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뱅의 기독교 강요는 1536년 칼뱅이 27세되는 해에 초판이 출간되었습니다, 그가 쓴 책은 그후로 그다지 큰 수정을 거치지 않은 것으로 보이고, 그 나이에 칼뱅이 많은 체험을 통해 터득한 것을 썼다기 보다는 당시의 교육기관에서 배운 것을 기반으로 썼고 그 교육기관이란 대부분 카톨릭 기관이었다고 믿어집니다. 그런 배경에서 칼뱅 강요의 제3권 3장을 보면, 그 장에서 어떤 것이 거듭남이고,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한다거나 어떤 상태에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도 없으며, 자신의 체험을 말하고 있지도 않습니다. 그 제목으로는 << 회개의 믿음에 의한 거듭남>> 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점을 먼저 파악하는 것은 칼뱅이 말하는 바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믿어집니다. 칼뱅은 흔히 복음운동가들이 경험했던 거듭남의 체험을 경험했던 사람이 아니라, 거듭남은 회개이며, 회개는 장구한 세월동안 평생동안 계속된다는 믿음에 서있었습니다. 반면에 복음운동가들, 요한 웨슬레, 존 번연, 파스칼, 스펄젼, 해리 아이언사이드, 죠지 뮐러 등의 사람들은 분명히 거듭남의 시점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을 간증했습니다. 그들은 그 거듭남의 시점 이후로 자기들의 삶이 변했다고 고백했습니다. 반면에 칼뱅이나 카톨릭 신자들은 대부분 그러한 경험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회개는 장구한 세월동안, 평생동안 지속되며, 그러한 복음주의자들이 경험한 것은 감정적 체험이며, 감정은 쉽게 변하고 감정보다는 말씀에 의지하여 평생 회개하고 살아가야 한다고 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거듭남을 순간적으로 체험하였다고 하며 그것을 보통 순간적 회심이라 부르고 카톨릭에서 말하는 장구한 세월 동안 지속되는 회개를 점진적 회심이라 부릅니다. 제가 만난 카톨릭 사제나 수녀들은 순간적 회심만이 아니라 점진적 회심도 회심이고 구원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카톨릭은 쉽게 거듭남이라는 용어보다는 회심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것에는 회개의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복음전도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자신의 육체적 감정적 체험이 아니라. 전혀 제3의 인격이 순간적으로 자기안에 들어오는 경험을 했기 때문에 거듭남이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저는 순간적 회심만이 옳고 점진적 회심은 잘못된 것이다는 전제하에서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순간적 회심 곧 거듭남을 체험했다는 사람들이 그릇된 길을 가는 경우도 보았고, 점진적 회심을 주장하는 사람이 성경적으로 틀리지 않은 말들을 하는 것과 그들이 특별히 무슨 체험이 없었는 경우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몇가지 주목할 일이 있습니다. 칼뱅은 분명히 전혀 다른 신앙체계를 말하고 있는데, 인간이 회개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회개는 평생동안 계속된다. 또 믿음은 교회, 거룩한 카톨릭 교회에서 터득한다. 여기서 말하는 카톨릭 교회란 우주적 보편적 교회를 말하므로 로마 카톨릭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고 믿어집니다. 반면에 복음전도자들은 생명을 받은,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전도를 통해서 성령께서 역사하시고 회개하라, 외칠 때, 듣는자가 회개하고, 그 회개에 대하여 성령께서 더욱 역사하시고, 다시 듣는자는 회개를 계속하여 상한 심령, 마음이 온유한자, 영에 가난한자, 마음이 청결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가 되며, 그에 따라 성령은 그 사람을 받아들이시고 그 심령가운데 임하시고 내주하시며, 그것이 의롭다함을 얻는 순간이요 거듭남의 순간이며, 그 이후로는 성령께서 그들의 삶을 인도하시며, 수시로 죄를 지을 때마다 회개하게 하시며, 거룩하게 성화시키시며, 죽을 때까지 성화의 과정이 지속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으며, 칼뱅은 복음전도자들의 체험과 신앙노선에 서있다기 보다는 로마 카톨릭의 점진적 회심의 기반위에 서있다고 말할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몇가지 쟁점들이 되는 사항들을 아래와 같이 요약해봅니다. 1. 칼뱅은 믿음이 와야 회개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복음진영은 회개하면 성령이 임하시고 믿음이 생긴다고 합니다. 이점에서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Can true repentance exist without faith? By no means. 진정한 회개가 믿음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가? 결코 아니라! 그러나 성경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노라, 하고 외칩니다. 만일 회개하기 전에 먼저 믿음이와야 한다면, 믿음은 성령께서 오셨을 때 가능하므로, 회개하라고 인간들에게 외치기 전에 < 성령이여, 이 사람에게 믿음을 주소서, 그리하여 회개하게 하소서! > 했어야 합니다. 믿음이 올때까지 회개하지 말고 기다려야함 3-3-1 1. Connection of this chapter with the previous one and the subsequent chapters. Repentance follows faith, and is produced by it. Reason. Error of those who take a contrary view. 칼뱅 : 회개는 믿음을 뒤따르며, 그것(믿음)에 의하여 생성된다. That repentance not only always follows faith, 회개하라,천국이 가까웠느니라는 하나님에게 외쳤어야 but is produced by it, ought to be without controversy (see Calvin in Joann. 1:13). 칼뱅 : 믿음이 회개보다 먼저이다. 믿음에 의해서 회개가 생성된다 3-3-21 Moreover, that repentance is a special gift of God, I trust is too well understood from the above doctrine to require any lengthened discourse 회개가 하나님의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은 위의 교리로부터 너무나 잘 이해되어서 긴 설명을 필요로하지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전도하기 전에 하나님께 선물을 내리시라고 먼저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Those whom God is pleased to rescue from death, he quickens by the Spirit of regeneration; not that repentance is properly the cause of salvation, but because, as already seen, it is inseparable from the faith and mercy of God; 하나님이 사망으로부터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자들을 그분은 거듭남의 영으로 살리시는데 회개가 구원의 적절한 원인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보여졌듯이, 그것이 하나님의 믿음과 자비로부터 불가분이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16장 30 저희를 밖으로 데려가 말하기를, “나리들,(주인들이여) 내가 구원을 얻도록 어떻게 하여야 하리이까?” 하니 31 저희가 이르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네가 구원을 얻고 네 집도 그러하리라.” 30절에서 어떻게 하리이까? 하고 회개의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자 파울과 실라가 <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 합니다. 그리하여 간수와 그 가족들이 믿었습니다. 그외에 침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회개하라, 고 외쳤습니다. 그에 반응하여 회개한 사람들은 믿었고 침례받았습니다. 복음진영은 회개가 먼저라고 믿습니다. 2. 칼뱅은 회개가 장구한 세월동안 죽을때까지 지속된다고 하며 불과 며칠동안 회개하면 된다는 재침례파는 틀렸다고 비판합니다. 3-3-9 This renewal, indeed, is not accomplished in a moment, a day, or a year, but by uninterrupted, sometimes even by slow progress God abolishes the remains of carnal corruption in his elect, 칼뱅 : 이 새롭게함은 과연 순간으로나, 하루에나, 일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부단히 때로는 서서히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자 안에서 육적 부패의 남은 것을 제거해가신다. 여기에 재침례파가 직접 말한 글들은 없으므로, 복음전도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칼뱅은 거듭날때까지의 회개와 거듭난 이후 성화과정상의 회개를 구분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입장에서는 거듭날때까지 대개는 몇시간 혹은 며칠 혹은 몇주간 회개의 과정을 거치며 말씀을 듣고 들으면, 성령을 갈망하고 간구하며, 그리하여 성령께서 응답하시사 거듭납니다. 그 이후에는 성령께서 일하시며 인도하시므로, 편히 쉬어야 하며, 그러면 성령께서는 회개하도록 이끄시고, 믿는자를 성화시켜 나가시고 죽을 때까지 거룩함을 향해가도록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화를 위한 회개입니다. 성화를 위한 회개가 평생동안 지속되는 것을 반대하거나 무시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거듭난 이후에도 죄를 짓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칼뱅은 구원 자체를 위해서 장구한 세월동안 회개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이런 까닭에 칼뱅은 당시의 복음전도자들이었던 재침례파들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칼뱅이 주장하는 바는 오늘날도 로마 카톨릭이 가르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들면 고후 7장은 이미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성화과정상의 회개문제입니다. As repentance begins with dread and hatred of sin, the Apostle sets down godly sorrow as one of its causes (2 Cor. 7:10). 거듭난자의 성화과정상의 회개문제임. 그런데 칼뱅은 이 사건을 거듭남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거듭난자의 회개와 초기 구도자의 회개를 구분하지 못함 이것은 복음진영과 명백한 두가지 차이를 나타냅니다 1) 순간적 회개와 점진적 회개 문제 2) 거듭나기 이전의 회개와 성화과정상의 회개 구분문제. 칼뱅은 점진적 회개를 가르치고 있으며 거듭남을 위한 회개와 성화과정의 회개를 구분하지 않고 있습니다. 3. 칼뱅은 카타리,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네스토리우스와 네스토리안, 재침례파 들을 비판 비난합니다. 이들은 오늘날의 침례교도들, 형제단과 같거나 그들의 뿌리라고 할수 있습니다. 카타리는 고대 청교도들이었습니다. 노바티안은 251AD 에 파비안이 죽고 황제숭배에 굴복했던 사람들이 다시 기독교로 돌아오자 그들이 다시 재침례받아야 하며, 황제숭배에 굴복한 감독들에 의해서 침례받았던 사람들도 다시 회개하고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하였던 사람입니다. 반대로 황제숭배에 굴복했던 사람들은 코르넬리우스를 중심으로 모였고, 그들은 다시 침례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모였는데 이 황제숭배, 우상숭배에 굴복했던 사람들이 압도적 다수였고 황제숭배를 거부했던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오늘날의 카톨릭의 뿌리는 바로 코르넬리우스 일당에 있으며, 저는 카톨릭의 출발점을 바로 이 시점부터로 보고 있습니다. 카톨릭은 파비안을 교황으로 추대하고 있으며 노바티안은 이단으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칼뱅은 바로 이 노바티안을 정죄하면서 우상제사장에 의한 침례라도 유효하다. 왜냐하면, 우편물의 내용이 중요하지, 우편물을 누가 전달했는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상제사장에 의해서 하나님의 진리가 전파되어 침례받게했으면 유효하다는 논리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4. 칼뱅은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으며 교회가 어머니라고 합니다. 전형적인 카톨릭 교회관과 같으며, 교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를 말한다고 하며, 바로 노바티안, 도나티스트, 네스토리안, 재침례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로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4권 1장 거룩한 카톨릭 교회 4. The name of Mother given to the Church shows how necessary it is to know her. No salvation out of the Church. 5. The Church is our mother, inasmuch as God has committed to her the kind office of bringing us up in the faith until we attain full age. 그런데 사도 바울은 구원얻을 때 어느 교회 소속이었습니까? 그는 다마스커스에 그리스도인들을 체포하여 살육하기 위해 가던 중에 구원을 얻었습니다.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어느 교회 소속이었습니까? 또 필립을 만난 에티오피아 내시는 어느 교회로 들여졌습니까?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라면, 라오디게아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입니까? 갈라디아 교회가 그렇습니까? 고린도교회입니까? 아니면 여호와의 증인교회입니까? 교회는 우리의 어머니가 아니라 우리가 모여서 형성하는 것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칼뱅은 순서를 거꾸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 위대한 스승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 18장 20 내 이름을 위하여 두 세 사람이 모인 그곳에 나도 그들 가운데 있느니라. 이 말씀이 바로 가장 기본적이고 위대한 교회 구성에 관한 진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두 세사람이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면 그것은 바로 위대한 그리스도의 모임인 것입니다. 어느 특정 종파나 카톨릭에 속해야 할 이유가 없으며, 소위 사도전승이라는 전통을 이어받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소위 사도전승이라는 것은 카톨릭이 꾸며놓은 역사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조작된 역사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교회관을 칼뱅은 갖고 있었습니다. 5. 칼뱅의 논리의 중요한 근간은 할례는 유아침례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받침이며, 그것에 의해서 유아침례의 정당성을 변증합니다. 실제로 할례와 유아침례는 많이 다릅니다. 할례는 여자아이에게는 실행하지 않았으며, 남자아이에게만 실행했고, 할례는 생후 제8일에 실행하라는 명시적 명령이 있는데 반해 유아침례는 그런 명령이 없으며, 할례는 미래의 믿음과 성화를 위한 것이었지만 침례는 모든 족속을 제자삼아 가르쳐 회개하게 한 후에 침례하라는 명령이 있으므로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재침례파들이 이유로 제기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칼뱅은 그에 대하여 생후 8일의 언급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사소하고 시시한 것으로 트집잡기 한다고 비난하고 넘어갑니다. 그러나 제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유아침례와 할례는 전혀 다르며, 할례받았던 유대인들, 파리새인들, 장로와 제사장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침례는 할례에서 나온 것이나, 할례를 대체한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정결례 즉 라핫츠에서 이어온 것으로 분별됩니다. 출 30장 19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그들의 손들과 그들의 발들을 그 안에서 씻을 것이라. 20 그들이 만남의 성막 안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물로 (잠겨) 씻을 것이며 그리하여 죽지 않게하고, 그들이 예호와께 불로된 희생(코르반) (가까이 감의 예물) 을 (향기롭게) 태워 섬기기 위하여 희생단에 가까이 갈 때, 그리하도록 하라. 21 그리하여 그들이 그들의 손들과 그들의 발들을 씻어서 그들이 죽지 않도록 하라. 이것이 그들에게 영원한 율례가 될지니, 그에게와 그의 자손들에게 그들의 대대로 그리 될지니라. 여기서 제사장들이 잠겨 씻는 행사가 바로 라핫츠였습니다. 이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제사를 믿고 증거함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들이며 그들이 사역에 앞서서 정결례를 행하며 그 십자가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침례라 할수 있습니다. 레비기 15장 7 그 흐르는 자의 육체에 접촉한 자는 자기의 의복들을 빨래할 것이며 물속에서 목욕할지니, 그는 그 저녁까지 부정결할지니라 이것 또한 라핫츠입니다. 레비기 16장 26 그 새끼수염소를 아자젤로 보낸 자는 자기의 의복들을 빨래할 것이며 그의 육체를 물속에서 목욕할지며, (라핫츠) 그런 후에 그는 진영으로 들어올 것이니라. 대속죄일에 두 마리의 염소를 취하여 한 마리는 여호와의 염소로 희생드리고 다른 한마리는 아자셀의 염소로 광야로 보내었습니다. 그것을 보낸 사람은 라핫츠의 정결례를 가졌습니다. 민수기 19장 19 그 정결한 자가 그 부정결한 자에게 제 3일에와 제 7일에 뿌릴지며, 그는 제 7일에 속죄희생할지며, 자기의 의복들을 빨래할지며, 물속에서 (물로) 목욕할지며(라핫츠), 그리하면 그 저녁에 정결할지니라. 붉은 암송아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표상이었습니다. 그 잿물로 뿌림을 받은 자들이 거룩하게 되었으며,(히 9:13) 그로 인해 거룩하게 된 자는 물속에서 잠김목욕(라핫츠)으로 정결례를 치렀습니다. 이러한 라핫츠의 정결례를 신약교회에서 제사장으로 영입하는 모든 새로운 신자들에게 실행하도록 명령하신 것으로 분별되며 이러한 침례는 할례를 대신한 것도 아니며, 할례와 동일한 성질의 것도 아님은 할례가 여자아이들에게는 실행되지 않았으며, 할례에 믿음을 검증하라거나 회개하라는 명령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음을 통해서도 확인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칼뱅은 갖가지 궤변으로 유아침례=할례의 공식으로 모든 반대자들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칼뱅은 이러한 라핫츠를 알지 못한 것으로 보이며, 엉뚱한 할례를 갖다가 어린아이 갓난아이에게 실행하는 유아침례와 같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6. 칼뱅이 침례중생주의, 세례구원론에 반대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침례중생주의, 세례구원론을 믿고 주장하는 자들 중에 유아침례에 반대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칼뱅 강요 제4권 16장 26절이 바로 그에 대한 반박입니다. 그렇지만 유아가 아닌 성인들에 대하여 말할 때에는 병든자가 침례받지 않고 죽으면 거듭남이 박탈될 우려가 있다고 말합니다. But there is a danger that he who is sick may be deprived of the gift of regeneration if he decease without baptism! 병든 사람이 침례받지 않고 죽으면 거듭남의 선물을 박탈당할수 있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자녀들에 대해서는, 우리의 아이들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부터 하나님이 자신의 자녀들로 입양하시기로 선언하셨으며, 구원을 위해 침례가 필요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But there is a danger that he who is sick may be deprived of the gift of regeneration if he decease without baptism! 병든 사람이 침례받지 않고 죽으면 거듭남의 선물을 박탈 당할 수 있는 위험이 있다! By no means. Our children, before they are born, God declares that he adopts for his own when he promises that he will be a God to us, and to our seed after us. 우리의 자녀들은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선언하시기를 그분이 우리에게와 우리의 후손들에게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실때 그분은 자기의 자녀들로 입양하신다고 선언하신다 In this promise their salvation is included. None will dare to offer such an insult to God as to deny that he is able to give effect to his promise. How much evil has been caused by the dogma, ill expounded, that baptism is necessary to salvation, few perceive, 침례가 구원에 필요하다는 그릇 상술된 교리에 의하여 얼마나 많은 악이 유발되었는가? 사람들이 거의 깨닫지 못하지만. 칼뱅은 유아들에 관하여는 하나님이 약속하셨다거나 언약가운데 있다는 이유로 구원이 침례와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어른들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침례와 죄사함을 연관시킵니다. 4-15-5 Christ by baptism has made us partakers of his death, ingrafting us into it. 그리스도는 침례에 의하여 우리를 그분의 죽으심에 참여하게 하고 우리를 그것에 접목시키신다. 침례 이전에는 그분의 죽으심에 연합하지 않고 있었는데 침례에 의해 연합시키시는가? 4-15-6 Thus first John baptised, and thus afterwards the apostles by the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remission of sins, understanding by the term repentance, regeneration, and by the remission of sins, ablution. 그리하여 우선 요한이 침례하였고 그리하여 그후에 사도들이 죄들의 사함을 위한 회개의 침례에 의하여, 회개라는 말로 거듭남을, 죄들의 사함이라는 말로 속죄를 이해하게 한다. 회개라는 말은 거듭남, 죄사함이란 말은 씻음, 침례는 그리스도와 연합이다 4-15-3 Wherefore, as often as we fall, we must recall the remembrance of our baptism, 넘어질때마다 십자가가 아니라 침례를 기억함 믿는자가 넘어질 때에는 침례가 아니라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침례사실을 매일 짊어지고 살라고 하지 아니하시고,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살라고 하셨습니다!(루카 9:23) 그런데 칼뱅은 걸핏하면 침례를 기억한다고 합니다. 3-3-13 “Therefore the law of sin (which was in the members of this great Apostle also) is forgiven in baptism, not ended.” Again, “The law of sin, the guilt of which, though remaining, is forgiven in baptism, Ambrose called iniquity, 그러므로 죄의 법( 죄의 지배) ( 심지어 이 위대한 사도의 지체들 안에 있던 것) 이 침례로 사해졌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 다시 죄의 법은 침례에서 사해졌다, 암브로스는 불의라고 불렀다- 칼뱅은 침례에 의해 죄가 사해진다는 어거스틴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음 이외에 수많은 설명에서 칼뱅은 실제로는 침례중생주의 또는 침례죄사함을 말합니다. 4-15-10 Believers become assured by baptism, that this condemnation is entirely withdrawn from them, since (as has been said) the Lord by this sign promises that a full and entire remission has been made, both of the guilt which was imputed to us, and the penalty incurred by the guilt. They also apprehend righteousness, but such righteousness as the people of God can obtain in this life—viz. by imputation only, God, in his mercy, regarding them as righteous and innocent. 믿는자들은 침례에 의해서 이 정죄가 자기들에게서 전적으로 철회되었음을 확신하게 된다. 왜냐하면 주께서 이 징표에 의해 전적인 죄사함이 이루어졌다고 약속하시기 때문, 즉 우리에게 전가된 죄와 그 죄에 의해 발생된 형벌 (모두가 사해진다고) 칼뱅은 원죄가 침례에 의해 씻어진다는 주장에는 반대 4-15-12 98 598 French, “Nous suivons donc de mot à mot la doctrine de Sainct Paul, en ce que nous disons que le peché est remis au Baptesme, quant à la coulpe, mais qu’il demeure toujours quant à la matière, en tous Chretiens jusques à la mort.”—We therefore follow the doctrine of St Paul, word for word, when we say that in Baptism, sin is forgiven as to the guilt, but that it always remains as to the matter in all Christians until death. 프랑스어 칼뱅의 문장 : 침례에서 죄가 불의에 대하여 사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을 때까지 그 문제에 대하여 항상 남아있다. 엘리야후 : 침례가 아니라 십자가에서 죄가 사해졌음- 그것이 믿어졌을 때 사해진 것임 7. 칼뱅은 회개가 거듭남이라고 말합니다. 3-3-9 In one word, then, by repentance I understand regeneration, 그리하여 한마디로 회개에 의해 (회개라는 말로) 나는 거듭남을 이해한다 프랑스어로는 영적 거듭남이라 함 성화를 회개로 혼동하는 한편, 회개를 거듭남이라 부름 회개의 가장 기본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이라 함 이것은 칼뱅이 요한 웨슬레나 파스칼이나 스펄젼이나 해리 아이언사이드 등의 사람들이 경험했던 거듭남을 경험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다면, 회개와 거듭남을 구분했을 것이며, 거듭나기 이전의 회개와 성화과정의 회개를 구분하였으리라 믿어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칼뱅은 며칠간의 회개로 거듭났다고 말하는 재침례파들을 맹렬히 비난합니다. 3-3-9 This renewal, indeed, is not accomplished in a moment, a day, or a year, but by uninterrupted, sometimes even by slow progress God abolishes the remains of carnal corruption in his elect, 칼뱅 : 이 새롭게함은 과연 순간으로나, 하루에나, 일년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다. 대신 부단히 때로는 서서히 하나님은 그분의 택하신자 안에서 육적 부패의 남은 것을 제거해가신다. 엘리야후 : 거듭남이란 성령께서 인간 자아안에 내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일어납니다. 그것을 위한 회개는 며칠 혹은 몇 달 혹은 1-2년에 걸릴수도 있지만, 대개 갈망하는 자들에게는 며칠 혹은 몇 주만에 이루어집니다. 칼뱅은 전혀 다른 길을 설명하고 있는데 그의 설명은 아래의 로마 카톨릭 신부가 말하는 순간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의 구분에서와 같습니다. 카톨릭은 평생동안 점진적으로 회심한다고 합니다. 케리 월터스라는 카톨릭 신부가 말하는 순간적 회심과 점진적 회심 https://www.youtube.com/watch?v=FepwMpW--TI 이 사람은 순간적 회심이란 인간의 감정에 따라 생긴것이고 불안정한 것이라고 합니다. 칼뱅은 그런 회심은 광신도적이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장구한 세월에 걸쳐 회개하고 죽을 때까지 회개는 지속한다고 말합니다. I allude to great numbers of Anabaptists, those of them especially who plume themselves on being spiritual, and their associates the Jesuits, and others of the same stamp. Such are the fruits which their giddy 경솔한 spirit produces, that repentance, which in every Christian man lasts as long as life, is with them completed in a few short days. 칼뱅 : 내가 언급하는 것은 많은 재침례파 사람들, 특히 스스로를 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과 그들과 교제하는 제수이트(예수회) 사람들과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들인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회개는 평생동안 걸리는 문제인데, 불과 며칠간의 짧은 날들동안에 완성된다는, 그들의 경솔한 영이 생산해내는 열매들이 그렇다. 엘리야후: 회개가 평생동안 계속됨은 맞습니다. 그러나 거듭나게하는 회개는 몇분 혹은 몇시간 혹은 며칠, 몇달, 몇년으로 끝납니다. 이것은 거듭난 경험이 없는 사람의 논평. 회개하라에 응답하는 인간 영혼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 다음 단계에 하나님이 대응하여 불어넣어주시는 회개의 영부터 설명, 인간의 회개 반응이 전혀 의미없다면, 하나님에게 전도해야 함: 실제 거듭남에 이르는 회개의 과정은 전도자 (성령의 외침)- 회개하라- 인간의 회개- 성령의 역사및 대응- 인간의 구원얻을수 있는 회개- 성령에 의한 거듭남- 거듭남이후의 인간 회개 그 결과 성화- 인간의 성화 지속- 죽을때까지 회개지속, 성화지속 이렇게 됩니다. 칼뱅은 믿음이 와서, 회개 시작, 계속 회개 죽을때까지 회개, 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거듭남의 체험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8. 칼뱅이 언급할 수 있는 유일한 신앙경험은 바로 침례 (세례) 입니다. 칼뱅에게 유일하게 언급할 수 있는 일생일대의 변화, 혹은 사건은 침례라는 것 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의 체험, 성령께서 임하시는 체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죄를 지을 때마다 침례받은 것을 기억한다고 합니다. 십자가에서 자아가 못박혔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아가 죽었다는 것을 다시 깨닫고 재확인하며 날마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침례를 기억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4-15-4 Wherefore, there can be no doubt that all the godly may, during the whole course of their lives, whenever they are vexed by a consciousness of their sins, recall the remembrance of their baptism, that they may thereby assure themselves of that sole and perpetual ablution which we have in the blood of Christ. 그러므로 모든 경건한 사람들은 그들의 일생동안 내내 그들이 자기들의 죄의식으로 말미암아 괴로울 때마다 자기들의 침례를 상기하도록 하여 그들이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가진 유일하고도 영속적인 씻음을 스스로에 확신시키도록 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날마다 십자가가 아닌 날마다 침례? 침례를 통해서 십자가를 기억한다는 것. 침례를 거쳐서 생각해야 십자가를 깨닫는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십자가 이후에 있었던 한 행사에 불과하며, 그 행사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비교할수 없는 것입니다. 왜 자꾸만 칼뱅은 침례를 생각할까요? 그것밖에는 기억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은 처음으로 십자가 진리가 깨달아진 날이 기억날 것입니다. 4-15-12 12. Here we say nothing more than the apostle Paul expounds most clearly in the sixth and seventh chapters of the Epistle to the Romans. He had discoursed of free justification, but as some wicked men thence inferred that they were to live as they listed, because their acceptance with God was not procured by the merit of works, he(사도바울) adds, that all who are clothed with the righteousness of Christ are at the same time regenerated by the Spirit, and that we have an earnest of this regeneration in baptism 우리는 침례에서 거듭남의 진지함(진심)을 갖는다 4-15-14 We therefore follow the doctrine of St Paul, word for word, when we say that in Baptism, sin is forgiven as to the guilt, but that it always remains as to the matter in all Christians until death. 칼뱅: 침례에서 죄가 불의에 대하여 사해졌다 그러나 그것(죄)은 죽을 때까지 모든 그리스도인들 안에 문제에 관하여 남아있다. ; 모든 것을 십자가를 처음 깨달은 거듭난 날 대신 침례로 대체하여 말함 "" 내주의 도 첨받은 날 기쁜날이 아닌가" " 내 죄사함받고서 구주를 안뒤 나의 모든 것이 변했네" " 내 속죄함을 받고서 성령이 오셔서" 이런 날이 없는 사람의 글입니다! 9. 칼뱅 :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특별한 지위를 갖는다 4-16-24 For he undoubtedly gives the place of sons to the children of those to whose seed he has promised that he will be a Father. (모든 자녀는 하나님의 것, 몰록 숭배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지만) But the child descended from unbelieving parents is deemed an alien to the covenant until he is united to God by faith.(예정-약속의 자녀가 아니었다가 약속의 자녀로, 나중에 하나님과 연합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면 약속의 자녀가 아닌가?약속의 자녀라면, 불신자라도 유아침례 받을 수 있다?) 이 해석은 요한복음 1장 13절에서 말씀하시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는다는 말씀에 위배됩니다. 믿는자의 자녀라 하여 특별한 지위를 갖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마엘도, 에서도 아브라함이나 이삭의 아들로서 믿는 자의 아들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음의 길로 가지 아니하였으며 패역의 길로 갔습니다. 또 오늘날 수많은 남미의 조폭들중에는 다수가 어렸을 때 믿는다는 가정에서 자라나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만, 사악된 길로 갔습니다. 미래의 믿음을 위하여 미리서 침례를 베푼다는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바가 아닙니다. 10. 칼뱅은 수많은 해설에서 자신의 카톨릭 신앙을 드러냈습니다. 1) 그는 교회는 거룩한 카톨릭 교회라 하며, 교회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다고 합니다. 로마 카톨릭이 주장하는 바와 아주 흡사합니다. 4-1-4, 5 4. The name of Mother given to the Church shows how necessary it is to know her. No salvation out of the Church. 5. The Church is our mother, inasmuch as God has committed to her the kind office of bringing us up in the faith until we attain full age. This method of education not to be despised. 사도 바울과 십자가상의 한 강도는 교회와 상관없이 구원얻었습니다 교회는 믿는자들이 모여서 이루면 교회가 되며, 믿는 자들은 성령을 받았을 때 믿는자가 됩니다. 2) 교회는 어머니이시다. 3) 마리아를 거룩한 어머니, 라 부르는데 이는 성모 마리아라는 뜻이 됩니다. 4-15-21 it was not even permitted to the holy mother of Christ, he makes no reservation. 칼뱅의 성모사상=> 그리스도의 거룩한 어머니, : 이것은 카톨릭의 데오토코스를 말하며 네스토리안은 죽기 살기로 이것에 반대하여 싸웠고 그들이 중국에 와서 경교가 되었습니다. 칼뱅은 카톨릭을 옹호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어머니라는 말과 그리스도의 어머니 혹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어머니라는 말은 엄청 큰 차이가 있으며 성경에는 오직 예수의 모친이라는 표현만 있습니다.
4) 침례는 목사나 기타 성직자만 베풀 수 있다고 합니다. 3-15-22 any one who baptises without a lawful call usurps another’s office. 아무나 침례하는 것은 합법적인 다른 사람의 직책을 찬탈하는 것; 성직자제도 : 사탄의 복음전파 방해, 만인제사장직에 반대됨(벧전 2:5-9) 5) 물속에 잠기는 침례나 그냥 몇 방울의 물들을 뿌리는 세례나 무방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세례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6) 카톨릭 우상 제사장들에게 받았던 침례도 유효하다. 다시 침례받을 필요가 없다 7) 회개는 장구한 세월동안 죽을 때까지 지속된다 8) 4-16-9 거룩한 물 ( 침례가 아닌 세례를 베풀 때 성수로 뿌린다 하여 거룩한 물) It remains briefly to indicate what benefit redounds from the observance, both to believers who bring their children to the church to be baptised, and to the infants themselves, 교회와 유아에게 미치는 유익 : 교회의 초토화, 불신자 소굴화to whom the sacred water 성수 사상은 아쿠아신 숭배 9. 카톨릭에서 우상제사장들에 의해 유아세례 받은 것도 유효하다: 4-15-16 Moreover, if we have rightly determined that a sacrament is not to be estimated by the hand of him by whom it is administered, but is to be received as from the hand of God himself, from whom it undoubtedly proceeded, we may hence infer that its dignity neither gains nor loses by the administrator Be it that those who baptised us were most ignorant of God and all piety, or were despisers, still they did not baptise us into a fellowship with their ignorance or sacrilege, but into the faith of Jesus Christ, because the name which they invoked was not their own but God’s, nor did they baptise into any other name. But if baptism was of God, it certainly included in it the promise of forgiveness of sin, mortification of the flesh, quickening of the Spirit, and communion with Christ. 우편물의 내용이 중요하지 누가 전달했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면, 아무나 침례했어도 괜찮다. 침례중생주의에서 가능함
- 카톨릭 우상제사장에 의한 침례도 유효하다.
11. 칼뱅의 주요 논술방식과 자극적 표현들 칼뱅은 자기 주장을 함에 있어서 전혀 성경적이지 않는 논리전개를 한다음, 그 논리는 하나님의 정하신 것이며 그것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그것에는 하나님의 보복이 있을 것이며, 교회는 징벌을 가해야 한다는 논조로 전개합니다. 그의 주요 논술방식은 1) 회개는 믿음을 뒤따른다. 즉 믿음이 회개보다 먼저다 2) 유아침례는 할례와 같다 4-16-4 Hence it is incontrovertible, that baptism has been substituted for circumcision, and performs the same office. 칼뱅 : 침례가 할례를 대체했으며 동일한 직책을 수행한다는 것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 ( 칼뱅의 자만스러운 단정임) 3) 하나님을 믿는자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보호되어 있으며 언젠가 구원해주실 것이다. 4) 자기가 내린 결론에 반대하는 자들을 억압할 수 있다 3-3-9 자기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억압할수 있음- 종교재판 But God furnishes us with other weapons to repress their stupidity.반대자 탄압합리화 논리- 카톨릭과 동일한 논리-종교재판과 고문 살육 His holy institution, 칼뱅의 단정
칼뱅의 독설, 표현들 3-3-Section 4 I pray you, my friends, who can refrain from execrating such beasts? 364 Calvin's Institutes John Calvin 누가 그런 짐승들을 욕설하는 것을 삼가할수 있겠는가? ( 칼빈의 독설방식) 4-15-20 Our children, before they are born, God declares that he adopts for his own when he promises that he will be a God to us, and to our seed after us. In this promise their salvation is included. None will dare to offer such an insult to God as to deny that he is able to give effect to his promise. 우리의 자녀들은 그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이 그분이 친히 우리에게와 우리 후손에게 하나님이 되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그분은 자신의 것들로 양자삼겠다고 선언하신다. 아무도 감히 그분께서 자기의 약속을 실행하실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리만큼 하나님께 그러한 모독을 가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마엘, 에서 는 믿는자의 자손이었습니다. 히틀러도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유아세례 받았습니다. 소위 그들 나름대로 믿는자의 자손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구원은 이미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의 약속에 포함되었습니까? 그들은 패역의 길로 갔습니다. 이런 해석은 요한 1:13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자가 아니라는 성경 말씀에 위배됩니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도, 믿어야지 안믿으면 소용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칼뱅의 해석은 틀립니다만, 칼뱅은 자기의 해석에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 모독으로 단정하고 있습니다. 4-16-32 . Why Satan so violently assails pædobaptism. 왜 사탄은 유아침례를 그토록 폭력적으로 공격하는가? 이 말은 재침례파, 세르베투스 등을 향하여 하는 말입니다. 재침례파들이 유아들은 믿음이 없이 침례받았으므로, 그들이 회개하고 믿은 다음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매우 성경적입니다. 칼뱅은 사도행전 19장 3-5절에서 에페소에서 요한의 침례만 받은 사람들이 다시 침례받은 사실을 그릇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재침례파들을 사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3-3-14 those who have resolved to turn the word of God into a lie, should thus be punished for their blasphemous audacity. 그들의 신성모독적 뻔뻔함 4-16-31세르베투스 = 철면피 The fifteenth argument is more than absurd. He says that we become gods by regeneration, but that they are gods to whom the word of God is sent (John 10:35; 2 Pet. 1:4), a thing not possible to infant children. The attributing of deity to believers is one of his ravings, which this is not the proper place to discuss; but it betrays the utmost effrontery 철면피 to wrest the passage in the psalm (Ps. 82:6) to a meaning so alien to it. 세르베투스 : 말씀받은 자를 신이라 하셨거늘은 유아들에게는 적용되지 못한다. 칼뱅 : 믿는자들에게 신성을 부여하는 것은 그의 비방들중의 하나. 시편 말씀을 비트는 철면피 칼뱅을 변호하는 사람들은 세르베투스가 칼뱅을 점잖은 말들로 반박하지 않고 독설로 비난했기 때문에 그가 살육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칼뱅의 기독교 강요를 읽으면 수시로 무리한 결론을 내리면서 논쟁의 여지가 없다거나 아무도 반박할수 없다고 하면서 자기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짐승들이며, 욕설을 해도 막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책은 1536년에 쓰였으며, 칼뱅은 1509년에 태어나 1564년에 죽었고 세르베투스를 칼뱅이 제소하여 참수형을 구형하였던 것은 1553년이었으므로 먼저 독을 뿜어낸 사람은 바로 칼뱅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27세 청년으로서 성령에 의한 인격수련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글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그 자신은 거듭난 경험을 말한 적이 없고 대신 장구한 세월동안 회개하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2. 칼뱅은 종종 성경을 그릇 해석하였습니다. 1) 마태 19장- 유아침례 금지 반대로 해석 칼뱅은 마태복음 19장 13을 해석함에 있어서 어린이들로 하여금 예수께 나아오게 하는 것을 금하지 말하는 말씀을 < 어린이들에게 침례베푸는 것을 금하지 말라> 로 해석합니다. 4-16-7 Hence our Lord Jesus Christ, to give an example from which the world might learn that he had come to enlarge rather than to limit the grace of the Father, kindly takes the little children in his arms, and rebukes his disciples for attempting to prevent them from, coming (Mt. 19:13), because they were keeping those to whom the kingdom of heaven belonged away from him, through whom alone there is access to heaven. But it will be asked, What resemblance is there between baptism and our Saviour embracing little children? He is not said to have baptised, but to have received, embraced, and blessed them; and, therefore, if we would imitate his example, we must give infants the benefit of our prayers, not baptise them. But let us attend to the act of our Saviour a little more carefully than these men do.칼뱅 억지기술 For we must not lightly overlook the fact, that our Saviour, in ordering little children to be brought to him, adds the reason, “ of such is the kingdom of heaven.” And he afterwards testifies his good-will by act, when he embraces them, and with prayer and benediction commends them to his Father. If it is right that children should be brought to Christ, why should they not be admitted to baptism, 만일 어린이들이 그리스도께서 데려와지는 것이 옳다면 어찌하여 그들이 침례에 데려와서는 안되겠는가? 원래의 성경 말씀은 이렇습니다. 마태 19장 13 그때에 사람들이 그분께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그분이 그들에게 손얹어 주고 기도하여 주도록 하니 제자들이 저희를 꾸짖는지라. 1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 어린아이들을 그냥두고 저희가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 천국이 이러한 자들의 것이니라.15 그리고 저희에게 손들을 얹으시고 거기서 나아가시니라.
이 말씀이 유아들, 영아들을 침례하는 것을 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그런데 칼뱅은 유아침례를 금지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둔갑시킵니다. 이것이 바로 칼뱅요술이라 할수 있습니다. 더구나 여기서 아이들은 < 저희가 내게 오는 것> 으로 보아 저희 스스로 걸을 수 있는 나이의 어린이들이며 유아나 영아들이 아닙니다. 오늘날 유아침례는 갓난아기들에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또 여기서 예수님이 하신 일은 침례가 아니라 그 어린이들에게 손을 얹어준 일이었습니다. 2) 사도행전 19장 -재침례 부인 칼뱅은 노바티안들이 우상숭배에 굴복한 감독들에 의해 침례받은 사람들은 다시 회개하고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에 반대하였으며, 재침례파들이 유아세례 받은 것은 회개하고 거듭난 이후에 다시 침례받아야 한다는 재침례에 반대하였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가득찬 칼뱅은 다음 구절도 억지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19장 1 아폴로가 코린트에 있을 때에, 파울이 내륙지방들을 지나서 에페소에 이르러 어떤 제자들을 만나 2 그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 너희가 믿고나서 성령을 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그에게 이르기를,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시는지도 듣지 아니하였노라.” 하니 3 그가 저희에게 이르기를, “ 그러면 무엇으로 침례받았느냐?” 하니 그들이 이르기를, “요한의 침례로.” 4 파울이 이르기를,” 요한이 과연 회개의 침례로 침례하며, 백성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즉 그리스도 예수를 그들이 믿도록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5 그들이 듣고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받았더라. 6 파울이 그들에게 손들을 얹으니, 그들에게 성령께서 임하시어, 그들이 방언들로 말하며 예언하였으니, 7 모든 남자들이 열둘쯤 이었더라. 칼뱅은 5절을 성령침례로 해석합니다. 그리하여 요한의 침례를 받았던 사람들은 요한의 물침례만 받았고,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받았다는 말이 성령침례받았다는 말로 들립니까? 이것은 명백한 해석학적(Hermeneutics) 문제인데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구절에서 사도 바울이 그 사람들 12명을 예수의 이름으로 침례 베푼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칼뱅은 자기가 반대하는 재침례를 허용하는 해석이 나올까봐 이 구절을 성령침례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4-15-18 What then is meant by the words, “They were baptis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Some interpret that they were only instructed in sound doctrine by Paul; but I would rather interpret more simply, that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in other words, the visible gifts of the Holy Spirit, 재침례부인 were given by the laying on of hands. These are sometimes designated under the name of baptism. Thus, on the day of Pentecost, the apostles are said to have remembered the words of the Lord concerning the baptism of the Spirit and of fire. And Peter relates that the same words occurred to him when he saw these gifts poured out on Cornelius and his family and kindred. There is nothing repugnant to this interpretation in its being afterwards added, “When Paul had laid his hands upon them, the Holy Ghost came on them” (Acts 19:6). 침례도 하고 안수도 하고. For Luke does not narrate two different things, but follows the form of narrative common to the Hebrews, who first give the substance, and then explain more fully. This any one may perceive from the mere context. For he says, “When they heard this they were baptis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And when Paul laid his hands upon them, the Holy Ghost came on them.” 해석기술 In this last sentence is described what the nature of the baptism was. 안수가 침례인가? But if ignorance vitiates a former, and requires to be corrected by a second baptism, the apostles should first of all have been rebaptised, since for more than three full years after their baptism they had scarcely received any slender portion of purer doctrine. 제자들은 재침례 안받았다. 요한이나 예수는 우상제사장이 아니었다Then so numerous being the acts of ignorance which by the mercy of God are daily corrected in us, what rivers would suffice for so many repeated baptisms? 실수할때마다 침례받아야 한다? 불신자 침례문제는 별개 이와 같이 칼뱅은 거듭남에 대하여 오늘날까지 알려진 많은 복음 진영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해석 체계를 갖고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칼뱅의 거듭남에 관한 해석들은 로마 카톨릭의 그것과 흡사합니다. 그러한 칼뱅의 이론을 배우고 목사들이 된 오늘날 장로교 목사들이 거듭남의 경험을 간증하고 거듭남 이후에 변화된 삶을 증거하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구원파라 하여 대적하거나 이단으로 정죄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며 그 뿌리를 우리는 칼뱅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27세 카톨릭 청년이 거듭남의 경험이나 특별한 체험 없이 써놓은 글을 전 세계가 추종하며 신봉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그렇지만 세계는 예정론과 유아세례등에 관하여 지금까지 그의 글에 이끌려왔습니다. 이에 대하여 더 많은 증거들과 사례들을 들수 있겠으나, 시간을 아끼고자 이것으로 정리하며, 칼뱅의 기독교 강요 3권 3장의 거듭남에 관한 장을 영문으로 별도로 올립니다. 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올바른 해석의 길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을 인도하여 주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의탁드립니다. 2020. 5. 31 엘리야후 2026. 6. 3 하토브 옮겨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