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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일제(日帝)의 방해
봄은 오지 않았건만 검불 아래에는 새 생명의 태동을 알리고 있었다.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에 맞추어 김천지역에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은 훈풍이 돌고 있었다. 이때 최송설당은 이한기, 고덕환, 최석태, 최동열, 김종호 수임 이사 5명을 서울의 자택으로 초청하였다.

정걸재에 모인 수임 5이사(출처 : 송설 역사관)
(뒷 줄 외쫀부터 이한기, 김종호, 조상걸, 최동열, 고덕환, 최석태)
“이사님들 먼 길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불러주시니 영광입니다.”
“오늘 이사님들을 초청한 것은 서럽고 불쌍한 우리 젊은이들을 위해 학교 설립에 전심전력을 다해달라는 부탁을 드리고자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여사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임 이사들은 최송설당과 굳은 약조를 하고 김천으로 내려왔다.
서울을 다녀온 수임 이사들은 즉시 이한기 사법서사 사무소에 기성회 사무소를 설치했다. 한 달간에 걸쳐 서류를 준비하였다. ‘1930년 3월 24일 최송설당 교육재단 설립인가원서’를 김천군에 제출했다. 그런데 김천군에서는 경상북도로 진달이 되지 않고 있었다.
여러 차례 수임 이사들이 경상북도 도청을 찾아 와타나베 학무 국장을 만났다. 기부자의 뜻을 전하고 속히 서류진달을 부탁하였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전번과 같았다.
“와타나베 국장님, 저희가 다섯 번째 도청을 방문했습니다. 이번에는 학교 설립 허가를 해주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개인적으로는 학교 설립을 해주고 싶습니다. 총독부에서는 서류를 올리지도 못하게 하니 난들 어떻게 합니까.”
“저희가 제출한 서류에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그런 것이 아니고, 꼭 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면 농업학교나 상업학교로 신청을 하시면 바로 승인이 날 텐데요.”
그제야 수임 이사들은 학교 설립 허가원이 나지 않는 이유를 알았다. 이러한 문제라면 도청 학무 국장이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짐작되었다. 당시 총독부는 인문계 학교 출신들은 독립운동에 관심이 많다고 보았다. 식민지 정책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따라서 인문계가 아닌 실업계 학교로의 변경을 집요하게 강요했다.
최종 결정이 나기 전에 언론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최송설당은 동아일보 주필을 찾아갔다.
“제가 고향 김천에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데 총독부의 방해로 인문계 학교 인가가 나질 않습니다. 언론에서 도와주십시오.”
“여사님! 총독부는 지금 광주학생사건의 여파로 정신이 없는데 학교 설립을 쉽게 허용하겠습니까?”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지난해 전라남도 광주군에서 조선인 중학생과 일본인 중학생이 충돌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때 조선인 학생이 일본인 학생에게 맞아 죽었다는 소문이 퍼졌답니다. 새벽닭 울음소리처럼 일시에 시위가 일어났지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마른 나무더미에 불이 붙은 격이었지요. 194개 학교에 5만여 명이 거세게 일어났답니다.”
“저런…….”
“경찰은 잡아가두고, 학교가 으르고, 학부형이 달래고 하였답니다. 금년 4월에야 겨우 진정된 상태입니다.”
“그런 사태가 있었군요.”
“총독부는 광주의 사건이 조선 민중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쉬쉬하고 있었답니다. 신간회에서 이를 눈치채고 광주학생운동의 진상을 알리고자 했지요. 민중대회 개최를 준비 중이었는데 이것이 발각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신간회 간부 홍명희, 권동진, 이종린, 오화영, 박희도, 이관용, 조병옥 등이 줄줄이 감옥 1)에 들어갔지요. 우리는 이런 내용을 보도도 못하고 있질 않습니까."
1) 교도소의 옛말
“참으로 난감한 일이네요.”
“그건 그렇고, 여사님께서 학교를 세우겠다는 의지는 확고하신 거지요?”
“물론입니다. 만약 인문계 학교 설립허가가 나지 않는다면 저는 학교 설립 자체를 포기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하며 배수의 진을 쳤다. 편집국장도 적극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5월 22일에는 동아일보에 기사가 실렸다.
“당국의 주장은 전 조선을 통해 고등보통학교는 대개가 사상이 불온하야 인가할 수 없는즉, 실업학교로 설치하라는 방침이며 설립자 최여사는 절대로 고등보통학교를 설립할 의향이라고 한다.”
그러나 동아일보의 보도에도 불구하고 총독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조선일보에서도 총독부의 결정을 촉구하는 뜻으로 다시 한 번 기사를 실었다.
“교육 사업이라는 것은 도에서 지방비로 반드시 학교를 설립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독지가가 나와 자기 돈으로 설립하겠다고 하는데 무슨 이의가 있는지 물의가 분분하다.”
언론기관에서 여론을 조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의 눈치를 보고 있는 조선총독부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총독부의 교육법상으로는 고등보통학교 설립이 보장되어 있었다. 이를 관철하고자 김천 주민 대표와 후원회 대표,수임 이사들은 인해전술로 총독부 타께배 학무 국장을 찾아갔다. 총독부 학무 국장은 면회조차도 거절했다.
이때 김수길은 삼천리 잡지에 '일본이 실업계학교 설립을 강요하자 최송설당은 인문계 학교 설립투쟁 전개'라는 내용으로 글을 실었다. 당황한 총독부는 6월 2일에 총독부 학무과장 명의로 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는 불허한다는 통보를 해왔다. 이제는 학교 설립을 포기하든지, 실업학교로 설립하든지, 끝까지 투쟁을 해서 목표를 달성할 것인지만 남았다.식민지 백성이 소신을 관철한다는 것은 정말 고단한 일이었다.
학교 설립이 한계에 부딪치자 김천지역 설립 후원회 인사들과 수임 이사들은 최송설당을 찾아갔다.
“여사님, 인문계든 실업계든 학교만 세우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게 무슨 말씀들을 하시려는 거지요?”
최송설당은 안경을 벗으면서 눈을 부릅뜨고 후원회 인사들을 쳐다봤다.
“총독부는 실업계 학교가 아니면 학교 설립은 허가하지 않는다고 하니 실업계 학교라도 출발하자는 것입니다.”
온화한 최송설당의 모습은 사라지고 결기에 찬 목소리는 천정을 뚫을 기세였다.
"내가 학교를 세우는 것은 젊은이들에게 민족교육을 시키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안 된다면 재산 기부를 취소하겠습니다."
“실업학교로도 민족교육을 시킬 수 있지 않습니까?”
“물론할 수 있지요. 지금 우리가세우려고 하는 학교는 보통학교를 졸업한 사람에게 중등교육을 시키는 것입니다. 제대로 된 중등교육을 시켜야 고등교육기관으로 진학을 할 수가 있지요. 그래야 이 나라의 동량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실업학교를 졸업하면 면서기나 사원 정도는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영원히 일본의 식민지 백성으로 살 수 있겠지요.”
설립 후원자들은 최송설당의 결연한 의지에 할 말을 잃었다.
“또 있지요. 일본은 자기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는 ‘중학교’라고 하고 우리가 세우는 학교는 ‘보통’이라는 글자를 넣어 차별하고 있어요. 우리가 저들과 동등한 수준의 교육을 시켜낼 때 차별도 없어질 것입니다.”
설립 후원자들은 최송설당의 확고한 의지만 확인하고 물러 나왔다. 최송설당도 큰 소리치기는했으나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런 가운데 조선일보는 ‘인문계 고등보통학교 대신에 실업학교 설립을 내정했다.’고 보도했다. 불난 집에 풍석질을 하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신문 보도를 본 본 김천지역의 여론은 분분했다.
"최송설당은 학교 설립 계획을 취소하고 경성에 산다더라."
"총독부의 반대로 결국은 실업계로 학교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송설당은 강인한 여성이었다.한번 결심하면 반드시 관철하고야 마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배수의 진을 칠 필요성을 느꼈다. 자신의 의지를 김천 주민들에게 확인시켜 주기 위한 행동이 필요했다.
1930년, 하지가 지나고 본격적인 더위가 오기 전이었다. 최송설당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살겠다.'라며 김천으로 내려왔다. 전 재산을 희사키로 한 이후 첫 귀향이었다.

1,000여 명이 모인 최송설당 환영회 (출처 : 동아일보 1930.7.2. 보도)
최송설당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한 김천 주민들은 최송설당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추어 김천역으로 몰려나왔다. 김천역 구내에는 관민 유지들이 플랫폼을 매웠다.역전 광장에는 화환은 마차로 한 대가 되었다. 취주악대의 연주는 끝없이 울려 퍼졌다. 만세 삼창은 오창, 십창이 되었다. 인력거로 상무관까지 모시고 성대한 환영식이 개최되었다. 76세 최송설당의 노안에는 시종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감사의 마음을 나타내는 주민들의 표정은 감동으로 나타났다. 정걸재로 향하는 연도에는 사람의 물결이 넘실댔다. 최송설당의 이러한 단호한 행동은 수임 이사들로 하여금 결의를 다지게 했다. 총독부에도 최송설당의 학교 설립에 대한 진정성을 보여 주기에 충분했다.그러나 결실은 얻지 못하고 해가 바뀌었다.

'송설로' 벚꽃 길(출처 : 김천고등학교)
(김천시에서는 김천역에서 김천 중. 고등학교 앞 도로를 '송설로'로 명명하고 있다.)
다급해진 최송설당은 부득이 친일인사들에게도 도움을 청했다. 최송설당은 중추원 부의장 박영효, 중추원 참의 박영철, 중추원 칙임 창의 한상룡을 차례로 찾아갔다. 한상룡은 최송설당이 어떻게 부자가 되었는지 가장 잘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또한 최송설당으로부터 재물을 좋은 일에 쓰겠다고 약조까지 받은 인물이었다.
“칙임참의님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알다마다요. 최송설당 아니십니까.”
“이제 제가 약조한 일을 실천하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떤 결심을 하셨나요?”
“저의 전 재산을 들여 내 고향 김천에 고등보통학교를 세우고자 하는데 허가가 나질 않습니다.도와주십시오.”
“큰 결심을 하셨는데 저도 도와드려야지요.”
그러나 친일 세력으로 권세를 누렸던 그들이었지만 인문계 고등보통학교 설립허가에는 도움이 되질 못했다.
심지어 일본인 문필가 콘도오시로쓰게(權藤四郞介)를 찾아가 여론 작업을 펼쳐 일본계 신문에 보도 자료를 내보냈다.
“조선 총독부 학무국은 공립 하교도 세워주지 못하면서 사립학교를 세우겠다고 하는데도 승인을 하지 않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그러나 조선총독부는 마이동풍이었다. 오히려 고타마(兒玉) 정무총감의 부인을 동원하여 최송설당을 설득하려고 했다.

1926년 완공된 조선총독부 청사(출처 : 위키백과)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1919년 제3대 조선 총독으로 부임하여 1927년 임기를 마치고 해군 대신으로 일본으로 갔다. 제5대 총독으로 1929년 8월에 다시 부임했었다. 총독부인 사이토 하루코도 함께 경성에 와있었다. 최송설당은 경성부인회 회원 가입을 계기로 사이토 하루코와는 명절 선물을 교환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개인적인 청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이토 하루코도 최송설당은 조선 사람 중 믿을 만한 지인 가운데 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연을 이용하여 최송설당은 총독 부인을 통해 마지막 승부수를 던져야 할지 갈등이 왔다. 고민 끝에 만해 한용운 선생을 찾았다.
“스님, 긴히 상의 드릴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학교를 세우려고 한 것이 앞으로 나갈 수도 없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미련이 남습니다.”

만해 한용운 (출처 : 한국민족 대백과)
“절대 포기하시면 안 됩니다.”
“이제 남은 것은 조선 총독 부인을 찾아가는 일만 남았습니다.개인적인 친분을 사리(私利)에 이용한다는 비난을 받지 않을까요? 훗날 이를 두고 친일로 보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는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입장에서 보라고 했습니다. 왜 조선총독부가 학교 설립을 불허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공립학교는 허용하면서도 사립학교를 불허하는 것은 사립은 자신들의 통제가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민족교육의 산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실업학교는 허용하면서도 인문계 학교는 불허합니다. 이는 인문계 중등학교는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스님 말씀대로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생각하니 답이 나오네요.”
“인도의 간디를 보십시오. 식민지 국민 간디는 런던대학으로 진학했습니다. 그는 대학에서 인도 국민이 영국 국민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인도 독립의 선도자로 나서고 있습니다.”
“그런 일도 있었나요?”
“여사님께서는 반드시 인문계 중등학교를 세우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학생들이 대학으로 진학할 수 있는 징검다리를 만들 수 있습니다. 총독을 찾아가는 것은 친일이 아닙니다. 학교가 서야 조선의 간디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제야 제가 할 일을 명확히 알았습니다. 스님, 용기를 얻고 돌아갑니다.”

백남훈 (출처 : 한국학 중앙연구원)
최송설당은 만해 스님을 만나고 왔지만 한가지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었다. 그때 생각나는 사람이 백남훈 선생이었다. 백남훈은 3.1. 운동 당시 와세다 대학생으로 2.8. 독립운동을 배후에서 조정했으며 동래 일신 고등여학교를 거쳐 한양의 협성실업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이었다.
"백 선생님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선생님은 일본 유학도 하셨고, 국제정세에도 밝으시니 찾아뵈었습니다."
"제가 도와 드릴 일이 무엇인가요?"
"제가 학교를 설리하고자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설립 인가가 나질 않습니다. 마지막 수단으로 총독 부인을 만나고자 합니다. 무슨 말을 해야 총독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요?"
"그러시면, 일본 언론에 호소하겠다고 해 보십시오."
"그동안 국내 언론에 아무리 호소해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조선과 일본은 차이가 있습니다. 조선은 식민지이기 때문에 정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본 내에는 의회정치가 자리 잡혀 있습니다."
" '정치'라는 말은 난생처음 들어봅니다."
"조선은 총독부가 모든 일을 좌지우지합니다. 그러나 일본 내에서는 의회가 내각을 움직입니다. 조선 총독이 식민지 정책에 실패했다는 여론이 조성되면 총독도 바뀔 수 있습니다."
"여론이 그렇게 무서운가요?"
"사이토 총독은 차기 일본 총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사이토는 민정당 소속이지요. 상대당인 정우회에서 민정당을 공격해 올 수도 있도록 빌미를 만들어 주면 됩니다. "
"정치가 무언지 모르겠으나, 선생님의 말씀에서 답은 찾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송설당은 한용운과 백남훈을 만남 후 총독부인 사이토 하루코에게 면회를 신청하였다. 총독관저로부터 방문해 달라는 연락이 왔다.
“여사님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최여사님, 어서 오세요. 반갑습니다.”
“지난 8년간 조선에서 살고, 최근2년 일본에 살다가 왔는데 조선이 고향처럼 느껴지네요.”
“조선을 아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일본에 계실 동안 여행은 좀 하셨나요?”
“예, 총독 각하와 고마신사(高麗神社) 1)를 다녀왔습니다. "
1) 고마신사는 1300년 전 일본으로 건너간 고구려 왕자 약광(若光)을 기리는 신사다. 슛세이요진(出世明神)이라고 하여 출세를 도와주는 신사다. 사이토 마코토도 실제 이 신사를 참배하고 총리가 되었다.
“조선의 기를 받으셨으니 좋은 일이 있으실 겁니다.”
“그건 그렇고, 학교 설립 때문에 오셨나요?”
사이토 하루코는 총독 부인답게 최송설당의 방문에 앞서 왜 면담을 요청했는지에 대해 나름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예, 그렇습니다. 여사님께 마지막으로 간청 드리고자 찾아왔습니다.”
“총독부에서는 이미 불가 방침을 통보한 걸로 아는데요.
“예 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여사님께 눈물로 간청 드립니다.”
“여사님께서 이렇게 간청하시니 저도 난감하네요.”
“총독께서 들어주시지 않으면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습니다.마지막으로 일본 언론에 호소해 보고자 합니다.”
“예! 일본 언론에 호소하신다고요.”
사이토 하루코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과잉 반응을 보였다. 최송설당은 직감적으로 백남훈 선생의 조언이 먹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일본은 일찍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 돈으로 학교를 세우고자 하는데도 불허하는 것은 조선인을 차별하는 것이 아닐까요?이것이 옳은 처사인지 일본 언론에 물어볼 수밖에요.”
사이토 하루코는 정치인의 아내답게 머리 회전이 빨랐다. 조선인이 일본 언론에 ‘사이토 총독의 조선 식민지정책은 실패했다.’고 떠드는 것을 난감한 일이었다.총독에게도 치명적인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조금 전까지 고자세를 보이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유화적으로 나왔다.답변도 신중해졌다.
“총독께서도 여러 가지 사안을 고려하고 계시겠지요. 제가 존경하시는 분이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하시는데 저도 적극 나서보겠습니다. 일본 언론에 호소하는 일은 잠시 뒤로 미뤄보시지요.”
“여사님께서 힘써 주시기만 한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당시 일본은 식민지 조선에 대해서는 무단정치를 펴고 있었다.그러나 일본 국내에서는 서구식 입헌군주제로서 정당 간에는 정치적 투쟁이 치열하였다. 최고 권력자인 총리대신 자리를 두고는 권력투쟁이 항시 벌어졌다.사이토 마코토 총독도 정계의 거물이었다. 차기 총리대신으로 유력한 후보자 물망에 올랐다. 식민지 조선에서는 폭군처럼 군림할 수 있었지만 일본 내의 여론에 대해서는 민감한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배수의 진을 친 최송설당은 긍정도 부정도 아닌 답변을 받은 상태에서 집으로 돌아왔다.
사이토 총독은 사이토 하루코로부터 최송설당의 의도를 들었다. 일본 언론에 자신의 처사가 나쁜 방향으로 보도될 경우 총리대신의 꿈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날 출근과 동시에 다께배(武部欽一) 학무 국장을 불렀다.
“이봐 국장, 요즈음 골치 많이 아프지?”
“예, 각하.”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 인가해주면 어떨까?”
“개인적으로는 설립 허가를 해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본국에서…….”
“본국 허가를 받아야 한단 말이지.”
“예. 각하”
“그렇다면 동경을 한번 다녀오시오. 조선의 사정도 잘 설명하고”
“예, 각하.”
최송설당은 일주일이 지나서 사이토 하루코 여사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최송설당은 직감적으로 좋은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이토 하루코 여사가 입장이 곤란하다면 자신을 부를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즉시 총독관저를 찾았다. 서로 인사를 나눈 후 사이토 하루코가 입을 열었다.
“총독께서 가능한 방법을 찾아보시겠답니다. 학무 국장을 일본으로 출장을 보냈으니 한 달만 기다려 보세요.”
“감사합니다.”
“제가 총독님을 못살게 했다는 것도 알아주세요.”
자신이 총독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것도 강조했다. 총독이 학교 설립을 승인할 의사가 있음이 확인되었다. 절반의 승인은 받은 셈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구름 위를 날아갈 듯 가볍고 걸음걸이도 빨랐다.
다께배 학무 국장은 본국의 문부성 관리와 업무 조율을 마쳤다. 서울로 돌아와 기자회견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조선인의 학교 설립을 환영한다. 그러나 고등보통학교도 인문계 교육만 시킬 것이 아니라 실업계 과목도 병행하여 수업을 하는 조건으로 학교 설립을 허가한다.”

김천고보 인가 실현 보도(동아일보 1930.10.21 보도)
1930년 10월 경상북도 도지사로부터 총독부에 학교 설립 인가 원서가 전달되었다는 통지를 받았다. 설립허가원을 내고 7개월 만에 도청을 벗어나 총독부로 올라간 것이다. 당연히 총독부의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최송설당은 평생의 소원이 눈앞에 다가왔다는 생각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그러나 시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930년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가을 쌀값이 폭락했다.기부받은 토지에서 나온 소출로 교사 신축 대금을 치르기에는 2만 원가량 비용이 모자라는 사태가 발생했다. 당초 제시했던 재산이 30만 2천1백 원이었는데 32만 원으로 증액된 것이다. 설립이 1년 밀리자 기본금에 1930년 수익 예상금 2만 6천 원을 합친 예산을 마련했다. 1만 6천 원의부족분이 생겼다며 총독부는 제동을 걸고 나왔다.
김천고등보통학교 수임자 고덕환은 경상북도 도청으로 출두하라는 공문을 받았다. 급히 도청을 방문하였다. 학무 국장은 고덕환에게 출연금이 부족하다며 다그쳤다.
“당초 기본금 30만 2천1백 원은 언제든지 구비하도록 정관에 명시되어 있는데 이 돈이 부족하지 않소?”
“예, 금년 농사가 흉년이 들어서 그렇습니다. 토지 대금 외에 금년도 수입을 2만 6천 원 예상을 했습니다. 그러나 금년은 물가도 폭락하였고 흉년이 들어 1만 6천 원이 부족하게 되었습니다.”
“이유 불문하고 기본금이 한 푼이라도 부족하면 학교 설립 허가는 나지 않을 것이오.”
학무 국장의 태도는 단호했다.고덕환은 도청을 나오자 곧바로 최송설당을 찾아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며칠 후 설립 추진 위원들과 김천지역 후원회 임원들 간에 연석회의가 열렸다.
“최송설당은 전 재산을 내놓았는데 나머지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나머지 자금을 조달해야 할까요?”
“지역 유지들로부터 기부금을 받도록 합시다.”
이렇게 하여 지역 유지들로 하여금 1만 6천 원을 모금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히 풀리지 않았다. 전국적으로 흉년이 들어 최송설당도 설립자금을 충당하지 못했다. 김천의 유지들도 흉년이든 형편은 마찬가지였다. 후원금은 모금되지 않고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이번에도 최송설당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최송설당은 추진 위원회 회의를 개최했다.
“나는 서울의 무교정 55칸 집을 처분하겠습니다. 이 주택은 대지234평이므로 평가액이 2만 3천 원은 될 것입니다. 이걸 내어 놓겠소.”
“여사님, 이것은 마지막 남은 재산이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오만 학교를 세우는 일이 더 중요하지 않겠소.”
“이 주택을 아무리 헐가로 판다고 하여도 부족한 예산을 보충할 수 있을 것이오. 조금도 구애치 말고 일이나 잘 해주세요.”
“감사합니다.”
최송설당의 폭탄선언에 회의장 분위기는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최송설당이 자신의 전 재산을 학교 설립에 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김천고보 설립 인가 조선총독부 관보
우여곡절 끝에 1931년 3월 17일에 총독부 고시 제145호가 발표되었다.
한국인 남자 학생만을 교육할 ‘재단법인 최송설당 교육재단’설립 인가가 났다. 사립 인문계 고등보통학교로 5학급 5년제로 운영할 수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인문계 학교라고 하더라도 실업 과목을 첨가하는 조건도 곁들였다.최송설당이 설립 의지를 발표한지 꼭 1년 만의 일이었다. 3월 21일과 4월 25일 동아일보는 보도를 내보냈다.
“최송설당 여사는 사재 전부를 학교 설립에 내놓았고, 그 진의가 총독부로 하여금 감동시켰기 때문에 특별히 김천고보 설립 인가를 해줌에 이르렀다.”
“적막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의 김천을 이상으로 김천으로 만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조선에는 많은 사립학교가 세워졌다.당시 서울의 5대 사립학교는 양정, 배재, 보성, 휘문, 중앙이 있었다. 이중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를 제외하고 양정의 엄주익, 보성의 이용익, 휘문의 민영휘, 중앙의 김성수 등이 대표적인 육영 사업가였다. 김천고등보통학교가 인가를 얻게 된 당시에는 전국적으로 공립고보 15개교, 사립고보 11개교가 있었다.

1932년 당시 전국 사립학교 현황(출처 : 김천시사)
사이토 마코토 총독은 자신의 보직을 걸고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을 허용함으로써 차기 일본의 총리대신에 무난히 부임할 수 있었다.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일본으로 들어가는 날이 정해졌다.총독부에서 재단 이사장 고덕환에게 전화가 왔다. 총독이 추풍령역에서 임시 정차할 터이니 고덕환 이사장과 최송설당 여사가 대구까지 동승하자는 것이었다.고이사장과 최송설당은 총독부의 요청대로 추풍령역에서 기다렸다가 동승했다.
“어서 오시오. 여사님! 여사님의 학교가 어디에 세워지는지 열차를 타고 가면서 보고 싶어서 오시라고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총독님의 배려로 저희 학교가 세워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열심히 후학들을 가르치도록 하겠습니다.”

개교 당시 본관, 정걸재, 경부선 열차(출처 : 송설 역사관)
추풍령을 지난 열차는 검은 연기를 뿜으며 곧바로 김천역을 향해 달렸다. 잠시 후 오른쪽 차창 너머로 고성산 아래 넓은 터가 보였다.
“저기 느티나무가 울창한 지역이 학교가 들어설 자리입니다.”
“저기가 여사님이 세울 학교란 말입니까?”
“예 그렇습니다.”
“정말 훌륭합니다. 여사님께서 일본 정계에 나를 나쁜 사람이라고 했다면 총리대신으로 부임하는데 문제가 많았겠지요. 하하하…….”
“그땐 너무 급박해서 그랬습니다.”
“아닙니다. 여사님께서 내게 좋은 교훈을 주셨는걸요.”
삽시간에 열차가 대구에 도착하자 최송설당과 고덕환 이사장은 작별 인사를 하고 하차하였다.
이후 최송설당은 사이토 내외의 온정에 보답하는 뜻으로 과하주를 백자 항아리와 오동나무 상자로 포장하여 사이토 총독에게 보냈다. 과하주는 김천의 명주로 여산(익산) 호산(개경), 춘단(춘천)과 더불어 이름이 높았다. 매년 정월 보름에 남산동의 과하 샘에서 물을 길어 담는 술이다.비록 한쪽은 식민지배 통치자요 한쪽은 피압박 민족이었으나 학교 설립의
의 인연으로 생긴 정은 이어져 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