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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오규원
─MEMU─
샤르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이브 본느프와 1,000원
에리카 종 1,000원
가스통 바쉴라르 1,200원
이하브 핫산 1,200원
제레미 리프킨 1,200원
위르겐 하버마스 1,200원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시 읽기 > 프란츠 카프카/오규원
오규원은 법학을 전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법관이 되지 않고 시인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지금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법과 시 사이의 거리고 무엇이며, 그들 사이의 인연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법은 한마디로 현실 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그만큼 냉정하고 사실적입니다. 이에 비해 시는 진실 원칙의 지배를 받습니다. 세상을 법으로만 다스리고 해석할 수 있다면 수학 공식에 의거해 문제를 풀듯이 세상살이는 참으로 편리해질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세상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란 아주 복잡하기 짝이 없는 입체적 존재이니까요.
인간이란 때에 따라 현실적이고 도구적인 세계를 원하지만, 또 때에 따라 낭만적이고 자율적인 삶을 원합니다. 인간들은 때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구별 없는 일상의 삶을 살기 바라지만, 또 때에 따라 그들만의 독자적인 세계 속에서 남들보다 자신의 존재와 영혼을 높이 들어올리며 남다른 삶을 살고 싶어합니다. 이렇게 자신의 존재와 영혼을 높이 들어올리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시가 있습니다. 법의 무차별적 편리성을 넘어서고 싶은 사람들을 위하여 시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오규원 시인에게 왜 법을 더 공부하지 않고 시를 쓰게 되었느냐고, 더 나아가 시를 가르치게 되었느냐고 물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일반론에 비추어 그 점을 추측할 수 있을 뿐입니다. 바로 위에서 제가 말한 바를 여기에 적용한다면, 오규원은 법의 현실 원칙만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시의 진실 원칙을 소망한 것입니다. 법이 사람을 사무적이게 만든다면, 시는 사람을 너그럽게 만듭니다. 법이 세상을 질서 있게 만든다면, 시는 세상을 풍요롭게 만듭니다.
물론 저는 법이 현실 원칙을 존중합니다. 그것이 바탕을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서 시의 진실 원칙도 제대로 피어나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들이 살아가는 데는, 본래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가 너무나도 자기중심적이고 때에 따라서는 무정부적인 상태를 야기할 만큼 위험한 존재이기 때문에, 법이라는 제도적 장치는 필요악과 같은 존재이지만 꼭 필요합니다. 그런 점에서 법의 현실 원칙은 우리가 시적 진실의 세계를 마음놓고 찾아가는데 파수꾼과 같은 역할을 해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이때의 법이란 인간의 행복을 지향하며 만들어진 법이고 그것을 위해 집행되는 법을 전제로 하는 것이지요.
오규원은 1968년도에 『현대문학』을 통하여 등단한 이후 여러 권의 시집을 출간하였습니다. 그가 출간한 시집으로는 《분명한 사건》 《순례》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소리》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 등이 있습니다. 저는 이렇게 많은 시집을 내면서 시를 써온 오규원의 시 가운데서 <프란츠 카프카>라는 작품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이 시는 형식과 내용 양 측면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 시는 오규원 시집 《가끔은 주목받는 생이고 싶다》 속에 들어 있습니다.
─MEMU─
샤르르 보들레르 800원
칼 샌드버그 800원
프란츠 카프카 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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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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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카프카
─<프란츠 카프카> 전문
위 시의 제목은 앞서 밝혔듯이 ‘프란츠 카프카’입니다. 여러분은 프란츠 카프카를 알고 계시겠지요? 한국에서 프란츠 카프카는 참으로 널리 알려지는 행운을 얻었습니다. 저 동구의 체코에서 태어난 한 작가가 동방의 한국 독자들에게 무한 사랑을 받은 것입니다. 지식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학에 약간 관심이라도 있는 사람이면 대부분 그의 이름과 작품을 잘 알고 있을 정도입니다.
몇 년 전, 저는 러시아를 거쳐 동유럽의 몇 나라를 여행하던 중, 체코의 프라하에 있는 카프카의 생가에 가보았습니다. 그의 작품 <성>을 쓰는데 배경이 되었다는 프라하 성 주변에도 가보았습니다. 카프카는 거기서뿐만 아니라 프라하 전체에서, 아니 체코 전체에서 그들을 빛내주는 자랑거리였습니다. 손수건에도, 옷에도, 문구류에서도, 엽서에도, 달력에도, 액자에도 온통 카프카가 들어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들은 일면 아주 고상한 분위기를 자아냈습니다. 도시 전체가 카프카의 예술정신으로 채색된 느낌이었습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카프카의 지적 수준만큼 올라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카프카는 상품화된 물건들 속에서 캐릭터 노릇을 하기에 바빴습니다. 상품과 문화가 교묘하게 만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서 산업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자원이었던 것입니다. 카프카의 의도와 관계없이, 카프카는 보험회사를 뛰쳐나와 지향한 저 비영리적인 예술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그는 체코 경제에 이바지하는 주요 인물이 되어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우리나라에서도 문화산업이라는 말이 신문지상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문화도 산업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강하게 제기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모든 게 돈벌이에 응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달러를 벌러들이는 데 응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로 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돈의 긍정적 기능을 우리는 결코 무시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나 문화가 돈벌이를 위한 산업이 되었을 때, 문화는 도구적 성격을 강하게 지닙니다. 도구적 성격이란 말 그대로 문화가 자족적으로 존재하는 기쁨을 상실하고 그야말로 인간의 욕망과 편리를 위한 도구가 된다는 것이죠. 사람이 살아가는 데 참으로 많은 도구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도구란 그 나름의 효용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도구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사용하면서도, 도구적 존재 이상의 것을 희구합니다. 말하자면 무용지용無用之用의 세계에서 자족적인 기쁨을 맛보고자 합니다. 어느 것도 이용당하지 않는, 그런가 하면 어느 것도 이용하지 않는 상태에서, 순수한 기쁨을 맛보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참다운 문화란 타율에 의하여 강요된 것이 아니라 자율에 의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생성된 것입니다.
경제의 위력이 대단해진 이 시대에는, 모든 것이 경제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교육도, 정치도, 문화도, 직업도 오직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처럼 생각됩니다. 이런 시대에는 모든 것이 다 상품이 되어 팔리기를 기대합니다. 전 국민이 세일즈맨의 정신을 갖고 살기를 바랍니다. 상품이 될 수 없는 것은 퇴출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사는 곳 어디에나 시장이 서고, 그 시장에서 유통되는 이른바 상인의 정신이 모든 걸 주도해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법칙에서 어긋난다면, 전 지구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무한 경쟁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다고 겁을 줍니다.
시장, 상품, 산업, 이익, 경쟁 등과 같은 용어가 최고의 대접을 받고 관심을 끕니다. 이런 시대에는 진리 탐구가 목적이라던 대학에서의 학문 연구도 응용학문이기를 요구합니다. 쉽게 말하면, 상품 생산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제가 너무 노골적이었나요. 그렇다면 점잖은 용어를 써서 다시 말씀드리죠. 요즘 논의되는 이른바 ‘신지식’이 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말할 것도 없이 ‘신지식’을 창출하는 사람이 ‘신지식인’입니다. ‘지식’과 ‘지식인’이라는 말 앞에 ‘신’이라는 접두사가 붙은 꼴입니다. 그렇다면 ‘신지식’ 그리고 ‘신지식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말일까요?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요즘 논의되고 있는 ‘신지식’이란 ‘사물지事物知’와 ‘사실지事實知’를 넘어 ‘방법지方法知’의 수준으로 나아간 지식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사물지’란 사물의 실재 그 자체를 아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사실지’는 사물의 원리를 아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에 비해 ‘방법지’는 사물지와 사실지를 어떻게 응용할 것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응용의 최후단계가 상품화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우리들이 사는 시대가 이처럼 바뀌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면서 오규원 시인이 그의 시 <프란츠 카프카>에서 들어주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봅시다. 오규원은 그의 작품 첫머리에서 대뜸 찻집의 메뉴판을 보여줍니다. 차라도 한 잔 주문하라는 것일까요? 지면에서 차를 마살 수는 없으니 그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혹 누가 알아요? 요즘은 컴퓨터 화면의 가상 현실이 진짜 현실을 대체하는 시대이니까 지면 위의 메뉴판을 펴다보면서도 차를 주문하는 기쁨에 젖어들지요.
조금 농담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가상 현실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생각해보라고 그런 농담을 던졌습니다. 다시 농담의 가운을 벗겨버리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어봅시다. 제가 먼저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오규원 시인이 작품의 첫머리에서 대뜸 보여주는 이 메뉴판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하셨습니까? 찻집 주인의 교양이 대단하다는 것을 확인하셨습니까? 참 이상한 메뉴판도 다 있구나. 하고 생각하셨습니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셨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어쨌든 좀 낯선 메뉴판임은 분명하지요? 그러면 무엇 때문에 낯설다는 느낌을 받았을까요? 우리는 어렵지 않게 이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메뉴판에 붙은 커피 이름이 커피의 원산지도, 커피의 유행지도, 커피의 화사명도 아닌, 세계의 뛰어난 예술가, 석학 등이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샤를르 보들레르, 칼 센드버그, 프란츠 카프카, 이브 본느프와, 에리카 종, 가스통 바쉴라르, 이하브 핫산, 제레미 리프킨, 위르겐 하버마스 등이 커피 명단에 올라와 있습니다.
샤를르 보들레르가 누구입니까? 시집 《악의 꽃》을 출간한 프랑스의 뛰어난 현대 시인임을 여러분들은 알 것입니다. 칼 샌드버그는 누구입니까? 도시문명이 문제를 탐구한 미국의 현대 시인입니다. 프란츠 카프카는 누구입니까? 더할 나위 없습니다. 이브 본느프와는 누구입니까? 폴 발레리 이후 프랑스 현대시의 전통을 이었다는, 시집 《두브의 운동과 부동不動》을 출간한 20세기의 뛰어난 현대 시인입니다. 에리카 종은 누구입니까? 그는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소설 《나는 것이 두렵다》를 출간한 미국의 여성 소설가입니다. 가스통 바쉴라르는 누구입니까? 그는 과학 철학자에서 상상력 이론가로 변모하여 물질적 혹은 역동적 상상력이 소중함을 가르쳐준 프랑스 현대 석학입니다. 그의 상상력 이론이 사람들을 행복한 세계로 안내한다고 하여 그의 시학은 ‘행복의 시학’이라고 불립니다. 이하브 핫산은 누구입니까? 그는 이집트에서 출생하여 미국인으로 귀화하였는데 그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20세기 후반의 화두인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을 선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제레미 리프킨은 누구입니까? 그는 미국의 석학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 소개되어 관심을 불러일으킨 《노동의 종말》과 《엔트로피》라는 책을 쓴 저자입니다. 마지막으로 위르겐 하버마스는 누구입니까? 그는 독일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사회학자입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모두 20세기 세계의 정신사를 개척한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찻집 메뉴판에 등장하였습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요? 이제 커피는 성분을 마시는 시대가 아니라 분위기를 마시는 시대라는 뜻일까요? 커피는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분위기를 마시는 시대라는 뜻일까요? 커피는 단순히 상품이 아니라 문화라는 주장일까요? 커피를 마심으로써 지성까지도 얻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20세기의 정신적 스승들에 대한 흠모의 마음을 담은 것일까요? 본질을 기호로 가리고자 하는 의도일까요? 음료와 지성 사이의 벽을 과감하게 파괴하자는 시도일까요? 도대체 무엇일까요?
방금 제가 제시한 것들이 다 가능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오규원 시인은 이런 메뉴판을 등장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오규원 시인은 본질이 이미지로 포장된 시대, 상품을 위하여 아첨하는 시대, 모든 것이 도구화된 시대를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이미지, 포장, 상품, 아첨, 도구 등은 인간살이의 필수품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인간살이의 최종 목표인 것처럼 행세해서는 곤란합니다. 인간만큼 자존심 강하고 도구적 존재가 되기를 마음속 깊은 곳에서 거부하는 동물도 이 땅에는 드물 것입니다. 저는 인간이 존중받을 수 있는 것은, 비록 살기 위한 방편으로 자신을 도구화시킨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그렇게 도구화된 자신을 거부하려고, 아니 넘어서려고 한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규원 시인의 찻집 메뉴판을 보고 안타까워한 것은 바로 인간의 모든 것이 상품을 위해 도구화된 현장을 그곳에서 적나라하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규원 시인은 찻집 메뉴판을 제시한 다음 그 아래 마치 주석과 같은 형태로 자신의 심정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 부분을 한번 더 옮겨볼까요?
시를 공부하겠다는
미친 제자와 앉아
커피를 마신다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
그는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미친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 속에 나오는 화자는 그 신분이 시를 가르치는 선생입니다. 그 선생에게 역시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가 찾아왔습니다. 선생은 이 시대에 시가 어떻게 대접받고 있는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음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닙니다 시가 이 시대에 어떻게 대접받는지 알고 싶습니까? 제가 이에 대해 조금만 말씀드리죠.
물론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미학적ㆍ정신적ㆍ지성적 측면에서 본다면, 시인은 꽤 대접을 받는 셈입니다. 그러나 돈이 모든 것을 말하는 이 시대에,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시인은 최하층의 프롤레타리아 대접을 받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지 좀 애매하게 들리실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현실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시인들이 문학지에 시 한 편을 발표하게 되면, 원고료로 약 3만 원에서 10만 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10만 원은 아주 대단한 원로 시인의 경우에나 해당되고, 보통은 3만원 내지 5만 원을 받습니다. 그렇더라도 매달 혹은 매계절 아주 많은 문학지에 아주 많은 시를 발표할 수 있다면 꽤 많은 수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발표할 수 있을 만큼 시가, 그것도 좋은 시가 술술 씌어진다면 문제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시인 한 사람이 1년에 발표할 수 있는 시는 보통 3, 4편에 지나지 않고, 그것도 소수의 시인들만 이런 혜택을 받습니다. 더욱이 시가, 앞에서 말한 좋은 시가 술술 씌어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시 한 편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고, 남다른 재능도 요구됩니다. 시집을 내서 많이 팔면 되지 않겠느냐고 말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그러나 시집 한 권의 정가가 4000원 내지 5000원일 터인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한다면, 일반적으로 시인들이 추간한 시집은 2000부 이상 팔리기가 어렵습니다. 시인들이 시집을 내고 출판사에서 받는 인세가 정가의 10퍼센트이니까. 5000원이 정가인 시집을 2000부 출간해야 시인에게 돌아오는 수입은 100만 원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단에는 시를 쓰거나 비평하는 사람들끼리 사로 시집을 나눠 보는 풍습이 있기 때문에, 많은 시인들이 인세 받은 돈으로 자신의 시집을 출판사로부터 100권 내지 300권쯤 사는 게 보통입니다. 그렇게 되면 오히려 시인들은 인세를 받기는커녕, 수중의 돈을 더 지출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를 쓰는 일은 말 그대로, 수지가 맞지 않는 일입니다. 시만 써서 생계를 유지하기란 불가능합니다. 또한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시를 쓰고자 한다고 해서 좋은 시가 샘솟듯 솟아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좋은 시만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이른바 ‘전업시인’이 되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닙니다. 시인들 역시 생활인입니다. 그들 역시 결혼하여 딸과 아들을 낳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자연 시인들은 다른 직업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시를 쓰는 일이란,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접받지 못하는 일입니다. 한마디로 상품 가치가 떨어져서 시장으로부터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뜻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시를 씁니다. 매달 혹은 매계절 나오는 문학지마다 시인이 되겠다고 작품을 투고하는 사람들은 줄어들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매년 시행하는 각 일간지의 ‘신춘문예’ 행사에는 그야말로 구름처럼 예비 시인들이 물려듭니다. 이런 공식적인 통로 이외에도, 일기장에, 낙서장에, 수첩 갈피에 자기만의 언어로 시를 쓰는 사람들도 아주 많습니다. 그런가 하면 아예 자비로 시집을 출간하는 사람도 적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시를 써가지고 세 끼 밥을 먹고 살기도 힘이 드는데,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시를 쓰고자 하는 것까요?
제가 여러분과 함께 감상하고자 한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 뒷부분을 보면, 화자인 선생은 시를 공부하겠다고 찾아온 제자를 가리켜 ‘미친 제자’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그 제자와 함께 찻집의 메뉴판을 보며 그 가운데서 제일 값싼 ‘프란츠 카프카’라는 커피를 마셨습니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왜 선생인 그가 이렇게 말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왜 제일 값싼 커피를 마셨는지 그 속뜻을 더 깊이 짐작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도 좀더 문제를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제가 여기서 한번 더 말씀드리자면, 작품 속의 선생이 시를 공부하겠다는 제자를 가리켜 ‘미친 제자’라고 부른 것은 경제적으로 수지가 맞지 않는, 상품으로서 환영받지 못하는 시공부(쓰기)를 그 제자가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계산을 하여도 돈이 되지 않는 시쓰기를 왜 하겠다고 하는지 한편 마음이 착잡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제자와 함께 가장 값싼 거피를 마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선생이나 제자나 모두 시를 쓰는 가난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상품 가치가 없는 물건을 생산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규원은 시 <프란츠 카프카>를 잘 읽어보면 그 속의 화자는 기가 죽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도구화되고 상품화된 시대상을 비판하며, 자신은 물론 그를 찾아온 제자가 세속적 가치에 굴복하지 않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는 눈치입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자신들은 생산성이 낮은 일에 좋아하는 것이 틀림없으나, 인간의 삶은 그것만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더 나아가 세속적 가치를 초월하고자 하는 용기와 그런 행위 속에 깃들인 가치와 보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저는 앞에서 사물지事物知, 사실지事實知, 방법지方法知라는 말을 쓰면서 이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지식과 지식인상에 대하여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를 쓴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창출하는데 속할까요? 제가 생각하기에, 앞의 세 가지 지식은 시를 쓰는 일을 설명하기에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그래서 제가 시인들이 시쓰기를 위하여 새로운 지식의 종류를 만들어본다면, ‘의미지意味知’라는 말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가 임의로 만든 용어이니, 이 말의 뜻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의미지’란 사물지를 넘어, 사실지를 넘어, 방법지를 넘어, 무언가를 앞에 놓고 도대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냐고 묻는 일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여기 나무 한 구루가 있다고 합시다. 그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를 아는 것은 사물지입니다. 그리고 그 나무가 어떤 원리의 지배를 받는지 아는 것은 사실지입니다. 또한 그 나무의 이러한 원리를 어디에 응용하여 인간사에 보탬이 되는 물건을 만들까 하는 것은 방법지에 속합니다. 이에 반해 나무로 그런 물건을 만들고 또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의미지에 속합니다. 시인들은 바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의미를 탐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의미를 묻거나 생각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인간이란 운명적으로 의미를 묻거나 생각하며 살아가도록 조건지어져 있습니다. 여기 한 그릇이 있다고 할 때 시인들은 그 밥을 어떻게 경제적으로 먹을까를 묻지 않고, 우리가 법을 먹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이렇게 볼 때 시인들이 갖고 있는 의미지는 상당히 놓은 차원의 지식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먹고사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지식은 아닙니다. 먹고사는 데 직접적으로 필요한 지식이 아닌 것은 세속사회에서 언제나 높지만 외롭고 쓸쓸한 자리에 있습니다.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에 나오는 선생과 제자는 이런 세계를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높지만 쓸모없는 세계를 추구하는 대가로, 외롭고 쓸쓸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이 시를 읽는 것도, 시 한 편을 읽었다고 해서 배가 부르기 때문도 아니요. 돈벌이가 되기 때문도 아닙니다. 시를 읽는 일은 먹고사는 일과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무엇인가를 먹으면서도 ‘그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드높은 영혼이 칭얼대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규원의 시 <프란츠 카프카>를, 그리고 저의 이 글을 읽으면서 여러분들이 진정 나는 얼마만큼 도구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또 얼마만큼 자율적인 삶을 살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보시기를 권합니다. 최대의 이윤을 남기는 일이 최고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과 등식일 수 없으며, 그것이 성공의 절대적인 척도가 될 수 없음은 자명하지 않습니까? 제일 값싼 커피 ‘프란츠 카프카’를 마시면서도 자존심을 잃지 않는다는 것은 아름답게 보이지 않습니까? 아예 제일 값싼 커피 ‘프란츠 카프카’조차도 거부하고 카프카의 삶과 그의 작품을 음미하며, 진정 자유로움을 추구한 카프카의 영혼과 만나는 일은 더욱더 아름답지 않습니까?
―정효구, 『시 읽는 기쁨』, 작가정신, 2003.
첫댓글 나는 이 시 평을 읽으며 무릎을 첬다 그리고 나는 왜 시를 쓰나? 생각하게 됐네요 돈도 안되는 이 고된 노동을, 페북 어느 시인이 "요즘은 개나소나 시를 쓴다"는 이 글을 보며 화가 났지만, 사실인것을 금방 수긍하게 되네요. 시는 왜 쓰나?
나는 개인가 소인가,
'프란츠 카프카'는
여러 평론가가 평을 했지만
정효구 교수의 해설이 비교적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