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탄광촌에 한 소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은 친구들과 놀다가 우연히 아름다운 빛을 내는 보석 하나를 주웠어요. 날이 저물어 탄광에서 아버지가 돌아오자 소년은 자랑스럽게 보석을 내밀었지요.
“아빠, 이것 보세요. 예쁘죠? 놀다가 주웠어요. 난 이런 보석 같은 사람이 될 거예요. 늘 이렇게 반짝이는 보석 같은 어른 말이에요.”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한참 동안 소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창가에 걸려 있는 호롱불 쪽으로 걸어가 성냥으로 불을 밝혔습니다. 어두웠던 방이 환해졌지요. 그리고 아버지는 소년에게 호롱불을 보여주며 말씀하셨습니다.
“얘야, 보석 같은 사람보다 이런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소년은 바람만 불면 훅 꺼져 버리는 보잘것없는 호롱불 같은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의 말씀이 잘 이해되지 않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아들아, 보석은 태양 아래서만 자신의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단다. 태양의 힘을 빌려 빛을 내는 건 참된 빛이 아니야. 너는 이 호롱불처럼 세상이 어두울 때 제 몸을 태워 세상과 사람들의 가슴을 환하게 밝혀 주는 사람이 되어라.”
이 아버지의 지혜가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보석이 훨씬 아름답고 가치가 있을 것 같지만, 어쩌면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자신의 몸을 태워 모든 것을 환하게 밝혀 주는 호롱불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들은 이 소년처럼 호롱불보다는 자신만을 뽐내려고 노력하는 보석과 같은 삶만을 원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준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언제 주인이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그냥 깨어 있으면 될까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늦어지는구나.’라는 생각으로 동료들을 때리고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것 역시 깨어 있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살다가는 예상치 못한 날에 주인이 돌아와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갈 수 밖에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바로 깨어 있다는 것은 앞선 아버지의 말씀처럼 호롱불과 같은 삶을 사는 것입니다. 자기만을 세상에 빛내기 위해서 노력하는 보석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태워서 세상을 밝게 비추는 호롱불과 같은 사랑의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행복을 주제로 논문을 썼고, 이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요? 아니지요. 왜냐하면 행복은 앎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행복해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깨어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깨어 준비하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위해 잊지 못할 쇼를 연출해보세요.
빠다킹신부
졸음이 밀려올 때
-김광태 신부-
졸면 죽는다.’ 군대의 초소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이 문구는 우리의 신앙 안에서도 똑같습니다.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렇긴 한데, 한편으로 늘 깨어 있기란 또 얼마나 어렵습니까? 설문 결과에 따르면 열심히 활동하는 구역장 반장들 중에서도 냉담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 사람들의 비율이 상당했습니다.
실제로 주변에서도 이제 좀 쉬고 싶다는 신자들의 불평을 흔히 듣습니다.
이해할 만합니다.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데다가 주변의 협조도 없는 가운데 너무 오랫동안 어떤 직책을 수행하다 보면 지치게 되는 것입니다. 운전하다 졸음이 쏟아지면 아무리 노력해도 정신을 가다듬기 쉽지 않습니다. 그럴 땐 휴게소에 차를 대고 잠깐 눈을 붙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신앙생활 하다가 힘들고 지칠 때 역시 ‘십자가를 져야 구원 받는다’는 당위성만 강조해가지고는 그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없습니다. 쉬어야 합니다. 단 그냥 쉬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힘을 회복하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의 사랑을 깊이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높은 산으로 올라가 얼굴이 변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처럼 일상의 삶에서 훌쩍 떠나 하느님의 기운이 머무시는 장소를 찾아가 봅시다.
하느님의 사랑을 진하게 체험하고 나면 더 이상 인내력으로 버티지 않아도 됩니다.
돌보는 이의 행복
-김보경 수녀-
13년 전 큰 어려움에 봉착하여 집에 가서 잠시 몸을 맡길 양으로 가족을 생각하는데, 제일 먼저 언니의 얼굴이 떠올라 깜짝 놀랐다. 평소 어머니께서 나를 두고 ‘딸 셋 중에서 제일 예뻐하는 딸을 하느님께서 데려가셨다’고 말씀하셨고, 나 역시 어머니의 희로애락에 나의 희로애락을 동일시하였기에 당연히 어머니가 떠오를 줄 알았기 때문이다.
며칠 동안 내면작업을 하고 나의 무의식을 알게 되었다. 나보다 2년 8개월 위인 언니는 아홉 살 때부터 어머니 대신 집안일을 도맡았다. 어머니께서 우리에게 아침을 먹이고 일을 나가시면 씻기고 옷 입히고 점심 저녁을 해먹이고 집안을 치우고 심지어 목욕탕에 데려가 때를 밀어준 이도 언니였다. 언니가 야간 고교를 가자 저녁밥 짓는 일이 내 몫이 되면서 언니가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살뜰히 씻기고 먹이며 돌보아 준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어머니는 양식과 교육비를 대었지만 나를 돌본 이는 언니였기에 마음 편히 쉬며 몸을 맡기고 싶을 때 언니가 떠올랐던 것이다.
언니는 뇌종양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몇 달 고생하다가 며칠 전부터 제천에 있는 용하다는 의사에게 치료를 받고 있다. 그런데 내가 전에 발이 아팠다는 것을 기억하고 제천에 데려가 진료받게 하고 싶다고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전화를 한 것이다. 이미 중년이 된 동생을 여전히 대가도 바라지 않고 돌보려 하는 언니에게 마음속 깊이 감사의 정을 느꼈다. “주님, 당신께서 식솔을 맡기시고 제때에 양식을 내주게 하였던 종이 그렇게 하였을 때에 축복하였듯이, 당신께서 맡기신 두 동생을 한번도 불평하지 않고 성심껏 충실하게 돌본 언니에게 ‘행복하여라,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이라 칭찬하여 주시고 축복하여 주소서.”
누군가가 참으로 어려워서 몸을 의탁하고 싶을 때 절로 마음에 떠오르는 사람이 된 이여! 행복하여라. ●
“깨어 있어라.”
-양승국신부-
<은총의 순간이 다가오면>
어느덧 여름의 끝자락에 와있습니다. 무더운 여름 보내시느라 고생들이 많으셨습니다. 저희는 청소년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바닷가 캠프장에 와서 그들이 사용했던 담요를 빨고 있습니다. 물기를 뺀 담요들은 대 강당 양철 지붕위에 널어 말립니다.
휴식시간 동안 높다란 지붕 꼭대기에 홀로 앉아있었는데, 그 기분이 이만저만 좋은 것이 아닙니다. 마치도 산 정상에 올라온 것 같습니다. 세상이 다 제 발아래입니다. 멀리 점점이 떠있는 고깃배들 하며, 무인도들이 그림처럼 제 아래로 펼쳐져 있었습니다.
아무리 그럴싸해도 지붕 위에서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졸다가는 바로 응급실로 직행입니다. 오늘 예수님 권고 말씀대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형제들과 단체로 움직일 기회가 많기에 저희는 주로 승합차를 이용합니다. 운전석 옆에 앉은 형제들이 가끔씩 꼬박꼬박 졸기 시작하면, 운전하는 저까지 졸음이 오기 때문에 저희끼리 농담 삼아 몇 가지 ‘선탑자 수칙’을 만들었습니다.
1. 선탑자는 만일의 돌발 사태에 신속히 대처하기 위해 늘 깨어 있는다.
2. 선탑자는 언제나 전방을 예의주시한다.
3. 선탑자는 운전자가 졸고 있는지 여부를 주기적으로 확인한다.
4. 선탑자는 운전자가 늘 깨어있게 도와주기 위해서 최신 버전 농담을 3개 이상 준비한다.
깨어있다는 것, 생각할수록 좋은 것입니다. 운전할 때 선탑자가 정신없이 졸고 있다면 정말 운전할 맛 안 납니다.
강사로 초빙되어 갔는데,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침을 흘려가면서까지 졸고 있다면 그것처럼 맥 빠지는 일은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가끔씩 그런 사람 있는데, 단 둘이 마주한 술자리에서 한 사람은 신나게 이런 저런 세상 살아가는 펼쳐놓고 있는데, 바로 앞에 앉은 사람이 술을 못 이겨 잠을 잡니다. 참으로 재미있는 모습입니다. 제가 많이 그랬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그분들께 정말 죄송하고 부끄럽습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준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늘 예의바르다는 것입니다. 깨어있다는 것은 경건하다는 것, 단정하다는 것, 성실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남들이 세상모르게 다 잠들어있는 꼭두새벽에 일어나 하늘을 올려다보신 적이 있습니까? 홀로 깨어있는 체험을 해보는 것, 정말 좋은 일입니다. 더욱 금상첨화인 것은 홀로 깨어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냥 홀로가 아니라 하느님 안에 홀로입니다. 그분과 나 둘이 함께 있는 것입니다.
돌아보니 정말 많은 은총의 날들이 흘렀습니다. 정녕 감사해야겠습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또 다시 자비의 세월이 흐르던 어느 날 주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실 것입니다. 그리고 손을 내미실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자, 이제 그만 일어나야겠구나. 때가 되었구나. 나랑 같이 길을 떠날 순간이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런 순간이 올 때 지체 없이, 기다렸다는 듯이 일어설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영원을 내다보는 사람
-이기양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늘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라. 너희의 주인이 어느 날에 올지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명심하여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지 집주인이 알면, 깨어 있으면서 도둑이 자기 집을 뚫고 들어오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마태24,42-44)
준비가 없는 삶은 재난을 초래한다는 것을 경고하시지요. 하느님께서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부르시더라도 충실한 종의 모습으로 따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늘 깨어 준비하는 모습이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탈리아 예수회 알로이시오 성인이 신학교를 다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하루는 교장신부님이 운동장에서 놀고 있는 어린 신학생들을 불러 세우고 물었습니다.
?’5분 후에 이 세상에 종말이 찾아온다면 무엇을 하겠느냐??“
한 학생이 대답했습니다.
?’성당에 가서 기도를 하며 종말을 준비하겠습니다.?“
또 다른 학생은 이렇게 답했습니다.
?’저는 집에 가서 부모님과 함께 종말을 준비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때 알로이시오 성인은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지금 그대로 운동장에서 놀겠습니다.?“
그렇습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수선을 떨며 허둥대는 것이 아니지요. 평소와 다름없이 성실하고 묵묵하게 최선을 다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지나온 과거를 후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고 또 허황된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현재를 충실하게 사는 것, 이것이 준비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물론 여기에서 성실하게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사는 삶을 말하지요. 준비하고 깨어 있으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매 순간 종말을 맞듯이 순간 순간을 성실하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우리에게 있어서 매 순간은 종말이지요. 그 순간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준비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을 예로 들어 설명하시지요. 여기에서 충실한 종은 주인이 맡긴 일에 최선을 다하여 자기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뿐만 아니라 더 큰 상급을 받게 되지요.
반면에 불충한 종은 속으로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때리며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기만 하다가 생각지도 않은 날, 짐작도 못한 시간에 돌아온 주인에게 발각이 되어 위선자들이 벌받는 곳으로 쫓겨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대조적인 두 모습을 제시하시면서 늘 깨어 준비하는 성실한 삶을 살아갈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지요.
또한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잊지 말고 짚고 가야할 중요한 부분이 있습니다. 충실한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에서 보듯이 모든 재산의 권리는 주인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마치 자기의 것인 양 으스대며 다른 종들을 때리고 술친구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방탕한 생활을 한 불충한 종은 결국 주인에 의해 벌받는 곳으로 보내지고 거기에서 가슴을 치며 통곡하였지만 때는 이미 늦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이지요.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은 나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천주교 신자나 불교 신자나 할 것 없이 인간이면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그래서 불가(佛家)에는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로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을 표현하기도 하지요.
우리는 하느님께서 맡겨주신 것을 관리하는 관리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나에게 위탁한 것을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관리하는 것뿐이지요. 그리고는 다시 주인에게 돌아가서 성실한 관리인으로 인정을 받는 것이 우리 삶의 본분입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갖추고 누리는 모든 것을 내 것인 양 여기며 살아갑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내 것으로 착각하는 그 도를 넘어서 재물을 마치 주인처럼 섬기며 살아가기도 하지요. 우리는 이것을 우상숭배라고 부릅니다. 이는 신자나 비신자나 별 차이가 없는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주인이시며, 우리의 인생이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임을 안다면 그렇게 살지는 않을 것입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생각지도 못한 때, 짐작도 못한 시간에 다가옵니다. 우리는 죽음을 만날 때마다 빈손으로 태어나서 빈손으로 죽는 우리의 삶이 재산 관리인에 지나지 않다는 것을 거듭 확인하게 되지요. 주인에게 최선을 다하고 자신의 본분에 충실한 관리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인이 맡긴 재산이 자기 것인 양 흥청망청 살거나 또는 필요 이상으로 집착을 한다면 그것은 성실한 종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만일 그가 못된 종이어서 마음속으로 ??주인이 늦어지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동료들을 때리기 시작하고 또 술꾼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면, 예상하지 못한 날, 짐작하지 못한 시간에 그 종의 주인이 와서, 그를 처단하여 위선자들과 같은 운명을 겪게 할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울며 이를 갈 것이다.?“(마태24,48-51)
우리는 언제든지 주인이 부르면 달려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부르심에는 순서가 없지요. 아직 젊다거나 할 일이 많다는 이유로 자신에게는 해당이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주인이 부르면 언제든지 응답할 수 있도록 성실하게 하루 하루를 준비해야 하겠습니다. 이런 글이 있지요.
?’할 일 없이 보낸 오늘 나의 하루가 어제 죽은 그 사람이 그렇게 살고 싶어한 바로 그 내일이다.?“
매일 매일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 성실한 종의 모습이며, 깨어 준비하라는 오늘 복음 말씀의 실천임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주님과의 관계
-이수철신부-
주님과의 관계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요?
관계 속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관계를 떠나선 살 수 없는 우리들입니다.
관계가 잘 될 때는 자유로움을 느끼지만
관계가 잘 안될 때는 답답함을 느낍니다.
“주님은 우리의 하느님이시니 어서와 조배드리세.”
늘 하는 평범한 독서기도 시 초대송 후렴이지만,
주님이신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사람 간의 보이는 수평적 관계만 있고,
하느님과의 보이지 않는 수직적 관계가 빈약하다면
그 내적 삶은 얼마나 천박(淺薄)하겠는지요.
가끔, 마치 친구 같은 장성한 딸과 팔짱을 끼고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걷는 모녀들을 보면
그 친밀한 관계의 모습이 참 아름답고 흐뭇하게 느껴집니다.
한 집에 살아도 다 그런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한 집에 살아도 고립 단절되면 남남일 수 있듯이,
한 수도원이나 수녀원에 살아도
하느님과 무관하게 남남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남남으로 살다 이혼하는 부부이듯이,
주님과도 남남으로 살다가 수도원을 떠날 수 있습니다.
새삼 관계의 중요성에 주목하게 됩니다.
우리가 매일 평생 끊임없이 드리는 미사와 기도,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하기 위함입니다.
그냥 타성적으로 바치는 전례기도가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전례요,
이 전례를 통해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도 깊어집니다.
이래서 깨어 의식적으로 미사와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하느님과의 깊어지는 관계는 저절로 온유와 겸손의 열매로 들어납니다.
오늘 복음과 독서도 이런 관계의 관점에서 보면 그 의미가 명료히 드러납니다.
“깨어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는 종이 충실하고 슬기로운 종이겠느냐?
행복하여라! 주인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늘 깨어 준비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성실한 삶의 자세,
바로 주님과의 살아있는 관계의 표현입니다.
이런 이들의 눈빛은 초롱초롱 기대의 기쁨으로 빛날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실하신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당신의 아드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맺도록
우리를 불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님과의 깊은 친교와 더불어
하느님과의 관계도 깊어지는 우리들입니다.
그분께서는 우리를 끝까지 굳세게 하시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흠 잡을 데가 없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 거룩한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아멘.
깨어있는 사람과 잠 자는 사람
-강영구신부-
+너희의 주인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있어라. 만일 도둑이 밤 몇 시에 올는지 집주인이 알고 있다면 그는 깨어있으면서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다.
그대에게
예수께서는 깨어있는 삶을 살 것을 당부합니다.
깨어있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잠을 자지 않는 것이 깨어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깨어있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자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삼분의 일을 침대에 누워 잠으로서 보냅니다.
80년을 산다고 가정하면 적어도 25년은 침대 위에서 잠을 자게 됩니다.
잠으로 보내는 25년이 깨어있는 55년을 좌우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루 24시간 중에 적어도 7시간은 잠을 자게 됩니다.
7시간 동안 깊이 그리고 평화롭게 잠을 자는 사람은 깨어있는 17시간을 알차게 보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반대로 잠자는 시간이 아깝다고 밤을 새워 일을 하거나
온갖 근심 걱정거리와 갖가지 망상으로 뒤척거리면서 뜬 눈으로 밤을 새우면
깨어있는 시간을 졸음으로 망쳐버리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깨어있기는 하지만 잠자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잠을 잘 잘 수 있어야 합니다.
엄마 품에 안긴 아기가 평화롭게 잠을 잘 수 있는 것처럼
하느님 품에 귀의(歸依)하여 그분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고 하늘의 뜻(天命)을 따라 사는 사람이 깨어있는 사람이 됩니다.
깨어있기 위해서 하느님 품안에서 잘 자는 사람이 되십시오.(一明)
-김윤태 신부-
무엇이던지 목적하는 바에 맞추어 준비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어디로 무엇을 하러 가느냐에 따라 말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의 행동이나 습관은 무엇을 지향하고 준비하느냐에 따라 정해진다는 말이 됩니다. 운동하러 가는지, 식사하러 가는지, 아님 어떤 일을 하러 가는지, 아님 쉬러 가는지, 여행 가는지, 하느님께 가는지 아님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 우리들의 행동양식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지금 우리는 각자 어디로 가고 있으며 나의 모든 행동들은 어디로 향해 가고 있습니까?
동물 중에 기린이란 동물 아시죠. 아주 키도 크고 목도 긴 동물 말입니다. 글쎄 이 기린은 아주 겁이 많답니다. 그래서 항상 맹수들이 오는지 주위를 살피면서 평생을 지낸다고 합니다. 그리고 많은 초식동물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비슷하겠지만 유독 기린은 더 조심하며 생활합니다. 그래서 기린은 대부분 선 채로 눈을 꾸벅 꾸벅 졸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안전하다 싶으면 땅에 앉아 잠을 자기도 한답니다. 그것도 땅에 앉아서 그 긴 목을 구부려서 잠을 잡니다. 잠을 자다가도 무슨 소리가 나면 금방 머리를 들어서 경계를 합니다. 그런 이유로 기린이 깊은 잠을 자는 것은 하루에 5분도 안된다고 합니다. 이런 기린의 습성과 긴 목과 다리를 가진 모양 때문에 다른 초식동물들도 기린의 행동을 많이 참고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기도 한답니다. 아마 기린 자신의 생존본능이 다른 동물에게는 좋은 파수꾼이 되나 봅니다.
이처럼 우리도 아마 기린과 같은 삶을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한 나의 삶이 중단되거나 훼손되지 않기 위해서 늘 깨어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우리의 삶의 발걸음이 하느님 에게로가 아니라 세상으로 대변되는 재물과 권력 등에로 빼앗기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원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로 다른 곳에 가 있게 되며, 이는 자신만이 아니라 자신과 연관된 이웃까지도 함께 원하지 않는 곳으로 가게 되는 결과를 맛보게 됩니다.
이런 연유로 성경은 우리에게 늘 깨어 준비하고 나아가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빛을 잃거나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무엇으로 대신할 수 있느냐고 질책하십니다.
그래서 오늘 독서에서는 우리들의 소중한 신앙을 잘 지켜 “흠 없는 사람으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서게 되기를 빈다.”고 하시며 늘 준비하는 자에게만 주어지는 것이라 하십니다. 나아가 “언제 올지 모르니 항상 깨어 있어라.”라는 말을 잊지 말라 하십니다. 자칫 어리석은 부자처럼 잘 준비하다가 가장 소중한 때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실수를 하면 안되지 않겠습니까. 이 부자는 어느 해 소출이 많이 나자 이렇게 외쳤지요. “내영혼아 기뻐하여라 먹고 마시고 즐기자 이제 몇 해 동안은 걱정이 없다 큰 곡식창고를 지어 놓아서니 걱정할 것이 없다고 말입니다.” 이때 하늘은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이 어리석은 자야 오늘밤 너의 영혼이 너를 떠나가리라.”고 말입니다.
“도둑이 언제 올지 모르니 깨어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동안 주춤하는 동안 다른데 관심을 갖는 동안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일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전부 깡그리 잃어버린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어버리면 방심한 기린이나 어리석은 부자나 악한 종처럼 되어 행복할거라 생각하고 선택한 것이 오히려 불행에로 이끌고 거룩하고 흠 없는 모습이 아니라 벌 받는 자로 아버지 하느님 앞에 나아가게 되어 가슴 치며 통곡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늘 준비하며 행복한자 될 것인지 잠깐의 재미와 기쁨을 위해서 자신과 이웃을 구렁텅이로 이끄는 방심한 기린의 삶을 선택할 것인지. 늘 우리 앞에는 도전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늘 후회하지 않는 선택으로 좋은 하루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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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태 신부 -
오늘 복음은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기준은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느냐? 혹은 없느냐의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책임을 다한다는 것은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함께 하시는 하느님께 충성스런 종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용기 있는 신앙생활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우리 인간은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는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이 태어날 때 무엇을 가지고 태어나겠습니까? 혹은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죽겠습니까? 돈, 명예, 권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것을 가지고 죽지도 못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면 전혀 우리가 가지고 태어나고 가지고 죽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같습니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그림자를 가지고 태어나고 죽을 때 그림자를 가지고 죽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바라 볼 때 하느님 아버지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곧,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와 함께 태어나시고 함께 죽음을 맞이한다고 할 수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같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는 내가 그렇게 기도를 열심히 하고 그렇게 봉사를 하였는데 무엇을 주셨는가?' 라고 하면서 떠나는 이들이 많은 것같습니다. 그러나 그렇지마는 않은 것같습니다. 어린 아기를 가지신 부모님들은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작은 꼬마 아이가 칭얼거리면 부모님은 들어주십니다. 우리 역시 간절히 청할 때 들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용기 있는 신앙 생활이 필요합니다. 그러할 때 우리는 충성스런 종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우리는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같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가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아픈데 부모가 춤바람이 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자식이 아프면 부모도 아픕니다. 자식이 슬프면 부모도 슬픕니다. 자식이 기쁘면 부모도 기뻐하십니다. 또한 자식이 길을 걸어가다가 넘어지면 부모는 일으켜주기보다는 스스로 일어날 수 있도록 용기를 부어주십니다. 그러면 넘어진 아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납니다. 그러할 때 부모는 매우 기뻐합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내가 힘들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힘들어하십니다. 내가 어려울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도 어려워하십니다. 내가 기쁠 때 하느님 아버지는 기뻐하십니다. 내가 신앙 생활을 하다가 넘어지면 하느님 아버지께서 일으켜주시지 않으십니다. 도리어 용기 내기를 바라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 용기를 가지고 일어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뻐하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세 번씩이나 넘어지십니다. 첫 번째 넘어지실 때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인간의 모습이 아닐 것입니다. 온갖 어려움에 짓눌려 있는 모습, 온갖 고통에 싸여 있는 모습, 온갖 아픔에 울부짖는 모습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넘어지시면 또 다시 일어나십니다. 그리고 또 넘어지십니다. 그래도 용기를 가지시고 일어나십니다. 세 번 넘어지시고 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십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다 이루었다." 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볼 수 있는 하느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닌가싶습니다.
가장 충성스러운 모습은 예수님을 통해서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예수님을 닮고자 합니다. 이러한 모습을 히브리서에서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2장 2절에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만을 바랍시다.' 라고 우리의 삶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진정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그 용기를 청하도록 합시다. 용기가 있는 자는 성실한 종이 될 것입니다.
† 나의 죽음 - 세상의 종말
-박상대 신부-
우리는 지난 며칠동안 마태오복음 23장을 통하여 예수께서 유대교의 지도자들에게 내뱉은 신랄한 비난과 7번의 불행선언에 관한 말씀을 들었다. 마태오는 23장을 마무리하면서 유대교 신앙의 상징인 성도(聖都) 예루살렘의 멸망과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의 총체적인 멸망을 예고하였다.(23,34-39) 이는 곧 이스라엘 역사의 종말을 의미한다. 마태오는 이스라엘의 종말에 관한 테마를 근거로 인류역사의 종말을 제고한다. 인류역사의 종말은 마태오가 엮은 예수님의 종말설교(24-25장) 안에서 논리적으로 다루어질 것이다.
마태오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산상설교(5-7장), 파견설교(10장), 비유설교(13장), 공동체설교(18장)에 이어 마지막으로 종말설교(24-25장)를 논리적으로 엮었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대략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마르코복음 13장의 구조를 따르고 있으나, 한층 포괄적이고 조직적이다.
마태오의 종말설교는 크게 7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것은 ① 예루살렘 성전파괴 예고(24,1-3), ② 종말예고의 전조들 / 재난의 시작(24,4-14), ③ 종말직전의 전조들 / 가장 큰 재난 발생(24,15-28), ④ 종말사건들 / 인자의 내림(24,29-31), ⑤ 무화과나무의 비유(24,32-35),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24,36-44), ⑦ 종말에 관한 비유 4편(24,45-25,46)이다.
종말에 관한 네 편의 비유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 열 처녀의 비유(25,1-13), 달란트의 비유(25,14-30), 그리고 최후심판의 비유(25,31-46)이다. 이 마지막 최후심판의 비유로서 사실상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앞둔 예수님의 공적 가르침은 끝난다.
오늘 복음은 종말설교의 ⑥ 그 날과 그 시간에 대한 말씀의 마지막 단락(24,42-44)과 ⑦ 종말에 관한 4편의 비유 중 첫 번째 비유에 해당하는 충성스런 종과 불충한 종의 비유(24,45-51)를 매끄럽게 연결시켜 들려준다.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44절)는 첫 단락의 말씀이 종말에 관한 비유 전체를 해석하는 열쇠가 된다고 하겠다.
이렇게 종말에 관한 비유들의 특징과 요구사항은 종말을 깨어 준비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미 예수께서 언급하신 바와 같이 ‘종말의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24,36)는 것이다. 이는 곧바로 들이닥칠 수도 있고, 시간을 두고 더디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기다림의 마음은 초조하기 마련이다. 곧 들이닥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의 종말과 인자의 재림이 늦어지면서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 적지 않은 문제들이 발생했을 것이라는 예상은 충분히 해 볼만하다.
이와 같이 ‘재림지체현상’은 종말의 시기와 모양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종말설교에 담겨있는 4편의 종말비유를 묵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종말이 오리라고 생각했던 시점에서 2,000년의 시간이 흘렀다. 언제 종말이 닥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인간이 삶을 다하고 죽는 순간이 바로 세상의 종말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든 필시 죽어야 한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죽음보다는 삶을 생각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살아 있도록 허락하신 기간 동안에는 누구든 삶에 애착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야 의무가 있고 동시에 권리도 있다. 그러나 삶이 곧 죽음의 준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삶이 죽음으로 모든 것을 마감한다면 그 준비는 큰 의미가 없다. 하지만 그 준비가 헛되지 않도록 분명히 다시 오실 주님께서 점검해 주실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을 준비시킬 책임을 맡은 종의 임무가 한층 돋보이는 것이다.
책임이 크면 압박감도 크지만 그에 대한 즐거움과 보람도 크기 마련이다. 행복하여라, 마지막 날을 향하여 하느님의 백성을 잘 준비시키는 데 밤낮으로 봉사하는 사람들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