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속은 미래가 없나 보다.
내가 선지자가 아니기 때문이겠지만.
그래서 언제나 과거 속에서 사는 자신을 발견한다.
평생을 다녔던 회사는 아직도 꿈속에서 나의 직장이고 그 분위기에 맞는 인간으로 등장한다.
오랜 시간 동안 그 일을 했으니 당연할진대 꿈을 깨고 나면 그것이 현실의 어떤 날처럼 기분이 울적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
그래서 가끔 혼잣말로 중얼된다.
‘그래 어차피 나는 ㅇㅇㅇ이야’
인생은 굴레를 벗어날 수 없는 운명 지니고 살아가나 보다.
소망하고 기대하면서 노력한 어떤 것들이 물거품처럼 느껴질 때도 아린 한구석마저도 완전히 외면하고 무시할 수 없는 운명을 느낄 때가 있으니 우습다.
뻔뻔스럽게도 살아왔나 보다.
혼자만이 가지는 자존감이 충만하여 두려움 없이 살아온 인생인데 가끔 멈춰 되돌아보면 억울한 부분만이 남았다며 푸념을 내지르고 있다.
완벽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하는 일정이 아닌 늘 그랬듯이 처음 하는 일들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부모가 되는 것도 처음이었고 어떤 방식으로 교육하고, 사랑하고, 훈육해야 하는지도 사실 몰랐으니 서툴고 누군가의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탓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그것으로 인해 가슴 한구석이 아프고 힘이 드나 보다.
누굴 탓할 수 있을까?
온전히 스스로 감내하고 이것이 내 운명이라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일 아니겠나 싶다.
늘 외로웠던 것 같다.
하지만 그 외로움을 숙명으로 여겼기에 친근함으로 마음에 안고 살아오지 않았을까 한다.
내 삶에 어떤 결정도 고난도 누군가와 상의하고 조언을 구한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혼자 고민하고 갈등하고 감내하면서 그것이 설령 잘못된 판단이라고 후회하는 일이 발생해도 결국은 언제나 고독한 결정에 만족하는 인생이 아니었나 싶다.
부모, 형제 그 누구도 잘살고 있냐고 물어보지 않았고 혹여나 근심 걱정거리는 없냐며 관심 가져 준 사람은 없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혼자 고민하고 문제와 싸우면서 살아왔는데 어찌 된 일인지 날 탓하고 원망하는 눈길이 많아 허허롭다.
내가 맏이는 아닌데 그 많은 권한은 모두 가졌으면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은 왜 많은지 모를 일이다.
아랫사람은 언제나 의무만 존재하고 권리는 없어도 되는 세상이 정상은 분명 아닌 것 같은데 항상 그렇다.
고독했으니 외로웠으니 나만의 방식으로 살고 싶다.
하지만 이 생각은 언제나 혼자만이 할 수 있는 꿈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꿈이고 현실은 명령에 따라야 하고 이해하고 아무렇지 않은 듯이 행동해야 하는 모순덩어리 인생이다.
살면서 남으로부터 책망받을 일을 과연 얼마나 했을까?
각자의 판단에 의한 행동이 책망의 대상이 되려면 이 알량한 윤리에 어긋나야 할 텐데 기억으로 없는데 타인은 느낀다고 표현을 감추지 않으니 머릿속이 복잡하다.
누굴 탓하거나 원망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단지 나름대로 살아왔듯이 어떤 사람의 판단 때문에 나의 삶이 흔들리고 싶지 않다는 얘기다.
어쩌면 늘 마음속으로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간직하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니 꿈속에선 멋있고 누군가로부터 칭송받는 인간일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한다.
나 또한 그렇다.
여기서 잘 산다는 의미는 부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방식으로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만족하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어떤 날 득도한 느낌처럼 깨달음이 왔다.
세상에서 나를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데 바보같이 존재할 것이라고 믿고 사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린 부부나 자식 관계나 형제라고 하는 가까운 관계에서도 괴리를 발견할 때가 더러 있다.
그것은 한날 태어난 쌍둥이도 생각이 다르듯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각자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찾아들 수 있는 것은 아픔이거나 외로움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잊고 산다.
“오랫동안 살았으니 당신은 나를 잘 알 것이다.” 하고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는다면 반드시 상처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다면 미리 알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마음의 한구석을 비우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자식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낳았으니 부모의 말씀을 잘 듣고 따르리라는 착각 또한 금물이다.
아무리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해 기르고 공부시켰지만, 자식 또한 부모의 마음을 절대로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뭔지 모르게 서운한 감정이 있고 그것이 자신의 권리인 줄 착각하고 살지만 탓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면 접힌 가슴 한구석이 아려옴을 느껴도 고통은 덜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꿈을 꾼다.
그 꿈속에서는 언제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이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고향 바닷가에는 조개껍질로 이루어진 모래톱이 있었다.
그 속에는 바닷물에 오랫동안 깎이고 닳아서 만들어진 아름다운 조개껍질이 있다.
어린 시절 학교에서 돌아오다 그 예쁜 조개껍데기에 반해 모래톱을 헤치고 무슨 금덩어리라도 주운 듯이 기뻐하며 해가 서산에 저무는 사실마저 잊은 적이 여러 번 있다.
그래서인지 늙어 저세상으로 떠날 날이 가까이 와 동무하자며 가끔은 손짓하는 요즘에도 그 모래톱 속에 곱고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고 있는 꿈을 꾸니 쓴웃음이 난다.
내 속엔 언제나 아름다운 꿈이 있나보다.
그 꿈처럼 소박하게 살고 싶었고 살려고 노력했다는 자부심이 존재한다.
그런데 가끔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미움과 원망의 조각들이 떠밀려와선 나의 몫이라고 들이댈 때는 한없이 초라하고 비참해지는 기분이 든다.
외롭다.
고독하다.
이 감정들을 벗 삼아 잘 살아가고 있다고 자위하고 사는데 가끔은 내동댕이쳐진 가을날 쓸쓸히 뒹구는 낙엽 같은 느낌 때문에 그냥 눈물이 난다.
내 꿈속에 되살아나는 모래톱 속 예쁜 조개껍데기도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길이 바뀌고 환경이 바뀌었고 인간들이 마구잡이로 변경해버려 조개껍질 무덤도 흔적 없이 사라졌듯이 내 주위의 어느 것 하나 바뀌지 않고 그대로 인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이들도 다 어른이 되었고 내 기억 속에 존재했던 어른들은 이미 다른 세상으로 이주한 지 오래되어 아는 사람보다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 어디를 가도 낯선 사람이 훨씬 많다.
친근한 사람들이 사라진 곳은 현실에서도 공허하고 쓸쓸하다.
그러니 늙어 고독하고 외로운 것이 아닌 존재했던 사람들의 모습이 사라진 주어진 환경이 왠지 모를 늦가을 같은 기분을 옮겨와 그렇게 느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늘 밤에 꿈을 꾸었으면 좋겠다.
현실 속 하얀 머리카락과 굴곡진 얼굴이 아닌 검고 탄력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좋은 게 꿈속이기 때문이다.
그때 꾸었던 순수한 마음들이 늘 그대로 인 꿈속은 언제나 평온하듯 지는 석양을 바라보고 느끼는 허전함과 외로움도 평온을 가져다줘서 고마운 생각이 든다.
영원히 아름다운 꿈을 꾸면서 나였으면 하고 바란 그 속에 살아가리라고 다짐하는 이유는 꿈속은 언제나 황홀하리만큼 행복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