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장. 윌리엄 쿠퍼(W. Cowper. 1731-1800년) – 검은 구름 우리를 뒤덮을지라도
찬송가 288장. “샘물과 같은 보혈은”을 작사
[1] 윌리엄 쿠퍼의 생애
① 1731년 11월 15일. 약 1,500명 정도 주민이 사는 런던 부근의 작은 마을인 그레이트 버컴스테드에서 출생.
존 웨슬리, 조지 휫필드와 같은 시대를 살았으나 웨슬리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보다 휫필드의 칼빈주의 신학을 받아들인다. 후에 존 뉴턴에게 크게 영향 받았다.
② 6살. 그의 어머니가 별세함
그의 아버지는 그를 베드퍼드셔의 피트먼 기숙학교에 보낸다. 그에게는 비극적인 시간이었다.
③ 10-17세. 웨스트민스터 스쿨에 다니며 프랑스어, 라틴어, 헬라어를 배운다.
④ 1749년. 그의 아버지의 일방적인 계획으로 법률가가 될 목적으로 사무 변호사에게 도제 교육을 받는다.
⑤ 1752년. 21살. 처음으로 심각한 우울증에 빠진다. 한 번에 몇 주 동안 창 밖만 물끄러미 바라볼 정도다. 그의 힘겨운 4번의 싸움 가운데 첫 번째다. 아직 그리스도인은 아니었다. “밤낮으로 나는 두려움 속에서 잠이 들고 절망 속에서 깨어나며 괴로움을 겪었다.”고 썼다. 조지 허버트의 시에서 도움을 얻으 우울증을 극복한다.
⑥ 1749-1756년. 사촌인 시어도라와 사랑에 빠져 주말마다 그녀의 집에 방문. 약혼했으나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로 결혼하지 못한다. 1756년 이후 다시는 서로 만나지 못한다. 시어도라는 평생 독신으로 지내면서 쿠퍼가 궁핍할 때마다 익명으로 돈을 보내기도 하고, 정기적으로 용돈을 보내주기도 하였다.
⑦ 1759년. 28살. 아버지의 영향력으로 런던의 파산 선고 위원으로 임명되고 4년 후에는 의회 서기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나 큰 두려움을 그에게 안겨주었다. 쿠퍼는 인사 청문회를 앞두고 신경쇠약으로 세 번 자살 시도, 결국 정신 병원에 수용된다. 청문회는 취소된다.
⑦ 1763년 12월. 세 번의 자살을 시도했던 쿠퍼는 결국 세인트 올번스 정신 병원에 수용된다. 그때 58세의 너대니얼 코튼 박사의 돌봄을 받는다. 코튼은 복음주의 신자였고, 하나님과 복음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쿠퍼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그에게 소망을 심어주셨다. 병원에 머문 지 6개월이나 지나서야 벤치에 놓여 있는 성경 책 한 권을 발견한다.
“정원 벤치에 성경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나는 요한복음 11장을 펴들었다. 나사로가 되살아나는 장면이었다. 나는 우리 주님의 행동 속에서 비참한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그분의 놀라운 자비와 은혜와 인자와 긍휼을 보고 그 계시의 말씀에 그만 눈물을 흘릴 뻔했다.”
다시 성경을 펼쳐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성경을 펼친 순간 그이 눈에 들어온 말씀은 로마서 3장 25절이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그 즉시로 나는 이 말씀을 믿을 힘을 얻었다. 그러자 의의 태양에서 나오는 찬란한 광채가 나를 비추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이루신 속죄가 보족함이 없고 내 죄가 그리스도의 피로 모두 용서되었으며 그리스도가 이루신 칭의가 충만하고 완전함을 깨달았다. 한순간에 나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다.”
쿠퍼는 세인트 올번스 병원과 코튼 박사를 너무 사랑하게 된 나무지 회심 후에도 12개월을 더 병원에 머물렀다.
⑧ 1765년 6월. 쿠퍼는 병원을 떠나 헌팅던의 언윈 씨 일가의 집으로 이사를 한다. 쿠퍼는 남은 평생을 메리 언윈의 집에서 살았다. 메리가 그를 잘 돌보아주었고, 쿠퍼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관계를 맺은 존 뉴턴과의 우정이 이 시기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존 뉴턴은 언윈 씨 일가의 집에서 멀지 않은 올니 교회의 목사보였다. 그도 여섯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뉴턴은 1764년 이래로 올니에서 사역했다.(1780년까지) 13년 동안 뉴턴은 쿠퍼에게 목사이자 조언자이자 친구였다. 뉴턴은 쿠퍼가 우울하고 은둔적인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심방 사역이 있을 때마다 가능한 자주 쿠퍼를 함께 데리고 다녔다. 1769년, 뉴턴은 쿠퍼와 힘을 합쳐 교회에서 부를 찬송가 만드는 일을 구상했다. 뉴턴은 쿠퍼의 시적인 재능을 이 일에 발휘하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훗날 뉴턴은 약 200곡에 달하는 찬송가를 작사했고, 쿠퍼는 68곡의 찬송가를 썼다. 쿠퍼의 신격쇠약은 언제나 1월에 가장 악화되었다. 1763년 이후로 거의 10년마다 가장 악화된 상태로 되풀이 되었다. 쿠퍼는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고 그 때마다 하나님은 섭리로 그의 자살을 막으셨다. 뉴턴은 그 동안 내내 쿠퍼의 곁에 있었고 심지어 쿠퍼를 홀로 남겨 두면 자살 시도를 할까봐 휴가를 포기해가며 그의 곁을 지킨 적도 있었다. 1780년 뉴턴은 올니에서 런던 롬바드 가의 새 목회지로 떠난다.
⑨ 1782년. 51살. 첫 시집이 나온다. 3년 후 시집 『일』이 나온다. 그의 시들은 “신앙부흥운동의 이념을 각계각층의 지식인들에게 널리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를 했다. 1786년, 쿠퍼는 네 번째로 깊은 우울증에 빠져 다시 자살을 시도했지만 다행히 미수에 그치고 만다.
⑩ 1799년. 3월 20일. “버림받은 사람”이라는 마지막 시를 쓴 뒤,
1800년 깊은 절망감 속에서 눈을 감았다. 3월, 자기 집을 찾아온 러벅 박사에게 쿠퍼는 “지금 나는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을 느낍니다.”고 말한다. 그는 4월 24일, 오후에 눈을 감았다.
[2] 윌리엄 쿠퍼의 우울함의 근원
그의 불가항력적이고 고질적인 우울증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6살 때 어머니는 여읜 고통과 정신적 충격이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59세 되던 해인 1790년에 쿠퍼는 우편으로 어머니의 초상화를 받는데 그 이후로 오랫동안 사무치는 그리움에 휩싸여 지낸다. 또 한 가지는 기숙사와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일 것이다. 그는 기숙사를 혐오했고,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3] 월리엄 쿠퍼의 생애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① 낙심의 어두운 때에도 결코 자포자기에 빠지지 않는 태도를 길러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는 것
② 자녀를 깊이 사랑하고, 그 사랑을 자녀에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 뉴턴도 6살 때 어머니를 잃었지만 그의 곁에는 늘 아버지가 있었다. 쿠퍼는 25세 때 돌아가신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고 단 한 편의 시도 아버지에 대해서 쓰지 않는다.
③ 주님이 우리 가운데 존 뉴턴 같은 이들을 많이 일으켜 주셔서 우리의 교회에 기쁨을 주시고 성도들 가운데 윌리엄 쿠퍼처럼 절망에 빠진 이들을 소생시켜 주기를 소망한다.
④ 자기 자신을 살피고 분석하는데 지나치게 몰두하지 말 것. 우리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가치 있는 실재에 초점을 맞추어 지성을 사용하는 것이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 우리의 내적인 상태에 대해 너무 깊이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 우울증을 치료할 수 있는 한 가지 좋은 방법은 세상 속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클라이드 킬비는 다음과 같이 결심했다고 한다.
“나는 눈을 뜨고 귀를 열 것이다. 매일 한 번씩 나무나 꽃이나 구름이나 사람을 단순히 응시할 것이다. 그 순간 나는 그것들이 무엇인가를 묻는 일에는 아무 관심도 두지 않고 단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기뻐할 것이다. 루이스가 말한바 그것들의 ‘신령하고, 신비롭고, 두렵고 황홀한’ 존재의 신비를 기쁜 마음으로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다.”
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정신 건강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 사랑의 길이 필요
⑦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다른 이들의 삶에 유익이 되도록 사용하셨다는 사실. 시편 40편 1-3절,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다윗은 꽤 오랫동안 곤경에 처해 있었으면서도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하나님께서 구원하셨다. 그것은 큰 도움을 준다.
⑧ 낙심한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자비에 대해 자주 말해주자. 그들에게 예수의 보혈을 거듭거듭 보여주자. 그것이 1764년 쿠퍼를 회심시킨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