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불과
20여년이 지나기도 전인 4세기 말, 시리아에서 이미 300석 규모의 초대형 수용능력을 자랑하는 병원이 출현하기 시작하였고 5세기에는 마침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에서도 대형 병원인 '삼손 병원'(Hospital of the Sampson, 영미식으로라면 심슨 병원이 되겠군요)이
건립되었습니다. 물론 아직 이 시점에서도 의학기술과 병원은 병립(竝立)할 뿐, 공존(共存)하지는 않았습니다. 즉, 전문의들이 병원 운영에
참여하지는 않고 있었습니다. 이 부문에서의 급격한 변화는 6세기에 이르러 시작되었습니다.
"짐을 빼놓고 병원사를 논할 수 있겠나?"
유스티니아누스 1세(483~565, 527-565
재임)
유스티니아누스 1세(527-565)가 집권하던 시기까지, 기독교
로마제국은 전문의를 '수석의사'(Arch-iatros)라는 일종의 공무원으로 기용하여, 각 도시별 수석의사들이 그 도시의 의료보건을 담당하게
하였는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이들을 공무원의 직책에서 병원 시설에서 근무하는 전문의로 전환시키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정부 재정이나
능력만으로 의료서비스를 넓게 시행할 수는 없었고, 어느 정도 준공적(準公的)인 시설인 교회나 수도원의 재력을 근간으로 삼을 수 있는 '병원'은
전문의들을 이식하기에 아주 적합한 도구로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따라 전문의가 일하는 기구로서의 병원은 이제 급격히 그 위상을 강화할 준비를
마쳐갑니다. 전문의들은 이제 병원에서 봉급을 받으며, 환자들을 전문적으로 진단하고 치료하였고 의학도들을 교육하고 훈련시킬 수 있는 공개적인
장소를 확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대강의 틀을 마련하게 된 병원은 급격히 확대되는 길을 걸었습니다.
초기의 병원은 알렉산드리아 등에서 의학을 전공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7세기에 선페스트 및 이슬람 제국의 대두로 지중해 로마사회가 크게
동요하고 붕괴되는 상황에서도 굳건하게 버텨냈습니다. 국가재정에만 의존하였던 교육시설들이 7세기의 위기를 넘지 못하고 대거 붕괴되어버렸던 데
비해, 사회적인 시스템에 의해 지탱된 병원은 오히려 교회조직의 도움을 받으며 각지로 확산되었습니다. 이제 '도시'가 반드시 포함해야 할
필수요소로 '교회'와 함께 그 옆에 위치하는 '병원'이 자리매김한 것이었습니다. 500년 직전까지, 콘스탄티노플에서만 최소한 3개 이상의 병원이
개원하였고 600년까지 2개 이상의 병원이 더 설립되었습니다. 6세기경엔 소아시아 변두리의 작은 도시인 데르비소스(Derbisos)에서도 병원
의사의 무덤이 만들어졌고, 마우리키우스(580-602) 황제가 고향인 카파도키아의 아라비소스(Arabisos)를 장식할 때 교회와 병원을 세우는
등 전 지역에서도 확산이 지속됩니다.
이슬람 군대에 의해 위협받았던 시절의 콘스탄티노플 역시 최소한 4개의
병원은 지속적으로 운영되었고 8세기에는 크레타 섬의 고르티나(Gortyna), 9세기의 니코미데이아(Nikomedeia), 11세기의 안티오키아
등 여러 곳에서 병원이 개설, 유지되었습니다.
가운데 세 동의 건물이 5세기에 세워져 10세기 동안 운영된 삼손
병원
대략적인 크기는 폭 60미터, 길이
70미터, 높이 8~10미터 정도인 것으로
보입니다.
마침내 11세기에 이르러 비잔티움 제국의 중흥이 본격적으로 절정에
달함에 따라, 그동안 발전을 계속해 온 병원의 조직 역시 다시 기록상에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9세기에는 회진(Round) 제도가 실시되어
수석의사(Primikerios, 위에서 언급한 수석의사 arch-iatros와 동일, 병원을 운영하는 병원장인 Nosokomos와는
구분됩니다)가 매일 아침 병원 입원실을 돌면서 환자들의 질병 상태를 살펴보고, 환자들과 질문 및 답변을 주고받으면서 진료에 대한 문의와
불만사항을 접수하였습니다. 비슷한 시기에는 아침마다 의사들이 자기 담당 환자들의 징후와 수술계획, 처방 등을 보고하고 평가받는 절차도 도입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한 가지 중요한 것으로, 의사들이 환자의 정보와 증세 그리고 그
처방과 효력 등을 일일이 문서에 기록하여 병원 문서고에 보관하는 오랜 전통이 제도적으로 자리잡았고 이를 통해서 이론적 요소와 대증적 요법을 오랜
기록과 함께 조합하여 최대한의 효율,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하였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수백년~수천년간 계속된 식물학, 동물학 등의
발전에 힘입어 허브 한 종류나 여러 종류를 조제하여 처방하는 방식이 선호되었습니다. 물론 이 조제법들도 일일이 기록되어 의학서에 지속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10~11세기에 이르면 본격적으로 외래진료 역시 시작되어, 외래과를
설치하고 대체적으로 외과의와 내과의를 배치하여 일반 시민들이 가볍게 병원을 방문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제약실도 설치하여 약을 받아갈 수 있도록
하는 체제가 마련되었습니다. 환자의 병세가 심각하거나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 경험이 많은 수석의사가 함께 협진해서 살피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치료를 기대할 수 없다고 판명된 환자는 의사들이
논의를 거쳐, 최종적으로 며칠 간 상태를 지켜본 뒤, 여행자들이 잠시 머무는 여관(Hospiece, 오늘날의 호스피스 개념과는 다르지만 기능은
좀 닮았네요)에서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조치하였습니다. 만약 최후를 맞은 환자가 어디에도 연고가 없는 사람이었다면 병원에서 고용하고
있는 사제와 운구인 등이 환자의 장례를 진행했습니다.
12세기
판토크라토 종교공동체의 상호작용 및 서비스 도식도
이러한 병원시설을 이용하는 비용은 전액 무료였습니다. 물론 오늘날처럼
엄청나게 비싼 의료기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능했겠으나 역시 무료운영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가령 12세기 판토크라토 수도원
부속 병원의 예를 보면, 외과, 내과, 부인과(여인들은 부인과에서 독점적으로 전담했습니다)의 3과에서 단지 50명만을 수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자
전문의 10명, 여자 전문의 1명, 이외에도 약학의 6명(長 1명, 일반의 3명, 보조의 2명), 안내인 1명, 세탁부 5명, 주전자 관리인
1명, 조리사 2명, 말구종 1명, 잡역부 1명, 회계사 1명, 사제 2명, 낭독자 2명, 제빵사 2명, 운구인 4명, 장례 전문 사제 1명,
변소 청소부 1명, 제분업자 1명 등 많은 고용인을 두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이 모든 직원들은 2, 3교대제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2, 3배가
되었고 일반적인 재력으로는 감당하기 곤란했습니다. (여기에다가 야간에 근무하는 직원인 레지던트 1명씩이 꼭 필요하다고
규정됩니다)
따라서 이는 대규모 재력을 운용할 수 있는 종교재단에서 운영비와 필요
물자를 공급받았습니다. 전술한 12세기 판토크라토 병원의 경우, 판토크라토 공동체의 운영이사 4명 중 1명이 독점적으로 병원의 경비와 필요물자를
공급하는 의무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원이 활동에 제약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 병원장(Nosokomos)은 병원의 경비에 대한 해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재량권을 부여받았고 그 아래 행정직원들이 연료, 식량, 약재 등을 쉬 공급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병원임금표(13세기 립스 병원, 12세기 판토크라토 병원)
연봉액은 1281년도
기준 환산액.
당시 최저임금은
금화 18.11전이다.
다만 병원의 고용인들은 다소 낮은 임금을 받았습니다. 사회의 고매한
인사들이 자신의 유산을 재단에 위탁하거나, 국가 및 교회로부터 재정지원을 받았음에도 어쩔 수 없이 임금 수준에는 제한이 있어, 의사라고 해도
임금은 당대 최저생계비를 조금 넘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1년에 1개월씩 번갈아가면서, 6개월만 병원에 근무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나머지 6개월은 개업의로서, 자유롭게 부자들의 초빙을 받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의사들이 다른 6개월동안 근무하였습니다. 이는 수석의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임금이 더 낮은 조리사, 세탁부, 청소부, 운구인 등은 1년 3교대제로 고용되어 4개월만 일하면
되었습니다.
실제 근무시, 하기(9월 15일~4월 30일)에는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
무렵까지 근무하고 퇴근하였으나 전기(5월 1일~9월 14일)에는 잠시 퇴근해 저녁을 먹고 다시 출근해 업무를 봐야 했습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공무원들의 근무시간과 동일한데, 당연히 의사들이 준공무원 성격을 띄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제도들을 통해 의사들은 공립병원에서 환자를 응대하고
치료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실력과 명성을 쌓았으며, 그 명성을 기반으로 나머지 6개월간 영업을 통해 추가 수입원을 확보하게 됩니다. 처음엔
'무료'였기 때문에 중산층 및 그 이상 환자들은 잘 오지 않았지만, 의사들의 명성이 높아지고 치료 성과가 점점 높아지자 많은 돈을 낼 수는 없던
중산층 시민들도 병원을 점점 더 많이 이용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황제들도 병이 걸리면 황실 전속의가 근무하는 망가나 수도원 부속병원으로 진찰
받으러 가서 치료받곤 했습니다. 여기서 일반 환자들까지 담당했는지는 미지수입니다만.)
이런 병원들은 어떤 구조로 이루어졌을까요? 기록과 유적 등을
고려해보면, 대체로 일반병동과 나병환자 병동, 안과환자 병동은 각각 그 전염성으로 인해 독립되어 운영되었습니다. 병원은 중정식, 그러니까 가운데
지붕 아래 마당을 중심으로 빙 둘러싸는 형식으로 입원실이 배치되었고, 마당에 해당하는 곳에는 커다란 난로가 배치되어 보온을 책임졌습니다. 수술을
대기하는 환자는 수술실 옆에 위치한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렸고, 마찬가지로 수술을 끝낸 환자 역시 회복실의 기능을 겸한 대기실에서 회복을
기다렸습니다.
원래 4~5세기 초기 의사들은 과학이 병을 이기는 모습을 대중에
보여준다는 명목으로 일종의 '수술 극장'을 준비해 대중에 수술장면을 공개하기도 했습니다만, 점차 수술 중 환자의 보온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하여
폐쇄되고, 독자적인 난로를 갖춘 난방시스템을 구비하였습니다.
이외에 병원은 의학서적들을 보관하는 도서관과 강의실을 설치하여
의학교수가 레지던트들에게 이론적 지식을 가르치고, 해부학을 가르치며 충분히 지식을 쌓은 레지던트들이 의사의 부재시 수술을 대리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보통 의사의 자식인 경우가 많은 레지던트들은 병원으로부터 숙식을 제공받으면서 공부에 전념했습니다.
6세기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쌓도록 지시한 병원으로 추정되는 터키 남부의
한 유적지
구체적인 구조는 아직
해명되지 않았으나, 후대의 셀주크인들의 병원 구조와 유사하다고 합니다.
모든 병원이 다 종교재단에서 개설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적지
않은 수가 종교재단을 통해 개설되었고 그 덕분에 재단 측이 운영하는 고아원 또는 보육원과 양로원, 여관(위에서 언급한 호스피스) 그리고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 시설들은 일반 대중에도 공개되긴 했습니다만, 병원이 자유롭게 이를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큰
이점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의사의 왕진을 받을 수 있었고 고아원과 양로원의 환자들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할 수 있었으며, 치료 불가능한 환자는
여관으로 옮겨 마지막 숨을 허허벌판에서 내어쉬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윈윈!!) 그리고, 무엇보다도 환자들이 목욕탕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환자들은 스스로의 뜻에 따라 1주에 최대 2회까지 목욕탕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의사가 처방하는 바에 따라 언제든지 목욕탕을
이용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이 목욕탕은 수도사들이 봉사하는 의미에서 관리하였고, 가끔씩은 수도사들이 의료 보조로서도 병원에서 봉사하기도
했습니다. (의사가 이를 뽑는데 옆에서 대머리 수도사 아저씨가 집게를 건네주는 광경이죠!!)
이런 병원들은 사실 그 운영주체가 교회였기 때문에, 명목상으로나
실질상으로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관할에 속해 있었습니다. 실제 기록으로 총대주교는 각 병원장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왕래하였다고
하는데, 이로 보건대 각 병원들 사이에도 처방과 의약 제조법 등에 대한 일종의 네트워크가 구성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실제로 마누일
1세(1143-1180)가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약을 1가지 만든 이래로, 황실 병원 뿐만 아니라 콘스탄티노플 모든 병원에 동일한 약의 처방법이
공유되었다는 내용을 보면 그러한 추측에 가능성을 더 실어줍니다.
병원의 실제 진료는 사실 지금까지 쓴 만큼의 분량을 더 할애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기에는 필자나 독자나 인내심의 여지가 많지 않을 것이기에, 좀 더 단촐하게 쓰도록 해보죠. 고대 그리스 이래로 수술도구에는
약 60여가지가 전해져왔고 비잔티움 시대에 이르러 20여가지의 도구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이를 출산할 때 아기를 꺼내는 도구, 치아를
뽑는 집게, 메스 비슷한 종류의 칼 등이 포함됩니다. 이런 도구를 수술시마다 뜨거운 물에 소독하는 절차가 있었고, 이를 담당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다만 수술이 매번 있지는 않았기 때문에 비정규직으로 고용했습니다)
수술에도 여러 종류가 있어, 일종의 성형수술이나 코 내부의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 탈장 수술, 정맥류 수술, 수두증 수술, 구강 수술, 정형외과 수술 등을 맡았습니다. 수술하기 전에는 국소마취, 전신마취 등을
위해 여러 마취제 대용 약재들을 사용하였고 뜨거운 물 등으로 의사의 손을 세척하도록 규정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흥미롭게도 아동의 질병을 다루는 데는 성인과 조금 다르게
접근하여, 처방시 사용되는 아편의 양을 조절하거나 따뜻한 목욕 등의 온건한 방법을 사용했고, 수술보다는 허브 약재 등을 통한 치료를 시도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물론 암 등의 병을 치료하는 데는 그다지 효력은 없었지만 적어도 미신적으로 대처하지는 않고 어떻게든지 과학적으로 해명하고
진료와 처치를 시도하고자 했습니다.
병원의 약재로는 2천여가지가 넘는 허브를 목록화하고 관련 기록들을
찾아가면서 조합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디오스코리디스(Dioscorides)의 De Materia
Medica(1500년경 판본)
수백년간 허브 조제약에
있어서 최고 권위서였던 비잔티움 시대 의약자료집
병원은 그러나 수술 및 처방 외적인 측면에서도 환자들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여전히 사혈법을 쓰거나 인두로 살을 지지는 방식도 사용하긴 했지만 최소한 사혈의 양을 제한하고, 인두로 살을 지지는 범위도
국한하는 방향으로 진행하였습니다. 또한 환자들의 식단에도 신경을 써서, 모든 환자들에게 육류는 제외하고 하루 빵 850그램과 올리브유를 끼얹은
야채 2접시를 제공해 균형잡히고 3,000칼로리에 달하는 영양을 공급하였습니다. 여기에 환자 각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시장에서 사먹을 수 있도록,
상당한 액수의 보조금을 주어 포도주 등의 기호식품을 제공했습니다.
또한 12세기의 서사시인인 프로드로모스(Prodromos,
1110~1165/70?)가 자신의 병원방문 경험을 시로 남겨놓은 바에 따르면, 병원 의사와 간호사, 레지던트들이 환자가 고통받는 치료 와중에
어떻게든지 고통을 잊게 만들기 위해 되도않는 것이라고 해도 유머를 날리거나 웃어보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사실 실제로 보면
무서운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환자는 고통받고 있는데 치료하는 의사는 괴이하게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를 하고....)
기나긴 글을 보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러한 병원의 구조는 6세기에
이르러 대강 틀을 잡았고, 이러한 틀을 기준으로 1440년대까지는 적어도 정상적으로 병원제도가 운영되었습니다. 1453년에 마침내 제국이 망했을
때 나온 비탄어린 소리 중 하나가, '저 많은 자선기관과 병원을 이제는 운영할 수도 없겠구나.'라는 것이었으니 병원 그 자체는 최후의
'필수요소'로 그 운명을 함께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뭐야 그렇다면 후대의 병원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건가?"
라고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않습니다.
1453년까지 콘스탄티노플의 한 병원에서 과학 및 의학을 가르쳤던 의학교수, 요안니스 아르기로풀로스(Ioannes Argyropoulos,
이탈리아어로 지오반니 아르기로풀로)가 제국이 망한 이후, 피렌체에 정착하면서 역시 과학과 의학을 계속 가르쳤으며, '새 성모 마리아 병원'이 이
영향을 받아 지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이 건물은 실제로 비잔티움의 정방형 교회건축 양식을 따라 건설되었고, 비잔티움 시대 병원과
마찬가지로 환자의 처방기록을 보존하는 전통을 지켰습니다. (이 중 최소한 3가지 치료법은 비잔티움 측에 남아있는 기록과 일치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1502년에서 1514년 사이, 이 병원에 입원한 중환자 중 9~14%만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입니다. 16세기에 정확한 의학적
지식이 부재한 가운데서 중환자 생존율을 86~91%까지 확보할 수 있는 것은 가볍게 볼 사안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이탈리아로 흘러들어간 지식들은 서구에서 보존되고 확대,
재생산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도 피렌체 시에서 운영중인 '새 성모 마리아 병원'(Hospital of Santa Maria
Nuovo)
이제 바야흐로 마무리에 들어왔습니다. 오늘날의 병원이 그 독자적인
사상에서 그 출발과 구분된다고 할 지라도, 병원 자체의 출발점은 보다 넓은 사람을 치료하고, 무엇보다도 재산의 다소에 상관없이 누구나 최대한의
치료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고안하는 데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곧, 어떤 형태였던지 박애로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오랜
전통을 이어받으며 어떻게든지 인간의 능력으로서 질병과 싸우고자 했던 이들의 노력이 1400년 전에는 대강 오늘날의 병원기능을 만들어내고, 많은
성과를 남겨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비잔티움 제국이 인류사에서 가장 크게 공헌했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하는
부분이자, 인류의 오랜 투쟁을 보여주는 분야로서의 병원이 마침내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 우리가 필수요소로 생각하고 흔히 갈 수 있는 서양식
'병원'이 등장했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인류사의 한 족적이라 하겠습니다. 길고도 지루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요출처:
Timothy Miller, The Birth of the
Hospital of the Byzantine Empir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