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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헤브론선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빛으로
본문 : 누가복음18장15~30절
제목 :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자
어제는 믿음의 기도와 겸손의 기도에 대하여 묵상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과부(寡婦)처럼 ‘끈질긴’(1~8절) 믿음의 기도와
세리(稅吏)처럼 ‘겸허한’(9~14절) 겸손의 기도를 하는 사람에게 지금 여기에서 그리고 장래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앞서 바리새인과 세리(9~14절)처럼,
어린아이와 부자 관리를 대조(對照)합니다.
대조되는 두 인물은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가 누구인지를 보여줍니다.
1. 어린아이와 하나님의 나라(15~17절)
1)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습니다(15절).
“[15]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 사람들이 예수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습니다.
‘만져 주심를 바라고’라는 말은 속죄의 날 저녁에 부모들이 그들의 자녀를 장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데리고 와서 축복의 기도를 받는 관습이 배경이 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입니다(2:28 주석 참조).
*2:28(아기 예수 정결예식 때)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어린 아기. - 평행 부분인 마19:13과 막10:13에서는 7세 미만의 어린 아이를 가리키는 '파이디아'로 표현되었으나,
여기서는 '갓난아기' 또는 '젖먹이'를 뜻하는 '브레페'가 사용되었습니다.
더욱이 누가는 이 말 앞에 접속사'카이'를 첨가하여 '젖먹이들까지도'라는 강조의 의미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렇게 천진한 아이들이 예수님의 은혜를 덧입고자 접근할 때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이의 부모들을 꾸짖으며 접근을 막았습니다.
이 같은 제자들의 행위로 보아,
아직도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어른들과 마찬가지인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있었으나 제자들은 아직 성숙치 못하여 사람 취급도 받을 수 없는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9:48)을 그새 잊은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는 세속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아이는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께서는 갓난애들과 같은 그러한 계층까지도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입니다(16~17절).
(1)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입니다(16절).
“[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하나님 나라는 자신을 낮추고 자비를 구하던 세리(13절)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 자체에 대해 진지하고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들이라는 주제로 관심을 확대시키고 게신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신뢰와 수용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모습이나 부자 관리의 계산적인 태도(23절)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다시 말해서 젖먹이가 엄마의 품을 의지하듯이 하나님께 온전히 의탁하는 자, 어린아이의 동심과 같이 깨끗하고 솔직한 마음을 가진 자가,
바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17절).
“[17]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결단코 거기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받아들이지 않는.
마샬(Marshall)은 '하나님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 들이다'의 의미로 해석하였으며,
쉴라터(Schlatter)는 '어린 아이들과 같이 아무런 이의 없이 하나님의 나라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거기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이 받들다라고 하는 말이 담고 있는 의미'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을 제대로 모르면 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을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같은 사건을 기록한 마가복음에서는 우리의 흥미를 끄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습니다.
막10:14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동에 화를 내셨다는 사실입니다.
단순히 꾸짖으신 정도가 아니라 분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 성전이 장사판으로 변한 것을 보시고 화를 내셨습니다(요2:13-16). 그러나 제자들에게 화를 내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어린이들의 접근을 받아주어야 합니다.
*아이들로부터 배워야 합니다.
"누구든지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고 변론이 일어났을 때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한 명 세우셨습니다.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이가 큰 자니라"(눅9:48)
어린아이로부터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통해서 배웁니다.
심지어 어리석은 사람을 통해서도 배웁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을 만나도 배우지 못합니다.
어린아이와 같음이란 단순한 믿음을 뜻합니다.
그들은 어른이 말해주면 의심하지 않습니다. 이것 저것 따져묻지 않습니다. 또한 부모에 대한 밀착감을 뜻합니다.
그들은 엄마로부터 책망 받아도 그때뿐이고 금방 엄마 품을 다시 찾습니다. 심지어는 울면서도 엄마 품으로 달려듭니다.
그러나 청소년들이나 다 자란 자식의 경우는 어떤가요.
아마 하루 종일이나 며칠씩 부모 얼굴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지 않습니까?
2. 근심하여 떠나는 부자(18~23절)
1) 어떤 관리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묻습니다(18절).
“[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영생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영생은 선행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요5:26)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8)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하고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분 자신이 외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요5:24)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요6:40)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영생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관리. - 마태는 이 사람을 '청년'(마 19:20)으로,
그리고 마가는 다만 '한 사람'(막 10:17)으로 소개하고 있는 반면에,
누가는 이 사람을 '관리'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선한 선생님. - 유대인들은 사람에게 '선한'이란 호칭을 붙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있어서 선한 것은 오직 율법이며, 하나님 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리(官吏)가 예수님을 가리켜 '선한 선생님'이라고 부른 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을 지녔음을 표시함과 동시에 그가 원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들어주실 수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관리가 '선하다'고 말한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로서 오신 선생'(요 3:2)이며
'생명의 떡'(요 6:48)이자 '생명수'(요7:38)이십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 질문은 어떤 율법사의 질문이기도 했습니다(10:25).
*10: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7]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28]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이 말은 영생을 얻는데 필요한 자격을 갖추는데 혹시나 자신이 모르고 빠뜨리고 있는 어떤 행위가 있는지를 발견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긴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그가 영생에 이르는 것이 다만 선행의 결과인 줄 착각하고 있었음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마 그는 정성을 다해 그 율법의 세부 규례들을 열심히 따랐으나 뭔가 부족한 것이 있었으며 이처럼 도덕적 행위나 율법을 철저히 행함으로도 만족을 느낄 수 없었던 그가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예수님은 영생에 이르게하는 확실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으로 판단하고서 그 앞에 나아왔던 것입니다.
여기서 '영생(永生)'으로 번역된 헬라어 '조에'는 하나님의 생명 혹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 관리가 요구한 생명은 순간적이며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 곧 죽음에 의해 차단이 되지 않는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요3:3~15에서도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결코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19절)
“[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 이 말은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죄있는 자로 여겼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어쩌면 이러한 반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도 어찌하여 하나님께만 적용될 수 있는 칭호를 사용하느냐는 약간의 비난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말씀에 함축된 의미는 다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선의 기준을 훨씬 높이심.
이 관리가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르며 접근한 데에는 자신의 선행에 대한 자신감이 은연중에 표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의 기준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에 의해 도달될 수 있는 성격이 아니며 참된 선은 하나님께만 있는 속성임을 가르쳐주고자 하셨습니다(대상16:34;대하5:13;시106:1;118:1,29).
*대상16:34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하5:13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되 선하시도다 그의 자비하심이 영원히 있도다”
(2)당신의 신성을 증거하고자 하심.
이 관리가 예수님을 신적 권능을 소유한 탁월한 랍비로 여긴 것에 대해 예수님은 은근히 비난하는 투로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탁월한 랍비가 아니라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3) 간음, 살인, 도둑질, 거짓증언 하지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20절).
“[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계명을 아나니. - '알다'의 뜻으로 번역된 동사 '오이다'는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 있어서의 '지키다', '따르다'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것들을 지키라고 하는 권고가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의 조건으로 제일 먼저 율법 준수를 거론하셨는데,
이는 율법 준수에 대해 내심으로 자신 만만해하는 이 관리의 허물을 벗기기 위해 정면으로 대응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율법의 완수자가 되지 못하며 다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을 수 있을'(롬 3:20:갈 3:24)뿐입니다.
이 사실은 마5:17-48에 언급된, 율법 준수에 관한 새롭고도 차원 높은 예수님의 교훈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이 관리의 율법에 대한 태도는 문자적이고 피상적인 것이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거론된 계명은 제5계명부터 제9계명까지 언급되었습니다(롬13:9;약2:11).
십계명에 있어서 전반부 곧 제1계명부터 제4계명까지가 하나님과 인간 간의 관계 규정이라고 한다면, 5계명부터는 인간과 인간 간의 관계를 규정한 것입니다.
문제 제기의 형식으로 여기 인용된 것은 십계명의 후반부,
즉 인간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 계명인 바,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에만 주력할 뿐 고통 받는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에는 무관심한 당시 종교인들의 냉혈성을 지적하고 싶으셨는지도 모릅니다.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언어 도단(言語道斷)인 것입니다(요일 4:20).
사실 당시 대다수 종교 지도자들의 대신(對神) 관계 또한 거짓과 위선으로 오염되어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4)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21절).
“[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어려서부터. - 어떤 이들은 이 말을 '바미츠바'(bar mitzvah)가 된 때부터 라고 해석하는데 '바미츠바'란 '율법의 아들'이란 뜻으로, 종교적 책임을 감당할 수 있는 연령에 도달한 유대 소년에게 주어지는 명칭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아들들이 5,6세가 되면 율법 공부를 시키고 그것을 준수하게 합니다. 따라서 이 말은 구체적으로 '소년 시절부터'를 가리킵니다.
다 지키었나이다. - 지킬 수만 있다면 율법은 구원의 길이 됩니다.
그러나 율법을 다 지킬 수 없다는 데 인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쉽게 인간을 측정할 수 있는 계명을 몇가지 인용하셨습니다.
그 관리는 자신의 행실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며 회심전의 바울처럼(빌 3:6) 율법을 다 지켰다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을 다만 문자적으로만 지켜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관리는 자신의 율법 준수의 헛점이 무엇인지는 몰랐지만 그러한 율법 준수로도 영생에 이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공허감을 느끼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5)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22절).
“[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한 가지 부족한 것. - 문자적인 뜻은 '네게 한 가지 남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관리의 생각을 그의 재산 문제로 돌리게 함으로써,
이제 열 번째 계명의 핵심을 찌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골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관리의 경우 마지막 계명 하나를 어김으로써,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들을 어긴 결과가 된 것입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 자신의 재물을 모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는 명령은 그 관원의 자만과 위선을 적나라하게 드러냄에 있어 정곡을 찌르는 말씀입니다.
그는 기껏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정도로 마치 이웃 사랑을 실천한 것인양 자부했는지 모르나, 예수님은 이웃을 위한 전폭적이고도 적극적인 헌신을 명하셨습니다.
특히 그는 많은 재물을 소유했던 관계로
이 말씀은 너무도 무거운 짐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마음속에 있는 재물에 대한 의뢰심을 다 버릴 때에만 비로소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음을 시사하는 말입니다.
또한 본문의 이 명령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는 14:33의 말씀과도 일맥상통합니다.
*14:33 “이와 같이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이 관원의 경우는 자기 소유물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는 데 이는 모든 성도들에게 문자 그대로 적용되어야 할 절대적 원리라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그 관리로 하여금 그의 탐심을 완전히 없애도록 하려는 특수한 의도에서 나온 것입니다(Liefeld).
결국 이 말씀은 단순한 청빈(淸貧)의 명령이 아니라,
적극적인 이웃 사랑에 대한 요구였습니다(12:33).
*12:33 “너희 소유를 팔아 구제하여 낡아지지 아니하는 배낭을 만들라 곧 하늘에 둔 바 다함이 없는 보물이니 거기는 도둑도 가까이 하는 일이 없고 좀도 먹는 일이 없느니라”
나를 따르라. - 영생에 이르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 해당합니다.
관리가 자기의 모든 재물을 풀어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준다고 할지라도 그가 진실하게 예수님을 좇지 않는다면 이것 또한 부족한 것이 됩니다. 예수님을 좇는다는 것은, 그의 제자가 되어 그 가르침을 준수하며
그리스도의 삶을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재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6)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23절).
“[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심히 근심하더라. - 이 관리의 심각한 갈등을 통해,
우리는 '두 마음을 품은 자'의 진면목을 보게 됩니다.
그는 한편으로 영생을 소유하고 싶었고 또 한편으로는 안락한 삶을 누리고도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양자 택일을 명하십니다.
이러한 양자택일은 진정한 주의 제자가 되기 위해 누구나 거쳐야 할 단계라고도 볼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관리의 교만하고 안일한 내면세계를 꿰뚫어 보신 예수님의 영적 통찰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만일 관리가 진정 자신의 연약함과 죄악됨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은혜를 간구했다면, 이렇듯 극단적인 양자택일의 도전을 받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이 관리의 마음속에 일어난 걷잡을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은 그의 마음이 영생에 대한 욕망과 세속적인 탐욕으로 나뉘어져 있었음을 잘 보여줍니다.
더욱이 그는 큰 부자였기 때문에 현실의 안락함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3.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24~30절)
1)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하십니다(24절).
“[24]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얼마나 어려운지(포스 뒤스콜로스). 이는 굉장히 힘들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며 나아가 그 일이 본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함을 암시합니다.
성경은 부자가 영생을 얻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영생을 얻기 힘든 이유는
(1)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재물을 의지함으로(시52:1-6;잠18:11;딤전6:17), (2)부의 축적을 위해 가난한 자들을 돌보지 않고 그들을 압제함으로
(잠 18:23;렘 22:13-19;딤전 6:17-19;요일 3:17),
(3)치부하고자 하는 탐심 때문에(12:15-21;16:13-31)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재물뿐만이 아니라 천하 만물을 잘 관리하고 다스리도록 우리에게 맡기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재물을 소유의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관리의 개념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일을 위해 관리하고,
이웃과 함께 나누고 그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할 것입니다.
2)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25절).
“[25]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흔히 랍비들은 불가능한 어떤 일을 가리킬 때 ‘코끼리가 바늘귀로 들어가려고 한다’는 말을 했습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였습니다.
'낙타'와 '바늘귀'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도 예수님께서 의도하신 비유의 의미는 분명해집니다.
다만 어떤 학자들은 이 두 단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도 합니다.
첫째,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큰 대문 옆에는 한 사람이 겨우 지나다니기에 알맞은 넓이와 높이를 가진 작은 문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작은 문은 ‘바늘귀 문’이라고 불렸는데 여기서 말하는 이 표현은,
약대가 이 작은 문을 억지로 들어가려 하는 모습에서 생긴 것이라 합니다.
또 하나는 '약대'를 나타내는 헬라어는 '카멜로스'인데 발음이 이와 비슷하게 들리는 '카밀로스'란 단어는 선박용 밧줄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밧줄'을 바늘귀에 꿰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보다는 쉽다는 비유로 이해합니다.
따라서 여기서 예수님께서 의도하는 바는 부자가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 나라로 들어가려 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인간이 소유하여 즐기는 재물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얼마나 방해가 되는지를 가르쳐 주려는 것입니다(마19:23;막10:23).
*마19:23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막10:23 “예수께서 둘러 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3)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26절)
“[26]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 여기서 '구원받다'는 말은 '영생을 얻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물음은 '그렇다면 구원을 얻기란 불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리빙 바이블(Living Bible)도 '그토록 어렵다면 어느 누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겠습니까?'(If it that hard, how can anyone be saved?)라고 옮겼습니다.
예수님과 부자 관원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주위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구약의 개념상 부귀는 하나님의 축복 중 하나로 여겨졌으며(욥 1:10),
당시 종교적 관행상으로 볼 때 이 관원의 행실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율법에 충실한 듯이 여겨졌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4)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27절).
“[27]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이는 부자 관리와 나누신 대화의 결론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를 묻는 관원에게 예수님께서 십계명 중 일부를 제시하신 것은 사실상 그 계명을 스스로의 힘으로 지킬 수 없음을 고백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온전한 의미에서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설령 율법의 한 부분을 지켰다고 하더라도 다른 부분을 범하고 마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리는 '다 지켰노라'고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관리가 부자이고 그의 마음이 물욕을 떨쳐버릴 수 없음을 알고 허를 찌르는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두 번째 요구 말씀도 실천을 요청하신 것이라고 보다는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알게 하시려는 의도를 시사합니다.
왜냐하면 이 관리가 설령 예수님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구제하였다고 해도 그 행위만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진정 필요했던 것은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5) 베드로가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합니다(28절).
“[28] 베드로가 여짜오되 보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다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 일시적으로 두려움과 절망에 빠졌던 제자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관한 예수님의 대답(27절)을 듣고 확신을 갖게 되었고, 그 관리가 하지 못한 그 일을 자신들은 해왔다고 하는 고백과 확인 요구의 말씀을 합니다.
마19:27에 의하면 베드로는 이 말 뒤에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란 말을 덧붙입니다.
부자 관리와는 틀리다고 하는 자부심을 은근히 비춰주는 베드로의 말은 처음 그가 예수님을 만나 따라 나설 때의 극적인 장면을 생각나게 합니다(마 4:20).
예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가 헌신적인 결단을 감행한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결과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축복에 이르게는 되었지만 예수님의 공생애 당시만 하더라도 메시야관이나 천국관에 있어 많은 오해를 지니고 있었고 인간적 나약함이나 무지로 말미암은 시행착오를 무수히 겪어야 했던 것입니다(막14:66-72).
본절의 경우는 은근히 자신의 공적을 내세우려는 과시욕과 예수님의 말씀에 담긴 속 뜻을 채 헤아리지 못한 아둔함을 드러내 보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아마 제자들은 부자 관리에게 하신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귀가 솔깃해졌을 것입니다(22절).
6)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가족을 버린 자는 현세에 여려배로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29,30절).
“[29]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30]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마19:29에 의하면 '내 이름을 위하여'이며,
막10:29에 의하면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과 그의 복음과 하나님 나라는 동일한 맥락에서 이해됨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계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1)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누가가 포기의 대상(물건, 사람)으로 삼은 것은
마가가 명시한 것과 다릅니다.
누가는 마가가 기록한 '전토'(田土)를 생략하고 그 대신 '아내'를 포함시켰는데, 이는 그가 버려야 할 대상을 주로 인간관계에 집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Marshall).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좇기 위해 그들의 가정과 직업까지도 포기함으로써 많은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무엇인가 포기해야 했던 사람들은
누구든지 금생과 내생에서 충분히 넘치도록 다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만일 한 사람이 안정된 직업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금생과 내생에서 그 자신과 안전 된 영원한 관계를 갖도록 하실 것이라는 것을 깨달을 것입니다.
만일 한 사람이 가족의 친성(親性)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가족의 사랑을 얻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수반되는 희생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도 그들이 그 모든 것을 보상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미 포기한 것에 대해 미련을 두고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아울러 우리가 포기한 것에 대한 대가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대해서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이러한 불가피한 포기나 헌신은 구원을 위한 담보물로서가 아니라 구원에의 확신에 따른 자발적 순종의 표시로서 이해되어야 하며,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잃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만큼은 잃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습니다.
누가와 마태는 단지 '여러 배'(many times,NIV)를 받는다고 기록한 반면, 마가는 '백 배'라고 하여 최상의 보상을 강조하고 있습니다(마19:29;막10:30).
또한 마가는 '핍박을 겸하여' 받게 됨을 지적하고,
마태는 굳이 현세와 내세를 구분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축복을 시사하지만, 누가는 현세의 보상에 비교적 강조점을 많이 두었습니다.
본절을 이해함에 있어 우리는 단지 물량적이고 세속적인 의미에서 보상의 기준을 삼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물론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의 뜻이 함께 하면 성도들이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주의로 살아가면 단지 일용할 양식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지만, 세속적 탐욕의 노예가 되면 백만장자가 되어도 불만과 번민에 시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요컨대, 문제는 누림의 질에 있는 것이지 그 양에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현실에는 핍박과 고통이 함께 하기 마련이기 때문에 물질적 어려움을 당하는 일이 허다하지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소망으로 말미암아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하는 역설적 충족감을 맛보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고후 6:10).
*고후6: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자의 것입니다(16,17절).
자신을 낮추고 자비를 구하던 세리(13절)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는 이들의 것입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신뢰와 수용은 종교 지도자들의 완악한 모습이나 부자 관원의 계산적인 태도(23절)와 큰 차이를 보입니다.
지금도 주님은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돌아선 이들을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불러주십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와 그 왕을 제대로 모르면 나도 들어가지 못하고, 들어가려는 이들도 막을 수 있습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사람들이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고 어린아이들을 데려오자 제자들이 꾸짖습니다(15절).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9:48)을 그새 잊은 것입니다.
그들이 꿈꾸는 세속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어린아이는 가난한 자, 천한 자, 눈먼 자, 세리, 창기처럼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그 나라의 제자인 우리는 세상에서 유력한 자들만큼이나 ‘어린아이’같은 이들을 환대하고 있습니까?
2) 부자 관원은 흠도 없고 부족한 것도 없었지만 영생에 대한 갈증만은 풀지 못했습니다(18~23절).
영생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으나 재물에 대한 집착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고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근심하여 떠납니다.
머리 둘 곳 없는 주님을 따르기에는 가진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내게 하나님 나라는 내 전부를 기쁘게 버려서라도 얻고 싶을 만큼 값진 것입니까?
3) 부를 복의 증표로 여기던 제자들을 ‘부자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씀을 듣고 당황합니다(24~30절).
예수님의 말씀은 소유가 많든 적든 소유권을 넘겨드리지 못하면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지 않고는 아무도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포기하든지 버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풍성한 영적 축복으로 되돌아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