(穢貊)이 현토성(玄菟城)을 포위하자, 부여왕(夫餘王)이 아들과 함께 주군(州郡)의 병사들과 함께 보내 쳐서 깨뜨렸다.》
● 「마한(馬韓)」이, “백제(百濟) 땅에 있었다.”는 말은 무엇인가? 충청(忠淸)·전라(全羅) 땅에 있었다는 마한(馬韓)이, 갑자기 고구려(高句驪)와 연합(聯合)하여, 현토성(玄菟城)을 포위(包圍)했다고? 이건 또 무슨 궤변(詭辯)인가?
‘식민사관(植民史觀)=반도사관(半島史觀)’ 논자(論者)들의 궤변(詭辯)은, 이제 무덤(墓)속으로 사라져야 한다.
《虔人羌叛,攻穀羅城.度遼將軍耿夔討破之. : 건인강(虔人羌)족들이 곡라성(穀羅城)을 공격하자, 도요장군(度遼將軍) 경기(耿夔)가 이들을 쳐서, 깨뜨렸다.》고 하였다.
《注:漢官儀曰度遼將軍屯五原曼柏縣也. : 주(注) : 한관의(漢官儀)에서 이르기를 : 도요장군(度遼將軍)은 오원(五原) 만백현(曼柏縣)에 둔(屯)하였다.》고 하였다.
「도요장군(度遼將軍)이 강족(羌族)들을 토벌(討伐)했다. 또 도요장군(度遼將軍)이 둔(屯)친 곳은 오원(五原) 만백현(曼柏縣)이다.」라는 원전(原典)속의 이야기는, 〈요수(遼水)는 곧 하수(河水)다〉 라는 이야기다.
●〈즉(卽) 청해성(靑海省)으로부터 감숙성(甘肅省)으로, 다시 동북류(東北流)하여 영하성(寧夏省)을 관통(貫通), 내몽고(內蒙古) 땅으로, 다시 동류(東流)하는, 이 하수(河水)가 바로 “요수(遼水)”였다면? 〉
이것에 첨언(添言)한다면 : 옛 요수(遼水)의 물줄기는 오늘날의 것과 일치(一致)하지 않을 가능성(可能性)이 많다.
왜냐하면 예전의 하수(河水)는 : 「곤륜산(崑崙山)으로부터 동류(東流)하여, 포창해(蒲昌海)에 모였다가 다시 흘러 발해(渤海)를 관통(貫通)하여, 하서회랑(河西回廊)의 북방지대(北方地帶)인 거연(居延) 곧 흑수(黑水)를 거쳐, 고비(Gobi) 사막지대(沙漠地帶)로 흘렀다.」고 하였으니 말이다.
조선사(朝鮮史)는 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 탈피(脫皮), “조선인(朝鮮人)을 위한 조선사(朝鮮史)로 거듭 다시 태어야 한다.”고 역설(力說)하는 바다. [1편. 끝-2편으로 계속]
2018년 11월 07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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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上谷郡(상곡군)
<조양(造陽)은 오원(五原) 북방 900리에 있는데, 상곡군의 屬縣(속현)이다.>라는 고전 주석에 따르면, 오늘날의 하수(河水) 북방에 있는 오원과 조양 모두 상곡군에 속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건 21세기 현재의 지명에 의한 것이다.
'규수와 규주'는 하천으로 인하여 지명(규주)이 된 것인 만큼, 규수를 떠나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하천과 지명은, 21세기 오늘날의 하수 북방엔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사에서 이런 것들이 문제가 된다.
규수는, 아랄해로 들어가는 '아무다리아강'이기 때문이다.
오원은 시황제때의 구원으로 거대한 릉과 같은 원(原) 아홉개가 있어 구원(九原)이었는데, 이게 갑자기 다섯개로 오원이 되었다.
이런 거대한 원(原)이 어느 날 갑자기 4개가 없어져, 오원(五原)이 되어버렸다는 것 자체가 의문이다.
시황제 때의 구원(九原),
서한(西漢) 때의 오원(五原), 그리고 그 북방 900리의 조양과 상곡군.....이에 따른 의문을 풀 수 있다면 "조선사의 절반은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고전에 많이 등장하는 구절이지만 누구도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약속한 것처럼 말이다.
오원(五原) '구원(九原)의 하천(河川) 지대는 곧 요수(遼水) 지대이라는 기록에 대하여 공감합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앞서 설명하셨던 그대로 감숙성(甘肅省)의 평량(平凉)에서 북쪽에 위치하는 녕하성(寧夏省)의 하천(河川) 지대는 역시 요해(遼海) ' 송화강(松花江 : 본시 만주의 흑룡강이라고 불리우는 강) 지대였다는 기록도 존재합니다.
안녕하세요. <玄朝>님!
오랫만입니다. 이 공간에서 보게 되니, 건강하시리라 생각됩니다.
그동안 우리의 조선사 연구가 무엇이 잘 되고,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하나 하나를 체크해 보고 중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고, 널리 알려져 있는 것부터 정리를 해보고자 한 것인데, 실제로는 너무나 잘못된 역사해설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강단에서는 이러한 잘못된 역사해설들을 실제인 냥 부풀려 발표하고 언론과 함께 국민들에게 알리고 있죠. 대부분의 국민들은 그게 사실(史實)인 냥 하지만 거짓이 대부분입니다. 위정자들의 역사인식은 보수나 빈보나 똑같습니다. 이게 우리에게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九原(구원)과 오원(五原)의 지명도 이와 똑같은 거라고 보는데,
시황제(始皇帝)의 구원과 전한(前漢)의 오원은 같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걸 후대인들이 같은 곳으로 만들다보니 이런 문제가 발생되었다고 봅니다.
진실된 조선사 복원 염원....아마도......어렵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 이유는 대한민국을 이끄는 위정자들의 머릿속에는, 세뇌된 일제시대의 역사인식이 고스란히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꾸려면 획기적인 유물유적의 발견이 있어야 하지만, 오늘날의 중국 당국은 이를 철저하게 극비(極秘)로 취급, 외부인은 철저히 통제하고 있어, 이런 사실을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대륙에서 모종의 혼란스러운 장면이 연출되고, 분열이 심화되어 획기적인 권력들이 새로 태어난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염원은 영원히 숨겨질 수도 있다는 거죠.
희망은 있다?
건강하시길 바라며, 자주 뵙기를 청합니다.
사기에서는 오원 북쪽으로 九里되는 곳을 조양이라고 서술하고 있습니다.
【索隐】:案:太康地记“秦塞自五原北九里,谓之造阳东行终利贲山南汉阳西也”。汉,一作“渔”。筑四十四县城临河
오원(구원)은 만리장성의 끝과 가까운 지역으로 요동지역이고 고조선과 멀지 않은 곳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아주 중요합니다.
안녕하세요. <고고아리랑>님!
님의 말씀대로입니다만, 사기(史記) 주석(註釋)에서 말하는 "조양(造陽)"은 오원(五原) 북방 9리가 아니라 : "북방 900리"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후대의 사가(史家)들이 "900리"를 9리로 만들었다고 보아지는 대목입니다.
다른 역사서 (통전이나 자치통감등의 또 다른 역사서)에서는 모두 "오원 북방 900 리 떨어진 곳에 조양이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오원으로부터 900리 라면 오늘날의 내몽고 땅을 지나 외몽골 땅이죠.
이곳이 상곡군이 관할하고 있던 땅이다라는 것이 원전에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관심과 성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
지금은 출장중이여서 가능한 다음주내로 百衲夲 사진을 올리고 인사 드리겠습니다.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요하는 대략 남북으로 흐른다고 보아야 할 것인데 이에대한 이견은 별로 없어보입니다. 요수의 동쪽이 조선땅인가...하는데에는 일부만 동의할수 있습니다. 요수는 중국에 있고 중국은 지금의 일개 성 크기에 불과하기 때문에 동, 남, 서쪽 모두가 조선의 영역으로 보아야 할것입니다. 그런데 조선과 이른바 중국(현 중국)은 서로 국경이 있고 대륙조선(지금의 동아시아일대) 저편에 중국의 여러나라들이 있었다고 설정한다면 절대 풀릴수 없는 역사가 될 것입니다. 지금의 신강지역과, 천산일대, 중앙아까지가 수,당,원,명,청등 중국의 여러나라가 있어야 하며 이는 동쪽에는 조선이, 서쪽에는 중국이 있어야 하는 지금의
반도사관의 확장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의 역사와 이른바 중국의 역사는 모두 동아시아 일대가 그 무대이며 중앙정부인 중국을 누가 차지 하는가에 따라 친목도하고 반목도 해 왔던 것입니다. 대체로 태항산맥 동쪽과 황하 이남이 반도조선으로 축소 왜곡되었고 고비사막 이남과 황하 이북, 태항산맥 이서(西)가 중국의 역사로 변한것이라 생각됩니다.
또한 중국(현 산서성 일대)의 작은 하천이나 산 ,지명들이 대륙조선의 빈 자리에 분산되어 마치 본래부터 그곳이 중국의 땅 인 양 행세하고 있습니다. 이 산서성 일대의 중국땅에 평양이나 해주 원주 함흥 백두산 등등의 지명도 있었는데 역사 왜곡과 더불어 반도조선으로 함께 와 있게 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일례로 고려말 ‘홍건적의 난’이나 근대 ‘태평천국의 난’과 ‘동학농민운동’ 의 사건을 보면 그 활동무대는 같은 곳 임을 직감할수 있습니다.
산서현지(山西县志)에는 요양,요산,기성등이 산서성에 있다고 서술하고 있고 청나라 말기 학자인 양수경이 편찬한 수경주 지도를 보면 현 산서성지역에 고려하를 확인할수 있었습니다. 산서성은 실제 고구려가 있었던 지역이였을 것으로 추측을 하지만..그 이전에는 요양,요산등이 서쪽에 있는 현 감숙성,섬서성에서 산서성으로 옮겨진 것으로 보여집니다.
동아시아 일대의 대륙조선, 그 변방 북,서,동쪽에 있던 여러 종족들의 이야기가 조선의 역사와 중국의 역사에 중첩돼 더욱더 혼란을 가중시키어 우리를 혼란케 하고 있습니다.
한나라의 도요장군도, 한(漢)나라가 가령 천산서북에 있었다라고 한다면 그들과 마주했던 흉노는 더 서북에 있어야 하고 요하 역시 더 서쪽인 그 어딘가에 있어야 하니 요하가 서쪽으로 가면 갈수록 조선의 강역도 그와 연동되어 서쪽으로 확장되어 역사가 풀리지 않고 미궁에 빠지는 것입니다. 규수가 아무다리아다....하는것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고구려 왕들의 장지가 원으로 끝나는 경우(두곡동원, 대수촌원, 모본원, 고국천원, 시원, 중천원....등등)가 많은데, 이는 결코 진(秦)의 구원이나 한(漢)의 오원과 무관치 않다 (즉 같은 장소다....)생각되고, 문무님께서도 ‘우연의 일치일까’ 의아해 하신적이 있습니다...
<무오연행록 6권 1799 2 11>이날로부터 이어서 연수(煙樹)를 보니, 계문을 지나 나산(螺山), 별산점(鱉山店) 사이가 극히 영롱하니, 대개 들의 낮은 곳은 기운이 흔들려 이상한 모양을 만들되, 은 바다와 옥 꽃이 눈에 황홀하여 언덕이 은은하게 비치고 초목이 움직여 여기로부터 심양까지 날마다 보이니,......
위의 무오연행록에 계문을 지나 심양까지 날마다 연수(煙樹)가 보인다 하니 같은 지형임을 짐작할수 있고.......
요동에서부터 길 좌우에 버드나무를 심어 북경까지 갔는데, 모든 큰 길은 다 그러하였다. 버드나무 사이는 수레 10대가 지날 만했다. 매년 여름철이면 장마로 물이 온통 들을 덮어도 이 버드나무로 인해서 길을 잃지 않게 된다고 했다.<담헌서 8집 연도기략>
에서 보듯 북경까지 버드나무를 심었다 했으니 버드나무는 개울가 물이 많은곳에서 자라는 나무입니다. 즉 북경까지가 하천으로 연결되었다라고 짐작할수 있는곳입니다.
유연(幽燕) 지방은 모래 개천의 불모지이므로 토지의 소출이 없는데, 황경(皇京)은 사방의 재물이 모두 모여드는 도회이므로, 이에 의지하여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승정원일기 고종9년 1872 4 4>
즉 유연지방은 모래개천으로 쭉 이어진 땅으로 이 개천이 바로 요하라는 것이죠....
안녕하세요. <맑은영혼>님!
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이 무엇을 뜻하는지, 주장하시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요수를 확정하기에 앞서, 나라와 종족들과의 전쟁터, 거점지, 지세등을 차례 차례 원전에 기록된 것들을 번역,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나라와 종족간의 싸움터나 접경지대가 수천리씩의 차이가 나는지에 대한 것들입니다.
또 과거의 해수면과 하수(河水)의 물길의 이동등에 따라 많은 부분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