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살! 그리고 지리산 종주기.
(떠나기 전)
사람은 무었으로 사는가 ?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고 정열적인 삶을 원하는가 하면 비가 내린 오후
하늘에 뜬 일곱색깔 무지개를 보고 감탄하며, 늘 푸르른 솔를 보고는 의연함을
생각하게하고, 힘겹게 오른 산의 정상 끝자락에서 내려다 보는 발밑 자연을 보며
가슴 부듯함과 도전이란 단어 아래 생활의 활력소를 찾고자한다.
"산이 거기 있기에 오를 뿐이다"라는 언어는 산악인의 인간사에 많은 생각과
깊은 사려를 자아내게 하지만 정녕! 자연의 아름다움은 자연과 함께 어우러지는
그 자체이어야 함이 옳지 않을까?
산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모르던 20대 후반.
산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직장 동료와 함께 한 설악의 겨울 산행에서 부터다.
눈 쌓인 설악의 설경을 보면서 시작한 산행은 지금 것 많은 것을 자아 내게해
가슴에 남고 생활의 활력소를 가지게 된 내 생의 한 획을 그을 수 있었던 계기로
산행의 산에 대한 애착은 날이 갈수록 심도가 깊어 갔고 그렇게 연계 되면서
지리를 생각하게 했다.
지리산 종주계획을 가지게 된 것은 7월 초 시골에 다녀오면서 부터 연세도
연세지만 어머님의 건강, 생활의 안정! 천왕봉을 생각하케 했고 1915m 하늘 닫는
천왕봉에서 소망 하고자 마음의 결정을 내리면서 가족등반의 결정을 내렸다.
7살,13살된 자식을 4살 때부터 서울 근교산을 기점으로 월출산, 민주지산,설악산
을 함께 다녀 왔지만 2박3일의 장구한 산행은 처음계획이라 걱정 앞섰고 장남과
처는 걱정이 안되지만 7살 자리 작은놈이 견디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우려가 앞서 두
려운 마음까지 엄습, 혼돈의 시간을 감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무든 계획을 잡고는 산장예약, 열차표 준비등을 한 달전에 모두 끝내고는 종주
계획을 잡았다.(물론, 오용민선생님 지리산 싸이트 열어 많은 도움을 얻음) 11일에
구례구역, 터미널 1박, 성삼재 첫차, 벽소령1박, 장터목1박 그리고 법계사로 하산 할
나름의 계획을 잡아 종료 시장을 보고 먹을 것을 마지막으로 준비하였다.
(떠나서)
8월11일(비-흐림-안개비)
우리가족(41, 37, 13, 7)은 영등포에서 16:00 구례행 무궁화호에 몸을 싣었다. 모든
것을 잊고 새로운 각오가 되어서 돌아 오자 하면서 그러나, 큰놈은 여름휴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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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라 아버지는 항상 극기훈련을 시킨다고 혼자서 군시렁 거린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휴가 끝자락의 들녘을 바라 보면서 마음은 지리산에 가있
었지만 7살 막내가 잘 걸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과 날씨가 또한 산행에 무리없는
기후가 되기를 간절한 소망으로 구례로 향한 열차는 질주했다.
숱한 생각에 꼬리를 무는 상상의 벽을 넘어 5시간 반을 달려 20:45분 구례구역에
도착하여 광장으로 나오니 흔건이 젖은 보도를 볼수 있었으나 하늘은 맑아 보였고
어제 비가 내렸다는 소식을 역전 앞 가계 집 아주머니의 말을 접하고는 터미널에
서 06:00 성삼재행 첫차를 탈 계산 이였지만 21:00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를 놓지는
까닭에 4,300원의 택시비을 내고 버스 터미널로 이동하여 저녁 식사를 근처에서
간단히 하고는 근방의 여관방(40,000원)에 여정을 풀고 기상시간을 03:00에 맞추
고 지리산 종주의 모든 것을 꿈꾸며 잠을 청하였다.
8월 12일
새벽 03:00!
드디어 꿈꾸던 지리 종주의 날은 밝아왔다.
먼저, 창문을 열어 하늘을 보았지만 구름만 끼고 비가내닐 기미는 보이지 않아
다행이다 싶어 아침 준비를 하였다. 집에서 미리 씻어온 쌀로 점심먹을 도시락까
지 계산하여 밥을 짖고는 04:30 식솔들을 모두 기상시켜 준비해간 김치, 깻잎, 볶
은 멸치등 으로 아침식사를 하고는 배낭을 재정리하고는 터미널로 나가니 05:30분,
뿌옇게 밝아오는 이른 아침이였지만 터미널에는 등산객으로 봄비고 있었고 준비
못한 물품을 사느라 부산하였다. 얼추 100여명은 되는 듯 싶었다.
첫차를 기다리다 보니 05:40분 노고단 가실 분 줄를 스라는 목소리가 들렸고 할인
은 안된다는 말이 연이어 졌다. 우리는 줄을 서고 06:00에 떠나려는 예상과는 달리
05:50분에 첫버스는 30여명을 태우고는 화엄사를 들리지 않고 성삼재로 향하
였다.(버스 비 2,900원/1인당)
구례 터미널을 벗어나 하늘을 보니 맑았고 비는 전혀 우려되지 않아 좋은 일정,
멋진 산행이 되리라 예감하였다.
모두들 산행에 부푼 가슴, 버스안은 떠들썩 했고 서울서 온 듯 한 한 젊은 친구는
지리산을 너무도 잘 아는지 함께 온 동료들에게 많은 이야기를 내내 나누었고
지리의 많은 것을 아는 듯하여 자랑스러운 모습 이였다.
10여분 시내를 벗어나니 지리산자락이 보이며 들녘은 온통 푸르른 빛으로 가득
했다. 가을을 기다리는 농부의 마음이 무더운 여름내 가꾸어온 정성인 듯.....풍성
하게 다가왔다.
서부 매표소에서 2,600원씩의 입장료를 내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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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재를 오르는 차량은 굽이 굽이친 산길을 거침없이 달렸고 내려다 보이는
지리의 자락은 너무도 웅장하게 두 눈에 다가왔고 설레는 마음에 가슴까지 울렁
거림을 어찌할 수 없는 현실 이였다.
한점 구름도 없고 맑은 날! 그렇게 버스는 시원스럽게 성삼재를 향하여 질주하고
있었고 20여분을 달리고 있는데.......
아∼ 아∼ 아∼
아불사, 이게 왠 말이란 말인가!
안개비가 내리기 시작 터만 반대쪽 능선에 들어서니 차량 브러시가 급하게 움직
이기 시작한다. 1,2,3분! 밖은 바람과 안개비가 한치 앞을 볼 수 없으리 만치 온통
칠흙 이였다. 40여분을 달려 성삼재에 도착하니 06:30분, 안개비에 바람은 무진 불
어대기 시작했고 차에서 내린 등산객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 봉착하게 되었고
기온까지 싸늘하여 몸의 냉기를 느끼는 순간 불안한 예감까지 들었다. 준비한 겨울
남방과 우비를 입히고 마음을 갇듬고 초입에 들어서 드디어 산행은 시작되었다.
작년 8월에 노고단을 거처 임걸령에 피아골로 내려온 경험이 있어 길은 익었고
비를 맞으며 시작되면서 줄줄이 등산객들이 이어져 올라 왔다. 무리지어 가는이
혼자 가는이 혼자서 가는이 - 선천성 소아마비,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 한 분
이 유독 시야에 들어와 누구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걷는 모습이 초연하였다.
지리산 10경중의 하나인 노고단 운해를 지난해는 너무도 장관으로 볼 수 있어
작은몸 한 장의 사진이 식탁 유리속에서 항상 반기고 있는데 올해는 그 장관을
볼 수 없음에 너무도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었다. 온통 안개비와 비구름으로 시야
는 막혀 자연경관을 볼 수 가 없었다
많은 비는 아니지만 그칠 줄 모르고 계속 내렸고 50분을 걸어 07:29, 노고단산장
에 도착하여 잠시 여정을 풀었다. 노고산장에는 10여명의 학생과 30여명의 등산객
들이 아침준비를 하고 있었고 한산한 분위기였다.
지난해 8월에는 텐트를 친 야영객 들이 온통 인산인해였는데 금년부터 야영이 금지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정해진 야영장외에 모든 산장에서의 야영은,
10여분을 걸어 노고단에 도착하니 바람은 더더욱 거세게 우리를 때렸고 10년 만에
개방하였지만 400명으로 입산객을 제한하는 노고단 정상은 시간이 맞지 않아서 뒤
로 하고는 뱀사골을 향해 계속 걸음을 재촉하였다. 노고단을 넘으니 반야봉 쪽에서
밀려오는 구름의 장관을 보면서 산행은 계속되었고
내리는 비는 우비를 벗을 기회를 주지 않아 후끈거리는 기온은 온몸을 너무도
짜증나게 하였다.
연하천을 16시 이전에 도착해야만 벽소령을 향해 출발하여도 무방 할 듯 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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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옹님의 말씀에 걷고 또 걷기를 ....
임걸령을 지나니 우비를 벗을 만큼 비는 그치고 10:25 반야봉 입구에 도착하였지
만 반야봉에 오르면 시간상 벽소령에 도착할 수 없는 상황이라 당초 계획에 두지
를 않았기에 지나칠 수 밖 에는 없었다.
반야봉 초입은 많은 사람이 쉬고 있었고 배낭을 놓고는 산에 오른 듯 배낭은 있고
사람은 없는 것이 몇게 보였다.(배낭을 놓고 반야봉에 오른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도의 경계라는 삼도봉에 도착하니 날씨는 제법 햇살을 들어냈고 많은 사람
들이 기념촬영은 물론 휴식을 취하면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날이 개인 후라 지나
온 반야봉이 저쪽에 웅장하고 거대하게 한눈에 들어와 장관이었다.
삼도봉에서 좌, 우로 펼쳐진 지리의 경관은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 만치 아름다웠
고 펼쳐진 자연을 놓고 기념촬영을 하고는 벽소령을 향한 장구한 산행은 지속되어
지만 끝이 보이지를 않았다.
잠깐 잠깐 휴식을 취하면서 행동식을 먹었고(오이,사과,쵸크릿) 벽소령 산장을
향한 장구한 산행은 지속되었으며 한참을 가다보니 평평한 대지가 보여 지면서
사람들이 옹기종기... 화개재 였다. 11:30분에서야 화개재에 도착하였다.
화개재는 많은 등산객들이 휴식하고 있는가 하면 코펠을 풀어 라면, 밥을 짖고
있었고 담소하고 있었으며 기후, 바람은 여전 그칠 줄을 몰랐다. 우리도 아침에
싸놓은 도시락을 풀어 식사를 하고는 잠시 휴식을 취하는데 작은 놈 또래의 아들
을 동행한 한 부자가 옆자리에 자리를 했다.
뱀사골까지 가야 물을 길 수 있기에 식수로 떡국을 끓여 먹을 모양이다. 피곤
한 기색이 비쳐졌고 우리처럼 아침에 노고단에서 올라 종주계획을 잡은 듯 싶었다.
휴식의 마무리를 하고 12:50분 또다시 걷기를 시작하여 토끼봉에 13:50 도착하
니 운무는 완전히 걷히고 웅대한 지리산자락이 눈에 들어왔다.
정녕! 장관 이였다. 장관.....
토끼봉에서 잠시 쉬는 동안 두 아들은 잠자리 잡느라 정신이 없었고 많은 사람
휴식을 취하면서 발아래 펼쳐진 지리의 웅장함을 감상하고 있었으며 나 또한
지금 것 그 어느 산에서도 느낄 수 없었던 감정이 뭉클하게 가슴에 와 닫다. 휴식
도 잠시, 또다시 출발하면서 벽소령만을 머리에 두었다.
7살 자리는 저만큼 가서 엄마가 제일 실어하는 계단이 나오면 "엄마 계단 시작"
또 저 만큼 가서 계단이 끝나면 "계단 끝" 그 아무런 어려움 없이 산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처가 많이 힘이 들어 했다.
화개재에서 뵈었던 부자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산행을 계속하여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니 15:50 ! 진정 버거운 산행은 지속 되였다.
작은놈 또래를 동반한 부자는 너무도 힘들어 보였고 작은놈 또래 아들은 다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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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 쥐가 나는지 아버지가 다리를 주무르고 비상 방법을 쓰고 있는 듯 하였다.
우리도 너무 힘들어 연하천에서 1박을 할까 했는데 자리도 비좁은 듯 했고 더구나
예약을 하지 않은 상태라서 망설일 필요도 없이 자리를 박차고 10분 후 16:00에
다시 벽소령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고자 연하천샘에서 식수를 채우고는 떠나기를
시작 하였지만 화개재에서 처음 만난 작은놈 또래의 애가 너무도 힘들어 하는 것
것 같아 안타까웠다. 아버지의 안색도 버거운 듯 싶었지만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우리는 먼저 일어나 인사를 하고는 벽소령을 향할 수 밖에 없었다,
연하천을 떠나 벽소령을 향한지 1시간 30 ! 육신의 힘이 빠지고 자신의 몸이 점
점 지쳐가고 있음을 감지하였지만 다행히도 두 아들은 지친 기색 없이 잘도 걸어
주었지만 반면 처는 처대로 지쳐있어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나는 나대로 버거운
산행은 지속되었다.
오고가며 만나는 산행인들이 작은놈에게 한마디씩 던지는 말씀 "너 몇 살이냐?"
"7살 이예요" "참으로 대단하구나!" 한마디 한마디의 칭찬에 더욱 힘을 얻은 막
내는 기고만장(?) 지친 기색 없이 선두에서 너무도 고마운 작은놈 이였다. 날은
어두워오고 있고 벽소령은 얼마를 가야하는지 보이지 않고 최상의 오리무중 이
였다. 시간은 18:00을 넘고 참으로 암담하였다. 허지만 중도에 자리할 수 없는 상
황이여서 어렵게 어렵게 내리막길을 쉴 겨를도 없이 걷고 또 걸어 도착한 벽소령!
어둠과 함께 밀려온 안개가 자욱한 벽소령에 도착하니 18:20이였다. 자욱한 저녁
안개속에 비춰지는 벽소령 산장 앞은 많은 사람들이 즐비하였고 산장의 저녁풍경
은 안개와 함께 어우러진 한 폭의 동양화로 표현한다면!.
먼저, 예약한 방을 배정 받고 산장에서의 준수사항을 가볍게 듣고 밖으로 나와
버거운 몸이 였지만 식솔들을 쨍기고자 50M 쯤 내려가는 샘터에서 물을 길어와
밥보다 삼분 짜장 라면을 먹겠다는 두 아들의 의양 대로 저녁을 준비하여 먹이고는
처와 나는 라면을 끓여 요기를 한 후 뜨거운 커피한잔을 하니 지친 몸이 풀리는
듯 피로가 달아 나는 듯 싶었다.
이것이 산행의 맛이자 자연과 함께 호흡하는 최고의 진미가 아닐런지!..힘들게 걸
어온 길이였지만 저녁식사는 너무도 허기진 배를 달랬기 에는 최고의 만찬 이였다.
인간이 자연과 함께 살아 가야할 이유이고 자연을 아껴야할 의무, 책무가 아닌가
생각을 해보면서 오늘 걸어온 12시간의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연을 훼손, 아끼지 않은 현실에 가슴아파했다. 많은 사람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지만 또 많은 사람이 쓰레기를 버려 훼손 되어 가는 대자연들.........
국물, 켄디 껍질등 쓰레기 하나 버려지지 않도록 세심한 마음을 기울였고 두 아들들
에게도 단단한 말로 일렀다. 항상 밖에 나가면 일상 해오던 교육 이였지만..........
시간이 지나도 여전 안개가 자욱하여 주변 경관을 볼 수는 없었고 밤이 깊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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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바람과 가랑비 까지 내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휴식 후 짐을 대강 정리하고는 분리된 여자방의 처에게 가지고간 침낭을 건네
주고 우리 3부자는 기 배정된 산장의 자리에서 휴식을 취하였다. 산장은 말끔하
였고 2층에 자리한 우리는 2,000원에 모포 2장을 임대해 깔고 덮어 깊은 꿈의 나
라로 향하였다. 오늘의 산행을 더듬어 기억하고 내일의 또 다른 멋진 산행을 꿈
꾸면서.....
8월 13일(비-비-비)
잠시 잠을 잔는 둥 만 듯, 샌 바람소리에 눈을 뜨니 새벽 2시를 가르친다. 무었
보다도 궁금한 것은 날씨, 날씨였기에 잠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았지만
여전 안개와 가랑비는 내리고 있었고 세찬 바람까지 불어와 을씨년 스러운 겨울
날씨를 연상케 하였고 아침이면 개이겠지 하는 암담한 기대를 걸고는 다시 들어
와 자리에 누었으나 잠은 도무지 오질 않는다.
생활의 버거운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단하나 천왕봉에서의 소원하나 심고자
떠난 일이 였지만 이것저것 풀리지 않는 많은 것들이 산장의 천장 대들보를 맴돌
며 헤메이고 있음은 인간이기 때문이라는 동물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결론에 눈
을 감고 잠을 청하지만 견딜 수 없는 불면은 계속되었다.
새벽 4시! 두시간을 헤메이다 아침 취사준비물을 자는 이의 피해를 주지 않고자
최소한의 소리로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오니 많은 사람들이 아침을 먹고, 취사를
하고 또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샘터로가 물을 길고 취사장 한쪽에 자리를 하고는 밥을 하기 시작하니 부산에서
올라온 어제 뵌 일행들이 옆자리에 자리해 밥을 짖고 국을 끓이며 어제의 산행
이야기를 나누며 포기하고 싶었다는 등 담소하고 있었다.
아침식사 준비를 끝내고 6시, 좀더 잠을 자게 두고 싶었지만 오늘의 산행을 위해
곤하게 자는 처와 두 아들을 깨워 짐을 챙겨 취사장으로 내려왔다.
아침식사는 밥과 김치, 멸치 볶음, 깻잎, 김으로 어제와 다름없이 식사를 하였고
점심에 먹을 밥을 프라스틱 도시락에 담고 자리를 정리, 휴지설거지와 다음 사람
을 위하여 깨끗이 치워놓고는 한쪽으로 비겨주었고 산행을 위해 휴식을 하였다.
08:40 안개낀 벽소령산장 앞에서 식구들과 사진을 몇 장 찍고는 09:00에 오늘의
목적지인 장터목으로 향하기 시작하였다.
안개 자욱한 장터목 산장을 못내 아쉬워 뒤로하면서.....................................................
산자락의 기온은 여전 차거워 겨울 남방을 입히고 산행을 20여분쯤 하다보니
작은놈 또래의 부자가 먼저 출발해 저만큼에서 덧옷을 벗고 있었고 잠시 휴식
중이였다. 어제의 어려웠던 기색은 보이지 않았고 우리는 서로 인사를 하고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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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을 하기 시작하였다.
안개비는 계속 내리고 있고 작은놈은 앞질러 가고 있었고 큰놈은 그 뒤를 따
는 듯 산행은 계속 되었다. 처의 어려워하는 모습에 나는 뒤에서 힘을 실어 주었
지만 자꾸만 보행은 늦어지고 시간은 지체되기 시작하였다. 순간 앞서가던 작은
놈이 보이지 않고 큰놈만 보여 불안한 마음에 큰놈보고 동생을 찾아 앞질러 가서
아버지가 갈 때까지 쉬고 있으라 전했다.
그러나 앞서가던 큰놈이 "아버지? 휘조가 보이 않아요!"하고 소리를 지른다.
아물사 ! 큰소리로 몇 번을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어 불안한 생각에 또다시 더욱
큰소리로 불렀지만 대답이 없다. 함께 동행하던 우영이 아빠가 먼저 가본다며
앞질러 뛰기 시작하였다. 없어진 7살 자리 자식을 찾기 위한............. 방심과 함께
순간 일어난 과정이었지만 우영이 아빠와 나는 앞질러 뛰면서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다. 덕평 샘터를 지나 5분을 뛰어 언덕을 넘어서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불안
한 마음은 온통 머리를 뒤흔든다. 혼자서 산행중인 앞선 아가씨에게 물어보았지
만 보지 못했다는 소식을 접하니 더욱 불안한 마음이 앞선다. 또다시 뛰기를
시작하여 온힘을 다하여 휘조야 ! 휘조야 ! 부러 보았다, 그때서야 희미한 목소리
로 "아버지 왜요?"라는 대답이 들려 왔다. 참으로, 참으로 어찌할 꼬.....................
한시름을 놓고는 아버지 갈 때까지 꼼짝 말고 그 곳에 있으라 해놓고는 한대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여 길게 빨아들인 후 허공을 향해 품어 버렸다.
큼 놈을 앞질러 세워놓고 뒤 처진 처를 기다려 함께 동행하고는 우영이 아빠에게
말없는 고맙움을 느끼며 내려가니 산행중인 젊은 친구 두 분이 어린놈이 산행을
하니 귀여워 함께간 것이 우리와 거리 차이가 너무 벌어져 있었던 것이다. 항상
뭇사람의 귀여움을 받았고 누구나 잘 따르는 작은놈 이지만 4년 산행중 이처럼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처음 있는 일 이였다. 산행 중 언제나 앞질러 가는 경우는
다반사였지만 안개 자욱한 비 내리는 지리의 산중에서 그토록 겁 없이 뒤돌아
보지 않고 무작정 앞 찌른 경우는........ 어린이를 동반한 한 경험 이였다.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는 우영이 아빠가 앞장을 서고 작은 놈, 우영이, 큰 놈
그리고 처 내가 대열을 정리하여 산행을 계속 하였다.
우영이도 또래가 있어서 그런지 서로들 끝말 잇기등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지치는 기색 없이 산행은 계속 되였고 비는 여전 우비를 벗도록 하여 주지는 않
았다. 너무도 야속한 날씨에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 없었고 눈앞에 보이는 지리
의 경관 ! 장관을 볼 수 없음에.. 자식들에게 자연의 웅장함을 보여주고 싶었거늘
지리의 태양은 우리 가족에게 너무도 위에 있는가 도무지 보여 주지를 않는다.
앞을 볼 수 없는 안개 그리고 비를 맞으며 걷고 걷기를 4시간 세석평전초입에
들어 산장에 도착하니 13:30분 바람까지 동반한 날씨는 짜증, 왕짜증 이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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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석 산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산행 중 허기진 배, 끼니를 챙기느라 분비고 있었다
부산에서 올라온 부부동행 일행은 벌써 중식을 먹고는 우리를 보자 자리를 비켜
주면서 장터목에서 보자고 말을 건네고는 또 떠난다.
우영이네와 우리는 떡국과 라면을 끓여서 아침에 쌓놓은 도시락 밥을 말아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다보니 시간은 14:30분 세석을 떠나 장터목을 향하기 시작하였다.
안개비 내리는 세석평전은 야생화로 가득하였고 사진으로 기록전시 하여놓은
자연박물관 그 자체였다. 많은 이의 손과 정성이 담김에 감사를 드리고 30분을
걸어 오르니 촛대봉(15:00)에 도착 잠시 사진촬영과 휴식을 취하였다.
촛대봉에서 삼십여분의 시간을 보내고는 15:30 장터목을 향하여 우리는 또다시
걷기를 계속하였고 우영이네 가족를 작은 놈, 큰 놈이 따랐고 처의 버거운 산행에
거리는 자꾸 처지고 내리는 비는 여전하였다.
안개낀 산야, 장터목은 도무지 보이지 않았고 가도 가도 걷고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은 듯 지리한 산행만이 계속될 다름 이였다.
그렇게 걷기를 2시간 ! 먼저간 작은놈이 안개속에서 소리를 지른다. 엄마 다왔다
는 것이 였다. 8시간의 산행 끝에 도착한 장터목은 6년 전에 보았던 모습은 간데
없고 새로이 지은 산장으로 변신하여 우리를 반겨주었고 비 내리는 산장은 인산
인해 였다. 예약된 방을 확인하다보니 대기자가 무려 250명이나 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예약 못한 우영이네가 문제였다. 산장 안은 산장 안대로 취사장은 더욱
발뒤될 뜸조차 없었고 내리는 비로 인하여 너무도 혼잡스런 장터목 이였다.
어째든 허기진 배를 먼저 채우고 잠자리는 어떻게 해보자 고는 마음을 먹고
컵 라면 두 개를 일단 산장에서 사가지고 취사장에 한참을 기다려 우영이와 두놈
의 끼니를 채워주고 우영이 아빠와 우리는 라면을 끓여 간단한 요기로 저녁을
대치하였다. 발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너무도 많은 사람으로 가득한 취사장은
다음 사람을 배려하지 않은 듯했고 비가 오는 연유로 더욱 비좁으며 지저분하게
자신들이 이용한 자리는 그대로 남은 곳도 있었다.
산장안의 통로는 배정 받지 못한 대기자들로 가득하였고 통행조차하기 힘이들을
정도였다. 우기 속에서의 산행에 너무도 지친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2층 한쪽에 배정을 받고는 우영이와 두 놈을 쉬게끔 하였지만 우영이
아빠가 걱정이 되었다. 대기자 명단에 올리기는 하였다지만 250명의 인원이 어찌
밤을 지날지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용인원의 두 배, 오가는 길목은 모두들 자리를 펴고 누워 있었고 화장실 나가기 초차 힘들 정도로 발 디딜틈이 없었다.
처는 어제와 다름없이 침낭을 주고 우리 넷이는 모포 두 장을 임대하여 자리에
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장소이니 만큼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앞서야 함
에도 도덕은 물 건너 간 듯 자기 멋대로 인생의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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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 산을 찾는 이는 도덕과 양심과 배려 그리고 덕목을 실천하는 인격체로
사회의 무리속에 살아가기를 기대하고 나름의 노력과 순수한 자연과 호흡하길...
우영이 아빠도 통로 한쪽에 자리를 하였고 우리는 그렇게 장터목에서의 밤을 보
냈다. 제발 내일은 비가 그치어 솟아오르는 붉은 태양의 빛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대자연을 볼 수 있으리라 큰 기대로 잠을 청하였다. 지리산에서의 두 번째 밤을..
8월 14일 흐림(비-흐림 -비)
너무도 피곤하였기에 잠을 자는 듯 싶었으나 밤이 새도록 떠드는 사람이 있는
가하면 아침 일찍 서두르는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깨어보니 04:30분이
되어 있었고 벌써 많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고 나가 자리는 비워져 있었고 나는
밖으로 나가보니 여전 우비를 입어야할 만큼 안개비는 내리고 있었다.
해돋이! 지리산에서의 해돋이!
그것은 기우였는가? 10대가 공을 올려야 볼 수 있다는 지리의 해돋이는 당초 큰기
대를 가지지 말았어야 했는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우영이 아빠에게 함께 갈거나 하였지만 아침을 하여 먹고는
천천히 오르리라 한다. 나 또한 망설여 졌다. 그러나 이곳에 온 목적이 무었이
였나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한다..
당초 법계사 방향으로 하산계획을 잡았으나 계획을 변경하고 간식거리를 간단히
챙기고는 배낭을 놓고 가기로 마음을 먹고는 처와 아이들을 깨워 서두르기 시작
했다. 늦은 감은 있었지만 우비를 입히고 후레쉬를 챙기고 05:30에서야 천왕봉을
향했다.
큰 놈,작은 놈은 문제가 없었지만 산행 시작부터 처의 힘들어 하는 모습에 나역
시 힘을 낼 수 없으리 만큼 버거웠고 비까지 내리니 더더욱 산행은 힘이 들었고 무거운 발걸음을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한 걸음은 중단할 수는 없었다. 걸음을
육중하게 내디디면서 천왕, 천왕봉을 향하였다. 큰놈은 뒤돌아 볼 것도 없이 앞질
러 질주하였고 작은 놈과 우리는 천천히 오르기를 20여분! 제석봉 고사목을 가로
지르는 운무는 장관 이였지만 50m이상을 볼 수 없었고 일찍 서두른 많은 사람들
이 정상을 거처 하산을 하고있었다.
해돋이는 못 본 듯 하였고 천왕봉에 오른 그 자체만으로 만족하는 듯 했다. 안개
속만을 가까이 하면서 한시간을 오르니 하늘로 통한다는 통천문이 눈앞에 보였고
부산의 일행 분 들은 천왕봉을 거처 내려온 듯 통천문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
고 작은놈을 보더니만 또 한마디 건네는 것 이였다. "장하다 ! 지리산 종주를 해
냈구나, 지금 것 최고로 어린 나이의 종주 기록이 될 것 같구나!"
통천문을 통과하여 앞을 보니 여전 안개만이 가득하였고 10여분 오르니 드디어
- 9 -
천왕봉이 뿌옇게 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였다. 06 : 30 !
천왕봉! 천왕봉!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 지리산 천왕봉!
천왕봉의 돌 팻말을 보는 순간, 두 눈이 희미해진다. 어느새 눈물이 흐를 듯...
정영 ! 내 얼마나 계획하고, 고대하고, 기리고 두려워하며 또한 빗속에 걸어온
2박 3일이 였는가 ? 큰 놈,작은 몸의 그 어려움과 70kg을 육박하는 아내는 또... 우리는 붉은 해를 보지는 못했지만 동쪽을 향하여 잠시 소망을 빌었다. 어머니
의 건강과.........또 서남쪽 어머니 계신 곳을 향해.............................................................
서두른 많은 사람들은 벌써 내려갔고 몇몇의 사람들 만이 기념 촬영을 하면서
못내 해를 볼 수 없음에 아쉬워하는 듯 했다.
몇 장의 기념 촬영을 하고는 정상을 조금 내려와 요기를 하는데 우영이네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오른다던 계획을 뒤로하고 올라온 듯 했다. 우영이
와 우리 애들은 받가워 하였고 정상에 올라갔다 오시라 하고 얼마 후 우리는 또
다시 우영이네 가족과 합류하여 여유롭게 하산(07:10)하기 시작하였다.
내려올수록 안개는 걷히고 웅장한 지리산 자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제석봉에 오니 아침 안개비에 가려졌던 고사목의 장관이 눈앞에 펼쳐졌다. 저멀
리까지 지리의 모습은 가슴으로 닫는 것이 였다.
첫날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오르면서 보았던 다리를 절면서 오르던 그분 또한
제석봉을 오르고 있었다. 불편한 몸이 였지만 끝내 인내하면서 오르는 모습은
자신과의 싸움 그 자체였으리라. 자신과의 싸움 없이 헤처 나갈 수 없은 현실에.
오랜 만에 해를 보고, 지리를 보면서 장터목 산장에 도착하니 08:50, 우리는
우영이네 가족과 아침을 떡국, 햇반,라면으로 요기를 하였다. 씨주 한잔을 하고싶
었으나 준비했던 팩씨주 3병은 화개재와 세석에서 동이나 너무 아쉬웠다. 다음에
는 한 5병은 준비를 해야 할거나 보다.
취사장에서 문을 여닫는 큰소리가 들려 보니 너무도 지저분하게 쓴 자리 때문
에 청소를 하시는 분이 화가 단단히 나있는 듯 보였다.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다.
많은 등산객들이 밀려오기 시작했고 안개비속에 넘어온 능선이 구비 구비 눈앞에
펼쳐져 아름다운 지리의 모습을 처음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우영이네와 식사후 휴식 그리고 기념 촬영을 하고는 우리는 중산리로, 백무동
으로 갈 길이 다르기에 만남의 기쁨보다 헤어지는 깊은 골을 안고 이별의 인사를
하고는 등을 마주한 체 10:30 하산의 길을 재촉하기 시작하였다.
장터목의 밝은 햇빛도 잠시 1시간의 급경사길을 내려 오다보니 날씨은 또다시
어두어 지며 비가내리기 시작하였다. 진정 ! 지리, 지리하게 내리는 비는 너무도
야속하기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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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경사 돌계단에 비, 그러나 하산의 길은 지리종주의 산행을 마무리 하고 있다
는 마음의 안정에 심리적인 부담은 전혀 느낄 수는 없었기에 평온하였다.
유암폭포를 지나고, 칼바위를 지나면서도 계속 우비를 벗을 여유는 주지 않았고
중산리에 도착하니 15:30, 억수 같이 솟아지는 빗줄기에 관리소에서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라는 안내방송이 들려왔다. 휴... 휴... 휴.........................................................
이렇게 우리는 2박 3일의 지리종주를 끝내고 근처 식당에 들어가 막걸리 한잔
과 음료수로 잔을 부디치며 서로를 수고하였다 한마디 말과 축배의 잔을 힘차게
기우릴 수 있었다.
(끝내고)
사람은 무었으로 사는가 !
혼자서는 결코 살아갈 수 없는 본지 인간사이기에 기다리지 않아도 찾아 온다
는 봄의 따뜻한 대자연의 섭리(순리)를 따르고 나보다는 우리 모두라는 생활의
일면 일면이 이 지상의 구석구석에서 이루어 질 때 정녕 ! 아름다운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여 봅니다.
산이 있어 산을 찾지만 그 산속에 아무도 없는 것은 또 얼마나 황량하랴. 산장 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어 좋고 반가웁고 자연을 지키고 가꾸고자 하는 이가 있어
우리의 생활은 자연과 함께 호흡하면서 꾸려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나름의 마음
을 접어 봅니다.
산(자연)을 사랑하는 모든 분들게 감사드립니다.
특히 종주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지리산 오 선생님, 박용희 님을 비롯하여
그리고 2박 3일간 지나쳤지만 오고가면서 만나 힘을 실어준 모든 분들, 이산의
가족처럼 헤여질 수 밖에 없었으나 짧은 만남으로 정이 듬북 들은 우영이 아빠께
도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모두모두 행복하세요.
2001. 9. 9 仁川에서 兪昌鉉 드림
※ 추신 : 쌀 종이컵 20개(5씩분), 햇반 6개, 3분짜장 1개, 진라면 4개, 코펠, 버너
김치, 깻잎, 볶은 멸치(집에서 만든 것), 소금 김(가게), 고구마5개, 컵 신라면 4개.
컵 짜장 라면 4개, 오이 8개, 과일 캔3개(복숭아2,포도1), 사과 6개, 쵸코 파이1박스,
캔디 및 알사탕2봉, 과자 4봉, 후레쉬 2개, 우비 4개(상의3, 판쵸1),침낭1개, 여벌옷
1벌씩(4벌), 양말2씩, 켤래 씩, 비상약품(소화재,지사재,붕대,소독약등), 물파스(통증
제거 스프레이), 대형휴지1타,모자, 썬그라스 및 텐트(2인용 : 종주 후 계곡 야영을
생각하였으나 활용하지 못함), 겨울 모직 남방 3개, 긴 팔(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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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것은 장시간을 걸어야 하는 활력소가 되지만 고지대의 기온은 생각 보다
춥게 피부에 와 닫습니다. 꼭 투툼한 와기는 하나정도 챙기시길 바랍니다.
저는 배낭의 무게 때문에 무진 고심을 하여 줄인다고 줄였지만 쇠 젓가락 보다
대나무 젓가락이 가벼울 것 같아 그것만 넣고 숟 가락은 쇠이기에 당초 넣지를
않아 끼니때 마다 식솔들의 구박을 감내해야 하였답니다. 프라스틱도 있거늘......
* 산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지리산을 다녀온 이미지는 누구나 다르겠
지만 항상, 지리를 그리는 마음이 크기에.. 미력한 글을 올리면서 끝까지
읽어 주심에 감사드림니다. 지난 해(2001년 여름 휴가)다녀 왔지만 정서를하지 못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