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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아의 시험-자유(自由)에의 소명(召命)”
구약의 말씀: 신명기 8:1-6
신약의 말씀: 누가복음 4:1-13
[서언]그리스도교-자유(自由)의 종교
(1) 그리스도교는 “자유의 종교” 입니다.
오늘 날 전 세계적으로 경제적 먹구름이 짙게 드리우고 있고 “경제적으로 잘 살아보자”는 관심만이 사회 공동체와 개인적 삶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에 우리들에게 “자유”의 문제는 그렇게 절실한 문제로 느껴지지 않을 런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라는 주제는 정치, 경제, 사회의 외면적인 문제에서 뿐 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과 영혼의 내면적인 차원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간들에게 아직도 가장 중요한 문제 중의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2) 평생 개를 좋아해서 오랫동안 길러온 사람의 이야기인데, 개들도 먹이를 줄 때와, 사슬을 풀어 줄 때 중에서, 사슬을 풀어 줄 때를 더 좋아한다는 그의 체험으로부터의 증언을 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개들에게 있어서도 “자유”의 의미가 이러할 진 데 사람들에게 있어서 어떠할지를 말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그러나 요즈음 “자유”의 뜻은 일그러져서 오용(誤用)되거나, 지나치게 남용(濫用)되는 세대를 우리들은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의 참된 뜻이 무엇인지를 오늘 우리들에게 주신 누가복음에 나오는"예수님의 시험(試驗)"의 이야기로부터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1] “대심문관의 이야기”(The Legend of Grand Inquisitor)
(1) “예언자적 사상가들”(The Prophetic Thinkers):19세기에 태어나 살았지만 그들이 죽은 후, 20세기에, 나아가서 21세기를 여는 포스트모더니즘 (post-modernism)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네 사람의 사상가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로 키에르케고오르 (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마르크스 (Karl Marx, 1818-1883), 도스토예프스키 (Fyodor Mikhailovitch Dostoevsky, 1821-1881), 그리고 니체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를 가리킵니다. 1813년 키에르케고오르가 태어나고 1900년 니체가 죽기까지, 동시대를 살았던 이 네 사람은 서로의 존재를 잘 알지 못했지만 - 단지 니체가 우상(偶像)의 황혼(黃昏)(Gtzendmmerung, Twilight of the Idols)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내가 그 무엇인가를 배운 유일한 심리학자(psychologist)였다" 라는 말을 제외하고서는 -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었던 19세기의 유럽의 기독교와 문명, 그리고 정신적인 또한 사회적인 위기를 혜안(慧眼)으로 통찰(洞察)하고 극복하기위해 치열하게 생각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2) 제가 종종 설교에서, 혹은 성서연구 모임에서 이 네 사람에 대해 자주 언급하곤 합니다만, 그 중에서도 특히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해서 오늘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아마 이미 알고 있겠지만 그는 1821년 10월 30일 아버지가의사로 일하던 모스크바의 어느 빈민 병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젊은 시절 사회주의 혁명아들의 페트라쉐프스키 서클(Petrashevsky Circle)에 연루되어 1849년 4월 23일 체포되고, 그해 12월 22일 세미욘스키 광장(Semyonsky Square)에서 총살형이 집행되려는 순간, 황제의 특사령(特赦令)이 내려져서 시베리아에서 4년 동안 살인, 강도, 강간 등 온갖 잡범들과 함께 유형(流刑)을 살았습니다. 시베리아의 유형지로 떠나는 먼 길에, 차디 찬 추위를 녹여주기 위해 신앙심이 깊은 러시아 정교를 믿는 부인들이 호송되고 있는 죄수들을 위해 싸모바르 주전자의 따뜻한 차와 더불어 쪽복음서 등 성서를 죄수들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기나 긴 유배지의 생활 동안 읽을 것이라곤 성서뿐이어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성서를 읽고 또 읽었습니다.
(3) "나는 일생 동안을 하나님 때문에 고통을 겪고 살아 왔다." - "나의 할렐루야는 지옥의 용광로를 뚫고 나온 찬양이다." - "그 누가 그리스도는 진리가 아니고, 진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다고 수학적으로 증명해 보인다 하더라도, 나는 그리스도 없는 진리 보다는, 진리 밖에 있는 그리스도를 선택하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편지에서, 또는 작가일기에서 표명한 위의 말들은 그의 삶을 지배했던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의 이해에 대한 깊이의 일면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4)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 백치(The Idiot), 악령(The Possessed, or The Devil), 그리고 까라마조프네 형제들(The Brothers Karamazov) - 이 네 작품을 흔히 도스토예프스키의 4대 장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1878년 집필을 시작하였으나 미완으로 끝난 최후의 대작(magnum opus) 까라마조프네 형제들 중에 나오는 흔히 "대심문관의 이야기"(The Legend of the Grand Inquisitor) [제2부, 제5권, 제5장], 또는 "종교재판장의 이야기"에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오늘 우리들의 본문의 말씀인 "예수님의 시험"의 사실을 통해 인간들의 영원한 주제 - "자유"의 문제에 대해 그의 깊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이해를 말해 줍니다.
[2] 메시아의 길 - 자유의 길
(1) "대심문관(大審問官)의 이야기"는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서구의 허무주의(虛無主義)와 무신론(無神論)과 초인사상(超人思想)을 화신(化身)한 인물인 둘째 아들 이반(Ivan)이, 첫째 아들 드미트리(Dmitri)로 상징되는 러시아의 육욕과 방탕과 물욕을 극복하고 러시아를 구원 할 새 인물, 그리고 러시아의 메시아적인 사명을 이 세계에 구현할 사명을 지닌 셋째 아들 알로샤(Alosha)에게 들려 준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알로샤는 이반에게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 대한 반역(rebellion)"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찬미(讚美)"라고 탄복합니다. 무슨 내용이었기에 알로샤로 하여금 감탄의 절규를 지르게 했을까요?
(2) 이야기의 무대는 "보다 더 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ad majoram gloriam Dei) 매일 매일 이단(異端)들을 잡아서 불태우는 끔직한 종교재판이 자행되고 있던 스페인의 세비야(Seville) 마을을 무대로 일어난 일입니다. 어마어마한 권위를 지닌, 크고 곧은 키에 메마르고 움푹 내려앉은 눈과, 빛나는 자태를 지닌 거의 90세에 이른 종교재판장에게 어느 칠흑같이 어둔 밤에 옥문을 열고 남루한 차림의 한 청년이 찾아옵니다. 종교재판장은 그 초라한 모습의 젊은이가예수임을 곧 알아챕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잘 해가고 있는 데, 왜 방해하러 찾아 왔느냐? 하고 항변합니다. 당신의 세 가지 시험은 도대체 무엇이냐? 그것은 모두 당신이 인간의 "자유"를 너무 과대평가해서 생긴 일이라고 예수를 힐난(詰難)합니다. 예수의 시험에 대한 종교재판장의 모든 질문과 설명과 비난과 항변, 그리고 답변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단지 침묵으로 일관하다 마침내 종교재판장에게 다가가서 그의 차디 찬 입술에 입을 맞추고, 그가 열어 준 옥문을 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3)도스토예프스키는 이 “대심문관의 이야기”에서 “자유”를 주제로 삼아, 러시아 정교(Russian Orthodox)의 신앙에 기반하여 당시의 로마-카톨릭 교회(Roman Catholicism)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에 영향을 받아 로마-카톨릭 교회 내부에서 일어난 예수교회(the Jesuits)를 아울러 비판하면서, 예수의 시험에서 “자유”의 도전이 되고 있는 세 가지 유혹 - 기적(miracle), 신비(mystery), 그리고 권세(authority) - 을 이겨내고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택하심으로 우리에게 “자유”를 “은총의 선물”로 주셨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한 ‘기적’, ‘신비’, ‘권세’를 “경제적 메시아”, “정치적 메시아”, “종교적 메시아”로 바꾸어 설명하면 더 쉽고 여실(如實)하게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A) 경제적 메시아: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 (누가 4:3)
(i)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굶주린 예수에게 나타 난 마귀는 "돌이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하고 예수를 시험합니다."굶주림"(hunger)의 문제는 인간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문제입니다. 마르크시스트(Marxist) 철학자인 블로흐(Ernst Bloch)가 프로이드 심리학자들 (the Freudians)을 향해서 "사흘 만 굶어 보아라, 리비도(libido)가 다 어디로 가는지?"라고 했다는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가난을 경험한 사람들은 가난이 얼마나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것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 누군가가 돈을 주어서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게만 해 준다면, 자신들이 가진 "자유"를 기꺼이 바치려 하는 사람들을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 주위에 많이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ii) 역사적으로 이 "굶주림"의 문제와, 이로 말미암은 인간의 "소외"(疎外)의 문제를 가장 포괄적으로 다룬 사람이 바로 마르크스(Karl Marx)일 것입니다. 그가 무신론적 입장에서 변증법적 유물사관(dialectical materialism)을 주장했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체질적으로 그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고, 우리나라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반공주의와, 소련과 동구의 몰락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인류 역사에서 실험이 끝난 이미 용도 폐기 처분된 것이라고 간주해버리는 것은 너무 성급한 단견(短見)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산과 생산을 위한 자본과 노동과 토지의 생산관계가 사람들을 "가진 자들"과 "갖지 못한 자들"로 나누며, a)노동과 생산의 결과에서 소외된 인간이, b)사회에서 소외되며, 나아가서 c)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부의 공정한 분배를 요구하는 사회 정의(social justice)에 대한 예언자적 요구는 아직도 우리 사회뿐 만이 아니라, 무자비한 세계화(globalization)의 진군(進軍) 속에 점점 더 가장자리로 밀려나는 이 세계의 가난한 나라들 중에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의 삶의 현실에 아직도 여전히 유효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iii) 예수님께서도 이 굶주림의 문제를 작은 문제로 결코 등한히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 "성경에 기록하기를 '사람은 빵만 먹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하였다." (누가복음 4:4 = 신명기 8:3)라는 예수님의 대답은 인간들에게 빵의 문제를 폐기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실제로 굶주린 무리들을 위해 사천 명, 그리고 오천 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6장 15절에 의하면 오천 명을 먹이신 후에 예수님은 무리들이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산으로 물러가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들의 자유보다는 그들에게 빵과 굶주림의 문제를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해결해 줄 수 있는 "기적"(miracle)과 경제적 메시아를 고대하고, 그런 메시아를 위해서라면 그들의 자유마저도 기꺼이 갖다 바치고 노예가 되겠다는 데 있습니다.
그러나 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경제 문제만 해결된다고 해서 살아갈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사람은 "빵 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가르쳐 주었습니다. - "인간 존재의 비밀은 사람은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위해서 살아야 할 그 무엇인가를 가져야 한다(to have something to live for)는 데 있습니다. 삶의 목적에 대한 지속적인 개념이 없다면, 인간은 삶을 계속 영위해야 된다는 데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비록 아무리 풍부하게 빵을 가졌다 하더라도, 지상에 남아있기 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파괴하려 할 것입니다." (Constance Garnett translation- A Norton Critical Edition, 1976, p.235)
ㅡ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자유를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B) 정치적 메시아: -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누가 4:8)
(i) 두 번 째 예수님의 시험은 악마가 예수님을 높은 데로 이끌고 가서, 순식간에 세계의 모든 나라를 보여주며, 그에게 엎드려 절하기만 하면 "모든 권세와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권력에의 의지"(will-to-power)를 갖고 있습니다. 일찍이 러셀(Bertrand Russell)은 말했습니다. - "인간의 무한한 욕망가운데 가장 큰 것은 권력과 영광에 대한 욕망이다. 그 둘은 똑 같은 것은 아니지만, 밀접하게 동맹을 맺고 있다." 나아가서 그는 보다 본질적인 것을 적었습니다. - "모든 사람은 그렇게 되는 것이 가능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처럼 되기를 바란다.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그 불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Power: A New Social Analysis, pp.11-12)
(ii)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권력에의 의지"를 추구하여 나라를 세우고, 전쟁을 일으켜 제국을 건설하고,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퍼뜨려 왔습니다. 고대의 이짚트, 바빌로니아, 앗시리아, 페르샤, 등은 말할 것도 없고, 팍스-로마나(Pax Romana)로 대표되는 로마에서 황제들이 자신들을 종교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황제숭배"(emperor worship) 종교의 예에서 이런 사실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파시즘(Facism)과 나치즘(Nazism), 그리고 오늘날 아랍권에서 특히 튀니지아와 이짚트에서 시작하여 일어나고 있는 대지진, 즉 리비아, 예멘, 바레인 등, 오랫동안의 독재에 시달린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을 메시아의 자리에 두었던 지도자들에 저항하여 일어나고 있는 민주화의 물결이 모든 정치 지도자들이 자신들이 획득한 권력을 통하여 하나의 "정치적 메시아"로 신격화한데 대한 우상의 파괴로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자신들을 우상화(偶像化)하고, 자신들을 신비화(神秘化) 함으로써 권력에의 신화(神話)를 빚어내며, 신(神)이나 신의 아들로 자칭하면서, 심지어 예배와 숭배의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중동을 거쳐 아프리카와 그리고 아시아, 특히 미얀마와 중국의 아직은 미약한 자스민 혁명, 그리고 유일체제 속에서 세습 왕조를 만들어 가는 북한, 그리고 라틴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이 대지진은 계속 여진을 만들어 가리라 믿습니다.
(iii) "기적"(miracle)과 "신비"(mystery)를 통해 자신들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고 삶의 안정(security)과 행복을 갖다 주는 "경제적 메시아"와"정치적 메시아" 들에게 사람들은 기꺼이 자신들의 "자유"를 담보로 갖다 바치고 노예가 됩니다. 종교재판장은 예수께 말합니다.- "당신은 사람들이 기적을 거부할 때는 하나님도 또한 거부한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기적을 찾듯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기적 없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스스로 그 자신들의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그 자신은 배역자, 이단, 또 자신 외에는 아무런 종교를 갖지 않는 불신자들 보다 백배나 더 나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점(占)이나 마술(魔術)과 같은 짓들을 숭배할 것입니다......당신은 군중들이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그(메시아)인 줄 믿겠노라'고 욕하며 조롱할 때에도,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다시금 기적으로 인간을 노예로 만들기를 원하지 않고, 기적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어진 자유로 믿음을 얻기를 갈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은 그들을 영원히 경포감(驚怖感) 속에 가두어 두는 권력 앞에 있는 노예들의 천박한 황홀이아니라 자유에 기반한 사랑을 갈망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람들을 너무나 높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물론, 비록 본성상 반역적이긴 하지만, 노예들이기 때문입니다." (ibid., p.236)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참된 자유의 길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하였다." (누가복음 4:8 = 신명기 6:13)
- 그렇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위해 살아갈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얻습니다.
(C) 종교적 메시아: -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누가 4:12)
(i) 마지막으로 겪은 예수님의 시험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악마는 성경 구절(시편 91:11-12)까지 인용하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고 유혹합니다. 여기에서 "악마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경도 인용한다." (The devil can cite Scripture for his purpose.)라는 영어 격언이 생겼습니다. (The Oxford Dictionary of English Proverbs,1970, p.180)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란 말도 있고, “정치적 동물” 이란 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인간은 “종교적 동물”입니다. 종교는 인간들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고 인간의 본성에 깃들이고 있는 종교로부터 인간의 내면적인, 그리고 외면적인 모든 활동들이 나옵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뿐만이 아니라 국제정세와 그에 따른 전쟁도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감행됩니다. 선거 철이 되어 정치인들이 점집을 기웃거리고, 최고도의 기술로 만들어진 점보 비행기를 띄울 때도 돼지 머리 앞에 고사를 지내야 하고, 주식을 사거나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려 할 때도 운수를 알아야 하고, 이사, 결혼, 입시를 앞두고 모두 점을 보고, 사주팔자를 따지고, 부모님이 돌아가셔도 풍수설에 근거한 명당을 찾아 모시고자 합니다. 참으로 인간들의 삶에 종교와 관계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ii) 신학자 틸리히(Paul Tillich)가 “종교는 문화의 내용이고, 문화는 종교의 형식이다.” (Religion is the substance of culture, culture is the form of religion.) 란 유명한 말을 했지만 (Theology of Culture, 1959, A Galaxy Book, 1972, p.42), 사실 인간들의 미술, 음악, 무용 등 많은 예술과 문화 또한 종교적인 근원에서 유래되었음을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심지어 개혁자 칼빈(John Calvin)도 기독교 강요(綱要)에서 “인간의 마음 속에는, 그리고 자연적 본능에 의해서, ‘신성(神性,divinity)에 대한 깨달음’ (divinitatis sensum) 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vol.1, LCC vol. XX, p.43) 이에 대한 바르트(Karl Barth)와 브룬너(Emil Brunner)사이의 “자연신학” (Natural Theology)에 관한 논쟁 [1934년에 일어난 E. Brunner의 자연과 은총 (Natur und Gnade)와 K. Barth의 아니오! (Nein!) 의 신학적 소저(小著)를 통한 논쟁]은 다른 기회에 설명드릴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칼빈은 요한복음 강해(講解) 에서 ‘종교의 씨앗’(semen religionis)이 모든 사람에게 심겨져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타락한 본성 속에 아직도 빛의 두 중요한 부분이 남아 있다: 첫째는 ‘종교의 씨앗’ (the seed of religion) 이 모든 사람에게 심겨져 있고; 다음으로는 선과 악의 구별이 그들의 양심에 새겨져 있다." (요한복음 1:5)
(iii) 예수의 시험의 이야기를 기록한 마태복음 4:1-11과 누가복음 4:1-13의 두 말씀을 주의 깊게 읽어 본 사람들은 시험의 순서가 두 번째와 세 번째가 서로 바꿔있음을 알았으리라 믿습니다. “종교적 메시아”의 유혹을 마지막에 둔 누가복음의 기록이 사물의 본질을 더 잘 이해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오는 유혹은 인간들에게 최후의 것이고 가장 궁극적인 것입니다. 인류 역사에 일어나고 사라졌던 많은 종교들과 요즈음의 신흥(新興) 종교들과 유사(類似) 종교들, 그리고 사이비(似而非) 종교들이 사람들을 미혹(迷惑)하고 있습니다. “인민 사원“ 교도들의 집단 자살 사건이나, 통일교와 같은 이단(異端) 종교 뿐만 아니라, 이상한 종교들이 저지르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마치 대형 기업체와 같이 그 교도들을 노예화 해 가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심지어 세계의 조화와 통일을 꿈꿉니다.
종교재판장은 예수께 말합니다. - “우리는 당신의 일을 고쳐서, 기적(miracle), 신비(mystery), 권세(authority) 위에 새로 세웠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다시 양 떼처럼 인도되고, 그들에게 그러한 고통을 갖다 준 끔직한 선물[자유]이 마침내 그들의 마음으로부터 들어내 버려졌다는 데 기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람들을 가르치는 우리가 옳지 않습니까? 말씀해 보십시오. 그렇게 부드럽게 그들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그들의 짐을 가볍게 해주기를 즐겨하고, 심지어 우리의 허락 하에 그들의 약한 본성이 죄를 저지르는 것 마저도 허용하는 우리가 인류를 사랑했지 않습니까? 지금 왜 우리를 방해하러 오셨습니까?.... 들어보십시오, 우리는 당신과 함께 일하지 않고, 그[마귀]와 함께 일합니다....당신은 왜 마지막 선물을 거절했습니까? 만약 당신이 막강한 악마의 마지막 권유를 받아들였더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이 지상에서 찾는 모든 것을 성취했을 것입니다.- 즉, 경배할 그 누구, 그의 양심을 지켜줄 그 누구, 하나의 일사분란(一絲紛亂)하고 조화로운 개미언덕 속에서 모든 것을 통일하는 그 무슨 수단, 왜냐하면 세계적인 통일에의 갈구가 인간들의 세 번 째 이자 마지막 갈망의 고통이기 때문입니다. 전체적으로 인류는 항상 세계정부를 조직하고자 애써 왔습니다... 만약 당신이 세계와 황제의 자색(紫色)옷을 받아들였더라면 당신은 세계정부를 세우고 세계평화를 주었을 것입니다.” (The Brothers Karamazov, A Norton Critical Edition, p.238)
[3] 교회의 현실과 우리가 걸어야 할 자유의 길
(1) 그러나 참으로 중요하고, 또 비극스러운 일은 이러한 시험이 유사 종교나, 사이비 종교나, 이단 종교에서 뿐만 아니라, 기독교 내부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거대 성장을 이룬 대형교회 목사들은 날마다 축복과 건강과 성공과 행복을 빌어주고, 또 팔고 있습니다. 다만 이런 일이 대형교회에서 만 일어나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대부분의 교회에서 주일마다 축복과 건강과 성공과 행복이 선포되고 헌금과 교환되고 있습니다. 구약성서의 예언서는 설교 본문으로 좀처럼 채택되지 않고, 예언자들이 부르짖던 “사회 정의”(social justice)를 위한 외침은 교회의 관심 밖으로 밀려났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가급적 피해서 말해지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라는 설교는 교회의 강단에서 거의 사라졌습니다. 그 대신 우렁찬 성가대와 심지어 오케스트라까지 동원된 음향이 아름답게 치장한 교회 내부와 조화를 이뤄 거대한 “종교적인 쇼”가 진행되고, 소위 성공한 목사들은 “거룩한” 목소리와 억양과 제스츄어와 쇼맨쉽으로 잘 조직된 “예배”라는 쇼를 연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무슨 소리를 하면 대중들이 좋아하는지를 천부(天賦)의 재능을 가진 자처럼 알아채고, 대중들이 듣고 싶어 하고, 듣기 좋아 하는 말만 잘도 알아서 “설교”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 비록 그들이 주문(呪文)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읊조리지만- 라기 보다는 거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종교성 (religiosity)을 만족시켜 주고, 세상사에 바쁘고 피곤한 영혼들은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체험하고, “값싼 은혜” (“cheap grace” - D. Bonhoeffer)에 축복까지 덤으로 얹어 받고 종교적 기분이 향상되어 교회 문을 나서게 만듭니다.
(2) 키에르케고오르(Kierkegaard)가 당시의 덴마크 국가 교회를 향해서,"오늘 날 덴마크에는 더 이상 신약성서의 교회는 없다!"고 예언자적 증언을 선포했는데, 그가 오늘 우리 나라의 교회에 온다면 무엇이라고 외칠 것인지요? 오늘 엄청난 교회 성장을 달성하여 갖은 명성과 안락과 존경을 누리는 대형교회의 성공한 목사들에게 예수님이 “대심문관의 이야기”에서 처럼 남루한 모습으로 종교재판장을 찾아왔듯이 다시 찾아 오신다면 그들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지요? - “주님, 우리들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잘 해 나가고 있는데 왜 찾아 오셨습니까? 무슨 훼방을 놓으시려고 다시 찾아 오셨습니까? 우리들이 다 잘 알아서 할 테니까 제발 돌아가 주십시오. 이 지상의 일은 거저 우리들에게 맡겨 놓아 주십시오.” 그리고 친절히 교회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요?
[결언]자유에의 소명(召命) -“십자가의 길”
(1)자유의 직설법 (Indicative):독일의 탁월한 신약 성서학자이며 신학자인 불트만(Rudolf Bultmann)은 하나님의 은혜에는 직설법(Indicative)과 명령법(Imperative)이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는 선물(Gabe, Gift)이자 동시에 과제(Aufgabe, Task)라고 가르쳐 주었는데, 저는 은혜 뿐만 아니라 자유도 바로 이와 같은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 - “사람이 먹는 것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는 신명기 6장 3절의 말씀은, 바로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는 요한복음 8장 32절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36절의 말씀은 선언적으로 말씀합니다. -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 은혜로 말미암은 “자유”가 선물로 주어져 있습니다. 비록 때로는 우리의 삶이 어두움에 놓여있고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에 봉착해 있다 하더라도, 그렇더라도 우리는 죄와 죽음의 현실을 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자유의 현실을 살아갑니다. 이것이 은혜의 직설법이고, 자유의 직설법입니다.
(2)자유의 명령법 (Imperative) : “은혜”에 “과제”(課題)가 따르듯이 “자유”에도 “과제”가 주어져 있습니다. -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갈라디아서 5: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복지에 들어가게 하려고 40년 동안 광야에서 훈련시켰듯이 [“그렇게 오랫동안 당신들을 광야에 머물게 하신 것은, 당신들을 단련시키고 시험하셔서, 당신들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당신들의 마음 속을 알아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신명기 8:2)] 자유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자유를 훈련해야 합니다.-“당신들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훈련시키듯이, 주 당신들의 하나님도 당신들을 훈련시킨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 두십시오.” (신명기 6:5)
자유가 훈련되어져야 한다는 사실을 본훼퍼(Dietrich Bonhoeffer)목사는 그의 시 “자유에의 도상의 정유소” (Stations on the Road to Freedom) 에서 아름답게, 그러나 비장하게 묘사했습니다.
그대가 자유를 찾아서 떠나려고 허거든,
욕망과 그대의 지체가 그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않도록
먼저 그대의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는 것을 배우라.
그대에게 정해진 목표를 찾아 거기에 복종하고 또 순종하라.
자유의 비결을 맛본 자는 없다. 그것은 다만 훈련에 의할 뿐이다.
(3)자유의 변증법 (Dialectics of Freedom) : 하나님이 있건 없건, 인간이 무서울 정도로 자유롭다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일 것입니다. 자유는 인간에게 있어서 무거운 짐인 동시에 고뇌(苦惱)이며 비극적인 사실입니다. 인간 앞에 놓여 진 자유의 길은 두 갈래라는 것을 그들은 인식했습니다. 한 쪽의 길은 신인(神人),즉 그리스도에 이르는 길이며(도스토예프스키), 또 다른 한 쪽의 길은 인간의 신화(神化,deification), 즉 초인(超人)의 길입니다(니체). 그리스도에 이르지 못한 자유는 어떻게 비극적인 운명에 다다랐는지를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작중 인물들을 통하여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타브로귄 (Stavroguin)과 베르실로프 (Versilov)의 자유는 의미가 없는 공허함이고, 스비드리가일로프 (Svidrigailov)와 표도르 카라마조프 (Fyodor Pavlovitch Karamazov)의 자유는 인격을 분열시키며, 라스콜리니코프 (Raskolnikov)와 표토르 베르호벤스키(Pyotr Verhovensky)의 자유는 범죄에 도달하고, 키릴로프 (Kirilov)와 이반 (Ivan)의 자유는 자살과 살인의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 니체가 스스로 파멸의 길에 이르렀던 것처럼.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고후 3:17) - 성령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에 이르는 자유의 길을 가리켜 주시고, 그 자유를 누리고 살게 해 주십니다. 자유의 직설법과 자유의 명령법의 변증법 (dialectics) 가운데 있는 삶- 그것이 성령 안에 있는 삶입니다. 자유의 직설법은 우리의 내면에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메시아를 추구하지 않는 삶을 가능하게 해 줍니다. 자유의 명령법은 우리의 외면에서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메시아의 거짓의 우상을 파괴시키는 자유에의 소명의 삶으로 우리를 초청합니다.
(4)자유에의 소명: 크리스천의 삶은 자유의 직설법과 자유의 명령법의 긴장 가운데, 즉 자유의 변증법을 삽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비극적인 운명-십자가의 길을 걸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는 데 자유의 운명이 비극이고, 그리스도의 운명이 비극이라는 사실을 증명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길의 끝에는 하나님의 새로운 현실,- 부활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쪼록 그리스도를 붙잡고,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의 선물을 지키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 가신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이 사회와 역사 속에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실현하는 성령의 삶을 사실 수 있기를 다짐하는 주후 2011년의 사순절과 부활절을 맞는 새 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 하 은규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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