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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블랙 드레이핑 롱 드레스는 보테가 베네타(Bottega Veneta)
한동안 패셔니스타로 명성을 얻으셨어요.
쑥스러운데요. 이 셔츠도 자라인데 다들 에르메스인 줄 알아요.
8년 전쯤인가, 드라마 [아내]로 복귀하면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장안에서 손꼽히는 스타일리스트를 찾는 거였다고 했죠? 참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그러네요. 민망하지만 제가 가진 무거움을 좀 덜어주는 효과가 있었어요. 진지한 거 촌스럽잖아요.
롤렉스 시계를 차고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는 게 진부하다고도 얘기했어요.
그랬어요? 제가? 그게 어떤 의미인가 하면, 자신감 있게 귀한 줄 알고 취하는 거랑 보여주기 위해 동기 없이 취한 건 다르다는 거죠. 적어도 붕 떠 보이지 않으려면요.
오늘 김희애 씨를 좀 변화시켜보려 해요. 잔다르크 스타일의 여신 정도쯤 될까요.
네. 시안 봤어요. 그런데 그 모델은 젊고 아름답고 이목구비가 또렷한 서양 사람이잖아요. 저는….
김희애 씨도 충분히 아름다운 동양 여자지요.
저는…, 그렇게 또렷하지도 않고 나이도 많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다른 아름다움이지요.
그러니까 잘못 나와도 여러분 책임이 아니니 자책하지 마시라구요. 다른 재료로 같은 음식이 나오진 않을 테니까요.
저는 제가 더 좋은 재료를 가졌다고 확신해요. 그런데 이런 경우가 생길 땐 보통 어떻게 하세요? 연출자가 김희애 씨에게 전혀 생뚱맞은 걸 요구할 때요.
그런 경우 많았죠. 보통은 거절하죠. 하지만 제가 믿을 만한 분일 때는 일단 가요. 저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면 좋죠.
[내 남자의 여자]가 그 경우였나요?
그렇죠. 김수현 선생님이 하시면 믿을 수 있다. 그거 아니었으면 저는 현모양처만 하다가 죽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그 후에는 오히려 팜므 파탈만 들어와서 작품을 못했어요. 하나 거절하니까 또 들어오고… 그래서 한참을 쉬었어요. 사람들의 사고라는 게 발상의 전환이 쉽게 안 되나 봐요.
많이 답답함을 느꼈나요? 좀 지루한 면이 있겠죠. [마이더스]의 차가운 커리어우먼 역은 어떠셨어요?
누구의 부인도 아닌 독립적인 인물이라서 선택을 했고 재미있었어요.
1983년도에 데뷔하셨죠?
데뷔는 82년에 CF로 했어요. ‘그린 에이지’라고 제일모직의 주니어복이었어요.
다음해에 바로 영화를 찍으신 거네요. 고등학생 시절에.
생짜로 한 거죠. [스무 해 첫째 날]이라고 막내딸로 나왔어요. 저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연기하는 데 겁이 없어요. 그냥 했어요.
겁 없는 연기라는 거 브라운관에서도 느껴져요. 망설임 같은 게 없는 연기예요. 그럼 1993년도에 [백한 번째 프로포즈]를 찍고는 영화는 안 하신 거네요.
가끔 영화 감독님들 만나는 자리에 가면 “김희애 씨는 왜 영화 안 하세요?” 그러세요. 그러면 전 속으로 생각하죠. ‘댁들이 먼저 연락을 하세요.’ 겉으로 얘기하긴 싫더라구요. 다시 영화 하면 완전히 신인처럼 해야 할 텐데, 섣불리 하고 싶지는 않아요. 드라마 오래 해서 그런지 저랑 잘 안 맞는 것 같고. 그래도 좋은 작품이라면 왜 마다하겠어요?
감독 입장에서도 김희애 씨를 스크린으로 끌어내기는 쉽지 않죠. 예전에 허진호 감독 작품이 좋다고 하셨잖아요. 그분과 작업하고 싶다고.
그랬죠. [8월의 크리스마스]나 [봄날을 간다] 그런 게 좋았죠. 요즘엔 이창동 감독의 [시]가 너무 좋았어요
여백이 많은 작품을 좋아하세요. 그 여백을 배우와 관객이 함께 채우는 그런 영화들이네요.
그렇죠. 요즘은 훌륭한 감독들 많죠? 저는 TV에 익숙해 있는 얼굴이니까 감독 입장에서도 웬만큼 그 그릇이 크지 않으면 저를 만지기 쉽지 않을 거예요. 반죽을 잘 해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참 오래 주연 여배우로 살아오셨네요.그것도 TV 드라마로. 제가 10대 때 <여심>으로 김희애씨를 발견하고, 20대 때 <아들과 딸>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에 반해서 살았고, 30대에 <완전한 사랑>과 <내 남자의 여자>에 빠졌다가, 40대가 돼서 <마이더스>를 보고 있더라구요. 10대부터 40대까지 매 시기마다 ‘김희애’라는 여배우 하고 함께 지내왔어요. 카리스마로 시대를 휘어잡았다기 보다 그냥 흐르는 강물처럼.
저는 뭐 계속 노력했고 노력해야죠.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게. 김수현 선생님이 저한테 팁을 주신 게 있어요. 카리스마는 카리스마의 반대로 하면 된대요. 눈에 힘주고 이러는 건 옛날 악극단 시절 연기처럼 촌스럽다는 거죠. 카리스마라고 힘을 쓰면 보는 사람도 매너리즘에 빠져요. 배우들도 표현이 좀더 세련돼질 필요가 있잖아요.
아까부터 ‘촌스럽다’ ‘세련되다’ 이 두 형용사를 자주 사용하시네요.
그래요? 죄송해요. 제가 촌스러워서.
아니요. 김희애 씨는 애티튜드가 굉장히 세련돼요. 지금 이렇게 새로운 거에 도전하는 것도 그래요. 보통은 못한다고 하거나, 해도 이상하게 나오면 스태프들 탓을 하거든요. 그런데 아주 나이스하게.
외적인 것에 촌스러운 것도 있지만, 일단 태도가 먼저 보이는 거 같아요. 방송국 간부나 건물 수위 아저씨를 봐도 태도가 세련되신 분이 있어요. 반대로 완장 티를 꼭 내시는 분들이 있고요. 저는 권위적일 수 있는 자리에 있는 분이 나이스하게 대해주면 참 세련돼 보여요.
몇 년 전에 저랑 인터뷰 하실 때도…, 리츠 칼튼 호텔에서요. 스타일리스트 정윤기 씨하고 저하고 셋이 한식당에서 밥 먹고, 그때도 비빔밥 한 그릇 앞에 놓고 김희애 씨가 캐주얼하게 성호를 긋는 모습이 보기 좋았거든요. 식사가 끝나고는 제일 먼저 일어나 직접 계산도 하셨어요. 참 자연스럽게 세련된 여자라고 느꼈어요.
하하. 전 뭐 배우답지 못해요. 생활인 같아요. 신비감 갖고 보시면 실망하실 거예요. 그래도 나답게 사는 게 좋잖아요.
나답게요? 어떻게요?
저는 열심히 운동하고 또 애들 학교 갔다 오면 또 애들 챙기고…, 시간을 쪼개서 사느라 ‘친구질’도 못해요. 유명한 여배우들 만나보면 제가 많이 만나보진 않았어도, 그 사람들도 유난한 게 없어요. SK-Ⅱ 모델로 케이트 블란쳇 만났을 때도, 아이들 이야기를 많이 해요. 선글라스 끼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집에서 팩 붙이고 수프 끓이다가도 팩이 냄비 위로 떨어지고… 이자벨 위페르도 아이가 셋인데 평범한 일상을 강조해요. 그래야 제대로 된 연기가 나온다고. 저도 그렇게 유난 떠는 게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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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스루 원피스와 화이트 실크 슬립은 스타일리스트 소장품.
이 기회에 시원하게 물어볼게요. 개그맨 김영철 씨가 성대모사하는 걸 보면 정말 어떠세요?
너무 과장되게 하셔서 ‘내가 저렇게 하나?’ 그러다가 자꾸 보니까 귀엽더라구요.
그런데 또 김희애 씨가 김영철 씨 성대모사 때문에 화가 났다고…
그런 일 없어요. 방송에서 회자되는 것처럼 저한테 누가 그런 거 물어보신 적 없어요. 저는 외려 내숭을 못 떨어서 손해를 봐요.
그렇군요. 보이스 톤이 농후하고 발음이 워낙 정확해서 개그맨들이 성대모사 하고 싶은유혹이 들 거예요. 예전에 라디오 DJ할 때도 참 듣기 좋았어요.
그때 라디오 PD 하시던 분이 굉장히 꼼꼼하셔서 저를 아나운서 교육을 두 달을 시키셨어요. 하루에 1시간씩. 그때는 잔소리쟁이라고 싫어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은인이에요. 그때 장단음, 고저음 같은 걸 다 교육 받았는데 제 연기에 큰 밑천이 됐어요.
‘나를 잊지 말아요’라는 노래도 발표하셨어요. 김희애 씨가 낮게 흐르는 음성으로 DJ를 보면서 그랬죠. “다음 들으실 곡은, 제 노래네요. ‘나를 잊지 말아요’ 들려드립니다.”
그래요. 나를 잊지 말아요.
잊으려던 그즈음에 7년 만에 [아내]로 복귀하셨죠. 어떻게 다시 시작할 수 있으셨나요?
멈추면 끝났을 텐데 다시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어요. 정말 흐르는 대로 오다보니… 고여 있는 건 또 싫어하거든요.
승부욕이 있으신 듯해요.
승부욕 있어요. 연기를 해도 자존심이 있어요. 잘하고 싶은 오기가 있죠.
어떤 배우에게 자극을 받으세요?
직업적으로는 유난스러울 정도로 열심히 하는 사람이 좋아요. <블랙 스완>에서 나탈리 포트만이 강박적으로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 보고 충격을 받았어요.
김희애 씨도 [완전한 사랑]할 때 기훈이, 기현이 두 아이가 엄마 보고 싶어 할까 봐 장롱 속에 혼자 들어가 대본을 외웠다고 하셨잖아요
그땐 정말 죽기살기로 했어요. 언제 또다시 그렇게 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요.
감동 받은 연기자는 누구세요?
저의 롤 모델은 이순재 선생님이에요. 참으로 담백하신데, 그만한 카리스마가 없죠. 드라마 [이산]에서 영조로 신의 경지에 오른 연기를 하셨는데, 시트콤 하실 때는 또 과장 없이 담백하시잖아요.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자유롭게 넘나드는 모습이 존경스러워요.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는 이순재, 송재호, 김수미 같은 훌륭한 TV 연기자들이 나와 가슴을 울렸어요.
네. 저도 많이 울었어요.
예전엔 그렇게 담백한 드라마가 많았는데 요즘은 자극적인 막장 드라마가 대부분이죠
공식이 있어요. 남편이 속 썩여서 이혼을 한 아줌마가 캔디가 돼서 잘생긴 사장하고 결혼해서 해피엔딩으로 끝나죠.
[아들과 딸] 같은 드라마는 얼마나 좋았어요. 차별 받아도 꿋꿋이 일어서는 오뚝이 ‘후남이’는 잊을 수가 없어요.
그걸 그때는 몰랐답니다. 정말 무공해 드라마인데. 그때는 쪽대본이란 것도 없었어요.
28년 동안 드라마 주인공을 하다니, 정말 대단하셔요.
그래요? 그래서 다작을 못해요. 그럴 바엔 아이들 키우며 같이 시간 보내는 게 낫다 싶은 거죠. 운이 좋아서 광고도 계속 하고 있으니까. 골라서 제대로 된 거 하자.
여배우를 보면서 안타까울 때가 있어요. 가령 제가 고두심 선생님을 좋아하는데, 노희경 씨 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할 적에 최고의 연기를 보여주셨거든요. 그런데 몇 년 지나 보면 막장 드라마 같은 데서 작은 배역을 하고 계셔요. 그러면 저는 가슴이 미어지더라구요.
그것도 괜찮아요. 연기자는 직업인이에요. 계획대로 살아질 수 없고 매번 그렇게 빛날 수도 없어요. 너무 다작을 하면 문제지만 원하는 역할들을 해나가는 게 좋죠.
마지막으로 김희애 씨 연기의 동력은 뭔가요?
운명이요. 이렇게 말하면 너무 진지해져서 저도 싫은데요. 저도 몰라요. 그런데 자꾸 하게 돼요. 저는 이 일이 그렇게 재밌지도 않아요. 그런데 주어지면 책임감과 승부욕으로 죽기살기로 해요. 그리고 저는 연기하는 일을 놓고 싶지 않아요. 일흔 살까지 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운명이죠.
그러니까 당신을 잊을 수가 없죠.
첫댓글 이전 인터뷰지만 엊그제인터뷰같네요. 그만큼 말씀에 일관성이있네요~ 최고!!
디제이 하실때 좋아하게 됐는데 그 피디님이 아나운서 교육을 매일 한시간씩 두달이나 가르치셨다니 인상적이네요.
예전에도 봤던 기사인데 다시봐도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