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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자에서 하룻밤 (천장암 홈 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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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한국 불교 1600년래의 대사건 - 초기불전연구원의 니까야 완역
천장암 추천 0 조회 72 13.01.18 09: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진출처 : http://beopbo.com/news/view.html?section=1&category=83&no=73159

 

 

사실 전재성 박사의 번역이 이미 있었다. 청정도론은 범라 스님의 번역도 있었다. 빨리어에서 우리말로 직접 옮기는 이런 작업만으로 본다면 '대사건'이라고 명하기 어렵다. 하지만 나는 역사적 대사건으로 규정한다.

 

범라스님의 번역본도 대단하다. 이 분의 공적을 폄하하지 않듯 마찬가지로 나는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폄하할 이유가 없다. 단지 '차이'만을 이야기 하면서 이런 분들의 '법보시' 공덕이 한국의 미래를 빛내는 자산이 되기를 기원할 뿐이다.

 

'차이'란 무엇인가? 그 '수학'의 차이다. 대림과 각묵스님은 출가전 일반 학문을 공부했다. 특히 각묵스님은 수학을 전공했다. 학부 4년을 부산대 수학교육과에서 공부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이 매우 중요하다.

 

사실 전재성 박사는 더 공부했다. 서울대 철학과 박사까지 공부했으니까 그렇다. 독일의 68혁명 세대 성자 페터 노이야르와 친화적일 수 밖에 없는 인연도 있다. 그 치열한 1980년대 한복판을 지내오면서 전재성 박사는 '운동권'이었으니까 그렇다. 페터 노이야르는 유럽 1968혁명의 한복판에 있었다고 한다. 사실 '불교운동'을 통해서 스님이 되었다는 점에서 각묵스님도 전재성 박사와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게 '한국적'인 상황의 생성물이다. 운동과 학문의 배경이 있었다는 사실 중요하다. 허나 '학문'이 또 중요한데 나는 각묵스님이 수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전재성 박사는 깊은 철학적 사유를 하고 있지만 각묵스님이 수학을 공부했기에 '온처계' 이렇게 나아가는 초기불교에 더 빨리 감응했다고 본다. 스님이면서 수학을 공부한 학문적 배경이 있기에 각묵스님의 초기불교 번역 사업이 전박사의 작업과 차이지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허나 이 분들이 '운동'에 나서게 되었던 '인연'에 대하여 나는 이미 여러차례 이야기 한바 있다. 한국적인 '비극'의 여러 측면에 대해서. 1970년대 당시 한국의 '경제성장' 기획이 얼마나 국민의 호응을 얻었던가에 대하여. 대통령 선거때마다 농촌 마을에서는 한 후보 빼놓고 나머지는 '왜나왔어' 분위기였다. 물론 대도시에서는 사정이 전혀 달랐다. '왜 또나와' 하면서 한사람만 질타하고 나머지는 감쌌다. 여촌야도 이것이 한국 산업화와 민주화에서의 비극이기도 했다. 오늘날 한국인에게 독재자로 질타당하는 바로 박정희 이 사람이 농촌과 도시에서 이렇듯 상반되게 대접받았다. 그래서 여기에 비극이 성립한다. 다름아닌 이 분 때문에, 각묵이나 전재성 박사 모두 '운동권'적 흐름에 관여했고 전재성 박사는 '고난'을 치루기도 했다는 사실 말이다.

 

이런 상흔은 한국의 근대화 시기를 무조건 폄하하는 사유를 낳기도 한다. '지양'이 필수적이며 이를 위헤서는 디테일의 천척이 필요하다. 그래야 한국의 과거를 성숙한 선진국 국민의식으로 극복하면서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박근혜 후보의 '국민통합' 이것은 정말 좋은데 너무도 미흡하다고 여겨진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국민에게 낮은 자세로 임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한다. 아무리 이해찬 같은 운동권 출신의 정치인도 인정하는 경제성장과 산업화의 공적이 있어도 원한은 원한이다. 이것은 반드시 '씻김굿'을 통해서 극복하고 나가야 한다. 박근혜 후보가 김지하 시인을 5번이나 찾았다는데 찾을 사람 아직도 수두룩하다. 전재성 박사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자꾸 찾아서 원을 씻어가야 한다. 특히 막걸리 보안법으로 까닭없이 고초를 당하고 목숨까지 잃은 민초를 찾아서 두루 챙겨야 한다. 전재성 박사도 이런 맥락에 있는 '한국의 엘리뜨'이다. 본인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해서 고초를 겪었으므로.

 

아마 각묵스님처럼 '출가' 하는게 그 격랑에서 한발짝 물러나 있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오히려 출가 생활이 순탄했을 수 있다. 독일의 페터 노이야르는 68혁명의 와중에서 독일 운동의 중심이었다는데 '진짜' 출가 생활을 한다. 집 없이 이곳 저곳 대학 캠퍼스 이런데 떠돌면서 '유랑걸식'한다. 헌데 이게 진짜 수행자의 모습이었다. 

 

그렇다! 진정 역사로부터의 이탈이 출가 수행자이다. 독일의 거지 성자 페터 노이야르와 전재성 박사는 그야말로 쌍동이처럼 여겨진다. 나는 독일 사람이 더 성취가 많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불교의 정수를 고스란히 구현하고 있어서이다. 사실 각묵스님과 대림스님은 '연구원'을 운영하고 있으니 이 분들은 어떤 측면에서 수행 성취보다 '경전 옮김 공덕'을 더 크게 평가되는 길로 간다 할 수 있다. 부처님을 보라! 부처님이 대체 영가 결혼식 같은 행사 했다는 이야기 나는 들어본바 없다. 남방 불전에서 '자애경'은 오직 살아 있는 사람들만 대상으로 하라고 제한한다. 한국불교는 '영가 결혼식' 같은 측면에서 한국화 된 것이 사실이지만 그만큼, 사실, 정도전 이 분이 불씨잡변을 서술하던 고려말처럼, 과도해진 것이다. 수행불교가 아니라 '성직자 불교'라는 말이다. '성직자'가 탄생해서 치렁 치렁한 '성직자 복'을 입고 화려한 '선식'을 드시면서 '성직자' 업무를 수행하는 것은 '수행'이 아닌 것이다. 압권은 '걸식 행사'에서 발우에 '돈'을 담아 줬다는 언론의 보도에서 나온다. 휴! 3끼니 잘 챙겨 드시고 성직자로서 치렁 치렁한 수행복 입고 살아 가시니 사실 서양 중세의 종교개혁 직전처럼 보이기도 한다. 한용운 이 분이 불교유신론 서술할때 기억 난다. 먼저 오후 불식 계율부터 지켜 보세요! 걸식은 나중 문제이고!

 

'깨달음'과 무관해진 이런 성직자 생활양식의 정착은 사실 '출가'하고도 무관하다. 그래서 '혁신'은 두 방향에서 늘 이루어진다. 바깥에 '기존'과 완전히 다른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어야 한다. 한국에 성립해 있는 아주 조그마한 '테라바다 불교협회'가 그렇다. 비교하면 거대한 정규군에 저항하는 소규모 게릴라 같다. 이쪽의 스님들은 대승불교를 '미신불교'정도로 여기는 경향이 강하다. 테라바다 스님들중 가령 붓타 락키타 스님은 오후불식 계율을 반드시 지킨다. 이러니까 이 분들이 소수이지만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것이다.

 

독일의 페터 노이야르 성자를 보면 분명하다. 바로 그렇게 유랑 걸식 해야 '선정'을 얻을 수 있음을 안다. 한국의 성직자 불교처럼 해서는 '선정' 근처에도 못감을 안다. 금강경 맨 앞의 '묘사'를 보라. 다름아닌 부처님께서 날마다 빠지지 않고 걸식 하셨다. 오후 불식의 계율을 철저히 지켰고 흉년으로 그나마 한끼마저 못먹는 경우도 그냥 굶고 넘어갔다. 이렇게 50년을 지내신 것이다. 자 수십년 힘들게 살았으니 지금부터 좀 편히 살면 어떨까! 아니 아니 아니되죠! 무슨! 오늘 은사스님 제사일에 모처럼 제자들 다 모였으니 '스트레스' 풀어 볼까나 하면서 고스톱을 친다니! 이런 거야 세속의 진실한 재가 수행자의 발꿈치 때만도 못할 짓이다. '단 한번'으로 그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것이다. 계행 철저는 지극히 당연하다. 부처님께서는 보름마다 수행자들을 다 모아 놓고 '포살'을 거행했다. 포살이 뭔가? 심하게 본다면 일종의 집단적 반성과 성찰 시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규율을 강하게 지키도록 했기에 불교가 2000년 지난 지금도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바로 그렇게 '내포'를 마련해 놓으셨기에, 끊임없이 '새로운 혁신'의 생성이 일어난다는 사실이다. 

 

성철스님이 젊은 시절, 자신보다 나이가 많았던 청담 스님을 포함한 여러 스님들과 '결의'를 했다. 그게 봉암사 결사였다. 여기서 정말 치열한 구도가 이루어졌다. 성철 스님이 얼마나 심했냐 하면 청담 스님 수행이 게으르다고 멱살잡고 '나이 많은' 선배 승을 혼냈다는 이야기다. 이런 이유로 이 봉암사 결사에서 함께 수행했던 스님들 중에서 여러 분이 조계종 종정이 되었다. 청담스님과 성철스님도 종정을 역임했지만 혜암스님이나 법전스님이 이 결사에 함께했던 분이었고 나중 종정을 역임했다. 이 시점의 '혁신'에 의해서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허나 이제 그 '약발'이 다해가는 시점인 것이다.

 

전쟁까지 겪으면서 정말 치열하게 구도했던 숭산스님도 입적했다. 60년 장좌불와를 실현한 청화스님도 입적했다.청화스님은 염불선이라고 하여 화두선 조계종에서 사실 인정받지 못했다. 하지만 60년 장좌불와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다른 분도 있는데 내가 늘 인용하는 '계율'의 대가 일타스님이 있었고 이 분의 삼촌이었던 법진스님 같은 분들이 있었다. 어디를 가도 아예 걸어다녔던 진정한 수행자였다. 이런 전통이 이제 한국 불교를 혁신하는 '엔진'역할을 하던 시점을 넘었다. 이제 다음으로 진전하는 동력을 확보해야 한다. 그게 테라바다불교 협회와 더불어, 조계종 내부의 흐름인 도법스님과 대림스님, 각묵스님이라고 본다. 재가에서는 전재성 박사가 대표격이다. 그리고 전박사를 따르는 블로거 진흙속의연꽃님도 혁신의 견인차로 손색이 없다. 도법스님은 빨리어 성전협회장을 하면서 전재성 박사의 번역을 돕기도 했으니 조계종 내부에서 혁신의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허나 진정 추진력은 각묵과 대림스님과 더불어 가령, '아짠 브람'의 책을 번역한 혜안스님 같은 분이다. 그리고 각묵스님이 그토록 아낀다는 사실을 만인 앞에서 표출한 일묵스님이 있다. 호두마을 선원이 있으며 한국테라바다 명산원 묘원 법사가 동력이다. '소수'이지만 연방죽 선원의 흐름도 있다.

 

새로운 세대의 새로운 불교 지도자가 이런 운동속에서 탄생할 것이다. 재가 불자는 전재성 박사를 중심으로 진흙속의연꽃과 같은 인터넷 블로거 운동에서 강력한 '혁신'의 동력을 형성하고 있다. 게릴라처럼 소규모로 출발한 한국 테라바다 불교는 보리수선원의 붓다 락키타 스님을 중심으로 혁신의 힘을 축적하고 있다. 그런데 조계종 내부에서는 각묵과 대림스님 마성스님 같은 분들이 '혁신'의 힘을 쌓아가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1월 18일의 행사에서 이런 힘의 분출이 이루어진 것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열기였다. 이 열기가 대체 어디서 왔는지 잘 파악되지 않는다. 아마도 바로 건너편의 '봉은사'에서 큰 배경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허나 '봉은사'와 같은 한국의 전통 사찰이면서 서울의 핵심부 강남이 위치한 절에서 이토록 지원해 준다는 사실이 내게는 놀랍다. 불교 내부적으로도 이런 '혁신'의 기운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는 의미다. 

 

바로 그 자리에, 봉은사 주지스님과 조계종 교육원장 현응 스님도 참석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하다. 도법스님은 당연히 참여했다.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한국 불교 혁신의 게릴라 부대인 '테라바다 불교' 스님들도 참여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그 자리에 두 분이 빠졌다고 본다. 한 분은 바로 전재성 박사이다. 다른 분은 테라바다 불교운동의 대표격인 붓타 락키타 스님이었다. 전재성 박사와 '보리수선원'의 붓따 락키타 스님이 초청받았다면 정말 '통합'의 정신이 구현되는 자리였을텐데 말이다. '통합'이 중요하다. 한국 불교의 '통불교' 정신이 위대한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미 2003년에 빨리어 불전의 번역을 혼자서 해낸 전재성 박사와 남방불교에 직접 출가해서 오늘날 한국의 테라바다협회 운영의 중심인 붓타 락키타 스님 초청이 필요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아짠 브람'의 책을 번역한 혜안스님 같은 젊은 분들도 그 자리에 왔으면 좋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왜  아짠 브람인가?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물리학을 박사까지 공부하고 나서도 '수행승'의 삶이 더 좋아서 그대로 승려가 되었다는 것이다. '수행승'은 전재성 박사의 용어인데 비구승이라고 하면 한국 공식 불교 용어가 되나? 아짠 브람이 주석하는 서오스트레일라 그의 '선원' 때문에 언급한다. 요컨대 한국 불교의 '문화적 더깨'가 전혀 없이 그야말로 '원초적 출발'이다. 아주 간단하다. 아짠 브람에게는 초기불교라는 개념 자체가 없다. 그냥 '불교' 승려인 것이다. 이게 중요하다. 한국 불교는 문화적 더깨 때문에 할 수 없이 '초기불교'를 맨 앞에 놓는 것이다. 그 중간에 '부파불교 - 반야중관불교 - 유식불교 - 대승불교 - 여래장불교 - 밀교 - 선불교' 이렇게 들어오기 때문이다. 부파불교는 성철 스님이 '소승'이라고 규정했지만 '초기불교'는 소승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초기불교는 '조계종 선불교'에 어색하지 않게 유입될 여지를 마련했던 것이다. 그 성철 스님이 '염원'하셨던 '초기불전의 번역'을 이제 차세대 스님인 대림,각묵,마성 이런 분들이 실현한 것이다. 물론 전재성 박사가 앞서서 행한 공덕도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자 그런데 문제는 한국 불교에 씌워진 더깨라는 것이다. 반야중관 여래장 선불교 이런 '더깨'를 완전히 타파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각묵스님의 지혜가 돋보인다는 것이다. 호주의 아짠 브람처럼 출발하면 얼마나 좋은가? 그에게는 반야중관 여래장 선불교 이런데 대한 '관심'도 '지식'도 없어 보인다. 그런 경전이나 저작을 공부한 적도 없고 그저 숲속 수행의 전통 한자락을 아짠 문으로부터 이어받은 아짠 차오 불교의 수행 전통속에 있다. 아잔 차오는 한국의 선사들처럼 '놓아버려라'를 일갈하는 방식으로 가르쳤는데 그렇다고 금강경과 같은 경전에 근거해서 그러지 않았다. 대념처경과 들숨날숨에 마음챙김경에 근거해서 지극히 '단순한' 수행을 하면서도 '선정'을 어렵지 않게 성취하도록 가르쳤다. 이게 중요하다! 각묵 스님에게는 자신이 출가한 '조계종'의 전통이 거의, '신라시대 원효'에서 '고려 시대 나옹' '조선중기 사명' 그리고 '조선말 경허' '일제시대 만공과 수월' 나아가 '개발연대 청담과 성철' 스님에 이르기까지 엄청나게 쌓여 있다! 아짠 브람은 오직 '아짠 차오'에게 물림받은 팔정도와 특히 '선정진입'을 중시하는 불교만 있거늘! 이러니 각묵스님이 강연에서 '종가집론 맏이론 막내론 봉사론 도덕불교론 한글불교론' 이런 이야기를 하게된 것이다. 정통이니 여래장은 불교가 아니니 이런 소리 일체 안하면서도 자연스럽게 흐름을 바꿔 나가는 길로 가는 것이다.  사실 거룩하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   이것을 나모 따사 --    이렇게 병렬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혁신의 길로 가는 것이다.

 

11월 18일의 봉헌 기념 법회가 그러했다. 조계종 스님과 불자들, 전재성 박사의 번역서를 읽는 재가자들, 봉은사 신도들, 울산의 초기불전 연구원 사람들과 전국의 초불 카페 회원들, 그리고 테라바다 불교에 출가한 스님들까지 모였고 '테라바다' 선원의 재가 수행자들도 모였다. 진정한 '통불교'의 정신이 구현되고 있는데 '초기불교'의 정신을 반영하는 '혁신'의 방향이었다. 바로 이런 것을 한국의 차기 정부가 실현할 '정치'에 구현해야 한다고 여긴다. 1600년만에 빨리어 남전 대장경이 순한글로 '바로' 번역되었다는 경사도 대단한 것이기는 하다. 전재성 박사의 번역이 있었지만, 출가 수행자가 우리말로 옮겼다는 점에서 더 의미와 가치가 빛난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재가자이건 출가지이건 사쌍 팔배의 성위를 성취한 분들이 하는 것이 가장 좋았겠지만. 허나 수행자와 재가자의 차이가 있는것이 분명하다. 특히 기존의 문화적 더깨를 결코 저버리지 않고 자연스럽게 '융해'되도록 한다는 점에서 조계종으로 출가한 대림과 각묵스님의 우리말 옮김의 업적이 더 빛난다. 호주의 아짠 브람처럼 그냥 '초기불교가 불교다'라고 나가는 것이 가장 좋겠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이 무엇인가'에서 시작하여 각종 다기한 '공'과 같은 개념이나 '여래장' 혹은 '불성' 같은 개념에 침윤 된 상태에서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개념에 침윤'되는 것 자체도 사실 욕망의 작동에 의해 이루어지는 과정이라 알아차리기 정말 어렵다. 그래서 진정한 수행자의 길은 험난하기만 하다. '문리'를 트는 것도 어려운데 도과를 성취하는 것은 더 어렵다. 이번의 우리말 옮김은 이런 어려운 과정에 놓여진 '다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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