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 각종 모임에서 요즘 분위기를 반영하는 신종 ‘건배사(乾杯辭)’가 뜨고 있다.
현재 연말 서점가에서는 건배사 모음집들이 나와 인기를 모으는가 하면 건배사 스피치 강의가 생겼고, 다양한 건배사를 모은 ‘치어 업 건배사’ ‘스토리 건배사 100’ 같은 스마트폰 응용앱까지 등장했다.
최근에는 “가장 맛있는 라면은? A라면, B라면이 아닙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식의 ‘Q&A’ 형태의 건배사가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장기화되고 있는 불황을 슬기롭게 이겨내자는 뜻으로 ‘명품백(명퇴조심, 품위유지, 백수방지)’이나 ‘행쇼(행복하십쇼)’ ‘멘붕(만날 붕붕 뜹시다)’처럼 개성을 강조하는 형태의 건배사도 등장했다.
또 ‘빠삐용(빠지거나 삐치거나 따지면 용서하지 않는다)’, ‘오징어(오래도록 징그럽게 어울리자)’ ‘이기자(이 좋은 기회를 자주 갖자)’ ‘오바마(오래 바라는대로 마음먹은 대로)’ 같은 삼행시(三行詩)를 이용한 전통적인 건배사도 여전히 인기를 모으고 있다.
아트스피치의 김미경 대표는 “건배사는 스피치 중에서 가장 짧지만 가장 강력하고 짜릿한 승부이자 특별한 예술”이라며 ““편견은 빼고, 웃음을 담아야 한다. 특히 마지막 한 줄에 모두를 만족하게 할 따뜻한 메시지를 담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예컨대 ‘함께 가면~’이라고 외치면 ‘멀리 간다’거나, ‘술잔은 비우고~’라고 하면 ‘마음은 채우고’로 화답하는 식의 건배사는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아울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은?”이라고 외치고, “당신과 함께라면”이라고 답하는 건배사처럼 마지막 한 줄 반전에 힘을 싣는 것도 좋은 방법으로 꼽힌다.
[술자리 망치는 건배사]
'성행위' '진달래' '남존여비'… 성차별적 건배사 외쳤다간 망신
억지로 외워서하는 것보다 재밌고 따뜻한 한마디가 나아
은행원 김모(30)씨는 아직도 작년 송년회 때 부장님이 외쳤던 건배사만 생각하면 입맛이 쓰다. "'오바마'라고 외치면서 이렇게 덧붙이시더라고요. '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고요. 여자 직원들은 물론이고 함께 앉아 있던 젊은 남자 직원들도 민망하고 화나는 마음에 얼굴이 붉어졌고, 모임은 찬물 끼얹은 듯 썰렁해졌죠. 정말이지 그런 건배사는 안 하는 게 나아요."
매년 송년회 철이면 건배사가 화제다. 건배사도 공부하는 세상, 최신 건배사를 엮은 책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도 수두룩하다. 몇 년 전만 해도 건배사는 '아저씨만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많았으나, 요새는 상황이 달라졌다. 여자들끼리 모여도 건배사를 주고받는 경우가 흔하다. 문제는 남녀가 두루 섞이는 모임에서도 종종 '깨는 건배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일부 남자만 즐겼던 성차별·성적 농담을 건배사 삼아 건넸다가 망신당하는 경우도 심심찮다.
◇'나쁜' 건배사 4종 세트
커뮤니케이션 클리닉 공문선 원장은 "건배사의 핵심은 모두가 유쾌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을 고르는 데 있다. 성적 농담과 욕설이 섞인 건배사는 듣는 사람에게 오히려 씁쓸한 여운만 남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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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성행위(성공과 행복을 위하여)' '진달래(진짜 달라면 내줄게)' '남존여비(남자가 존재하는 이유는 여자를 비명 지르게 하는 것)' 등은 '나쁜' 건배사의 대표격으로 꼽힌다. '여필종부(여자는 필히 종부세를 내는 남자와 결혼하라)' 'SSKK(시키면 시키는 대로, 까라면 까라는 대로)' 같은 것도 "편견을 고착화하거나, 수직관계를 강화하는 건배사"(공문선 원장)로 꼽힌다.외국에서도 성차별적인 어조를 담은 건배사는 갈수록 피하는 분위기다. '우리 사나이를 위하여(To our men)'나 '우리 아내와 애인을 위하여(To our wives and sweethearts·다들 불륜녀가 있다는 뜻)' 같은 건배사는 군대에서조차 더는 통용되지 않는 분위기다.광고회사 상암커뮤니케이션즈의 황원미 국장은 나쁜 건배사로 크게 ▲'무(無)영혼'형 ▲마초형 ▲아부형 ▲수면유도형 등 네 가지 유형을 꼽았다. '지화자(지금부터 화합하자)' '해당화(해가 갈수록 당당하고 화려하게)' 같은 흔하고 낡은 말을 쓰는 영혼 없는 건배사를 비롯해 술김에 성희롱을 슬쩍 넣거나(마초형), 사장이나 팀장의 이름을 노골적으로 언급하고(아부형), 길기만 하고 졸린(수면유도형) 건배사도 피해야 한다는 것.◇억지 건배사보단 따뜻한 한마디라이프 스타일리스트 여윤형씨는 "편견은 빼고, 웃음을 담아야 한다. 마지막 한 줄에 특히 모두를 만족하게 할 따뜻한 메시지를 담는 게 중요하다"고 충고했다. '함께 가면, 멀리 간다' '술잔은 비우고, 마음은 채우고' 같은 건배사는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도 분위기를 훈훈하게 만드는 예. "제일 맛있는 라면은?"이라고 외치고 "당신과 함께라면"이라고 답하는 건배사처럼 마지막 한 줄 반전에 힘을 싣는 것도 나쁘지 않다.또한 억지로 운율을 맞춰야 하는 비자발적 건배사보단 깔끔하고 기분 좋은 '한 마디'가 술자리를 더 훈훈하게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광고회사 이노션 김호영 부장은 "지루한 건배사보단 사장님이 솔직담백하게 '인센티브 펑펑 주겠다'고 말하는 게 최고 아니냐"고 했다. 디자이너 이원우씨는 "혼자서만 길게 건배사를 하는 것도, 누구나 돌아가면서 억지로 일어서서 한마디를 하는 것도 술자리를 지루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오히려 '올 한 해 다들 기대 이상으로 잘해줬다' '내년에도 함께 가자' 같은 말이 사람을 움직이게 하지 않나요? 억지로 외워온 건배사보단 진심이 담긴 한 마디가 더 멋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