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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파는 믿음을 가지라(창26:17-22)-2020.9.27
성경에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물은 물을 긷는 곳 그 이상의 의미를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우물은 물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매일 들러야 하는 곳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우물가에서 삶의 모든 정보를 얻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은 집안에서 수도꼭지를 틀면 물이 나오니까 우물의 정감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 세대는 대부분 우물을 경험하고 살아온 세대들입니다. 예전에는 마을마다 함께 사용하는 공동우물이 있었거든요. 그곳에서 주로 여인들은 세상의 모든 정보를 얻고, 자기들의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집살이하는 여인들은 한풀이를 쏟아내기도 합니다. 우물은 생업과 생존에 필수적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나오는 우물은 영적으로 우리에게 더 깊은 의미를 제공합니다. 성경에는 우물가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들이 참 많습니다. 사마리아 수가성의 여인은 야곱의 우물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생수를 마십니다. 아브라함의 여종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고 사라의 학대를 받고 도망하다가 광야의 샘곁(우물가)에서 하나님을 만나 위로를 받았습니다(창16:7). 야곱은 라헬을 우물가에서 만났고(창29:2), 바로의 눈을 피해 도망하던 모세가 미디안 땅의 우물가에서 아내 십보라를 만났습니다(출2:15).
무엇보다 우물은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를 맺던 곳입니다. 민수기서21장6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백성들을 ‘브엘’로 모으라고 하셨습니다. ‘브엘’은 하나님이 물을 주리라고 약속하신 우물입니다. 이스라엘은 그곳에서 물을 얻었고, ‘우물물아 솟아나라’는 우물의 찬가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우물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가 있는 곳입니다. 겨울이 우기인 팔레스타인은 년중 강수량이 200mm도 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니 물이 귀할 수밖에 없지요. 때문에 우물의 가치는 상상을 초월하지요. 우물은 개인의 재산과 생명이요, 종족의 힘과 부의 상징이었던 셈입니다. 그래서 우물로 인한 분쟁이 끊이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유엔은 2025년도에 인류의 60%이상이 물 스트레스를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세계은행도 20세기는 석유가 국가 간의 분쟁 요인이라면, 21세기는 물 분쟁이 잦을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습니다. 그래서 지구촌은 물로 인한 분쟁이 많습니다. 강에 관한 분쟁이지요. 이스라엘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의 수자원인 요르단 강, 이집트와 수단과 우간다를 흐르는 나일 강, 터키와 이라크와 시리아가 점유하고 있는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등 10개국 이상의 영토를 관통하는 다뉴브 강, 인도와 방글라데시 접경의 갠지즈 강, 미국과 멕시코의 그란데 강, 페루와 에쿠아도르의 밀라 강 등에서 지금도 물에 관한 분쟁이 끊이질 않는 것이지요.
인간에게 물은 생명과 같습니다. 물론 모든 생명체가 다 마찬가지이지요. 그러면 굳이 우물의 중요성은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 인생은 누구나 목마릅니다. 한마디로 물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때문에 우물을 팝니다. 인생이 마치 우물을 파는 것과 흡사합니다. 목마른 인생이 할 수 있는 것은 우물을 파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속한 사람들은 평생 의식주를 위해 우물을 파고, 영적인 사람들은 영혼을 위한 우물파기를 하고 살아가지요. 둘 다 필요한 것들입니다. 다만 영적인 사람들은 영적 우물파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보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우물파기의 전문가였습니다.
(1) 목마른 이삭
그런데 그 아들 이삭도 우물파기의 달인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삭의 우물 파는 신앙을 살펴보고 은혜를 받으려고 합니다. 아브라함 때에 가나안에 흉년이 있었는데, 다시 이삭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생존을 위협하는 큰 흉년이었던 것이지요. 그 흉년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대표적으로 가뭄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살 길을 찾아 가나안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삭은 그랄 지방으로 피난을 갔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조심할 것은 무조건 가나안을 떠난다고 해서 하나님이 책망하시지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때에 따라 하나님이 막으실 때도 있고, 허용하시는 때도 있더라는 말입니다.
인생은 나그네요, 순례자입니다. 그리고 나그네 인생 앞에 시련은 수시로 찾아옵니다. 때로는 그 시련이 질병일 수 있고, 자연적인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가나안에서 흉년을 경험했고, 이삭도 경험했으며, 야곱도 경험했습니다(창41:57). 어떤 시대, 어떤 인생이든지 시련은 있다는 말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인도와 도우심으로 시련을 통과합니다. 당연히 이삭의 흉년 앞에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삭에게 나타나 친히 명령하십니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에 거하라는 것입니다(2절). 그러면 하나님이 함께 하사 복을 주고, 모든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는 것입니다(3절). 이 언약은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언약과 동일한 약속이었습니다(4절).
언약의 골자는 이렇습니다. 4절을 보십시오. “네 자손을 하늘의 별과같이 번성케 하며, 이 모든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니 네 자손을 인하여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과 흡사하지요? 하나님이 이삭의 흉년 가운데 간섭하셔서 이삭의 순종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어떤 시련이 외도 결코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냐의 여부에 따라 시련의 강도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는 시련은 작아도 큰 고통이나, 하나님이 개입하시면 아무리 큰 시련일지라도 전혀 걱정이 없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어떤 시련이 와도 절대 겁내지 말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나안의 흉년을 피해 이삭은 애굽으로 내려갈 계획을 세웠던 것 같습니다. 당시 애굽은 나일 강의 풍부한 수자원으로 인해 거의 흉년이 없던 곳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피난처가 없다고 생각한 거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그런 계획을 한방에 무산시켰습니다. 어쩌면 이삭은 자기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으로 인해 갈등이 심했을는지 모릅니다. 물론 하나님은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차 애굽으로 내려갈 것을 예언하셨지요. 창세기15장 13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라고 말입니다.
물론 이 일은 야곱의 시대에 찾아온 전 세계적인 기근으로 말미암아 야곱의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이 때를 대비하여 미리 요셉을 애굽으로 팔려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총리라는 제2인자의 자리를 마련해 놓으셨던 것이지요. 하지만 아직은 그 때가 아닙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시는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이삭의 때에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아직은 이삭이 애굽의 더러운 이방문화를 소화해 낼 수 있는 자질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아직 애굽이 이삭을 받아드릴 만한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그것은 여러분의 상상에 맡깁니다.
하지만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그랄로 갔습니다. 그랄 지방은 지중해 남쪽 해변, 그리고 가나안 남쪽 경계선 서남쪽에 위치한 풍부한 곡창지대로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이 관할하고 있었습니다. 그랄은 일찍이 아브라함이 한때 거주했던 곳이기도 합니다(창20:1). 물론 블레셋 사람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곳으로 이삭이 거주하기에는 마음이 편한 곳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지중해 중심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호전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삭은 그들의 심기를 건들지 않으려고 무척 신경을 썼습니다.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며 떳떳하지 못한 꼼수를 부린 것이지요.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삭에게 복을 주사 백배의 수확을 주신 것입니다(12절). 솔직히 말이 됩니까? 사실 이삭은 농사꾼이 아니요, 대대로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초보 농사꾼이 그 땅에서 농사를 지은 거예요. 그리고 한 해 백배의 수확을 거둔 것이지요. 한마디로 거부가 된 거예요. 하나님의 초자연적 은혜가 아니면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그랄 지역에 거주하던 블레셋 사람들이 이삭을 주목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내는 것이에요. 당연히 원주민들로부터 시기를 받은 것이지요. 결국 그랄 왕 아비멜렉이 자기들 땅을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고 결국 그랄 골짜기로 밀려난 것입니다(17절). 한마디로 좋은 땅 내버려두고 골짜기로 쫓겨난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그곳에서도 이삭을 도우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도우시면 범사가 형통합니다. 그 어디나 천국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삭이 가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가셨습니다. 이삭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이삭은 그곳에서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친히 목도한 것입니다. 물론 이삭의 도우심을 이방인들도 목격한 것이지요. 나중에 아비멜렉이 이삭을 친히 찾아와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았다고 고백하며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안합니다(28절).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을 도우시면 어디서나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이삭은 간신히 피신한 곳이 그랄 골짜기였습니다(17절).
(2) 하나님의 은혜로 파는 우물
그곳에서 이삭은 장막을 치고 우물을 파기 시작합니다. 우물이 있어야 농사를 짓고 생존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당시 자기 아비 아브라함이 팠던 우물을 다시 팠던 것입니다. 그곳은 지난날 자기 아비 아브라함이 우물을 파서 물을 얻었던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에 블레셋 사람들이 그 우물을 메워버렸던 것이지요. 아브라함도 당시 그곳에서 그랄 사람들에게 우물을 늑탈 당했습니다(창21:25). 그런데 그곳에 다시 이삭이 우물을 판 것이지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니 물이 솟아납니다. 샘 근원을 얻은 것이지요(19절). 하나님이 은혜를 더하신 것입니다.
우물을 파면 뭐합니까? 만일 물을 얻을 수 없다면 헛된 일이지요. 아무리 우리가 좋은 것을 계획할지라도 결국 하나님이 이루어 주셔야 합니다. 잠언16장 9절을 보면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예레미야33장2-3절은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말씀하시지요. 이 말씀을 믿습니까? 하나님은 축복을 주도하시는 분이시오, 번영을 주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랄 골짜기에서 우물은 이삭이 팠을지라도 물을 나오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삭은 그 우물들의 이름을 아브라함이 부르던 대로 불렀습니다. 당시 모든 우물은 이름이 붙여질 정도로 귀한 것이었던 것입니다. 이삭의 우물은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징이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역사하심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의 증거였던 것입니다. 우리는 이삭과 함께 하신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을 보게 됩니다. 비록 이삭이 골짜기로 밀려났을지라도 골짜기에서도 하나님은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던 것입니다.
이삭이 팠던 우물은 샘의 근원이었습니다. 이는 자기 아비 아브라함과 함께 하셨던 하나님이 이삭에게도 함께 하심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삭의 하나님임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보여주신 것입니다. 어쩌면 예전에 아브라함이 한번 판 우물이기에 파기도 쉬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면 모든 것이 편하고 쉽습니다. 모든 것이 은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그곳에도 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삭이 우물을 파놓으면 그랄 지역 목자들이 찾아와서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떼를 부립니다. 그래서 다툼이 일어난 것입니다. 대표적인 우물 이름이 ‘에섹’과 ‘싯나’입니다. ‘에섹’은 다툼이라는 뜻이고, ‘싯나’는 대적함이라는 뜻입니다. 이른바 그 땅은 이삭이 잠간 머물다가는 땅입니다.
억울하지만 이삭은 참아야 했습니다. 그들과 분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우물을 팝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들의 영토라고 주장할 수 없는 곳으로 이동하여 우물을 팝니다. 그곳 이름이 ‘르호봇’입니다. ‘르호봇’은 하나님이 허락해주신 땅으로 넓고 안전한 장소였습니다(22절). 하나님은 그곳에서 이삭을 보호하셨고, 복을 주셨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복을 받을만한 그릇으로 준비된 영혼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은 이삭이 가는 곳에 함께 가셨고, 이삭이 있는 곳에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삭이 과연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하나님은 이삭에게 이런 복을 주셨을까요?
(3) 이삭의 우물파는 믿음의 자세
이삭의 믿음은 열정이 있었습니다. 믿음도 열정이 있는 믿음이 있고, 열정이 없는 믿음이 있습니다. 열정 있는 믿음에 역사가 나타납니다. 이삭의 믿음은 열정 있는 믿음이었습니다. 부지런함과 성실함으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 거부가 된 이삭이 아비멜렉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았을 때 그 충격은 상당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자신의 억울함을 한탄하거나, 불평 부당함을 소리치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받아드렸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어차피 나그네 인생 어디로 가든지 다시 시작한다는 믿음이 있었던 거지요. 이른바 믿음의 열정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살아도 억울하고 답답한 일이 많이 있습니다. 어쩌면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홀로 당해야 하는 아픔이 상당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때 우리의 믿음의 색깔이 드러납니다. 아무 일이 없을 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일도 모릅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날 때 우리는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전혀 다르게 나타납니다. 우리에게 좋지 않는 어떤 일이 일어날 때, 믿는 자도 흥분하고 믿음이 없는 자도 흥분합니다.
그런데 흥분하는 내용이 전혀 다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눈에 보이는 일로 인하여 흥분하지만, 믿는 자는 보이지 않는 일로 인하여 흥분합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육신적인 것으로 흥분하고, 믿는 자는 영적으로 흥분한다는 말입니다. 믿음이 없는 자는 지금 나타난 현실로 인하여 자기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흥분하고, 믿음 있는 자는 장차 그 일을 통해 행하실 하나님으로 인하여 흥분한다는 말입니다. 믿는 자는 오히려 그런 일로 인하여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의식을 갖고, 희열을 느끼며 흥분한다는 말입니다. 이삭은 암담한 현실 앞에서 낙심치 않았습니다. 억울함을 탄식하지도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분명히 열악한 환경이지만 그는 새롭게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흥분했을 것입니다. 새로운 것을 개척한다는 마음으로 말입니다. 건강한 믿음은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열정을 찾아내는 것이요, 깨우는 것입니다. 이삭에게는 이런 열정이 있었던 것이지요. 믿음이 있다하면서도 열정이 시든 것은 병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자기 안에 감추어진 열정이 있습니다. 사람마다 열정의 깊이가 다를지라도 열정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열정이 다 있다는 말이지요. 우물을 파는 믿음은 열정을 드러내게 합니다. 다시 말해 우물 파는 사람 곁에는 우물을 막는 사람이 반드시 있거든요.
이른바 우리의 열정을 시들게 하는 세력들이 있다는 말이에요. 그것이 노골적일 수도 있고, 은밀할 수도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우물을 파는 자였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막고 메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삭은 우물을 파는 자였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빼앗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물을 메우는 사람들은 은밀하게 방해하나, 우물을 빼앗는 사람들은 노골적으로 방해합니다. 둘 다 우리의 열정을 시들게 하는 세력들입니다. 믿는 자는 우물을 파는 자입니다. 어떤 것도 우리 안에 있는 믿음의 열정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85세의 나이에도 척박한 헤브론 산지를 자신에게 달라고 요청하던 갈렙의 신앙을 기억하십니까?
또한 이삭은 온유한 성품을 가졌습니다. 아비멜렉으로부터 그랄 땅에서 쫓겨난 것도 억울하지만 그랄 골짜기에서 판 우물을 다시 빼앗으려고 하는 블레셋 사람들도 미움의 대상이었을 테지요. 하지만 이삭은 그들과 다투지 않았습니다. 어지간한 사람 같으면 한판 싸움을 붙어도 붙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다투지 않고 옮겼습니다. 이삭이 결코 무기력하거나 비겁한 것이 아닙니다. 당시 이삭이 그들과 싸움을 못할 정도로 약하지 않았습니다.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비멜렉이 이삭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보다 크게 강성한즉 우리를 떠나가라”. 한판 붙을 만큼의 세력이 되었던 것이지요. 그만큼 이삭이 온유했던 것입니다.
이삭의 믿음은 끈기가 있었습니다. 우리말 속담에 한 우물을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물을 파되 물이 나올 때까지 파야 합니다. 이삭은 물이 나오기까지 팠습니다. 우물을 파기만 하면 물 근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당시 수맥검사를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우물을 파면 물 근원을 얻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도 아무에게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고 끈기 있게 일하는 자에게 임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은 조급합니다. 끈기가 없습니다. 인내심이 없다는 말이지요.
달팽이가 사과나무를 향해 올라갑니다. 그러자 나무껍질 사이에 있던 벌레가 빈정거립니다. ‘야, 느림보야, 괜히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지 말고 포기하라고, 네가 저 사과나무 꼭대기에 올라가면 네가 먹을 사과가 하나도 없을거야’. 그러자 달팽이가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알아, 내가 저 꼭대기에 도달할 때쯤이면 사과가 다시 열릴거야’라고. 믿음도 우리에게 인내를 요구합니다. 우물을 파는 믿음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합니다. 당시 물이 나올 때까지 파는 작업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오늘날 같이 좋은 도구가 있는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그만큼 끈기가 필요했던 것이지요.
성공하는 사람들과 실패한 사람들의 차이는 백지 한 장의 차이입니다. 조금만 양보하고 참고 다시 우물을 파면 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믿는 이삭은 끈기 있게 우물을 파는 작업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지요. 성도는 영적인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의 우물을 파되 생수가 나올 때까지 파야 합니다. 기도의 우물을 파되 하나님의 응답이 떨어질 때까지 파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우물을 파되 그 영혼이 주님께 돌아올 때까지 파야 합니다. 한마디로 물이 나올 때까지 파야합니다. 그것은 인내를 요구합니다.
미국 소매상협회에서 세일즈맨들의 거래실적과 집념의 상관관계를 연구했답니다. 그랬더니 물건을 파는 세일즈맨의 48%가 한번만 권유했고, 두 번 권유한 세일즈맨은 25%, 세 번 권유한 세일즈맨은 15%, 네 번 이상 권유한 세일즈맨은 12%였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네 번 이상 권유한 12%의 세일즈맨이 전체 매출액의 80%를 차지하더랍니다. 나머지 88%의 세일즈맨들의 매출액은 고작 20%밖에 되지 않더랍니다. 결국 한번이라도 더 인내심을 갖고 도전하는 자에게 역사가 일어난다는 의미이지요. 실패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한 두 번 해보고 중도에 쉽게 포기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우물의 생명은 물을 구하는 것입니다. 땅에 구멍을 뚫기 위해 우물을 파는 자는 없습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우물은 구덩이요, 물이 고인 우물은 웅덩이입니다. 우물은 물이 솟아나는 것입니다. 우물을 파되 물이 나올 때까지 파야 합니다. 인내심을 갖고 끈기 있게 파야 합니다. 이삭처럼 말입니다. 특별히 믿음의 성도들은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목이 말라서 우물을 파기도 하지만, 목마른 누군가를 위해 우물을 파야합니다. 목적이야 어떻든지 우리는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모두 우물을 파는 사람들입니다. 반드시 우물을 파야 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사람들은 하늘의 신령한 우물을 파는 자들입니다. 성도는 하늘의 신령한 우물을 파서 마시고 사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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