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산 : 전남 여수 삼산면 거문도소재 불탄봉(242m) 거문도는 고흥반도로부터 남쪽으로 40㎞ 지점에 있다. 삼도(三島)·삼산도(三山島)·거마도(巨磨島)라고도 불린다. \ 고도(古島)·동도(東島)·서도(西島)의 세 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 고도만을 거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도의 면적은 0.42㎢이고, 해안선 길이는 3.70㎞이다. 서도의 면적은 7.77㎢이고, 동도의 면적은 3.43㎢이다. 8:10분 이러한 거문도를 탐방하기위해 외나르도 선착장에 도착한다. 승선하기위해 개찰하고 선착장으로 나오니 쌀쌀한 바람이 불어온다. 8:40 여수항에서 출발한 쾌속선이 외나르도 항에 도착하여 일행을 승선시킨다. 8:50분 외나르도 항을 출발한배는10:10분 거제도 동도에 도착한다. 백도관광팀은 고도항에서 유람선으로 환승한다고 한다. 동도항은 사유지로서 입항료 500원을 추가로 징수한다. 동도항에 내려 서도로 가기위해 도로를 따라 가는데 저만치 삼호대교가 웅장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서도는 세 섬 중 가장 큰 섬으로서 온 섬이 동백나무로 뒤덮여 있어 연중 푸른데, 이곳에 위치한 수월산(水越山, 128m)에는 다도해의 뱃길을 비춰주는 거문도 등대가 있다. 고도와 서도는 삼호교로 연결되어 있다. 삼국시대 이전에는 마한에 영속되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의 원촌현에 속하여 삼호(三湖)라고 하였다. 1396년(태조 5)에는 흥양현(현재의 고흥군)에 속하여 삼도라고 불렸으며,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으로 여수군 소속이 되었다. 1949년에는 여천군으로 이속되었다가 1998년에 통합 여수시 삼산면이 되었다. 건너편에 서도의 중앙에 안테나가 있는 산이 바로 거문도에서 제일 높은 음달산(237m)이다. 1885년(고종 22)에 영국은 청·러시아·일본과의 세력 균형을 이유로 동양 함대를 주둔시켜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하여 해밀턴 항(Port ㏊milton)으로 불렀다. 그 뒤 영국은 섬을 매수하겠다는 등 갖은 술책을 쓰다가 결국 1887년 2월 27일에 이곳에서 철수하였다. 이때 종래 부르던 삼도를 거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과거 러시아의 태평양 출구 구실을 하여 ‘동양의 지브롤터(Gibralter)’라고도 불리었다. 지명은 삼도에 문장가가 많아서 거문도(巨文島)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이곳에 왜인들이 고기잡이를 하기 위해 살았기 때문에 ‘왜섬’이라고 부르던 것을 ‘왜’와 훈이 비슷한 ‘외섬’으로 훈차(訓借)해 고도(孤島)로 불리다가 후에 고도(古島)가 되었다는 설도 있다. 거문도의 주 섬은 삼도중 제일작은 고도이다.\ 고도·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둘러싸인 바다를 도내해(島內海)라고 하는데, 수심이 깊어 큰 배의 출입이 자유롭다. 고도는 섬의 동쪽으로 비교적 높은 산지가 형성되어 있고, 서도를 바라보는 서쪽으로는 만입이 형성되어 있다. 해안은 대체로 암석해안이다. 연평균기온은 14.4℃, 1월 평균기온은 2.1℃, 8월 평균기온은 24.8℃, 연강수량은 1,247㎜이다. 위는 녹산등대가는 정자에서 바라본 삼호교의 우아한 자태이며 아래는녹산등대로 향하는 뱃노래길이다. 저끝에 녹산등대가 보인다. 거문도의 2009년 기준으로 인구는 704명(남 386명, 여 31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세대수는 307세대이다. 취락은 섬의 서쪽 선착장 주변에 집중해 있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없고 밭 0.11㎢, 임야 0.25㎢이다. 탐방객을 향해 탐스럽게 피어있는 동백꽃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수산업이 주민의 주업이며, 농산물은 콩·고구마 등이 주로 생산된다. 고도를 중심으로 하는 수역(水域)은 순천·여수 방면에서 제주도로 항해하는 여러 선박의 기항지로서 근해어업의 근거지이다. 갈치·삼치·고등어·방어 등의 좋은 어장이 되며, 김의 생산지로도 유명하다. 전복 양식이 활발하며, 갈치는 이 섬의 특산품이다. 성어기에는 파시(波市)가 섰는데, 파시 성립의 역사가 길어서 현재의 마을들은 대개 파시에서 유래되어 발달한 것들이다. 주민 사이에 구전되어 내려온 「거문도뱃노래」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호로 되어 있다. 교통은 여수·녹동 등지에서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교육기관으로는 거문중학교와 초등학교가 있다. 뱃노래길을 가다보면 이런 축대가 쌓인것을 볼수 있는데 이 축대는 바로 논둑이고 밭둑이다. 10:55 인어 해양공원에 도착한다. 아름다운 인어상이 우리를 반긴다. 거문도는 고도, 동도, 서도의 3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어 예전에는 삼도라고도 불리웠다. 일찍부터 문장과 학문이 탁월한 인물이 많이 배출된 곳으로 유명하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거문도 서도의 수월산 아래 바다 속에 길이 30m 가량의 남근형 바위가 있어서 대유학자가 태어났다고 하며, 이 바위를 "문필암"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또,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이 섬에 들어와 김유라는 대학자와 필담을 나누다가 그의 문장력에 탄복하여 거문도라 이름지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이곳은 동양 최대의 거문도 등대, 수백년 묵은 동백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찬 수월산의 동백나무숲, 남해안 최고의 절경에 속하는 백도 등 아름다운 관광지와 영국군 묘지, 조선시대 유학자로 유명하였던 귤은 김유를 기리는 거문사, 그리고 유학자 만해 김양록을 기리는 서산사 등의 역사 유적이 있다. 거문도 최북단에 자리한 녹산등대가 바로 눈압에 자리하고 있다. 11:10 녹산등대를 뒤로하고 거문초교에 도착한다. 서도의 수월산 남쪽 끝에는 1905년 4월 우리나라 최초로 불을 밝힌 거문도등대가 있다. 거문도 주변의 해역은 고기떼가 훤히 보일 정도로 물이 맑으며, 특히 성어기에는 각지에서 고기잡이배들이 몰려와 불야성을 이룬다. 거문도와 그 주변 섬들은 갯바위낚시터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여름철이면 해수욕과 함께 낚시를 즐기려는 외지인들도 많다. 뱃노래길 이정표가 나타난다. 거리표시도 없이 방향만 제시되어 있다. 뱃노래길은 2013.5.26~2014.2.27까지 총예산 2억6천만원을 투입해 거문등대로 부터 녹산등대까지 약 10km구간을 트래킹 할 수 있도록 조성한 길이다. 불탄봉 북쪽은 명소가 없이 울창한 동백숲길로 조성되어 있고, 불탄봉 남쪽은 신선바위 선바위 촛대바위, 거문도등대등 명소가 즐비한 곳이다. 1박2일이면 충분한 시간적인 여유를 가지고 관광할 수 있지만 당일치기 하려면 백도 관광후 불탄봉 남쪽코스만 탐방하면 좋은결과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거문도의 농사패턴이 많이 바뀐듯 하다. 쑥농사를 많이 하고 있는데 지금이 수확철인가 보다. 낫으로 베어서 손질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육지에서는 아직 구경도 못하지만 봄이 제일먼저 오는 이곳 거문도민들은 봄을 알리는 쑥을 캐서 육지로 내보내 짭짤한 수익을 올리는듯 하다. 거문도 뱃노래길은 온통 동백숲으로 우거져 있다. 거문도와 인접한 손죽도에는 16세기 초, 왜구와의 해전에서 전사한 이대원 장군의 사당인 충렬사 등을 비롯해 역사유적이 많다. 거문도에서 동쪽으로 28km쯤 떨어진 백도는, 39개의 크고 작은 무인도로 이루어 졌다. 깎아지른 듯한 바위벽이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고 웅장하게 솟은 바위벽은 세로로 골골이 파여 있어 오묘한 모습을 보여준다. 크고 작은 여러 부속 섬들도 갖가지의 기묘한 형상을 띄고 있어 바다에 잠긴 금강산처럼 풍광이 빼어나다. 11:37분 임도에서 능선을 찾아 오르는길에 거문도 뱃노래길 안내도를 만나게 되는데 안내도가 아니라 울릉도 도감을 지내고 고향 거문도에 돌아와 향토발전을 위해 노력한 오성일의 업적을 적은 묘의 해설판이다. 도감은 현재의 군수에 해당한다. 생리현상을 해소하고 능선에 올라서니 드넓은 바다가 저멀리 하늘과 맞닿은수평선까지 탁트여 가슴 한구석에 남아있는 스트레스를 확 날려보내준다. 짙푸른 바다에 여객선 한척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이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한폭의 그림이다. 음달산을 향해가는 등로 가운데 맑은 샘물이 졸졸 흘러나온다. 길 가운데 흘러나오고 있지만 인적이 드문곳이라 물이 깨끗하다. \ 그저 지나칠 수 없어 엎드려서 한모금으로 목을 축여본다.\ 달콤하고 상스러운 기운이 몸속으로 스며든다. 12:17분 뱃노래길은 음달산을 우회하여 억새평원에 도착한다.산에는 온통 동백으로 뒤덮여 있다. \ 다음주쯤엔 온통 붉은 동백꽃으로 온산이 뒤덮이겠지.... 좌측으로 변촌으로 가는길이 있지만 종주를 목적으로 불탄봉을 향해 직진한다. 뒤돌아본 음달산.... 군사시설이 있어 뱃노래길을 우회해서 개설한듯 하다.백도 관광을 떠난 회원들도 지금쯤 돌아와서 불탐봉을 향해 갔을듯 하다. 전설에 따르면 일찍이 섬 전체의 봉우리가 백(百)개에서 하나가 모자라 백도(白 島)라는 지명이 붙었다고도 하고, 멀리서 보면 섬 전체가 흰 빛을 띠고 있어 백도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현재 백도 일원은 명승지 제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생태계보존을 위해 일반인들의 상륙은 금지돼 있다 음달산 맞은편 169봉을 돌아나오는데 한적한곳에 묘지 하나가 자리하고 있는데 상석이 조금 특이하다.\ 육지에서는 상석에 제수음식을 놓고 중간 앞부분의 돌기둥은 상석과 같은 높이로 술잔을 올리는 곳인데 여기는 돌기둥이 높이 솟아 있는걸 보니그게 아닌듯 하다. 섬 안에는 천연기념물 제215호인 흑비둘기를 비롯해 휘파람새, 팔색조 등 뭍에서는 보기 힘든 30여 종의 조류와 120여 종의 희귀 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또한 소엽풍란, 눈향나무, 원추리 등 40여 종의 식물이 자생하며 수중에는 붉은 산호가 무리 지어 자라고 있어서 섬 전체가 가히 "생태계의 보고" 로 불릴 만하다. 13:34분 불탄봉 아래 덕촌 삼거리에 도착한다. 덕촌리에서 올라와 불탄봉으로 가는 빠른길을 여기서 만난다. 13:56분 불탄봉에 도착한다. 음달산에 오르면 모든 조망을 할 수 있지만 오르지 못하니 이곳 불탄봉이 제일 좋은 조망대 이기도 하다. 조망대아래엔 일제 강점기에 시설한 관측소 벙커가 자리하고 있다.\ 발아래 고도와 건너편 서도가 조망되고 저멀리 동쪽과 북쪽의 망망대해도 조망된다.\ 그래서 영국군이 점령을 한 거문도 사건이 일어났나보다. 남으로 신선바위를 지나 거문도등대로 가는 능선이 보인다. 발아래 작지만 주섬인 고도가 보이고 우측에 거문도 등대를 가진 수월산이 보인다. 고도의 마을뒤 숲이 없는 부분이 영국군 묘지가 있는곳이다. 셀카로 인증샷을 하고... 시간이 촉박해 거문도 등대는 포기하고 고도를 향해 하산하기로 한다 하산길에 자리한 일본군의 관측소 벙커를 둘러보고 간다.\ 1944. 12월 2차대전 막바지에 일본군 방위 총사령부는 연안을 중심으로 방어시설 구축을 지시하여 당시 한반도의 해안과 도서지역의 해안 방어굴을 축성한것도 이 때문이다. 거문도에는 당시 일본군 일개중대가 주둔하면서구축한 시설물은 동도해안가 7개소, 능선에 2개소, 음달산 통신시설, 불탄봉 관측시설 벙커 3개소, 거문리의 참호및 교통시설물등 모두 17개소로서 대부분이 거문도 주민이 동원되어 구축하였으며 부족한 인력보충을 위해 황해도 광산에서 광부들이 동원되었다고 한다. 불탄봉을 내려와 이정표가 있는 삼거리에 도착한다. 거문중학교로 하산하는 길은 이정표에도 없다. 표시가 없는 거문중학교 방향으로 하산한다. 거문도 사건은 1885년(고종 22) 3월 1일부터 1887년 2월 5일까지 영국이 러시아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거문도를 불법 점령한 사건이다.\ 거문도는 전라남도 여수와 제주도 사이에 위치한 섬으로서 고도(古島)·동도·서도의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변은 수심이 깊어 대형 선박을 수용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고, 또한 대한해협의 문호로서 한·일 양국간의 해상 통로로 이용되었으며, 러시아 동양 함대의 길목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였다. 영국은 거문도를 발견자의 이름을 따서 ‘해밀턴항(Port Hamilton)’이라고 불렀다. 조선이 개항한 이후로 청나라 및 일본, 그리고 구미 열강은 동북 아시아의 요충지인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러시아는 크리미아전쟁 이후 영국·프랑스와 더불어 침략의 방향을 아시아, 특히 태평양으로 전환하였다. 그리하여 1860년에서 1900년에 이르는 약 40년간 일본·한국·중국의 연안지를 대상으로, 태평양 진출 계획의 일환인 부동항(不凍港) 획득을 기도했다. 약 10여분 내려오니 데크길과 학교 건물이 보인다. 1860년블라디보스토크를 강제로 점령한 러시아는 청나라와 북경조약(北京條約)을 맺어 연해주를 합법적으로 영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블라디보스토크는 부동항이 아니었으므로 러시아는 자연히 더 좋은 항만 조건을 지닌 조선에 대한 지배욕을 품게 되었다. 당시 러시아의 남하 정책과 대립하고 있던 영국·청나라·일본 세계 각지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경계를 소홀히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청나라·일본은 개항 전부터 조선에 대해 러시아의 남하에 대한 방비책을 권고하였다 중학교 울타리를 넘어 상수도에서 갈증을 해소한다. 청나라의 황쭌셴(黃遵憲)이 지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이 대표적이며, 청나라가 조선으로 하여금 구미 제국과 수호 교역하게 한 것도 일본과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1884년 조선과 통상 조약을 체결하면서 조선에 대한 진출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Waeber, K. I.)는 능란한 외교 수완으로 청나라의 지나친 간섭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조선 정부에 접근하여, 친러 세력을 부식하는 데에 성공하였다. 친러 경향은 조선 정부의 고문으로 있었던 독일인 묄렌도르프(M?llendorf, P. G.)의 주선으로 더욱 촉진되었다. 학교를 나와 고도를 향해 간다. 고도를 가려면 고도와 서도가 연결된 삼호교를 건너야 한다. 삼호교는 좁고 약한 다리로 차량은 일방통행을 하도록 신호체계가 되어있다. 조선 내에 러시아의 영향력이 강화되던 당시는 영·러 간에는 아프가니스탄 문제를 둘러싸고 긴장이 고조된 때였다. 러시아는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아라비아해로 진출하고자 하였는데, 아프가니스탄을 보호령으로 삼고 있던 영국과 충돌하게 된 것이다. 1885년초 영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군과 러시아군 간의 전투가 개시되면서, 조선에서도 양국의 충돌 위기가 예상되었다. 이 때 러시아의 영흥만 점령 계획설이 나돌면서, 영국도 러시아에 대해 견제하는 수단으로 거문도 점령 계획을 추진하게 되었다. 영국은 1885년 음력 3월 1일 갑자기 세척의 동양 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를 불법 점령하였다. 영국은 거문도 점령의 공식적인 이유를 러시아의 점령에 대한 예방 조처라고 설명하였지만 당시의 러시아 측의 형편을 고려하면 오히려 러시아에 대한 공격적인 대처였다고 볼 수 있다. 거문도를 점령한 영국군은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와 병영을 쌓는 등 섬 전체를 요새화 하였다. 섬 주위에는 수뢰를 부설하고 급수로와 전선을 가설하였다. 그 밖에 해문 공사를 벌이고 동도의 남단과 고도를 연결하는 제방 축조 공사도 벌였다. 거문도 주둔군은 때에 따라 200∼300명에서 700∼800명으로 증가하였고 정박한 군함도 5∼6척에서 10척까지 증가하였다. 영국군과 거문도민과의 관계는 원만하였으며, 도민들은 영국군에게 노동력을 제공하고 보수와 의료 혜택을 받았다. 영국 정부는 3월 3일청나라와 일본에 거문도 점령 사실을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주청 영국 공사관을 통해 4월 6일에야 통고하였다. 조선 정부는 3월 중순 무렵에 외신을 통해 점령 사실을 알았으나 영국 측의 공식 통고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그리고 청나라 정여창(丁汝昌) 휘하 군함에 엄세영(嚴世永)과 묄렌도르프를 승선시켜 거문도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거문도에 도착하여 진상을 파악한 뒤 일본의 나가사키로 가서 영국 측과 외교 교섭을 벌였다. 조선 정부는 영국 측의 공식 통고를 접수한 뒤 강력한 항의를 전달하고, 비공식적으로 각국 공사관에 협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조선 정부는 사건의 해결 교섭에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지 못하고 청나라·영국·러시아 3국의 상호 교섭에 의존할 뿐이었다. 국제 관계가 어렵게 전개되자 영국은 조선과 직접 교섭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서울의 영국 총영사 애스턴(Aston,W. G.)에게 ‘거문도를 영국의 급탄지로서 임차 교섭을 하되 금액은 1년에 5,000파운드 이내로 할 것’을 훈령하였다. 5월 7일 애스턴은 김윤식(金允植)을 비롯한 통리아문(統理衙門) 관원들과 회담하였다. 그러나 당시에 한·러밀약이 탄로되어 통리아문이 곤란한 처지에 빠져 있었으므로, 영국과의 협상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결국 애스턴은 임차 교섭 안을 거론도 못하고 포기하였다. 러시아 대표 스페이에르(de Speyer, A.)는 한·러밀약이 통리아문에 의해 거부당하자,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해 강력히 항의하면서 러시아도 제주도 등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따라서 통리아문으로서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불가피했다. 이홍장 또한 거문도사건이 국제 문제로 커질 조짐을 보이자 조선 정부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할 목적에서 적극적으로 사건의 중재에 나섰다. 한편, 영국의 거문도 점령에 대한 비난이 고조되던, 4월말부터 아프가니스탄 문제에 대한 영·러의 협상이 개시되어 영·러간의 긴장이 크게 완화되었다. 더욱이 8월 2일에는 아프가니스탄 협정이 조인되어 영국의 거문도 점령의 명분이 없어졌다. 영국 해군도 거문도에 대한 군사적인 평가를 실시, 거문도가 군항 내지 급탄소로서 적당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외무성의 정치적 타결만을 기다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변화에 따라 영국 외상 로즈베리(Rosebery)는 1886년 3월청나라가 다른 나라들로 하여금 거문도를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는 보장만 해주면 거문도에서 철수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여기에 희망을 얻은 이홍장은 같은 해 8월 28일과 9월 2일에 주청러시아공사 라디젠스키(Ladygensky)와 회담을 하였다. 회담 결과, 영국이 거문도에서 철수한다면 러시아는 조선 영토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3개조의 약속을 러시아로부터 받아 냈다. 청나라는 10월 5일부로 영국 공사관에 러시아 측의 보증을 전달하고 영국의 거문도에서의 철수를 촉구하였다. 영국은 청나라를 중재자로 하여 몇 차례 교섭을 벌인 뒤, 10월 29일에 철수 의사를 청나라에 통고하였으나, 조선 정부에는 11월 28일에야 통고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군이 거문도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1887년 2월 5일이었으며, 2월 7일에 철수 소식을 접한 조선 정부는 경략사(經略使) 이원회(李元會)를 거문도에 파견하여 철수 사실을 확인하였다. 거문도사건은 영국 대 러시아라는 제3국 상호간의 정치적 야욕에서 발단된 사건이었다. 하지만 주권국인 조선의 양해 없이 점령이 감행된 점과 처리 과정에서도 조선 정부를 배제하고 열강간의 이해관계에 따라 외교 교섭이 진행된 점에서, 조선의 허약한 국제적 지위가 단적으로 드러난 사건이었다. 영국의 거문도 점령으로 러시아의 조선 침투에 제동이 걸리기는 하였지만, 사건 해결에 있어서 중개 역할을 맡았던 청나라는 더욱 더 종주권을 과시하여 조선의 내정에 대한 간섭을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 세개의섬 거문도를 찾아 역사의 일부가 스며있는 거문도의 역사와 뱃노래길을 종주하면서 우거진 동백의 기를 마음껏 받고 가는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다음부터 당일치기면 백도를 관광후 불탄봉에 올라 거문등대까지 다녀온후 거문도 공원을 다녀오는 코스로 정해야 될듯 합니다. 거문도를 다시찾아 탐방못한 구간을 트래킹 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수 있도록 숙제로 남깁니다. 오늘 트래킹을 위해 수고해 주신 금강산악회 관계자들께 감사드리고 또 함께 해주신 44분 회원닙들께 감사드립니다. 건강하시고 만사형통 하시길..... 감사합니다. |
출처: 만사 원문보기 글쓴이: 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