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험난한 박해의 역사를 딛고
1770년대에 들어와 종교로서 가톨릭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이들은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약종(若鐘)·약용(若鏞) 3형제,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 등으로서 경기도 여주군의 주어사(走魚寺)와 광주군의 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천주교에 대한 연구하면서 기도와 재계 등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유교의 나라 조선에서 천주교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으로 전 국토가 왜군에 유린되어 유교국가의 허상이 깨어진 이후 시작되었다. 그 첫 모습은 서양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으로 나타났다.1631년(인조 9) 진주사(陳奏使)로서 명나라에 간 정두원(鄭斗源)은 서양신부 로드리게스(Johannes Rodorigue, 중국명 陸若漢)를 만나 화포(火砲)·천리경(千里鏡)·자명종(自鳴鐘) 등의 기구와 천문, 지리 서적과 대포에 관한 기술서적을 얻어가지고 돌아왔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을 때 자진하여 인질로 가 9년 동안 청국에 머물렀던 인조의 왕자 소현세자는 1644년 9월 북경(北京)에서 독일인 신부 아담 샬(Schall,J.A., 일명 湯若望)과 친교를 맺고 천주교로 개종하였으며, 천문·수학·천주교 서적과 여지구(輿地球)·천주상(天主像) 등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런 행보가 부왕과의 갈등을 낳고, 귀국한 지 두 달여 뒤인 1645년 4월 26일 병석에 누운 지 4일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이후 수십 년의 간격을 두고 조선 지식인들은 청나라에 와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과 접촉하며 서양문물에 눈을 뜨게 되었고, 중국 일변도의 세계관이 변하게 되었다

▲ 명동 카톨릭성당이 보이는 서울 거리
1770년대에 들어와 종교로서 가톨릭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났다. 이들은 권철신(權哲身)·일신(日身) 형제, 정약전(丁若銓)·약종(若鐘)·약용(若鏞) 3형제, 이벽(李蘗)·이가환(李家煥) 등으로서 경기도 여주군의 주어사(走魚寺)와 광주군의 천진암(天眞庵) 등지에서 강학회(講學會)를 열고 천주교에 대해 연구하면서 기도와 재계 등 천주교 계명의 일부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1784년 봄 이승훈(李承薰)이 동지사 편에 북경으로 가게 된 기회에 그라몽(Grammont, J.J.de, 梁棟材) 신부에게 교리를 배워 세례를 받고, 많은 성서와 성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이승훈은 곧 이벽과 더불어 교리를 연구하고, 지금의 명동성당 자리인 명례방의 역관출신 김범우(金範禹) 집에서 신앙집회를 가지기 시작하였다.이로써 자생적인 평신도의 천주교회가 창설되었다. 1785년 봄 이들의 집회가 관에 알려지면서 을사추조적발사건(乙巳秋曹摘發事件)이 일어났다. 형조판서는 사대부 집안 자제들은 돌려보내고 중인이었던 김범우는 단양으로 귀양보냈다.
그는 귀양지에서 죽음으로써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1791년에는 모친상을 당하고서도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를 불사른 일이 고발되어 진산사건(珍山事件)으로 불리는 신해박해로 윤지충(尹持忠)·권상연(權尙然)이 처형당하였다.

▲ 로즈 제독(중앙)과 기함 La Guemiere 수병들(1865)
조선의 교인들은 천주교 의식을 완전히 집행할 수 있도록 북경에 밀사를 보내 신부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였다. 이에 따라 1794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周文謨)가 조선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그의 입국사실이 알려지면서 관헌의 추적을 받아 사목활동에 많은 제약을 받게 되었다. 1795년 주문모 체포령이 내렸다.주문모는 피신하고 그 대신 최인길·윤유일·지황 등 3인이 사형을 당하였으며, 이가환(李家煥)·정약용·이승훈 등이 좌천되거나 문초를 받았다. 특히 호서지방과 경기도의 양근·여주지방에서 박해가 심하였다(을묘박해).
그런 속에서도 주문모 신부는 여주·공주·온양·남포 등지를 순회 전교했으며, 교리연구회를 조직하여 교리연구와 전교에 힘쓰게 했다. 이런 노력으로 주문모가 입국할 당시 4천 명이었던 신자수가 6년 사이에 1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렇게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천주교를 공격하는 성토·상소·박해운동이 일어났다. 정조는 적극적인 탄압을 가하지 않았고, 천주교를 신봉하는 양반 남인 시파(時派)의 채제공(蔡濟恭)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묵인한 것도 탄압을 받지 않은 요인이었다.
그러나 정조와 채제공이 죽자 벽파는 남인시파를 꺾기 위하여 어린 순조의 수렴청정을 하게 된 정순왕후 대왕대비 김씨를 움직여1801년 천주교를 부모도 임금도 모르는 인륜을 무너뜨리는 종교[滅倫之敎]로 몰아 탄압을 가하였다.
이 신유박해 때 주문모 신부를 비롯하여 이가환·권철신·이승훈·최필공·홍낙민·정약종·홍교만(洪敎萬) 등 초기 지도적 인사들이 대거 서소문 밖에서 참수(斬首)되었고, 내포교회(內浦敎會)의 이존창(李存昌), 전주교회의 유항검(柳恒儉)·관검(觀儉) 형제 등 300여 명이 순교하고, 성서도 대부분 압수되었다. 살아남은 교인들은 경기도, 강원도, 충청도의 산간지방, 태백산맥·소백산맥의 심산유곡에 숨어들었다.
오히려 이 때문에 천주교가 전국으로, 그리고 서민사회로 확산되어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러자 1815년(순조 15)의 을해박해는 신유박해 때 피신한 교인들을 상대로 경상도와 강원도에서, 1827년의 정해박해는 경상도 일부와 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다
1811년 교인들은 다시 성직자 영입운동을 추진하였다. 이 일은 20년이 지난 1831년에야 교황청이 직접 나서 북경교구에서 독립된 조선교구를 설정하고 초대 교구장에 브뤼기에르를 임명하였다.브뤼기에르는 조선입국을 서둘렀지만, 조선국경까지 오는 데 3년이란 세월이 걸렸고, 조선입국을 목전에 두고 병사하였다. 여기에는 그들 소관에서 벗어나는 것을 원치 않은 북경교구 선교사들의 방해가 있었다.
1836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었고, 1837년에는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 앵베르(Imbert,L.M.J.) 주교가 입국하여 독립교구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 1839년(헌종 5) 당시의 세도가인 풍양 조씨와 안동 김씨의 다툼으로 인하여 박해가 시작되었다.
3인의 선교사가 모두 순교하였고, 유진길(劉進吉)·정하상(丁夏祥)·조신철(趙信喆) 등 교회의 중요 인물이 모두 순교하였다. 이때 정하상은 재상에게 올리는 <상재상서(上宰相書)>를 통해 천주교에 대한 박해의 부당함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1846년의 병오박해는 신부 김대건(金大建)의 체포가 발단이 되어 김대건과 남녀 교우 9인이 순교하였다.
마지막 박해인 1866년(고종 3)의 병인박해는 흥선대원군 때 일어난 것으로 과거의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광범하고 혹독한 것이었다. 그는 초기에 천주교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러시아의 남침야욕을 막기 위해 주교 베르뇌(Berneux,S.F.)의 협조를 요청하기도 했다.
그러던 그가 병인년 초에 주교 베르뇌의 체포로 시작되어 불과 3개월 사이에 당시 조선에서 전교 중이던 선교사 12명 중 9명과 남종삼(南鍾三)·홍봉주(洪鳳周)·정의배(丁義培)·최형(崔炯) 등 교회의 지도층 평신도들을 거의 모두 처형하였다.
살아남은 3인의 선교사 중 신부 리델(Ridel,F.C.)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의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Roze,P.G.)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로즈는 군함을 이끌고 한강과 강화도에 나타나 선교사학살의 책임을 물었다. 이것이 병인양요이다. 이로 인해 다시 박해가 일어났다.
대원군은 프랑스함대가 서강(西江)까지 침입하였다고 해서 천주교인에 대한 보복의 일환으로 인근 양화진(楊花津, 일명 切頭山)을 새 형장(刑場)으로 정하고, 그곳에서 천주교인을 무수히 학살하였다.
1868년 오페르트(Oppert,E.J.)가 남연군묘도굴사건(南延君墓盜掘事件)을 일으키자 이를 계기로 병인박해 때 살아남은 신부 페롱(Feron,S.)과 일부 천주교인이 이 일과 관련되었다고 해서, 해미지방(海美地方)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박해가 일어났다. 병인박해 때 희생된 천주교인은 약 1만 명을 헤아린다.
이렇게 거듭 박해를 받음으로 해서 처음 양반계급과 지식층의 교회에서 점차 무식하고 가난한 서민층의 교회가 되어갔고, 도시에 집중되었던 교인들은 박해를 피하여 산간벽지로 피신하여 많은 교우촌을 형성하게 되었다.
1882년(고종 19)에 조선정부가 미국을 비롯한 구미(歐美) 여러나라들과의 조약을 맺고, 특히 1886년의 프랑스와 조불수호통상조약을 맺게 됨에 따라 프랑스 선교사들은 개항지에 토지를 구입하고 건축을 할 수 있는 권리와, 여행증명서였던 호조(護照)만 지니면 국내 어디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인이 완전한 종교의 자유는 1899년 조선교구장인 주교 뮈텔(Mutel,G.)과 내부 지방국장 정준시(鄭駿時) 사이에 교민조약이 체결됨으로써 비로소 공식으로 인정되었다. 5년 후 프랑스 공사와 외부대신 사이에 선교조약이 체결되어 선교사들이 지방 본당에 합법적으로 정착할 수 있게 되었다.
천주교는 임진왜란으로 이미 그 체제의 한계가 드러났음에도 성리학적 이념을 바탕으로 더욱 꽁꽁 묶어서 양반 중심의 체제를 유지를 하고자 했던 조선에 굴러 내린 돌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깨지지 않았고, 천주교인들은 무수한 피를 흘렸다.
어쩌면 그때 천주교를 용인하고 변화해야 할 때였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유교의 굴레를 용감하게 벗어던졌던 사람들이 조선을 더 일찍 근대적인 국가를 만들어 내는 동력이 되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