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1회 詩하늘 시 낭송회
銀詩동인 편
"銀詩" 하면 늦가을의 햇살을 머금고 스스로 눈부시게 빛나는 억새가 떠오른다.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뿌리는 그 곳을 떠난 적이 없는 억새,
모든 사물과 자연의 조그마한 주파수에도 온 몸을 이리저리 정성스럽게 귀를 기울이며
어쩔수 없이 흘러가는 세월 앞에서도 당당하게 시에게로 다가가는 마음들,
어쩌면 은시는 그 억새를 닮아 있는 듯 하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늦은 듯하여도 열정적인 시심을 가진 모습들을 보면 담장을
넘고 피어 오른 능소화 혹은 덩쿨장미를 닮은 듯도 하였다.
그런 은시동인의 시낭송회는 아나운서 출신인 남주희 님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시낭송 중간중간 들려주는 얘기들이 한 편의 시처럼 다가왔다.
한 편 한 편 본인이 혹은 지인이 들려주는 시낭송을 들으며, 음악을 들으며, 그 날
참석한 모든 분들께 나누어 준 은시동인집에 실려있는 동인들의 '시작노트'을 읽어 보았다.
여한경 시인.......계절을 모르는 늦바람둥이가 / 갈바람 타고 구름 위를 간다 //
-중략- 아스라이 / 아스라이, 내려다 보이다가 그만 / 구만리
장전을 날아가는 / 꿈속의 / 붕새가 된다
정경자 시인.......누군가의 가슴 떨리게 할 / 시, 한 편 살아 남을 수 있다면
정 숙 시인.......꿈을 꿀 수 있어 감사합니다 / 아침 커피 한 잔이 또 감사합니다.
변영숙 시인.......눈꽃/ 하늘 가득 내리고/겨울 강 얼어/대리석처럼 투명한/겨울
강의 영혼/ 무소유의 수행에 침묵하는 겨울 // 이 숨은 뜻/가
슴에 담으며 겨울 강가 거닐고 싶은/ 어느 날
김영임 시인.......낙엽들은 오색 찬란하게/ 제 몸을 불살라서 축제를 벌이네/ 구시
월 여윈 바람 쓰다듬고 가는 산 기슭/ 이름 모를 들꽃들도 다
순리대로 제 몫을 하네/ 중략
류호숙 시인.......바람에 실려오는 속살거림/ 어디에도 버려진 시간이 없어/그 아름
다웠던 시간들이 여울지는 곳에/ 어물고 싶어......
남주희 시인.......-중략-시가 무섭고 또 무서워 내 살점이 자꾸 두꺼워진다/또한/
나를 나답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이선영 시인.......산다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사랑하는 가슴이 있는 동안은/살아
있는 것이고/ 살아 있는 동안은/ 사랑하려 더 애쓰리라
정해경 시인.......어슴푸레 달빛 내리던 뒷마당/청솔가지마다 매단 영롱한 꿈들이/
아직도, 당도하지 못한 저문 길 위에/ 성에처럼 시린 눈발로/아무
문양도 없이 창백하게 흩날리고 있었다
이순복 시인.......오래도록 문 닫혀 있던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중략
근질근잘한 가려움을 즐기며/여기저기 화기의 꽃을 피우련다
곽미영 시인.......중략/ 가을 햇살 아래 /찬란하고 신비로운 보라빛 물결/ 그 몸짓
같은 시의 꽃송이/전제쯤 피워 낼 수 있을지......
안봉태 시인.......중략/ 시의 바다로 흐르는 밤/쓰고 또 지우고, 쓰고/밤이 새도록/
내 영혼을 엮어/ 한 편의 詩를 쓰고 싶다/ 내 소박한 꿈이다
정미상 시인.......뜰에 내려섰더니/가을 햇살 한 자락/내려와 안깁니다/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 확실히 잡히지 않는 그를/늘 짝사랑합니다.
시작노트를 읽으면서 시에 대한 열정들을 새삼 다시 느끼며 나 또한 잡힐 듯 잡힐
듯 하면서도 잡히지 않는 시를 생각해보았다.
그 날 박곤걸 선생님께서 은시가 황금시가 되기를 바라신다고, 좋은 시를 쓰면 몸도
영혼도 장수하게 한다는 말씀을 해주셨으며, 나 또한 가을비에 고스란히 내려앉은
은행잎들처럼 은시동인들의 시가 황금으로 빛나기를 바래 보았다.
대구문학 아카데미에서 문학을 배우신 분들로 모인 은시동인들 중에서는
저력있는 유명한 여류시인들이 많고 전국에서 주목하는 시인들도 많은 것을 보면
이미 은시 동인들의 시는 황금시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였다.
문무학 시인은 겸양지덕, 요조숙녀들이 모인 동인이지만, 銀은 독성을 구별하는데
무서운 성질을 가진 만큼 은시동인도 아름다운 시를 쓰는 것에서 칼 같은 시를 쓰는
동인, 독이 가득찬 세상에 독기로 세상을 치유하는 은시동인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김주곤 시인은 銀詩의 銀은 머리가 쉰 것이 아니라, 익은 시를 말하는 것이
라고 하셨다. 그 멋진 표현에 감탄하며 많은 분들이 즐겁게 웃었다.
은시 동인
'늦깎이 시인'들이 꽃피운 '푸르른' 시심이라는 제목으로 은시문학회에 대해 대구
매일신문에 소개된 글을 읽어보면
베란다에 시월 봉숭아 한 포기가 붉은 꽃잎을 피우기 위해 온 몸을 뒤척이며
마지막 햇살을 끌어당기고 있다.
어쩌면 늦은 듯도 하지만 끝까지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스스로를 조율하며
고운 꽃을 피우려는 의지가 차라리 애처롭다.
'은시(銀詩)문학회’가 바로 그런 문학의 꽃을 피우려는 시 동인이다.
문학에 늦게 눈을 뜬 늦깎이들이지만, 비바람 많았던 지난 삶을 시로 승화시
키며 그윽하고 향기로운 시를 빚어낸다. 은시문학회는 1995년에 발족했다.
그후 10년 동안 매년 시낭송회를 열었고, 최근 동인시집 제3집을 상재했다.
정경자, 정숙, 변영숙, 김영임, 류호숙, 허명순, 남주희, 여한경, 이선영,
정해경, 이순복, 곽미영, 안봉태 회원의 작품을 담은 것이다. 은시 동인의
뿌리를 더듬어 보면 ‘대구문학아카데미’라는 울타리가 보인다.
이제 팔순을 넘긴 박주일 시인이 1988년 8월에 ‘문예창작원’이란 이름으
로 시작했으니 벌써 20주년이 가까워온다.
그동안 130여 명의 문학도들이 이곳에서 시의 텃밭을 가꾸었고, 40명가량의
회원들이 대구와 전국 시단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이선영 시인은
여성문학회 회장으로 동분서주하고 있고, 몇몇 회원들은 시낭송가로 신라
문학대상을 수상했으며, 각종 신춘문예와 유명 문예지로 문단에 등단하거나
박경리 토지문학상을 받기도 했다.
박주일 시인의 뒤를 이어 현재 대구문학아카데미 시창작반을 운영하고 있는
정숙 시인은 인터넷 포엠토피아의 포엠스쿨 강의도 맡고 있다. 특히 "인생은
육십부터"라며 "시 공부 시작할 때 나이가 세 살"이라던 김영임, 변영숙
시인은 과연 문학에 나이가 없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일흔에 시 공부를 시작한 전직 국어교사인 여한경 시인의 문학에 대한 열정도
아무도 못 말린다. 14기인 류호숙, 허명순, 이순복 회원은 팔조령과 팔공산
야외수업 때 막걸리 한 잔에 가요 ‘봄날은 간다’를 구수하게 뽑아내던 시절
을 떠올리며 소녀같이 수줍어 한다.
안봉태 회원은 치매로 누운 시어머니 봉양하느라 늦게 등단했고, 아나운서
출신인 남주희 회원은 편지글 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 가장 젊은 사십대
회원인 곽미영 씨는 현대적 서정시의 묘미를 찾기 위해서는 사물의 뒷면과
깊이를 볼 수 있는 시안(詩眼)과 사고력을 더 키워야 한다며 눈을 반짝인다.
은시문학회 회원들은 시라는 매개체로 나이에 상관없이 끈끈한 우정을 쌓아왔다.
여름이면 청도 유등연지에서 종일 연꽃의 몸짓과 손짓을 관찰하며 자연과
시에 취했다.
경산 당음지의 가시연꽃을 찾아서는 '왜 제 잎을 가시로 뚫어야 하는지’ 물
음표를 끝내 지우지 못한 채 노을에 젖어 돌아오기도 했다.
동인들은 은시문학회의 자료와 회원 시집 ‘인동초’ 14집, 변영숙의 ‘오딧
빛 꽃댕기’, 정해경의 ‘수리봉의 갈꽃’, 정숙의 ‘신처용가’와 ‘위기의
꽃’, 이선영의 ‘꽃잎 속에 잠든 봄볕’, 김영임의 ‘일상의 뜨락에서’, 여한
경의 ‘괄허집’이 대구 서부도서관 향토문학관 은시 문학회 코너에 비치되었
다고 자랑한다.
정경자 은시문학회장은 "살아온 연륜이 깊고 진한 만큼 각자의 시적인 개성도
다양하다"며 "앞으로 주민들을 위한 시낭송회와 시화전을 열고 불우이웃을 위한
자원봉사 활동도 펼쳐나갈 것"이라고 했다.
박주일 시인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참석하지 못하신 박주일 시인을 직접 만나뵌 적은 한 두번
정도라고 기억한다. 베레모를 쓰시고 나비 넥타이를 하셨던 모습이 생각난다.
그동안 13권의 시집을 내셨으며, 그 13번재 시집 <는개 그리고 달빛>의 자서를
소개해보면 다음과 같다.
"궁합이란게 있기는 있는지 모르겠다. 사람의 세계에서는 흔히 궁합이 맞다, 안
맞다라는 말을 쓰기도 한다. 하나의 작품의 세계에서도 그 작품을 이루고 있는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사이에 이 궁합이 맞는 단어들이 모여 있나,
그렇지 않나에 따라서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 궁합을 맞추는 작업이 대단히 요긴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로 별 상관도
없는, 혹은 잘 맞지 않는 단어들이 모여 있다면, 그 작품은 십중팔구 이미 실패
작이라고 보아진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궁합이란 사전적 의미의 궁합과는
색깔을 달리한다.
[는개 그리고 달빛]은 이 낱말 궁합 맞추기에 힘을 써보았다. 궁합이 맞았다면
오래 빛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쉬 시들어질 것이다."
시낭송회를 마치고 대구시학회에서 준비한 작은 화분을 한 분 한 분께 전해
주는 모습을 보았다. 화려한 꽃다발이 아닌 흙이 초록빛을 거느린 뿌리를 감싸
안고 있는 화분이 참 고아보였다.
그날 무엇보다도 기뻤던 것은 시낭송회가 시작되기 전 변영숙 시인께서
나를 찾았다. 제가 전향입니다, 라고 하니 "별일없지" 하시면서 반가워
하셨다.
시편지를 보낼 때 시인이름을 잘못써서 보낸 사실을 알고 계셨고,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반갑게 맞이하여 주셔서 참 고마웠다.
늘 건강하시길 바랬다
그날 모처럼 2차 모임까지 참석한 원무현 시인이 은시동인은 참 단아하다고
하였으면 나 또한 은시동인의 빛깔은 화려하진 않지만 단정하고 지적이며
참 겸손하다는 것을 늘 느낀다.
4번째의 은시동인집의 연두빛 표지를 바라보면 그 은은한 향기가 자신과 이웃에
게까지 물들여 주기를 바래본다.
마디라는 것은 / 박주일
나무에는 마디가 있다 자라면서 피곤한
삶을 쉬었다 간 자리다
혹은 그 흔적이다
달리는 열차의 마디는
역(驛)이다
나의 집은
나의 마디다
무덤은
인간이 남기는 마지막
마디다
첫댓글 전향님 수고 하셨습니다. 시 낭송회 날의 모습들을 사진으로 보는 듯 자세히 올려 주셔서 참 잘 읽었습니다. 시하늘 많은 회원들이 솔선수범 하는 가운데 발전해 가는 모습에 저는 늘 기쁨 감추지 못합니다. 사랑해요.^^
아~ 사랑한다는 말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 고맙습니다. 나도 사랑해요~*^^*
수고하셨습니다. 올릴 때마다 특징이 있군요.
늦었지요. 시인들의 후기를 쓰면서 나를 뒤돌아 보기도 합니다. 고맙습니다.
참석하지 못했는데.......전향님 감사합니다 좋은글 읽게해주셔서...
다음엔 꼭 뵈어요~ 수현 님~*^^*
수고하셨습니다 그날 모습이 그려집니다 시에 빠지신분들이 부럽습니다
고맙습니다. 소나무 님이 누구신지 궁금합니다. *^^*
전향님 늘 찬찬하고 고우신 모습으로 시 하늘 지킴이 역활을 멋지게 해 내고 계시네요. 은시 후기를 이제야 봅니다. 참 세심하게도 올려주셨네요. 감사해요~^^
후기가 늦었지요^^ 고맙습니다. 그 날의 밝고 고운 모습이 생각나네요. 건강하시고 건필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