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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꿈샘님.
님께서
개혁주의신앙공동체를 찾아주시며
복음의 교제에 있는 것에서 질문해 주심을
주 안에서 기쁨을 가지며
이 일을 이루신 주께 감사드립니다.
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질문해 주셨습니다.
“바리새파 사두개파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대교 안에 있는 분파중 하나인지요?
어떤 차이가 있는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
이에 다음과 같이 답변을 드립니다. 답변의 글에서 보충적인 설명이 필요한 부분은 각주를 달았습니다. 하오니 참조하여 보시기 바랍니다.
님은 먼저“바리새파 사두개파라고 하는데 이것이 유대교 안에 있는 분파중 하나인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답변은“예, 그렇습니다.”입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유대교 안에 있는 분파중 하나인지를 알아야겠습니다.
유대교의 기원은 이스라엘 왕국이 남왕국 유다와 북왕국 이스라엘로 분열되고, 북왕국 이스라엘은 B.C. 722년 앗수르에 의해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며, 남왕국 유다 또한 바벨론에 의해 3차(1차 B.C. 605년 여호야김왕 재위시, 2차 597년 여호야긴왕 재위시, 3차 586년 요시야의 아들, 곧 여호야김의 동생 시드기야가 재위시)에 걸쳐 주전 586년에 멸망하였으나 70년간의 포로기를 겪은 후 바벨론 제국을 멸망시킨 바사(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의 고국 귀환을 명하는 칙령을 B.C. 538년에 반포함으로써 538/537년, 아닥사스다 왕 때인 458년, 444년, 모두 3차(1차 스룹바벨, 2차 에스라, 3차 느헤미야의 인도에 의해 귀환)에 걸쳐 본토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함으로 존속하여 여호와의 신앙에 있는 것에서 시작이 됩니다.
이러한 유대교에는 여러 종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자주 대하는 바리새인(바리새파 사람), 사두개인(사두개파 사람)이 그들인데, 이들 종파 외에도 열심당인 셀롯파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는 언급되고 있지는 않지만 엣센파가 있었습니다. 이는 유대인으로서 역사가로 이름이 알려져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보게 되는데, 그는 네 종파 중에서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 세 종파를, 또 다른 곳에서는 셀롯파를 거론합니다.
이 당시 유대인들 가운데는 세 가지 사상 학파가 있었다. 이들은 인간사에 대해 서로 견해를 달리했다. 첫째는 바리새 학파요, 둘째는 사두개 학파이며, 셋째는 엣센 학파였다. 바리새인들에 대해 보면 그들은 어떤 사건들은 운명에 의해 일어나지만 다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른 사건들은 그것이 일어나고 일어나지 않고 하는 것이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그러나 엣센 종파는 운명이 만사의 주인이며 운명이 공포한 것과 일치하지 않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사두개파는 운명을 도외시하고 운명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의 활동이 운명이 공포한 것과 일치해서 일어나지 않으며 만사가 우리의 능력 안에 있다고 한다.
유대인의 네 번째 학파의 수장은 갈릴리 사람 유다이다. 이 학파는 다른 모든 면에서는 바리새파와 일치하나, 자유를 향한 그들의 열정은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오로지 하나님만을 통치자요 주인으로 인정한다.
요세푸스의 기록에서는 이처럼 바리새파, 사두개파, 엣센파와 함께 셀롯파, 모두 네 종파가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에서도 바리새인, 사두개인과 함께 열심당으로 불리는 셀롯인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엣센파의 언급은 말해지고 있지 않습니다. 요세푸스의 기록과 신약성경, 이 둘을 종합할 때 바리새파, 사두개파, 셀롯파, 엣센파의 네 종파가 유대교 안에는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 종파는 유대교 안에서 자생적으로 생긴 것이 아니라, 유대교 안에서 일어난 분열에 의하여 있게 된 것이었습니다.
1. 엣센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셀롯당, 엣센파, 이들 네 종파가 있기 이전의 유대교는 B.C. 2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레위 지파 아론의 자손으로서 엘르아살의 가계를 잇는 사독 가문 출신의 대제사장1)을 정점으로 하는 단일종파로 존재해 왔었습니다만, 안티오쿠스 4세가 B.C. 175년에 시리아 왕의 권좌에 오르며 강력한 헬라화 정책을 쓰며 예루살렘을 유린하여 율법서를 불태우고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는 등 유대인의 신앙을 무참히 짓밟아 훼손함으로 유대교와 충돌하자2) 이에 저항하는 경건한 충성자들의 모임인‘핫시딤’이 결성되어 격렬히 저항하는 것으로 희생제사의 언약적 규범들을 굳게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 저항자들 가운데는 모딘(Modin) 출신의 유대인 하스몬가의 시골 제사장 마타디아스(Mattathias)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 유다 마카비(Maccabeus)는 유대교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사장 규정을 도입하는 등으로 저항하는 마카비 가문의 봉기가 일어납니다.3) 이 마카비 가문의 제사장 규정은 마타디아스의 조상인 하스모니우스(Hasmoneus)라는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그런데 이 마카비 가문에 대항하는 분열이 있게 됩니다. 그것은 마카비의 동생이며 하스몬가의 다섯째 아들인 요나단이 유대 총독이 되자 B.C. 152년에 대제사장 자리를 불법으로 차지하는 일이 발생하였으며,4) 이때부터 로마통치시대까지 대제사장직은 하스몬가의 특권이 되었으나, 이때 쫓겨난 대제사장은‘의의 교사’(teacher of righteousness)로 불리며 B.C. 150년경에 엣센파를 결성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하스몬가를 이루고 있는 마카비 가문이 다윗 가문의 왕권을 찬탈한데다가 대제사장직마저 빼앗았으며, 로마와 결탁하여 군사적인 목적이 있을 경우는 안식일을 위반하는 등으로 율법에서 이탈해 있는 마카비 가문에 대해 좋지 않게 여겼습니다. 반면에 하스몬가와 대항하는 엣센파를 하스몬가는 반체제 조직으로 몰아세우며 비난하였습니다. 하지만 엣센파는 그 수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4천명에 달한다고 할 만큼 세력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 엣센파는 정치적으로는 영향력이 크지 않았으나 종교적으로는 가장 영향력이 큰 집단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이들이 조상들의 전통적인 신앙에 그 누구보다도 철저히 순종하였다고 보아 다른 종파보다도 엣센파를 높이 평가하며 따랐습니다. 이러한 엣센파는‘하-야하드’(the community)란 새로운 조직체인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이 야하드를 그들은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유일한‘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엣센파는 요세푸스의 기록에 의하면 그 수가 4,000명에 달했으나, A.D. 70년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어 무너질 때까지 존재하며 활동하다가 그 모습이 사라지게 됩니다.
2.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언급되고 있어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유대교의 대표적인 종파입니다. 이 바리새파는 유대인의 바벨론 포로기 이후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에 의한 유대교의 시작과 함께 서서히 움터 그 모습을 갖추면서 하스몬가의 통치자 요나단의 시대(B.C. 161-143)에 바리새파란 이름이 처음 등장함에 따라 이 시기를 바리새파의 생성 시기로 봅니다. 당시 바리새파는 전통적으로 지키던 안식일법 및 정결법을 어겨가면서 전쟁을 수행할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직을 불법으로 겸직하는 마카비 가문 요나단의 통치를 용납하지 않고 반대하여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요한 힐카누스(B.C. 134-104)가 통치하였던 시기에 이르러서 바리새파는 유대 사회에서 이미 영향력이 큰 종파로 존재하였으며, 살로메 알렉산드라 시대(B.C. 76-67)에서 가장 왕성하였습니다. 이는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확인됩니다. 그는 살로메 알렉산드라의 통치에 대하여 말하기를,“그녀는 명목상의 통치자였으며 바리새인들이 실권을 장악하였다.”라고 기술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바리새파와 대립관계에 있던 알렉산더 야나이(B.C. 103-76)가 임종시에 부인이자 후계자로서 통치자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살로메 알렉산드라에게 바리새인들이 이전에 누렸던 권세의 자리를 그들에게 회복시켜 줄 것을 권고하는 유언을 다음과 같이 하였습니다.“바리새인들은 동료 유대인들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어 밉보인 자들에게는 해를 입히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도울 수 있으며 백성들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고 있으니 그들과 대적하지 말고 친하게 지내시오.”이에 알렉산드라는 그의 권고를 받아들여 바리새인들이 마음대로 통치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바리새파는 이 시기에 가장 왕성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되는 A.D. 70년을 기점으로 그 명칭이 유대교의 연보(annal)에서 사라질 때까지 그 세력이 6,000명에 이를 만큼 크게 확장됩니다. 이러한 바리새파 사람들이지만 헤롯 대왕 시대(B.C. 37-34)에 들어서서 헤롯 대왕의 정권에 대항할 힘을 갖지 못함으로 더 이상 정치에 관여를 못하게 됩니다. 헤롯이 권좌에 올랐을 때 폴리오라는 바리새인은 백성들에게 헤롯을 지도자로 받아들일 것을 권고하였으며, 그 결과 폴리오와 6,000명에 달하는 바리새인들은 헤롯을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이렇게 정치적 기반을 잃은 바리새파는 변화를 꾀하게 되는데, 민간 경건 운동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치는 순수한 종파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다가 로마제국에 대반란을 일으키는 첫 해(A.D. 66-67)에 정치적 집단으로 그 모습을 띠지만, A.D. 70년 이후에 다른 종파가 그렇듯이 바리새파 또한 쇠락하여 사라집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바리새파가 세력을 크게 확장하며 발전하여 유대교를 지탱하는 중심으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 데에는 몇 가지 요인이 있습니다.
첫째는, 유대인이 바벨론 포로 시대를 마감하고 본토로 귀환하여 예루살렘 성전과 성을 재건함으로써 제사 의식이 회복되고 회당에서 율법이 해석되고 교육되어 강조되면서 유대 백성의 신앙과 정신적 역할을 수행하는 바리새인의 필요와 등장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습니다.
둘째는, 유대 신앙의 보수를 위한 저항과 함께 엄격한 종교생활을 힘씀은 백성의 신망을 얻으며 유대 민족주의, 또는 유다 국가주의와 연결되어 하나님 나라로서의 이스라엘의 회복을 대망하는 유대인들의 지지기반이 되며 바리새파가 발전하는 주요 요인이었습니다. 바리새인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 뜻이 분리되어 나간 자라는 것에서‘분리된 자’, 또는 분리를 조장하는 자들이란 것에서‘분리주의자’를 뜻했습니다. 이는 B.C. 2세기경에 형성된 저항 세력인‘핫시딤’에서 하스몬 가문을 이르게 되는 마카비 가문에 반발하여 저항하는‘의의 교사’가 주도하는 엣센파를 추종하는 것을 거부하고 독자적으로‘핫시딤’의 한 무리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런 이들을 엣센파는 비난조로 부정적인 관점과 시각에서의‘분리시키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파라쉬’에서 가져와‘페루쉼’이라고 부르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서 이것의 헬라어인‘파리사이오스’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이것의 영문 표기가‘바리새’(Pharisee)입니다. 그러나 바리새란 용어가 갖는 부정적인 뜻은 이들이 종교법과 관련된 일상적인 규칙들을 만들어 엄격하게 지키는 모습에 있는 것에서 훗날 속된 백성들과‘구분(구별)된 자’란 긍정적인 개념으로 사용됩니다. 이 바리새인들을 유대교 지도자로 두고 있는 유대인들은 이들에게 절대적 신망을 갖고 이들의 가르침을 좇아 온전히 율법을 지킴에 있을 때에 있고자 하는 것에서 많은 바리새인을 배출할 여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바리새인들은 예루살렘만이 아니라 팔레스타인 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으면서 그들의 율법에 대한 헌신과 종교적 열심 때문에 유대 백성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았는데 유대인의 세계에 있어서 모든 계급에서 바리새파를 구성하는 회원을 취하였습니다. 바리새파의 구성은 극히 소수만이 상류 계급에 속한 제사장들이었고, 대다수는 백성들에게서 취해졌으며,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 포함되었습니다. 이러한 특성의 구성은 바리새파의 층이 두터우며 범위가 넓어 유대 땅 전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문이 열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리새파가 이렇다 보니, 이들을 적대시 하며 대항하는 다른 종파인 반대 세력들이 무시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영향력을 인정하고 지배를 받아 따르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3. 사두개파
사두개파의 사람들, 곧 사두개인들은 바리새인들과 더불어 자주 신약성경에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유대 사회에서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 함께 유대교에서 중요한 종교적 종파였습니다. 사두개파란 명칭은 마가복음 12장 18절에서 우리말로는‘사두개인’이지만 헬라어로는‘사두카이오스’라고 불리며 처음 나타나는데, 이러한 명칭은 다윗 왕 시대의 제사장‘사독’이란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다고 봅니다(삼하 15:24 이하; 17:15; 19:12; 왕상 1:32). 사독 가문은 대제사장 야손(Jason, B.C. 175-172) 때에 평범한 가문의 제사장 메네라오스(Menelaos)에 의해서 대제사장직을 빼앗길 때까지 대제사장직을 잇고 있었던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 계급에 속하는 최상위 계층이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들에 대해 언급하기를,“사두개인들의 가르침은 단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져 있다. 이들은 최고위층에 속하는 사람들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사도행전 4장 1절, 5장 17절에서 사두개파를 제사장들과 한 무리로 언급합니다.
이 사두개파가 출현하게 된 것은 마카비 가문의 요나단이 B.C. 152년에 대제사장 자리를 불법으로 차지할 때 적법한 대제사장‘의의 교사’가 B.C. 150년경에 엣센파를 결성하는데, 핫시딤의 일부인 바리새파가 의의 교사와 동조하는 것을 거부한 반면에 요나단에게 동조하는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이 있은 것에서 말해집니다. 이들이 훗날 바리새파와는 구별되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었는데,‘사두개파’라고 불립니다.
사두개파는 제사장 가문에 속하는 자들인 만큼 숫자에서는 다른 종파에 비해 소수였으나 학식을 겸비한 자들인데다가 유대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특권층으로서 막강한 세력을 이루었습니다. 하지만 유대 사회의 정치적 상황이 갖는 변화에 의해서 세력이 강해지기도 하는가 하면 또는 약화되기도 하는 등 다변적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두개파는 아리스토불루스 2세의 통치(B.C. 67-63) 때에 가장 활발하며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다가 헤롯 대왕 때에 박해5)로 그 수효가 현저히 감소되었으나, 헤롯 대왕과 아켈라오스6)가 죽자 다시금 대제사장의 권한이 커지게 되는데 로마가 유대를 합병(A.D. 6)하였을 때 대제사장이 유대인의 공식적 대표자로 간주됨으로 사두개파는 다시 지배 계급에 머물며 그 세력이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사두개파는 하스몬가 이래 그 수가 4,000명 정도였으나 바리새파에 비해 결코 열세에 있지 않고 대등한 관계에서 대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A.D. 70년 예루살렘 성전 파괴와 더불어 다른 종파가 그렇듯이 사두개파 또한 자신들의 기반을 잃고 소멸되어 갔습니다.
4. 셀롯파
유대교의 종파에는 엣센파, 바리새파, 사두개파 외에 셀롯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 두 곳에는 이들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눅 6:15)
“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행 1:13)
여기서‘셀롯’(Zealots)은 헬라어로는‘젤로타이’로서 그 뜻은‘열심당’입니다. 요세푸스는 이들의 출현 배경을 갈릴리인 유다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A.D. 6년으로 잡습니다.7) 열심당인 셀롯파의 명칭은 로마에 대항하는 저항운동가로서의 역할을 부각시키는 영예의 칭호로서 스스로 지은 것으로 보입니다.8) 이들 셀롯파는 A.D. 66-73년에 걸친 로마제국과 가진 유대전쟁 때 로마에 가장 격렬하게 맞서 항거한 극단적인 저항 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이며, 이때 마사다의 마지막 요새가 함락된 것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하지만 이들 셀롯파의 정신은 근절되지 않고 유대인에게 계속 이어졌습니다.
신약성경에는 강도(막 15:27), 혹은 자객(행 21:38)이 등장하는 것에 대해 유대인 역사가들은 그들을 도적과 산적 떼로 묘사하나 이들이 기치를 들었던 사상들을 생각해 볼 때 이들은 유대에서는 애국자로서, 셀롯파에 속했던 사람들일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님의 질문에서 두 번째에 해당하는“(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유대교 안에 있는 분파라면 이들 분파 사이에는)어떤 차이가 있는지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을 바리새인이라고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싶습니다.”라고 질문하신 것에 대해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님이 말한 바와 같이‘바리새인’은“바리새파에 속한 사람”, 곧“바리새파의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파는 사두개파와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설명하여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답변을 바리새파와 사두개파 두 종파만이 아니라, 앞에서 답변 드린 것에서 언급한 엣센파와 셀롯파까지 모두 다같이 답변을 드림으로써 유대교 안에 있은 분파인 네 종파 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를 알 수 있도록 설명하겠습니다.
1. 엣센파
엣센파는 그 존재가 성경에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아 알 수 없습니다. 이들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유대인 역사가의 기록과 이를 연구한 분들에 의한 설명에서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의존해서 알 수 있는 엣센파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엣센파는 그 출현이 예루살레 성전이 이방인에게 짓밟혀 모독을 당하며 율법이 유린당하는 것에 항거하는 핫시딤에 의하여 결성된 데다가 불법적으로 대제사장직까지 독차지함으로써 유대인의 지도력인 정치적이며 종교적인 자리까지 다 차지하는 것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등장한 것인 만큼 정치적인 집단의 색깔이 강합니다.
(2) 엣센파는 새로운 종교 조직체인‘야하드’(the community)를 전체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종교 공동체라 내세우면서 야하드에 가입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선민인 이스라엘임을 주장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야하드에 가입을 거부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거부하는 것으로 하나님과 맺은 시내산 언약을 파기하는 것이며 율법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다룸으로써 유대교 안에서는 극단적 세력으로 형성되었습니다.
(3) 엣센파는 야하드와 연계되어 있기 때문에 야하드의 엄격한 계급 구조를 따르며 성전 제의 규정을 엄격히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금욕주의 생활을 하는데 대체로 독신생활을 유지하지만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속시키기 위해 제사장 가문의 고아들을 입양, 훈육시켰습니다.
(4) 엣센파는 사독 계열의 대제사장이 아닌 대제사장직의 정통성을 부정하며 성전에서 드려지는 희생제사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항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보편적으로 따르던 태음력에 기초한 유대절기를 거부하고 태양력에 따른 자체적인 월력으로 절기를 지켰습니다.
(5) 엣센파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그 이전에 세워 놓으신 하나님의 창조 계획에 따라 일어난 것이라고 믿으며, 하나님은 우주를 자신의 뜻에 따라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창조하신 피조물과 동행하시길 원하신다는 당시에는 독특한 예정론 사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진리의 영과 악마의 영인 두 가지 영에 의한 가르침을 통해서 대립적인 두 영의 세력 사이에 벌어지는 전쟁이 개인의 삶에도 일어나 각 사람은 빛과 어둠의 일정 부분을 갖고 있어서 이 두 사이에서 싸움이 일어나는데 빛의 부분이 많을 경우는 의인으로 불리며 어둠의 부분이 많을 경우는 악인이라고 불린다는 이원론적인 사사을 가졌습니다. 이는 유대교의 다른 종파인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차이가 나는 엣센파의 한 특징이 됩니다.
(6) 엣센파는 또한 인간을 하나님의 영광과 대비시키는 가운데 철저하게 죄에 빠진 피조물로 이해하며 하나님의 인도와 자비를 필요로 하는 존재로 보면서, 그러기에 인간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책임 있게 관리할 과제를 안고 있으며, 제의적 정결함과 토라(율법)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을 가르쳤습니다. 이런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불법적인 대제사장으로 인해 더럽혀졌다고 여겨 당시를 악의 세력이 절정에 이른 때로 보면서 성전 안에서 행해지는 희생제사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에 예배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엄격히 참여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예배를 하늘의 제식에 참여하는 천사들이 함께 하고 있는 것으로 믿었습니다.
(7) 엣센파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서 자신들이 임박한 종말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보아 메시야의 도래를 강하게 열망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메사야관은 한 분의 메시야가 아닌 복수형의 메시야관입니다. 하나님은 마지막 시대에 빛의 자녀들인 엣센파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종말론적 메시야를 보낼 것인데, 한 예언자와 함께 아론의 메시야인 제사장 메시야, 그리고 이스라엘의 메시야인 다윗 가문 출신의 왕적 메시야를 보내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엣센파는 이 메시야관을 이스라엘의 메시야, 즉 왕적 메시야보다는 제사장적 메시야를 더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것은 엣센파는 성전 제사장 중심의 공동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엣센파의 이러한 메시야관은 하나님의 언약으로 주어져 예언된 하나님의 메시야와는 전혀 성격이 다릅니다. 엣센파의 메시야관은 아론의 제사장 계열에서 오는 한 대제사장, 또한 다윗왕가의 한 자손으로 오는 메시야로서의 한 인간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2. 바리새파
바리새파는 신약성경에 99번 기록되어 있을만큼 자주 언급되고 있습니다. 그에 따라서 가장 많이 자세하게 알 수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입니다.
(1) 바리새파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율법이 완전히 준수될 때 메시야가 강림하실 것이며, 이 때 유대인들은 이방(로마)의 통치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2) 이러한 사상을 가진 바리새파는‘엄격하고 정확히 율법을 지키는 자’란 특징을 갖습니다. 이는 사도 바울이 사도행전 22장 3절, 5절에서 각각 “나는 유대인으로… 우리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고 오늘 너희 모든 사람처럼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이 있는 자라”,“일찍부터 나를 알았으니 그들이 증언하려 하면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한 파를 따라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다”라고 말한 것에서 잘 알 수 있습니다.
(3) 바리새파는 유대 백성들이 율법을 철저히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제의를 수행할 시 제사장들에게 부과된 성경에 있는 정결법을 제사장이 아닌 유대 백성 모두가 지켜야 할 보편적인 법으로 만들고 이를 가르쳤습니다. 바리새파는 율법을 지킴으로써 모든 백성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바리새파는 글로 기록된 토라 외에도 구전으로 전해 내려온 법체계, 곧 유대인들의 조상들에 의한 전승에서 유래한 규정들을 중요하게 다루면서 이를 통해 일상적인 삶을 규정지었습니다. 이는 바리새파 출신인 사도 바울의 말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는 말하기를,“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갈 1:14) 라고 하였습니다.
(4) 이처럼 율법과 조상들의 전승에 엄격함은 안식일 계명을 철저히 지키는 것(마 12:2, 병행구절. 막 2:24; 눅 6:2)을 비롯하여서 자기들의 전 재산의 십일조를 준행하되 가장 사소하고 작은 것에서까지 십일조를 준행하였던 것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마 23:23, 병행구절 눅 11:42).
(5) 바리새파가 사두개파와 구별되는 차이를 갖는 것은 바리새파는 조상들의 구전에 의한 전승을 율법과 동일하게 권위를 갖는 것으로 인정하는 것과 함께 영혼의 존재와 함께 영혼불멸과 부활신앙을 갖는 것에 있었습니다. 이는“모든 영혼은 비록 불멸하나 오직 의인들의 영혼만이 다른 육신으로 넘어갈 수 있을 뿐이다. 이와 달리 악인들의 영혼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된다.”라고 언급하고 있는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확인이 됩니다. 사도행전 23장 6-8절에서의 사도 바울의 변론에서는 바리새파는 죽은 사람의 부활과 함께 천사도 영도 다 있다고 믿고 있다고 하였습니다.“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어지니, 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6) 바리새파가 사두개파와 차이를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모든 것을 운명과 하나님의 섭리를 의존하는 신앙에 있으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 또한 믿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요세푸스의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바리새파 사람들은 모든 것을 운명과 하나님의 섭리에 돌린다. 그러나 비록 운명, 혹은 섭리가 모든 행위에 있어서 협력하지만 옳은 일을 행하거나 그 반대되는 악한 일을 행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바리새파 사람들은 비록 모든 것이 운명에 의하여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인간적 욕구로 말미암아 원하여 이루어진 것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결정과 이를 선이나 악으로 연결시키려는 인간들의 결단 사이에 공동작업이 놓여있음이 하나님 보시기에 흡족하시기 때문이다.”
(7) 이러한 바리새파는 자신들만의 독특한 복장을 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손쉽게 식별하는 표지 역할을 함으로써 다른 종파와 구별시켰습니다. 그들은 이마에 두르거나 팔에 매다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쉐마(“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성구)와 하나님의 축복이 적힌 경문곽(성구함/성구곽)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아 늘어뜨리며 거룩하게 꾸며 자신들을 보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그들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칭찬 듣기를 좋아했습니다(마 23:5-7).
(8) 예수님은 이러한 바리새인들을 모세의 자리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나 말에만 있지 행함은 없는 자라며,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으로 상석에 앉는 것을 좋아하고 많은 사람이 오가며 다니는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에서 갖는 것이었습니다(마 23:2-7). 그러기에 신약성경 많은 곳에서 예수께서는 이들의 외식에 의한 위선을 꼬집으며, 이런 그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질책하셨습니다(마 6:2 등).
3. 사두개파
사두개파는 엣센파와 바리새파와 함께 유대교에서 중요한 종파를 이루고 있으면서 주로 바리새파와 함께 등장합니다. 사두개파는 신약성경에서 모두 14번 언급됩니다.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정반대의 특징을 띠고 있어서 바리새파와는 쉽게 구별이 됩니다.
(1) 사두개파는 예루살렘의 성전 계급, 곧 제사장 귀족들로 구성되었으며, 하스몬가의 민족주의적 성전 국가 이념을 수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성전 중심으로 한 정치적, 종교적 활동에 역량이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2) 사두개파는 바리새파와는 달리 오직 문서화된 율법만을 인정하고 조상들의 구전 전승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사두개파에 대하여 요세푸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은 모세의 율법책에는 기록되지 않은 조상으로부터 전승되어진 대단히 많은 율례들을 백성에게 가르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두개인들은 그들을 배척하며 말하기를‘우리는 기록된 율법만을 준수하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것들을 준수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3) 이러한 사두개파는 바리새파가 영혼불멸과 함께 죽은 자의 부활과 천사와 영을 믿은 것과는 달리 영혼불멸을 말하게 되는 죽은 자의 부활을 부인하였으며(마 22:23, 병행구절. 막 12:18; 눅 20:27; 행 4:1-2; 23:6-8), 천사와 영도 믿지 않았습니다(행 23:8). 그러기에 또한 미래의 심판으로 있을 하늘의 상도, 그리고 지옥의 형벌도 믿지 않았습니다. 사두개파는 인간의 행위에 합당한 보응의 상과 벌은 현세에 주어진다고 보았습니다. 사두개파의 이러한 특징은 바리새파와 구별되는 가장 큰 차이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4) 사두개파는 또한 바리새파가 운명과 하나님의 섭리 및 이와 관련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말하는 것에 반대의 입장을 취하고 있으니, 운명이란 것을 전적으로 부인하며, 인간이 선을 행하거나 악을 행하는, 그리고 이를 단지 방관하는 일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멀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이들은 선과 악은 인간의 선택에 놓여 있으며 각 개인의 결단에 따라서 선과 악 둘 중에 하나를 따라가게 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4. 셀롯파
신약성경에서 단 두 곳에서만 언급되고 있는 셀롯파(셀롯당/열심당)는 그 출현이 A.D. 6년에 있은 갈릴리인 유다가 로마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킨 것에서, 그리고 이들은 또한 A.D. 66-73년에 걸친 로마제국과 가진 유대전쟁 때 로마에 가장 격렬하게 맞서 항거한 극단적인 저항 운동의 선봉에 섰던 사람들로 마사다의 최후와 함께 한 자들인 것에서 무력적인 성향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면에서 바리새파와 일치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셀롯파는 유대인에게서는 의인이요 애국자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면서 바리새파와 깊이 관련되어 있다고 봅니다.
그럼에도 바리새파와는 구별된 차이를 갖는 것은 당시 바리새파가 급격한 헬라화의 위험에 처한 상황에서도 이에 대항하지 않고 단지 전통 고수로만 나가는 것을 비판하는 가운데 여기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바리새파를 이탈하여 독자적인 종파를 형성하고 무력적인 항거로 맞서 나가며 이스라엘을 위한 애국과 종교는 분리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함으로써 자신들의 행동을 하나님을 위한 열심으로 내세워 유대 백성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님이여!
이상으로 답글을 마칩니다. 본 답글이 님이 궁금해 하며 알고자 하는 것에 충족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만, 혹 설명이 미흡한 부분이 있으면 관련된 전문 서적이라든지 또는 보다 나은 자세한 설명을 드릴 수 있는 분을 통해서 도움을 받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무엇보다 질문에 대한 답글을 대하며 정작 님에게 필요하고도 중요한 것은 유대교의 네 종파(분파)에 대한 이해를 잘 가져나가는 것과 함께 바리새파와 사두개파가 그리스도이시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에게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이해를 가져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유대교의 각 종파 지도자들로서 당시 71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공회의 구성원이었습니다. 그러한 것에서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는 유대인들에게서는 존경받는 지혜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지혜로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여 거부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나아가서는 그 지혜로 예수님을 죽일 음모에 있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그들의 지혜를 깨부수시고 그들의 슬기를 감추심으로 지혜 없는 자가 되게 하시며 슬기롭지 못한 어리석음에 있게 하십니다. 그러한 예수님은 자신을 따르는 제자들에게는 나타내심으로 하늘로부터 주신 그 지혜로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것이 되게 하시는 복에 있게 하셨습니다.
이 지혜의 영이신 성령님의 인도와 도우심이 님과 함께 하실 것을 주께 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말미암아 님의 믿음이 진리 위에 올 곧게 굳건히 잘 서나감으로,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교회를 잘 이루어가시길 바랍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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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12지파 중에 레위 지파를 택하셨고, 그 중에서도 아론의 가문을 제사장 가문으로 택하시고 아론의 직계 장자로 대제사장 직을 맡게 하셨다.(출28:1) 아론에게는 네 아들이 있었다.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이 있었는데 이들 중에 나답과 아비후는 임의로 준비한 불로 성소에 분향하다 죽임을 당하였다.(렘10:1~2) 그래서 셋째인 엘르아살이 장자 계승의 원리에 따라 아론의 뒤를 이어 제 2대 대제사장 직으로 취임을 하였다.(민20:25~28) 그리고 엘르아살 계열의 계승 언약이 성립된 것은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 때였다. 이스라엘 백성이 싯딤에서 모압 여인들과 간음 사건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백성들을 진멸하려 하셨을 때, 비느하스가 모압 여인과 간음한 자를 처형함으로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인 죄를 제거하였기 때문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비느하스와 언약을 맺으사 그 후손들로 하여금 영원한 대 제사장 직분을 잇도록 하셨다.(민25:10~13) 이 때에 아론의 4남인 이다말의 후손들은 제사장으로 직분을 수행하였는데 가나안 정착 후에 사사시대를 거치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타락하였고, 엘르아살 계통의 대제사장직을 맡은 사람이 너무 어려 그 직책을 수행할 수 없자 이다말 계열의 제사장 중에서 임의로 대제사장직을 대신 맡아 하기 시작했다. 이 계열의 대표적인 후손 대제사장이 엘리 대제사장이다. 한편 엘르아살- 비느하스 계열의 대제사장은 사울의 통치기간 까지는 나타나지 않았으나 사울 왕이 죽고 다윗이 돌아오자 12지파의 대표자들이 모여 다윗을 왕으로 추대할 때에 아론의 후손 가운데 사독이 22명의 용사를 이끌고 처음 나타났다.(대상12:27~28) 그가 지금까지 숨겨져 있었던 엘르아살 계통의 대제사장직을 이어받을 전통적인 후손이었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이다말의 후손인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직을 맡고 있었다. 그 이유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도망의 길에 올랐을 때 성막이 있는 성읍인 놉에 들러 그 때 대사장이었던 아히멜렉의 도움으로 양식과 골리앗의 칼을 받고 은혜를 입었고, 이 사실을 안 사울이 분노하여 대제사장 이하멜렉과 그와 함께 있던 85명의 제사장들을 모두 죽이는 일이 발생했다. 이 때 아히멜렉의 아들 아비아달이 대제사장의 상징인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도망하여 왔을 때, 다윗은 그를 영접하여 그의 아버지와 제사장들이 죽은 것은 자신 때문이라고 깊이 뉘우치며 안타까워했다. 다윗이 왕으로 즉위한 후 기브온 산당에서 사독을 제사장으로 봉직하게 하였고,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와 성막에 모신 다음 아비아달로 대제사장으로 삼아 직분을 수행하게 하였다. 그러다가 다윗의 말년에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이 아도니야를 왕으로 추대하고 반역을 일으킨다. 다윗은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 아비아달이 고향으로 유배당함으로 이다말 계열의 대제사장은 사라지고, 엘르아살-비느하스 계열의 사독 가문이 정통적으로 대제사장직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2) 안티오쿠스 4세는 유대인을 헬라인화 하기 위한 정책으로 유대교를 말살하고자 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이 드리는 희생제사 대신에 유대인들이 부정하게 여기며 가장 혐오하는 돼지피로 제사하게 하는가 하면, 예루살렘 성전을 훼파하고 제우스 신전을 대신 세우고 성전이 있던 자리의 중앙에 주피터 신상을 세웠으며, 유대 땅 곳곳에 자신의 얼굴 형상을 신상으로 세우게 하여 황제 숭배에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율법과 성경사본을 불태워 폐기하였으며 안식일과 할례를 폐지함으로써 유대인의 큰 반발을 사며 저항을 일으켰다.
3) 하스몬가의 제사장 마타디아스에게는 요한, 시몬, 유다 마카비, 엘리아살, 요나단, 다섯 명의 아들이 있었다. 이들 하스몬가의 주동으로 핫시딤이 결성되며 유다에 의한 마카비의 봉기가 일어났다. 마카비는 ‘쇠망치’를 뜻하는 것으로 군사적 역량이 탁월했던 유다의 별명으로 ‘마카비 가문’으로 불린다. 유다에 의해 일어난 로마에 항거하는 봉기가 성공을 거두므로 마카비 혁명이라 불리며, 이것을 기념하여 하누카 절기를 지킨다. 마카비 가문은 안티오쿠스 4세로부터 독립하면서 이후 100년간은 마카비 가문의 시대를 갖는다. 하스몬가인 이 마카비 가문에 의해서 유대인 통치가 이루어지므로 이 왕조를 ‘하스모니아 왕조’(하스몬왕가) 라고 한다.
4)하스몬가 다타디아스의 장남 유다가 전투에서 죽자 정치적인 지위는 그의 동생 요나단에 의해 계승되었다. 더욱이 그는 대제사장직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그는 곧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그러자 요나단이 차지한 정치적 권력과 대제사장직은 그의 형제 시몬에 의해 다시 계승되었다. 마카비 가문은 다윗 왕가 아니었음에도 유다를 통치하는 통치자가 되었고, 대제사장 가문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제사장직을 차지함으로써 이의 불법과 부당함을 지적하며 대항하는 세력으로 엣센파가 등장하는 요인이 되었다.
5) “헤롯은 하스몬가 출신의 어떠한 사람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지 않았고 아리스토불루스만 제외하고는 오히려 이 직분을 단순 제사장 출신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요세푸스, 유대교회사 제14권, 168-176). 헤롯은 사두개파의 영향이 압도적이었던 산헤드린을 없애버렸을 뿐만 아니라 사두개파의 지지를 받았던 하스몬가 출신의 대제사장들의 세력도 제거하였다.
6)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 B.C. 63-A.D. 14) 때 팔레스타인(유대)을 통치하던 헤롯 대왕(B.C. 73-A.D. 4)은 아켈라오스, 헤롯 필립, 헤롯 안티파스 세 명의 아들에게 유다를 분배하여 통치하게 하였다. 아켈라오스는 사마리아와 이두메를 포함한 유다 지방을, 헤롯 안티파스는 갈릴리와 베레아(Peraea)를, 헤롯 필립은 갈릴리 호수 동쪽과 동북쪽에 있는 영토를 다스렸다. 그 중 아켈라오스가 다스리던 지역에서 계속해서 반란이 일어나고 통치에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자 당시 로마의 황제였던 아우구스투스(옥타비아누스)는 아켈라오스의 지역 통치권을 빼앗고 직접 로마에서 파송한 총독이 그 지역을 다스리게 하였다.
7) 갈릴리 사람 유다는 로마에 조공을 바치는 것이 그들의 참된 왕이신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란 이유에서 로마 황제에게 조공을 바치는 것을 반대하여 A.D. 6년에 반란을 일으켰으며, 이것이 셀롯파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다. ; 이에 반해 페이퍼(Robert Pfeiffer)는 셀롯파의 시작을 로마 통치 이전으로 잡으면서 “바리새파가 핫시딤의 후예인 것처럼 열심당은 마카비 일파의 후예이다.”라고 주장하는 견해를 갖는다.
8) 셀롯파, 곧 열심당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된 것에는 이들이 로마에 항거하는 사람인 것과 함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유대인의 헬라인화를 추구하고 유대교의 신앙과 관습에 대한 노력을 금지하였을 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하여 열심을 내었던 마티디아스와 그의 아들들과 그 추종자들의 본을 그들이 따랐기 때문인 것에서 찾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갖는 열심을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났을 때 하나님에 대한 열심을 보여준 성경상의 비느하스(25:11; 시 106:30 이하)의 본을 좇는 것이라고 믿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