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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 제3 수행편 제 2장 정기훈련과 상시훈련 제2절 성사 훈련법 공부인에게 상시로 수행을 훈련시키기 위하여 「상시 응용 주의 사항(常時應用注意事項)」 육조(六條)와 「교당 내왕시 주의 사항(敎堂來往時主意事項)」 육조를 정하였나니라. 상시 응용 주의 사항 1. 응용(應用)하는 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2. 응용하기 전에 응용의 형세를 보아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3.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4.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대강 마친 사람은 의두 연마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5. 석반 후 살림에 대한 일이 있으면 다 마치고 잠자기 전 남은 시간이나 또는 새벽에 정신을 수양하기 위하여 염불과 좌선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6. 모든 일을 처리한 뒤에 그 처리건을 생각하여 보되, 하자는 조목과 말자는 조목에 실행이 되었는가 못되었는가 대조하기를 주의할 것이니라. |
[지난 주 복습 및 개요]
대종사님께서 새 시대에는 사실적 도덕의 훈련이 되어야한다고 하셨죠. 결국은 얼마나 실제 상황에 우리 법을 적용해서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원불교에 입문해서 다니다 보면 기본은 알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넘어서서 내 것으로 만들었느냐, 실제로 경계에서 쓸 수 있느냐는 것이죠. 그것이 법력이고 법위등급입니다. 그것은 삼학의 반복인 훈련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반복 훈련이 없다면 지적 호기심에서 멈추고 아는 것에서 멈춰서 오히려 중근 병에 들어서 여러 가지 스스로 재미가 없고 진취적인 기분도 안 나는 것입니다.
정기로 법의 훈련, 상시로 수행의 훈련을 해놓으셨죠. 상시훈련은 대종사님께서 상시훈련이라고 하셨지만 응용주의사항이라고 하셨지요. 주의사항이란 주의에 대한 훈련을 시킨 것입니다. 아무리 안다고 해도 주의하지 않으면 무념이 되어서 실수를 반복하게 됩니다. 대종사님이 일기법에 주의를 적용하게 해놓으셨습니다. 결국 대종사님께서 12개 주의 조항을 유무념으로 주신 겁니다. 그 주의 중에 자력적 주의는 상시응용주의사항이고 타력적 주의사항은 교당 내왕 시 주의 사항입니다. 두 가지 중에 어떤 것이 더 어려운가요?
교당을 몇 년 무결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자력적 주의를 안 하고 교당만 주의를 했습니다. 그러면 교당을 다닌 것은 반 푼도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의사항이 자력과 타력이 서로 상시응용 주의사항과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이 서로 연결되게 되었는데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만 했다. 물론 마음내서 교당 오는 것도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교당은 와서 앉아 있다가 가면 되잖아요. 재가교도 중에는 자칫하면 내가 헌공금 몇 푼 내고 교당에서 다 차려놓은 밥상 먹고만 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대종사님의 법이 밀접한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상시 응용 주의 사항과 교당 내왕 시 주의 사항]
상시 응용 주의 사항을 보면 1조는 삼학의 취사, 2조, 3조, 4조는 연구과목이라고 하는데, 그렇게 나누었을 뿐이지 그 안에 수양, 연구, 취사가 다 들어갑니다. 예를 들어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법규 연습을 주의하라」는 것은 미리준비죠. 경전 법규를 연습 해 놓으면 많은 시행착오를 줄이고 공부의 방향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미리준비고 그것이 취사에 상당한 도움을 줍니다. 4조가 보면 「의두 연마 할 것이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 2조에 「지도인의 감정 얻기를 주의할 것이요」가 있습니다. 상시 응용 주의사항 4조에서 나오는 의두 연마를 해서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2조처럼 감정을 받아야 합니다. 또한 상시 응용 주의 사항 3조에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 해서 교당 내왕시 주의사항 1조 「그 지낸 일을 일일이 문답하는데 주의」를 하라는 거예요. 그런데 집에서 상시응용 주의사항을 주의 안 하니까 설교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제 시간에 안 오고 설교만 듣고만 가는 사람이 가끔 있습니다. 상시응용 주의사항과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 서로 맞물려가면서 시너지 효과가 나야 되는데 탁탁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법회 때 상시응용 주의사항과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을 함께 봉독하게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예법엔 없지만 대종사님 법을 공부해 보니 이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 6조 소득 유무를 반조해서 실생활, 즉 상시에 활용하는 것입니다. 서로 밀접하게 자력과 타력으로 주의하게 되어있습니다. 하지만 상시에서는 주의를 안 합니다.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 1조를 보면 「상시응용 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런데 상시응용에 주의를 하지 않으니, 문답하면 고개를 숙이고 그러면 감정할 게 있겠습니까? 어떤 분이 ‘교무님은 질문을 해서 사람을 부담스럽게 하냐.’고 해서 그러면 내가 질문 더 할 거라고 했습니다. 왜냐면 문답을 하라고 했잖습니까. 사실 제가 질문을 하는 것 보다 여러분이 먼저 하는 게 맞지요.
저는 처음 교당에 가서 첫 법회에서 교당에 어떤 문화와 풍토, 기류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법회는 일찍 오는 문화인가, 수양을 하는 문화인지, 훈련을 함께 가는 문화냐. 서로 신뢰하는 문화냐, 단회를 제대로 하는 문화냐, 일기를 제대로 하는 문화냐. 즉, 교당에 대종사님의 정신이 어떻게 박혀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상시응용주의사항이 살아서 교당의 법회나 단회 때 경전 법규를 연습하다보니 ‘이런 것을 모르겠더라, 이게 맞나’ 라고 문답 감정, 해오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청년법회에서 매단 첫째 주에는 대산종사법어를 하는데 질문하는 사람만 합니다. 왜 안하겠어요. 안 읽어온 것도 있고 불안하지요. 상시응용주의사항을 제대로 하지 않고 오니깐 법회의 효과가 반도 안 되는 거예요. 그리고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에는 신앙적 의미가 기가 막히게 들어있습니다. 법회오기 전, 법당문을 열었을 때, 향을 피우고 사 배를 할 때 그 안에 신앙적 의미가 있는데 그 걸 모르는 거지요. 그러니 법회에 설교만 들으러 오니 지각을 하고 그러는 것이지요. 법회의 소득의 절반은 경종 치기 전에 이미 끝난 것입니다. 지각하면 절반을 다 놓쳐버리는 겁니다. 이것은 뭐냐면 주의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경전 법규를 우습게 알고 이해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렸다는 겁니다.
상시응용주의 사항 1조는 동시 삼학이라고 하셨죠.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해라 했습니다. 취사하기 전에 생각하고 생각하기 전에 온전함을 갖추라는 것이지요. 온전함은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 나라는 틀을 놓아버리는 게 온전한 것입니다. 내가 들어가면 어떻게 되죠? 예쁜 사람, 미운 사람, 옳고 그름, 감정, 생각, 에고와 업이 막 튀어 나옵니다. 그걸 초월한 상을 초월한 자리가 온전한 것입니다. 온전하다면 미운 사람 예쁜 사람을 다 품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온전하지 않으니 마음에 드는 사람만 가까이 하고 예뻐하는 것이지요.
취사하기를 주의하라는 것은 멈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과연 멈추냐 응용하기 전에 미리 연마하기를 주의하라. 해외여행갈 때 미리연마 잘하죠. 그런데 불과 몇 십 년 후에 내 생사를 과연 미리 연마하느냐. 내 직장에서 내가 책임진 분야에서 미리연마를 하느냐. 신심 공심이 없으면 의견이 없고 미리연마가 없습니다. 미리 연마가 없으면 회의를 할 때 아무 의견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순환하며 계속 변하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의견이 없는 것은 정체되어 있는 겁니다. 휴대폰이 10년 전에 만들어진 것 그대로인가요? 계속 의견이 나오며 발전하잖아요.
미리연마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을 치루고 나서 평가하는 것도 미리연마입니다. 대학교 동아리를 보면 10년 전에 나온 이야기를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평가를 하고 기록하지 않았고, 기록했더라도 후배들이 그 것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새로 시작하는 것이지요. 미리 준비를 안 해서 계속 헛바퀴를 돌리는 것이다. 정신 육신 물질 간에 미리 준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 마흔이 넘어가면 죽을 보따리를 다 챙기셔야 합니다.
3.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
아주 간단한 말이지만 이게 보통이 아닙니다. 이걸 보면 ‘대종사님은 숨 쉴 틈을 안 주네’ 생각 안 드세요? 놀면서 재밌게 살아야하는데 노는 시간에 경전 법규 연습하라니 원불교가 재미가 없지 않아요? 그래서 제가 여러분께 대종사님이 얼마나 자비로운 분인지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고속도로 휴게소는 노는 곳 입니까? 쉬는 곳이지요. TV에서 어떤 강연을 봤는데 노는 것은 내 정신이 뽑아져 나간 것을 노는 것이라고 한답니다. 예를 들어 낚시, 게임, 쇼핑이 있지요. 노는 것은 자기 자신을 잊어버립니다. 쉽게 말해 온전한 정신이 아니라는 겁니다. 온전한 정신이 아니지만 그 아닌 마음으로 하고 있지요. 그런 것은 생산적인 시간인 시간이 아닙니다. 그런데 쉬는 것은 아주 생산적입니다. 대종사님은 노는 시간을 생산적인 시간으로 바꾸라는 것이지요. 노는 시간에 쉬던가 아니면 경전법규연습을 하라는 것입니다. 경전 법규 연습하는 것이 사실은 쉬는 거지요. 쉬는 것은 내가 나와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산적 휴식이고 의식작용이 재미있습니다. 한편으로 쉬는 것은 자기 직업에 대해서 충실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노는 시간에 주로 뭐하세요? 생각보다 게임을 많이 하고 만화도 많이 보더라고요.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생산적인 시간이 아니라 온정신을 빼앗겨 버리는 시간은 노는 것입니다.
[경전이란?]
정전 제3 수행편(修行編) 제 2장 정기(定期) 훈련과 상시(常時) 훈련 제 1절 정기 훈련법 경전은 우리의 지정 교서와 참고 경전 등을 이름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 |
경전은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려주는 것이라고 정기 훈련법 11과목을 할 때 설명 드렸습니다. 옛날 경전은 대체적으로 특별한 예언이나 장엄함을 넣었습니다. 그런 차별화를 통해 신심이 나게 했습니다. 그렇게 했더니 무슨 문제가 생깁니까. ‘나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못하겠네.’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대종사님은 앞으로 경전을 만들 때 절대로 실상에 넘치게 장엄함을 넣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사들의 신록을 보면 매우 비범하지요. 비범한 것이 신심을 나게 할지는 몰라도 그만큼 자기비하가 되지요. 그래서 우리는 사실적 도덕에 훈련이고 진리적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러 대중이 큰 도인이 되게 하는 데에는 장엄한 것이 방해가 된다고 하셔서 사실 그대로 실상에 넘치지 말게 해라 하셨습니다. 경전을 만들 때 신기한 게 없지 않은데 실제로 많이 뺐습니다.
대산종사법어 교리편 10장 대산 종사 말씀하시기를 「일원은 사은의 본원이요 요래의 불성으로, 무생 법인(無生法印)이요, 대적광전(大寂光殿)이요. 복혜 원천(福慧原泉)이요, 무진장보고(無盡藏寶庫)요, 삼세제불의 도본(圖本)이자 천만 경전의 근원이니라.」 |
경전은 무엇이냐? 경전의 근원을 치고 들어갔더니 경전은 일원상에서 나왔습니다.
대종경 제 3 수행품(修行品) 22.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세상 사람들은 경전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야 도가 있는 것으로 인증하여, 같은 진리를 말할지라도 옛 경전을 인거하여 말하면 그 것은 미덥게 들으나, 쉬운 말로 직접 원리를 밝혀줌에 대하여는 오히려 가볍게 듣는 편이 많으니 이 어찌 답답한 생각이 아니리요. 경전이라 하는 것은 과거 세상의 성자 철인 들이 세도 인심을 깨우치기 위하여 그 도리를 밝혀 놓은 것이지마는, 그 것이 오랜 시일을 지내 오는 동안에 부연(敷衍)과 주해(註解)가 더하여 오거 시서(五車詩書)와 팔만 장경(八萬藏經.)을 이루게 되었나니니, 그 것을 다 보기로 하면 평생 정력을 다하여도 어려운 바라, 어느 겨를에 수양, 연구, 취사의 실력을 얻어 출중 초범한 큰 인격자가 되리요, 그러므로 옛날 부처님께서도 정법(正法)과 상법(像法)과 계법(季法)으로 구분하여 법에 대한 시대의 변천을 예언하신 바 있거니와, 그 변천되는 주요 원인은 이 경전이 번거하여 후래 중생이 각자의 힘을 잃게 되고 자력을 잃은 데 따라 그 행동이 어리석어져서 정법이 자연 쇠하게 되는지라, 그러므로 다시 정법 시대가 오면 새로이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모든 사람을 실지로 훈련하여 구전 심수의 정법 아래 사람사람이 그 대도를 체험하고 깨치도록 하나니, 오거 시서는 다 배워 무엇하며 팔만 장경은 다 읽어 무엇하리요. 그대들은 삼가 많고 번거한 옛 경전들에 정신을 빼앗기지 말고, 마땅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부지런히 공부하여, 뛰어난 역량(力量)을 얻은 후에 저 옛 경전과 모든 학설은 참고로 한 번 가져다 보라. 그러하면 그 때에는 십년의 독서보다 하루 아침의 참고가 더 나으리라.」 |
대종경 수행품 22장에 보면 왠지 도는 쉽지 않을 것 같고, 잘 몰라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법문에 보면 정법(正法), 상법(像法), 계법(季法)이 있습니다. 이는 불교에서 내려오는 이야기인데, 정법은 법이 그대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상법은 장엄함이 들어가고 계법은 형식만 남아서 내용이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종사님이 경전을 다시 내신 것도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경전은 이와 사, 즉 일과 이치를 밝혀 놓으셨습니다.
정산종사법어 제 9 무본편(務本編) 31장에 보면 독경 해액(讀經解厄)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독경을 읽으면 액이 풀린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옛날에 스님을 모셔다가 집에서 독경을 하게 하는 것이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아무나 글을 썼다고 경이라 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깨친 성자가 쓴 것을 경이라고 표현합니다. 그 성자가 내놓으신 경을 읽을 때 그 액이 풀린 다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법어 제 7 권도편(勸道編) 36, 말씀하시기를 「동경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하나는 과거 성현들의 책으로 지어 놓은 경전들을 읽어 거기에서 지견을 밝히는 것이요, 둘은 모든 사람의 선악을 보아 거기에서 스승과 거울을 얻는 것이요, 셋은 모든 사물을 접을할 때에 그 사사물물 가운데에서 진리의 교훈을 발견하는 것이라, 통달한 사람은 이 세 가지 독경을 아울러 하므로 보보일체 대성경(步步一切 大聖經)이 되나니라.」 |
독경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책, 둘째는 환경에 경이 있더라, 셋째는 모든 걸 접할 때 거기에 있더라 하였습니다. 진짜 경은 보보일체 대성경(步步一切 大聖經)이라 하셨습니다. 걸음걸음이 다 경전이라는 뜻입니다. 일원상 진리가 우주 만유의 본원이면서 그 본원이 실제거든요. 그래서 거기에서 경이 나왔기 때문에 우리가 마음을 쓰고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경이고 이것을 모아서 일과 이치에 맞게 해 놓은 것이 책 경전인 것입니다.
정산종사법어 제 9 무본편(務本編) 52. 말씀하시기를 「부처님께서는 근기 따라 읽게 하는 세 가지 경전을 설하시었나니, 첫째는 지묵으로 기록된 경전들이요, 둘째는 삼라만상으로 나열되어 있는 현실의 경전이요, 셋째는 우리 자성에 본래 구족한 무형의 경전이라, 지묵의 경전보다 현실의 경전이 더욱 큰 경전이요 현실의 경전보다 무형의 경전이 더욱 근본되는 경전이니라. “성인이 나시기 전에는 도가 천지에 있고 성인이 나신 후에는 도가 성인에게 있고 성인이 가신 후에는 도가 경전에 있다” 하시었나니, 우연 자연한 천지의 도가 가장 큰 경전이니라.」 |
지묵 경전, 현실 경전, 무형의 자성경전이라고 하지요. 제가 첫 교무 발령을 받아서 청년들에게 교전을 몇 번이나 봤는지 물어봤습니다. 한 번도 다 못 봤답니다. 법회 때, 훈련 때 본 게 다라고 합니다. 어린이나, 학생의 경우는 그렇다고 쳐도 청년이 그렇게 이야기하니 듣고 충격을 먹었습니다. 몇 천 년 된 종교들은 역사성, 규모 등으로는 뛰어나지요. 원불교의 장점, 매력이 뭐예요? 대종사님의 초기정신이 살아있고, 아직 때가 타지 않은 점이지요. 대종사님의 당대 제자가 지금도 있어서 신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종사님이 직접 내놓으신 경전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 중요합니다. 과거에는 경전 하나 얻기 위해 몇 년씩 걷다가 죽기도 하고 경전을 얻어도 필사만 하다가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경전이 휴대폰에, 컴퓨터에도 들어있지, 필요에 따라 다 있고 내가 필요한 법문, 관심 있는 것, 의문 나는 것을 얼마든지 검색해서 찾아볼 수 있어요. 원불교의 가장 큰 장점을 이 교법인데 이 교법을 내놓은 경전을 우리는 얼마나 보는가? 한편으로는 여러분들이 존경스러워요. 어떻게 교전을 한번 다 읽어보지도 않고 원불교를 계속 다닐 수 있지요? 저 같으면 몰라서 못 다닐 것 같아요. 대단한 인연 복이 있는 건지, 안 봐도 되는 지혜가 있는 것인지 대단합니다. 만약에 제가 교전을 몇 번 안 읽었으면 아무리 우리 아버지가 출가하라고 천일기도를 하셨어도 출가를 안했을 것입니다. 출가는 내 인생을 통째로 바치는 건데 그 선택이 쉬운 겁니까? 내가 믿음이 서고 이해가 되고 방향이 결정되지 않고는 결정하기 어려운 것이지요. 공부의 방향은 어찌 보면 삶의 방향입니다. 경전을 통해 어떤 인생을 살아야하는지, 어떤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영원한 행복인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시간과 에너지와 사람을 쓸 것인지. 이것이 결정이 되지도 않고 어떻게 내 인생을 살아갈 수 있나요. 내가 어디서 오고 어디로 가는지, 참 나는 무엇인지, 그것을 모르고 내가 어떻게 웃으며 살 수 있겠어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참 부러워요.
대산종사법어 동원편 12장에 보면 삼귀의(三歸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삼귀의, 불(佛), 법(法), 승(僧)에서 법은 결국 한편으로는 경전인 것입니다. 부처님이 그 법을 내놓으신 것이 경전이지요. 둘이 아니라는 겁니다.
대산종사법어 제 2 교리편 1. 대산 종사 말씀하기시를 「정산 종사께서는 ‘정전’은 근원을 밝힌 원경(元經)이요, ‘대종경’은 두루 통달한 퉁경(通經)이라 하셨나니, ‘정전’과 ‘대종경’은 복과 혜를 구하고 성불 제중 제생 의세하는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을 밝혀 주신 큰 경전이니라.」 |
‘정전’과 ‘대종경’은 복과 혜를 구하고 성불 제중 제생 의세하는 가장 바르고 빠른 길을 밝혀 주신 큰 경전이라는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으세요? 내가 진짜 복과 혜를 구하고 싶고 성불제중, 제생의세하고 싶으면 정전, 대종경을 내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보겠다는 생각이 안 들으시나요? 어떻게 한 번도 다 안보고 원불교를 다니는지 대단해요.
살면서 공부하며, 궁금한 것들 있잖아요. 거의 대부분이 여기에 나와 있어요. 나만 궁금했겠어요. 선진님들도 다 궁금해서 물어놨죠. 우리가 모르는 것을 배워서 알고자 하는 마음은 인생의 철학적 사유인 거예요. 나는 어떤 인생을 살고 싶다는 생각이 없으면 눈앞에 보이는 것만 쫓게 되는 겁니다. 오늘도 사업을 하는 사람이 왔다 갔습니다. 작년에는 너무 힘들어서 목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경전에 보면 답이 다 나와 있잖아요. 현실 세계만 보고 살지 말고 현실에 세계에서 벗어나 제 3자가 되어서 나만 보지 말고 무차별의 세계로 한번 가봐라. 또 경계 따라 가봐라. 이것을 인과의 세계로 넘나들라는 것이 경전에 다 나와 있어요. 실제 경계에서 연습을 해야 할 거 아니에요? 때로는 백억, 천억 원도 고작 종이구나 하는 것이 왔다갔다 같이 해야 합니다.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 皆是虛妄)입니다. 천억이고 때로는 허망한 것입니다. 때로는 그 천억이 얼마나 소중해요. 그러나 때로는 허망한 것이라는 마음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정산종사는 앞으로 유, 불, 선 삼교와 기타 종교를 통합하여 한 경전을 만들려 한다고 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해 놓으셨지요. 대산종사님이 내놓으신 교리실천도 인(仁), 지(智), 용(勇)은 유교, 정(定), 혜(慧), 계(戒)는 불교의 용어이지요.
총부에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들어왔습니다. 총부에 인민군이 들어오면 여러분들을 뭘 하시겠어요? 대산종사님은 정산종사님 모시고 경전공부를 하셨습니다. 경전을 설명하기 전에 경전, 대종사님이 내놓으신 이 법과 회상, 진리, 스승이 보물이라는 확신과 믿음이 중요합니다. 이 믿음이 약해버리면 아까 환경 따라서 상황만 오면 경전공부는 뒤로 밀리지요.
정산종사법어 경의편(經義編) 1. 정산종사 말씀하시기를 「정전은 교리의 원강을 밝혀주신 “원(元)”의 경전이요 대종경은 그 교리로 만법을 두루 통달케 하여주신 “통(通)”의 경전이라, 이 양대 경전이 우리 회상 만대의 본경(本經)이니라.」 시자 이 공전 사뢰기를 「예전 등 기타 교서의 주지(主旨)는 무엇이오니까.」 말씀하시기를 「예전은 경(敬), 성가(聖歌)는 화(和), 세전(世典)은 정(正)이 각각 그 주지가 되나니라.」 |
지난 공부 때 먼저 경전공부는 뭐 먼저 해라고 했지요?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보는 것도 물론 좋지만 먼저 원경인 정전을 공부해야 합니다. 혼자서 공부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반드시 지도자와 모시고 정전을 공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정기 훈련이나 아니면 교무님을 졸라서라도 정전공부는 꼭 필요합니다. 대종사님 당대에 법낭이라는 구타원님이 계셨죠? 그리고 범산 이공전 선진님 이런 분은 우리 경전이 나오는데 아주 큰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 뇌가 책을 볼 때 한번 보기도 어렵지만 많이 봐도 2~3번 보기가 어렵지만 내 것이 되려면 5번 이상 반복해야 합니다. 좋은 음악도 계속 듣다가도 조금만 시간 지나면 관심이 떨어집니다. 뇌는 계속 새로운 것을 원합니다. 우리의 뇌가 2~3번을 하면 싫은 마음이 생기는데 그것을 이겨내고 반복하고 훈련하는 것이 연습입니다. 연습이라는 것은 새로운 것을 원하는 게 연습이 아닙니다. 저는 원불교 교도라면 전서를 최소한 10번은 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누가 법문을 말하면 어느 부분에 몇째 줄이라고 다 짚을 수 있습니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옥편을 외웠습니다. 어떤 한자를 말하면 몇 페이지 몇 째 줄이라고 바로 짚습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해요. 저 사람은 머리가 좋다고 하면서 나는 못한다고 하는 사람은 가장 멍청한 것이지요. 기적과 마법의 비밀은 연습입니다. 그 예를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키신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 살 때 음악을 들으면 바로 피아노를 쳤습니다. 몇 십 년을 피아노를 치고 세계 최고가 되어서도 그래도 최소 하루에 6~7시간 피아노를 칩니다. 최배달, 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실제 인물입니다. “천 일을 연습하면 단(鍛)이 된다. 그런데 만 일을 연습하면 연(練)이 된다.” 이것이 단련이라는 겁니다. 김연아가 예쁘고 돈 많이 벌었다는 생각만 하십니까? 김연아를 아는 사람은 지독하다고 합니다. 지독한 연습벌레라고 합니다. ‘두 살 때 들으면 친다니 천재구나 나와는 다르구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일 멍청한 생각입니다. 대종사님은 불보살은 연습을 통해서 되더라는 것을 아신 것입니다. 이 반복의 연습이 바로 훈련입니다. 모르는 것을 새롭게 여기저기서 찾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아는 것을 대종사님이 내놓으신 법을 그대로 주의해서 반복하는 것이 바로 불보살이 되는 길인 것입니다.
[오종법사]
법화경 제 10. 법사품 – 오종법사(五種法師) “만약 다시 어떤 사람이 묘법화경의 이에 한 게송에 이를지라도 받아서 가지고 읽고 외우며 풀어서 말하고 써서 베끼면서, 이 경권을 공경하되”라고 하여 수지(受持), 독(讀), 송(誦), 해설(解說), 서사(書寫)의 다섯 가지의 묘행(妙行)을 실천할 것을 설하신다. 이처럼 경문에 나타낸 받아서 가지고(受持), 읽고(讀), 외우며(誦), 풀어서 말하고(解說), 써서 베끼는(書寫) 것은 법사(法師)의 수행으로서 가장 거룩한 것이므로 이를 오종법사(五種法師)라고 한다. 즉, 보살행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정행(正行) : 수지(受持) 받아 지님을 말하는데 마음 깊이 믿고, 믿었으면 행동으로 나타나며, 믿음을 가졌더라도 계속 유지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므로 정행(수지)가 가장 중요하다. 예) 정전 법위등급 – 보통급 십계를 받은 사람의 급 특신급 십계를 받아 지키며, 법마상전급 십계를 받아 지키며 ② 조행(助行) : 독(讀), 송(誦), 해설(解說), 서사(書寫) 읽고, 외우고, 해석하고, 간행하는(讀, 誦, 解說, 書寫) 넷은 수지(受持)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우리의 신심을 강건하게 하는 역할을 하므로 조행(助行)이라 한다. ⓐ 독(讀) - 경문을 이해하면서 읽어야 한다. 간경(看經) - 마음속으로 읽음. 견경(見經) - 눈으로 읽음. 문경(聞經) - 귀로 들음 ⓑ 송(誦) - 사무치기 위해 외워야 한다. ⓒ 해설(解說) - 다른 사람을 이해시키기 위해 해설해 준다. ⓓ 서사(書寫) - 세상에 널리 펴기 위해서 써서 베끼고 간행한다. 정행(受持)은 반드시 일심으로 믿고 지녀야 하지만, 조행(助行)은 자신의 환경에 맞게 마음에 따라 수행의 단계를 맞춰나가면 된다. |
금강경에 수지독송 위타인설(受持讀誦 爲他人說)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중에 수지(受持)라는 말은 정전에 보면 법위등급에 나옵니다. 보통급 10계를 받은 사람의 급. 특신급 10계를 받아 지키며, 법마상전급을 받아 지키며라고 나와 있습니다. 그 받아 지키는 것이 수지를 말하는 겁니다. 수지는 받아 지키는데 깊이 믿어가지고 행동으로 나타내는 것까지가 수지입니다.
수지를 받쳐주는 것이 독송(讀)입니다. 받아 지키기 위해서 독이 필요합니다. 읽는 것을 독이라고 합니다. 제가 예전에 말했듯이 먼저 후루룩 읽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사전에서 단어 찾아가면서 읽으면 끝까지 읽기 쉽지 않습니다. 가능하면 시간을 정해서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쉽게 말해서 유념은 자세해야 합니다. 그리고 목표를 잡아야합니다. 내가 금년에 어디까지 읽을 것이고 하루에 몇 페이지를 읽어야겠다고 구체적으로 잡아야합니다. 그렇게 해서 최소한 몇 분은 보겠다하고 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침에 기도 끝나고, 점심 먹고, 자기 나서 봐도 되고 고정적으로 유념을 잡아서 하는 것이 좋습니다. 한번 읽기가 어렵지만 4~5번 정도 읽고 나면 처음에 교전 전체를 봤던 시간의 1/3정도 밖에 안 걸립니다. 처음이 항상 어려운겁니다.
더 들어가면 읽는 방법이 마음으로 읽는 것, 눈으로 읽는 것, 귀로 듣는 것 등이 있습니다. 듣는 것도 독송입니다. 양산 김중묵 종사님께선 당신이 독경하시는 것을 녹음해 놓으신 것을 계속 들으셨고 돌아가실 때도 틀어놓으시고 돌아 가셨습니다. 양산 종사님은 대종사님 당대 제자이십니다. 그런 분이 정전을 모르겠어요? 대종사님을 안 만났겠어요? 출가위입니다. 그런데도 날마다 당신이 녹음하신 것을 틀어놓으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들으셨습니다. 이것을 말씀드리는 것은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고,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바로 공부의 진전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희한하게 아까 영화나 소설은 다섯 번 보기 어렵지만 경전을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엔 소설보다 읽기 힘들지만 세, 네 번 읽으면 소설보다 몇 배 더 재밌는 게 경전입니다. 여러분들도 처음에는 잘 몰라도 나중에 다시 읽다 보면 알아지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가 연구력이 밝아지는 때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경전, 대종사님 말씀이 파편으로 따로 놉니다. 그러다 법문을 듣고, 공부를 하다보면 서서히 짜 맞춰집니다. 이렇게 맞춰지는 것이 얼마나 재밌는지 모릅니다. 경전법규 연습을 하면 할수록 법문이 더 재미있습니다.
독송에서 송(誦)이라는 것은 거의 외우다 시피 하는 겁니다. 그리고 위타인설(爲他人說)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경전을 설명해주고 법문 들은 것을 풀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엄청난 연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법회를 보고 가면서 나는 법문을 이렇게 들었다고 이야기 해주는 것, 단회에서 같이 법문 들은 것을 가지고 의견 교환을 하는 것이 다 경전 법규를 연습하는 것입니다. 교당 내왕 시 주의사항과 연결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서사라고 하지요. 이 사(寫)는 베끼는 거거든요, 경전을 그대로 사경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당에서는 사경 노트를 만들었죠. 몇 번 보고나면 사경을 하라는 것입니다. 사경 하신 것은 한 번 보고 듣는 것 보다 여러분들한테 엄청난 자산이 될 겁니다. 사경을 몇 번했다는 것은 대단한 겁니다.
결국에 수지, 독, 송, 설, 서사 전부를 법화경에서는 오종법사라고 합니다. 다섯 종류의 법사. 수지 받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입교를 하시면서 법명도 받으셨지만 계문과 사종의무를 다 받으셨습니다. 사종의무를 분명히 받았는데도 사종의무를 받은 적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신앙생활은 껍데기로만 다니면 안 됩니다. 경전 법규 연습을 적당히 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근데 경전법규를 연습할 때 처음에는 대종사님이 그렇게 얘기하셨나보다 하실 거예요. 하지만 하다보면 그 뜻이 알아지고 내 마음과 경계에 대조가 되고 경전이 더 재미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돼야 비로소 경전 연마가 생활 속에 경전 연습으로 연결이 돼요. 법문에도 보면 연마가 아니라 연습으로 되어 있지요? 연마와 연습은 천지 차이에요. 야구선수가 상대 팀을 분석하고 야구 원리를 공부하는 것은 연마입니다. 연습은 직접 던지던가, 방망이를 휘두르는 거지요. 연습은 훈련을 말하고 대종사님이 말씀하신 것을 직접 써먹는 거지요. 대종경이나 정전에 나온 것을 실제로 적용시켜보는 겁니다. 그러다보면 의두연마가 걸리게 되어있습니다. 금강경에도 이것이 여러 번 나옵니다. 수지독송하라고 하고 그 가치가 얼마나 크냐. 항하사 모래 수만큼 보시한 것보다도 크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웃을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도 적혀 있습니다. 하지만 사항하사 모래 수만큼 보시한 것보다도 수지 봉독하는 공덕이야 말로 더 큽니다. 왜냐면 그 사람은 수지독송을 하다보면 항하사 모래 수만큼 공덕을 더 짓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법규]
법규[法規] 법률과 규칙. 법률의 규정, 규칙, 규범. 국민의 권리, 의무를 규정하여 활동을 제한하는 법류, 명령, 규정 등. 원불교 교도들이 준수해야 할 <교헌>, <교규>, <규율> 등과 정기훈련법, 상시훈련법, 교당내왕 시 주의사항, 삼심계문, 각종 예법, 사종의무 등이 넓은 의미의 법규에 해당한다. |
법규라는 것은 법의 규칙이죠. 법률과 규칙을 말하는 거예요. 국가의 법에는 상법, 민법도 있고 다 있잖아요. 그런 법규를 알아야 한다는 거예요. 교통법을 모르면 어떻게 되죠? 심하면 자기도 죽고 다른 사람도 죽이기도 하죠. 총부에 발령받은 교무님들은 먼저 헌규, 교규부터 봅니다. 그 법령안에 있는 정신과 체계를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도님들도 먼저 예전을 다 보셔야 합니다. 가례, 교례를 다 보셔야 됩니다. 예전에 나오는 예법들은 다 법규에요. 그런데 보지도 않고 연습도 않으니 자기 맘대로 신앙 생활하는 것이지요. 신앙인은 어떻게 신앙을 해라고 적혀있지요. 그러면서 종교는 마음 편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고 하지요. 진짜 자유는 구속과 인내와 그 노력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진짜 편안함도 다 고생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지 편안하기만 하면 고통밖에 안 오는 것입니다. 교헌이나 이런 것은 원불교 홈페이지에 가면 다 나와 있습니다.
정기훈련법, 상시훈련법은 다 법규에요 법률은이 뭐냐면 법규에요. 법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삼십계문, 계문 우습게 알면 안됩니다. 특히 사종의무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하면 네 가지 부처되는 길입니다. 네가 부처가 되고 싶거든 신앙의 의무인 조석 심고를 해라. 수행의 의무인 법회 출석을 해라, 보은헌공을 해라, 인연 복을 장만하는 연원을 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종의무를 지켜 나갈 때 결국은 성불제중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정산종사 법어 제9 무본편(務本編) 26. 이어 말씀하시기를 「헌규는 대중을 총섭하는 생명선이니, 개인의 사의와 편견에 집착하여 혹 위반할 생각이 나거든 본래 목적에 반조하여 대중의 공법을 자기의 생명 같이 보호할 것이요, 우리는 개인의 명예와 권리를 위하여 모인 것이 아니요 오직 교단의 명예와 권리를 얻음으로써 다 같은 영광을 삼자는 것이니, 혹 개인의 명예와 권리에 편착하는 삿된 생각이 나거든 본래 목적에 반조하여 전체의 명예와 권리를 얻는 데에 노력할 것이요, ...」 |
정산 종사님께서는 헌규는 대중을 총섭하는 생명선이다. 위반할 생각이 나거든 그 헌규에 대한 법률 보은에 조목으로 하고 법규 연습의 조목으로서도 실천했으면 좋겠습니다. 계문을 우리가 우습게 알면 원불교를 안 다니는 주변 인연들은 더 우습게 압니다. 예전에 원남교당 교도인 분이 8년간 무결석 했습니다. 제가 물었지요. “따님도 둘이나 있고, 남편도 있으시고, 시부모도 있으시고, 고향도 청주이신데 어떻게 그렇게 무결석을 하셨습니까. 집안에 애경사는 없으십니까.” 그러자 애경사가 물론 많지만 다 지키는 방법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분은 일요일 법회 날 결혼식이 생겼다고 하면 전날에 간다는 것입니다. 원불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원불교 때문에, 아니라면 내가 내일 꼭 필요한 일이 있어서 일찍 왔다고 한답니다. 그게 신심입니다. 신(信)은 정(定)입니다. 원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원불교에서 하라는 대로 법회 출석에 마음을 정합니다. 이게 선약입니다. 막상 결혼식 날 가도 줄서서 인사하고, 축의금 내고, 밥 먹고 나오잖아요. 먼저 가면 더 가까워지는 겁니다. 못 올 사람이 따로 찾아오니 오히려 더 고마운 것이지요. 이분이 일 년에 한번 법회를 쉬는 날이 있었습니다. 그 날 딸이 “엄마 무슨 일 있어? 왜 교당 안가? 누구랑 싸웠어?” 물었다고 합니다. 내가 계속 지켜나가면 주변에서 처음에는 하지마라고 하지만 나중에는 절대 방해 못합니다. 오히려 밀어주고 보호해줍니다. 친구들도 그 날은 일정이 안 되니 약속도 피해서 잡자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그것을 싹싹 빠지면 고려해주지 않습니다. 평상시에도 자주 빠지면서 그냥 와라고 합니다.
질문1) 노는 시간은 있어도 경전 볼 시간은 없으니 어찌하면 좋습니까?
서원과 신이 없는 사람은 가치에서 밀리게 되어 있습니다. 서원과 신심 있는 사람은 그러면 영화 안보고, 놀러 안다니냐? 아닙니다. 삿된 벗과 놀고, 주색낭유 하는 시간에 진리를 연마하고 경전 법규 연습을 해라는 것입니다. 시간은 만드는 겁니다. 자기가 중요하다고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쓰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시간을 어디다 쓰는지 보면 견성 했는지 알 수 있어요. 견성을 하거나 하고자 하는 신이나 서원이 있는 사람은 경전 법규 연습에 시간을 안 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데에다 쓰고 여기다 할 생각은 없는 것입니다.
질문2) 노는 시간이 없으면 친구가 없게 되고 세상에서 소외 되잖아요?
이런 착각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정당하지 못한 벗은 안 사귀는 게 낫습니다. 휴식시간은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님이 친구도 만나지 말라 했겠습니까. 지금의 청년들은 제중을 말하면서 제 능력과 법력을 헤아리지도 않은 채 세상의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만을 능사로 여기나니 크게 근심이 됩니다. 대종사님께서 젊으신 26세 대각을 이루신 것은 숙겁의 적공도 계셨겠지마는 젊은 정열을 오로지 수도 일념과 구도 일념에 쏟으셨기 때문이니 젊음을 처리하기 위하여 제중의 미명을 쓰지 말고 정열을 낭비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질문3) 스승과 경전을 특별히 정하고 공부를 하게 되면, 한편에 치우칠 염려가 있고 편협한 인격이 되지 않을까요?
그럴 듯한 말씀이지만, 정해야 합니다. 경전도 원불교의 경전이라고 이렇게 말하기 보다는 대소유무와 시비이해가 제대로 나와 있는 경전을 먼저해라는 것입니다. 일과 이치에 대한 핵심에 대한 것을 먼저 공부하게 되면 다른 것은 참고만 해도 된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먼저 우리의 지정 교서를 공부해라는 이야기입니다. 제가 원불교 학과 다닐 때 방학이 돼서 어떤 교무님한테 경전을 어떻게 공부해야하는지 질문을 했습니다. 상당히 실력이 있는 교무님이셨습니다. “나와 있지 않는가. 상시응용주의사항에 나와 있지 않는가?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라고 했고,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대강 마치면 의두 연마하라고 했지 않는가 그 것이 경전 공부 방법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걸 듣고 상당히 느낀바가 많았습니다.
4. 노는 시간이 있고 보면 경전, 법규 연습하기를 주의할 것이요, |
3조는 타력을 빌리는 것입니다. 스승이 내놓은 경전을 가지고 내가 해보는 것입니다. 지정한 법규를 받아서 지키는 것이지요. 타력을 통해서 자력을 얻기 위한 하나의 방법입니다. 그런데 4조는 경전 법규 연습을 대강 마치면 철저히 자력으로 공부해라는 것입니다. 경전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이 4조인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이 마음이라는 것은 철저한 자력의 세계입니다. 성인들을 그것을 통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경전을 내놓으셨고 우리는 이 타력을 통해서 자력을 밝히자는 것이잖아요. 참 나를 찾아서 맘대로 쓰자는 것이잖아요. 그러려면 타력을 통해서 자력을 얻기 위해서는 의두연마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의두연마는 경전을 통해 배운 것을 깊이 있게 들어갑니다. 의두 연마는 누가하죠? 경전은 성자가 쓰셨지만 의두 연무는 내가 하는 겁니다. 경전 법규 연습을 하다보면 의두를 나게 되어있습니다. 경전 내용 중에 궁금한 것이 생기잖아요. 그 궁금한 것을 계속 생각하는 것이지요.
의두는 제목을 잡고 계속 해 나가야 합니다. 모계포란(母鷄抱卵), 어미 닭이 알을 품고 있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의심을 다양하게 하는 것이잖아요. 먼저 생각도 해보고 직관으로도 해보다 보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교당에 가서 감정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두가 없어서 깨친 게 없으니 감정 얻을 것이 있겠어요? 상시 응용 주의 사항과 교당 내왕 시 주의 사항이 서로 같이 맞물려있습니다. 제목을 정하면 쭉 가지고 가보십시오. 하루에 좌선 후에, 일하다가, 경전 보다가 5분, 10분 씩 해보면 됩니다. 꼭 좌선을 해서만 깨닫는 게 아니고 경전을 보다가도 놀러가서라도 때가 되면 되게 되어있어요. 이것이 정혜등지입니다. 수양, 연구를 통해서 죽 하다보면 내 안에 밝은 지혜가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반드시 깨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깨쳐, 이거 쉽지 않을거야.’하는 사람은 확실히 안 깨치게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조물주잖아요. 내 마음에서 그런 마음을 갖는 순간 안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근데 여러분들이 신을 가지고 분 의 성을 들이대면 그 신을 확인할 때가 올 것입니다. 신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음은 정하는 거예요. 그 마음이 자기를 거기다 에너지를 쓰게 하고 참 나를 만나게 하거든요. 그런데 내 스스로 안 될 거야, 나는 못 깨칠 거야, 나는 멍청해, 안 된다고 하니까 안 되는 거죠.
반드시 열릴 거라는 생각을 가지면 제가 확실하게 도와줄 겁니다. 사실은 제가 도와주는 게 아니라 여러분들이 여러분을 도와주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의두 연마를 하잖아요. 그 대소유무라던가 원리를 알면 모든 게 감각감상이 쏟아져 나옵니다. 그러면서 산 경전이 되는 것입니다. 산 경전이라는 것이 법문이 나오거든요. 그것을 통해서 이치와 원리를 얻는 것이지요. 그 것이 경전이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여러분들이 만나는 모든 경계 속에서 여러분들의 경전이 나올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자력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일원상입니다. 철저한 일원상인데 본인 스스로가 일원상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일원상이 아니게 되는 거예요.
질문 2) 의심 건을 적어 놓고 연마는 하오나 해오를 얻지 못하기 때문에 며칠 하다가는 싫증이 나서 놓아버리게 됩니다.
각산님께서는 밤이 아직 안 익었으니 밤알이 쏙 안 빠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 때가 있습니다. 전생에 많이 닦은 분은 이생에 조금만 해도 됩니다. 전생에 닦은 것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반드시 스승이 있어야 합니다. 전생에 닦은 사람도 스승이 있으면 더 빨리 늡니다. 제가 보면 왜 경전을 가까이 하지 못하고 스승의 타력을 잘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 참 안타깝습니다.
남악회양화상이 처음 육조혜승 스님을 참례하였다. 육조스님이 물었다. “어느 곳에서 오는가.” “숭산에서 옵니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회양 스님은 어쩔 줄 모르고 쩔쩔매다가 8년만에야 홀연히 깨치게 된다.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는가?”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곧 맞지 않습니다.” “증득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가?” “증득하는 것은 있지만 더럽혀지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더럽혀지지 않는 그것이 모든 부처님의 아끼는 것이다. 그대가 이미 이와 같으며 나도 또한 이와 같다.” 남악회양화상의 법은 마조도일선사가 이었고 몇 대가 지나지 않아 위앙종이 처음으로 생겼다. 그 이후로 임제종이 나왔다. |
마조도일(馬祖道一 : 709-788) 남악회양(懷讓) 화상을 만났다. 회양은 도일(道一)이 진리를 담을 만한 그릇이 됨을 알아보고는 물었다. “대덕(大德)은 좌선(坐禪)을 하여 무엇을 하려 하시오..?” “부처가 되려고 합니다.” 회양은 이에 벽돌 한 개를 가져와 그 암자 앞에서 갈기 시작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려 하십니까.” “갈아서 거울을 만들려 하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벽돌을 갈아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수레가 가지 않는다면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도일일 대답이 없자, 회양이 다시 말했다. “그대는 좌선을 배우고자 하는가, 좌불(座佛)을 배우고자 하는가? 만약 좌선을 배우고자 한다면 선(禪)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며, 좌불을 배우고자 한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 없는 법에서는 취하거나 버리지 말아야 한다. 그대가 좌불을 따른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니, 만약 앉은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이치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오조도 육조한데 어디서 오냐고 물었었습니다. ‘설사 한 물건이라고 하더라도 곧 맞지 않는다.’는 말은 언어도단의 입정처, 무일물을 이야기합니다. ‘증득하는 것은 있지만 더럽혀지지는 않습니다.“는 말은 그 자리는 더럽혀지지 않고 따로 가꿀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 마음자리는 결국 하나더라는 이야기입니다.
남악이 마조에게 이렇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마조가 엄청난 도인되고 임제종이 생기고 불교의 큰 흐름이 됩니다.
질문3) 의심이 걸리는 경우를 들어주십시오.
여러분 의심이 안 걸리십니까? 안 걸리는 이유가 여러 가지 있습니다. 관심이 다른 곳에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경전공부, 의두연마하는 것이 사치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진짜 의두심이 있는 사람은 의심이 아래로 내려가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현상의 만법은 들어가고 하다보면 도대체 이것이 뭐냐하고 의심이 들게 되어있습니다. 저 지리산의 물이 어디로 흘러 들어가지? 강으로 가는구나. 강물은 어디로 들어가지? 바다로 가는구나. 바다는 어디로 가디? 다시 수증기가 되네. 그러면 수증기가 어디로 가는 거지? 비가 되고 눈이 되는 거구나. 비가 눈이 되어서 다시 지리산으로 떨어져서 이렇게 순환하는 거구나. 그 이치를 의심을 통해 알아가는 것이지요. 왜 그런가, 왜 그런가 계속 들어가는 의두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 의두를 반드시 하겠다는 신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 의심은 놓지 않는 정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그 의심은 수양과 동반되어야 합니다. 또한 현실 속에서도 까닭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사람은 아주 멍청한 사람입니다. 뭔가 시키면 나라면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해야 효과적일까 의두를 걸어야 개선책이 나오고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의두를 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응용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대종사님 법문을 그냥 그대로 전달하는 제자가 아니라 대종사님 법문을 의두를 통해서 내 것으로 만들어서 내가 경계에서 마음대로 써야 하는 것입니다. 원리를 알면 의두를 통해서 실지 경계에서 응용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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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