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의 본질은 예수님. 맹세는 동의어가 언약이다. 두 종류의 약속이 있다. 하나님의 맹세가 있고 인간의 맹세가 있는데 하나님의 맹세는 언약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지고, 거기에 인간의 욕심과 뜻을 섞는 변질을 보이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내 이름에 권위가 없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자기의 권위를 세우려 하는 것은 다 거짓말이다.
하나님의 약속만이 진짜다. 맹세는 9계명에 연관된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찌니라”(출애굽기 20:16) 동일한 말씀이,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레위기 19:12) 맹세는 약속이다. 약속은 하나님밖에 없다. 그런데 인간의 약속을 섞어서 변질시킨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데 자기의 뜻과 욕심이 들어가서 하나님의 약속인양, 속여선 안 된다. 우리는 약속을 지킬 수 없는 무능한 죄인이고 병자이다.
‘맹세하지 말라’는 우리가 약속의 일부가 돼서는 안 된다는 것. 예수님만이 약속이다. 인간은 약속이 될 수 없다. 자기 말이 거짓이고 신용을 얻을 수 없으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한다고 하나님의 권위를 슬쩍 빌려와서 호가호위한다. 믿음이 들어갈 자리에 우리는 맹세를 한다. 믿음이란 전적인 신뢰, 전적인 순종, 하나님 우선이다.
베드로도 기도는 안 하고, ‘여기 있는 사람이 다 주를 버린다고 할지라도 나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라는 것이 ‘맹세하지 말라’에 다 걸린다. 믿음으로 반응해야 할 때 맹세로 반응하는 것은 가짜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권위가 없으니까 대부분 맹세한다. 두렵고 조급하니까 믿음으로 반응하지 않고 전화하고 사람 만나고 선동한다. ‘맹세하지 말라. 너는 약속이 될 수 없다’ 그 말씀을 하고 계신다.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마23:16-17) 사람들이 자기 생각으로 약속을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설교를 들어도 말씀이 훨씬 큰 것이고. 해석은 그 하위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의 특징은 해석에 목숨을 거는 것. 해석도 하나님 말씀에 맞는 해석을 해야 한다. 그런데 해석은 절대 100%일 수 없고 심지어 틀릴 수도 있다. 해석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변질된 신앙을 보면 어떤 목사의 해석에 목숨을 건다. 해석이 약간의 유익을 주나 본질은 말씀에 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출20장, 9계명) 거짓 약속하지 말라는 것. 거짓 약속이란 하나님의 약속 말고 다른 것을 섞는 것이다. 이것은 선교 메시지와도 연결이 된다. 내 이웃이 누구인가? ‘양 떼를 먹이는 자’라는 어원이 목사인 pastor. 풀이 Pasture. 이같이 모든 성도는 목양자가 되어야 한다. 내 이웃을 살리기 위해서는 오직 예수만 전해야 한다. 나의 이익과 욕심과 뜻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너의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것은 변질된 복음을 증거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받고 천국에 가게 된다.
율법사가 와서 묻는다(눅10장).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행위나 공로에 관한 질문 자체가 틀렸다. 그때 예수님이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구전이 아니라 기록이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해석이 중요하다는 것.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네가 살리라” 네가 이를 행할 능력이 없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야기를 말씀하신다. 여기서 선하다는 말은 오직 예수님께만 쓸 수 있는 말이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이웃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다. 강도 만난 이웃은 구원받고 천국 가야 할 대상인데 외면한다. 그를 보고도 레위인과 제사장이 도망친 이유가, 부정한 사람을 손대면 사역을 할 수 없기에 손해 보지 않으려는 계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이웃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존경받고, 손해 보지 않고, 이익과 만족을 얻을까 하는 것에 있다. 반면 선한 예수님은 과도할 정도로 모든 것을 희생해서 이웃을 살리신다.
마지막에 물으신다.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웃은 사명의 대상이다. 우린 맨날 나에게 잘해 주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강도 만난 사람이 중심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이웃이다. 율법사가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은혜를 베푸는 분은 예수님밖에 없다. 예수님이 "가서 너도 이와같이 하라" 예수님만을 의지하게 될 때 승리할 수 있다.
맹세에 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6장이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주고 복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히6:14-15)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맹세다. 예수님이 맹세 즉 언약의 완성이다(히7:18-21). 하나님의 맹세 위에 인간의 욕심이나 자기의 뜻을 섞지 말라. 그래야 이웃을 살릴 수 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37) 예수님밖에 없다고 말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변질이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이,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1:18-20) 제사장이나 레위가 폼나게 다닌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강도 만난 영혼들을 위험한 세상에서 건져낼 방법은 예수님밖에 없다. 그래서 이것은 전도 메시지다.
예수님이 있으면 참된 약속이고, 예수님이 없으면 다 가짜다. 섞이지 않은 순수한 약속이 있을 때만 우리 이웃이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대강령,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는데 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이 구원받고 천국 가는 것. 이웃에게 변질된 복음을 전하지 말라. 이웃에게 천국과 구원을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것은 오직 예수님의 약속밖에 없다. 오직 예수를 전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일꾼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