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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전례상징’] 성체성사의 상징: 빵과 포도주
음식을 통해 자신을 기억하게 한 먹보 주님!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마태 11,19) 예수님은 먹보, 술꾼으로 불릴 정도로 식탁에서 다른 이들과 식사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신 듯합니다.
한때 ‘먹방’이 유행이 되어 옥스포드 영어사전에도 ‘mukbang’이라고 등록이 되었는데, 왜 우리는 남이 먹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까? 사람들은 자신이 먹는 것뿐 아니라 남이 먹는 것을 보는 것도 즐깁니다. 그것은 맛있는 음식을 보면, 위와 췌장에서 그렐린 호르몬이 만들어지고 이 호르몬이 식욕을 자극하기 때문이라고 뇌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먹고 싶은 욕구와 자신을 멋있게 보이고 싶어서 다이어트를 해야 한다는 심리적 갈등 사이에서 고민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차원, 곧 하늘나라의 잔치에서 먹고 마실 수 있는 희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의 나라에서 너희와 함께 새 포도주를 마실 그날까지, 이제부터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을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마태 26,29)
땅의 결실인 빵과 포도주!
미사 중에 사제는 예물 준비를 하면서 “저희가 땅을 일구어 얻은 이 빵을 주님께 바치오니”, “저희가 포도를 가꾸어 얻은 이 술을 주님께 바치오니”라고 기도합니다. 주님께 봉헌되는 빵과 포도주는 창조주께서 창조하신 ‘땅의 결실’입니다. 땅에 뿌리를 두고 토양 깊숙이 있는 모든 기운을 모아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입니다.
빵이 되기 위해서 밀알은 가루가 되고, 포도주가 되기 위해서 포도알은 즙이 됩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준 예수님의 삶을 매일 미사 때 봉헌되는 빵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을 장 레미 신부님은 ‘생명의 태양인 성찬례’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밀은 자라서 추수되기 위해 땅에서 죽는다. 하지만 추수도 밀을 빻아 반죽해서 빵을 구워 먹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다. 이런 이중의 죽음을 통하여 사람이 사는 데 필요한 빵이 되는 것이다. 이 죽음은 생명의 양식이 되기 위한 길이다.”
탈출에서의 ‘어린 양’과 ‘누룩 없는 빵’과 광야에서의 ‘만나’
고대 유다인에게 있어서 이집트를 탈출한 사건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고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체험입니다. 왜냐하면 출애굽은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 종살이의 멍에를 던져버리자고 스스로 결정한 게 아니라 주님께서 구해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와 상인방에 바르고 그 고기는 가족이 먹는 파스카 축제(탈출 12,1-14 참조)와 ‘이레 동안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무교절(탈출 12,15-20 참조)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는 출애굽과 연결된 가장 중요한 축제들입니다.
브랜트 피트는 ‘성만찬의 신비를 풀다’에서 “파스카 축제를 완성하는 것은 어린 양의 죽음이 아니라 그 고기를 먹는 것”이라고 하며 그 이유는 성경에서 그들이 어린 양을 ‘먹어야’ 한다고 다섯 번에 걸쳐 진술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받아 먹어라. 이는 내 몸이다”(마태 26,26)라는 말씀의 배경이 됩니다.
출애굽 여정을 위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푼 특별한 음식은 ‘만나’(탈출 16,31)입니다. 만나는 40년 동안 매일 나타났으며,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도달하자 그 기적이 멈추었다고 전해줍니다(여호 5,12). 여기서 핵심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는 사실로서, ‘만나’라는 이름이 히브리어로 ‘이게 뭐지?’(man hu)라는 의미에서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자연에서 얻은 천연 물질이 아니라 하늘에서 온 초자연적인 빵이라고 이스라엘 민족은 믿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주님의 기도’(마태 6,9-13; 루카 11,2-4)에서 ‘일용할 양식’이 그리스어 단어인 ‘에피우시오스’(epiousios)이고, 불가타역 라틴어로는 ‘수페르숩스탄찌알레’(supersubstantiale), 곧 ‘초자연적인’ 빵이라는 사실과 잘 연결이 됩니다.
최후 만찬의 빵과 포도주
출애굽 사건을 기념하며 하느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리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은 매년 ‘파스카 예식’을 거행했습니다. ‘파스카 예식의 만찬’은 ‘세데르’(seder)라고 불리고, 파스카 만찬의 규정은 ‘하가다’(Haggadah)라고 알려진 문헌에 담겨 있습니다. 파스카 만찬의 기본 구조는 예수님 시대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정형화된 것으로 보입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에 대한 이야기는 두 그룹, 곧 마태 26,26-30와 마르 14,22-26, 루카 22,14-20과 1코린 11,23-25으로 나뉩니다. 이 두 그룹의 차이 중에 가장 두드러진 것은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라는 문구가 있느냐 일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빵과 포도주를 당신의 몸과 피로 변화시키고 제자들에게 먹고 마시라고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라 교회는 지금도 성찬례를 거행하며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며, 주님과 일치를 이룹니다.
성서학자인 스콧 한은 ‘네 번째 잔의 비밀’에서 유다교의 파스카 예식과 비교했을 때, 예수님께서 네 번째 포도주잔을 마시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추어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 네 번째 잔을 거르기로 택하셨을 때, 파스카 만찬은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나라의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까지 포도주를 다시는 마시지 않겠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직전에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건네진 포도주를 한 차례 거부하셨다(마르 15,23 참조).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에 이르자 ‘신 포도주’가 예수님께 건네졌다(요한 19,29; 마태 27,48; 마르 15,36; 루카 23,36 참조). 요한복음에서만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을 알려 준다. ‘예수님께서는 신 포도주를 드신 다음에 말씀하셨다. ‘다 이루어졌다.’ 이어서 고개를 숙이면서 숨을 거두셨다’(요한 19,30).”
우리는 성체성사에 참여하여 말씀과 성체와 성혈로 양육을 받으면서도, 아직도 또 다른 그리스도로 동화되지 못합니다. 우리는 언제 예수님처럼 “다 이루어졌다”라고 할 수 있을까요. 밀처럼 가루가 되어 빵이 되듯이, 포도가 짜여서 즙이 되듯이, 사랑 때문에 자신이 가루가 되고 짜이는 아픔을 넘어서야 비로소 가능할까요?!
[전례력 돋보기]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공경
본래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로 가까운 주일에 경축 이동해 성대하게 기렸다. 어린이 미사 때 신부님이 두루마기 형태의 제의에 갓을 쓰고 미사를 드리면서 김대건 신부님의 인상을 깊게 남겼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이제 성 김대건 신부의 대축일을 지내지 않는다. 성 김대건 신부의 축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전례력에서 따로 기억하지 않게 된 것이다.
2017년부터 사용된 「로마 미사 경본」 새 번역 인준 때 교황청 경신성사성이 전례력 안에 한 성인을 중복해서 경축하지 않을 것을 강조했는데 한국 교회는 이미 9월 20일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축제를 대축일로 지내고 있었다.
보편 전례력에서 성인 공경
‘성인 공경은 자주 할수록 좋은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경신성사성이 한 성인에 대해 중복해서 축제를 지내지 말라고 규정한 이유는 성인 축일이 너무 많아져 예수님의 신비를 기억해야 하는 전례력이 온통 성인 축제로 가득 채워지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순 시기나 대림 시기에도 매일 성인 축일이 이어지면 그 전례 시기에 기억하고 묵상해야 할 예수님에 관한 내용들을 놓치기에 이를 방지하고자 한 것이다. 사실 교회 전례력의 역사 안에서 이런 성인 축일의 확장은 계속 있어 왔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 문제를 바로 잡고자 했다.
성인들의 축일은 참으로 그리스도께서 당신 종들 안에서 이루신 놀라운 위업을 선포하고, 신자들에게 본받아야 할 적절한 모범을 제시하지만 예수님의 구원의 신비 자체를 기억하는 축일보다 앞서지 않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전례 헌장」 111항 참조)
한국 순교자 시복 시성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공경
그렇다면 왜 애초에 성 김대건 신부의 축일만 따로 지내게 된 걸까? 103위 한국 성인 시성은 함께 되었지만 그 공경의 시작은 달랐다. 먼저 1925년 비오 11세 교황에 의해 기해박해(1839년)와 성 김대건 신부를 포함한 병오박해(1846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다. 이후 비오 12세 교황은 1949년 11월 25일 당시 복자였던 성 김대건 신부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로 정하고 이듬해부터 7월 5일에 대축일로 지내도록 허락했다. 그리고 계속된 한국 교회의 순교자 현양 운동의 노력으로 1968년에 병인박해(1866년)의 순교자 24위가 복자품에 올랐다. 이리하여 한국 교회는 103위 순교 복자를 모시게 되었고, 그분들을 9월 26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984년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성식에서 103위 순교 복자를 성인 반열에 올렸고, 그 축일을 9월 20일로 옮겨 지내게 했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에 79위 복자만 있고 그 기념일은 없던 시절,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신부의 축일만 7월 5일에 따로 지내도록 허락되었다. 이후 103위 순교자가 시복, 시성이 되어 축일이 정해지자 성 김대건 신부는 양쪽 축일을 모두 지내게 된 것이다.
사도적 열정의 모범, 성 김대건 신부
한국 교회가 성 김대건 신부의 축일을 더이상 지내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에 대한 공경의 크기를 줄인 것은 아니다. 2019년 추계 주교회의의 결정으로 7월 5일을 연중 시기 주일과 겹치더라도 성대하게 신심 미사를 드릴 수 있도록 정했다.
지난 5월 24일 프란치스코 교황은 매주 바티칸 광장에서 열리는 수요일 일반 알현의 훈화(교리교육) 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사도적 열정의 모범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전세계에 소개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고, 결국 죽음으로 예수님을 증언하던 그 시대에 특별한 열정과 사랑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성 김대건 신부는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전세계 신자들에게도 모범과 귀감이 되는 분이다.
싱그러운 7월에 성 김대건 신부의 신심 미사에 참여해 그분이 지니셨던 예수님께 대한 사랑의 불꽃과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타오르도록 기도해야겠다.
[알기쉬운 전례상식] 올바른 전례 동작과 자세
요즘 첫 영성체를 준비하는 어린이들이 기도문을 외워 바치는 소리가 성당이 떠나갈 듯 우렁차다. 마당에서 뛰어놀던 한 어린이가 “신부님, 성당에서 기도하는 동작과 자세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고 묻는다. “혹시 TV에서 교황님이나 주교님들이 미사를 주례하는 모습을 본적 있니? 그분들이 취하는 동작과 자세를 그대로 따라 하면 된단다. 왜냐고? 그분들이 전례 모델이거든.”
미사에 참여하는 이들을 보면 기도하는 동작과 자세가 다양하다. 양손을 마주 잡거나 깍지를 끼고 있거나,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거나 팔짱을 끼고 있거나, 배꼽 아래에 양손을 마주 잡고 있는 자세 등. 이를 고려하여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42항에서는 사제뿐만 아니라 교우들이 취해야 하는 기도의 동작과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강조하고 있다. “교우들의 동작과 자세와 마찬가지로 사제, 부제, 봉사자들의 동작과 자세도 전례 거행 전체가 아름다움과 고귀한 단순성으로 빛나도록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동작과 자세는 거행의 여러 부분들이 지닌 참되고 완전한 뜻을 밝혀 주고, 모든 이가 거행에 참여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총지침과 로마 예법의 전통 관습이 정하는 사항에 주의를 기울여, 개인 취향을 따르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기보다는 하느님 백성의 영적인 공동선에 이바지해야 한다.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갖추어야 할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이 이루는 일치의 표지다. 이는 참여하는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표현해 주고 길러 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예식서는 기도의 동작과 자세에 대해 더 상세하게 다루었다. “미사 전례 때 맡은 직무를 수행하거나 다른 일로 바삐 움직이는 봉사자는 보통 가슴 앞에 양손을 모은다. 다섯 손가락을 모두 붙인 상태로 펴고 손바닥을 서로 마주 닿게 한다. 오른쪽 엄지는 왼쪽 엄지 위에 십자 형태로 올려 놓는다. 합장한 양손을 완전히 수평으로 뉘거나 완전히 수직으로 올려 세우는 동작은 피해야 한다. 손끝이 가슴에서 약간 떨어져 있도록 해야 한다.(양손은 서로 자연스럽게 마주하고 양손에 무리하게 힘을 주지 않아야 한다).” 더 나아가 “전례복을 입고 있는 사제는 항상 양손을 모아야 한다.” “전례 행위를 한 손으로만 수행한다면 다른 손은 가슴 앞에 가지런히 올려놓는다.”
그렇다. 사제이든 교우이든 “개인 취향을 따르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기보다는 하느님 백성의 영적인 공동선에 이바지”하도록 기도의 동작과 자세를 취할 때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모든 이의 통일된 자세는 “거룩한 전례에 모인 그리스도교 공동체 구성원이 이루는 일치의 표지”를 이루기 때문이다. 기도하는 기본자세는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서 있는 동작, 즉 합장이다. 가슴 앞에서 45° 방향으로 양손을 가볍게 모으는 합장이 기도의 기본 동작이며 자세다. 합장은 경건함, 겸손과 봉헌을 나타내며 다른 동작(축복과 안수 등)을 취하기 위한 준비 자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미사에 참여하는 우리는 과연 어떤 동작과 자세를 취하고 있을까요?
[슬기로운 ‘전례상징’] 견진의 상징: 도유와 성령칠은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게 하는 성령!
보통, 사람들 사이에 서로를 위해 축하하거나 기억하는 날들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태어난 날인 생일(生日), 돌아가신 날인 기일(忌日), 부부라면 결혼기념일이 있지요. 여기서 성장 과정에서 성숙한 날을 기념하는 성인식(成人式)도 있습니다. 성인이 됨은 청소년이 유년기를 거쳐 성인으로 인정받는 법적인 효력을 지니는 시기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는 따로 성인식을 해주지는 않지만, 17세가 되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거나 18세가 되어 선거권을 행사할 수 있는 경우에 축하해줍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사회에서 성숙한 한 인격체임을 인정받음과 동시에 그에 따르는 사회적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책임도 주어집니다.
세례가 그리스도교에서 ‘영적인 탄생’이라면 견진은 성숙한 ‘영적인 어른’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며 또한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이 되어야 하는 사명을 부여받는 성사입니다. 주교님의 ‘안수와 도유’로 성령을 받아 영적으로 성숙한 어른으로 인정받아, ‘대부(代父), 대모(代母)’의 자격을 부여받는 견진의 상징에서 도유에 사용되는 성유(聖油)와 그와 더불어 수여되는 성령칠은(聖靈七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성령 수여의 상징인 안수와 도유!
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교 입문을 위한 일반적인 과정으로써 세례와 구분되어 성령을 수여하는 고유한 예식은 나타나지 않고, 대신 세례를 통해 성령이 선사된다고 증언합니다. 사도 바오로에 따르면, 세례는 성령의 수여까지 의미하며(1코린 6,11), 요한복음은 “물과 영”을 통한 탄생(요한 3,5)에 대해 말하면서 성령이 세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성령의 수여와 세례를 분리하여 말하는 대표적인 구절은 사도행전 8장 14-17절로, 여기에서는 사도들의 안수를 통한 성령의 수여를 세례의 완성으로 이해합니다.
또한 세례와 결부되어 성령의 수여를 의미하는 ‘도유(塗油)’에 대한 언급도 있습니다. “우리를 여러분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세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어 주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또한 우리에게 인장을 찍으시고 우리 마음 안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습니다”(2코린 1,21-22; 참조 1요한 2,20.27). 여기서는 도유, 성령 전달이 ‘인장(印章)’이라는 표현과 연결되는데, 인장이라는 말도 고대 사회와 종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유다교에서는 할례를 계약의 인장으로 해석했습니다.
함께 이루어졌던 세례와 견진의 분리!
3세기 말까지는 주교가 파스카 성야나 성령강림 전야에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3세기 초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히폴리투스의 ‘사도전승’ 21장이 증언하듯이 세례 대상자가 사제의 인도로 침례를 받고 나면 주교는 그에게 안수를 하고 성유를 바르고 이마에 십자 표시를 해주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세례와 주교의 안수가 서서히 분리됩니다.
313년 밀라노 칙령으로 그리스도교의 자유가 선포되어 신자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세례가 자주 베풀어졌고, 주교가 있는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도 본당들이 많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사제나 부제가 세례성사를 집전하고, 주교의 안수는 따로 이루어져서 세례와 안수가 시간적으로 분리되는 현상이 일반화되었습니다. 서방 교회는 새 신자들과 주교의 일치를 더욱 분명하게 표현해 줍니다.
성 빅토르의 후고(+1141)는 주교의 안수를 ‘견진’이라는 용어로 설명합니다. “안수는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견진(confirmatio)이라고 부른다. 이를 통하여 그리스도 신자는 안수를 받고 이마에 크리스마 성유로 도유된다. 사도들의 대리자인 주교들만 신자들을 인증하며 성령을 전해 줄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성경에서 읽은 바로 같이 초기 교회에서는 사도들만이 안수를 통해 성령을 전해 주는 권한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
교황 바오로 6세는 ‘견진 예식’을 개정하면서 견진성사의 본질에 잘 부합하도록 성사 양식문을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견진성사는 이마에 축성 성유를 바름으로써 주어지며, 기름 바를 때 그 손으로 안수하면서, ‘성령 특은의 인호를 받으시오’하고 말한다.”
‘성령 특은’은 무엇일까? 견진의 본질적인 도유와 한 손 안수 전에 하는 주교의 기도에서 일반적으로 성령칠은이라고 하는 은사들을 청합니다. “… 이들에게 보호자 성령을 보내주소서. 지혜와 통찰의 영, 식견과 용기의 영, 지식과 공경의 영, 주님을 경외하는 영을 보내주소서.” 성령칠은은 이사야서 11장 2절을 기반으로 하며, ‘일곱’이란 숫자는 ‘충만함, 완전함’을 뜻합니다.
‘지혜’는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은총’입니다. ‘통찰’은 ‘하느님의 지극히 깊은 뜻과 그분의 구원 의지를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합니다. ‘식견’은 일명 ‘깨우침’으로 예수님과 그분 복음의 논리에 따라 우리의 양심이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구체적인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주는 성령의 선물입니다. ‘용기’의 은사는 우리 마음을 구속하는 온갖 두려움과 무감각함과 불확실함에서 해방시켜 주시고, 주님의 말씀을 기꺼운 마음으로 올바르게 실천할 수 있게 해 줍니다. ‘지식’은 피조 세계를 통해 하느님의 사랑과 그분의 위대하심, 모든 피조물과 그분 사이의 깊은 관계를 파악하도록 우리를 이끌어주는 특별한 선물입니다.
‘공경’의 은사는 우리와 하느님의 깊은 관계를 드러내 주며 우리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몹시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에도 우리를 하느님과의 친교 안에서 굳건하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감사와 찬미를 불러일으킵니다. ‘경외’의 은사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과 그분 사랑 앞에서 참으로 작은 존재라는 것과 신뢰와 공경의 마음으로 겸손하게 하느님의 손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는 데 우리의 행복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는 성령의 선물입니다.십여 년 전에 읽었던 ‘무탄트 메시지’(말로 모건 지음)에서 호주 원주민 ‘참사람 부족’은 일 년마다 생일을 기념하는 문명인들을 이상하게 여기며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생일이 아니라 나아지는 걸 축하한다. 작년보다 올해 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었으면 그걸 축하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건 자기 자신만이 알 수 있다.”견진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성숙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견진성사를 통하여 신앙인들이 성령 안에서 영적 성숙을 이루어 하느님의 참된 증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교회에게 바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구원받을 사람들에게나 멸망할 사람들에게나 우리는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2코린 2,15)
[알아볼까요] 가톨릭 장례의 올바른 이해 (1)
1. 장례를 둘러싼 우리 교회의 현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처럼 ‘요리문답’을 외워 시험(찰고)을 치르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수업 시간에 출석해서 교리를 배우면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판공 때 사제가 모든 교우를 대상으로 교리 지식을 점검했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회장은 수시로 교리를 재교육했으므로 신자들은 날이 갈수록 교리 내용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폭넓게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양한 매체로 성경 지식과 교회의 가르침을 익히고 신심 단체에서 기도와 활동으로 믿음을 굳건히 하는 이도 있지만, 견진성사를 받을 때나 혼인성사를 받을 때 일시적으로 해당 교리를 배우고 그치는 이도 적지 않습니다.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듯이 교회의 장례로 이승의 삶을 마무리해야 합니다. 예전에는 가족이나 본당 교우가 선종하면 영혼의 구원을 간구(懇求)하면서 교회의 장례를 익혔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부모나 친척의 장례 외에는 연령회원이나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에게 의존하므로 예식과 교리는 물론 기도마저 익숙해질 기회가 적습니다. 지난날의 공소회장들은 죽음의 의미를 분명하게 이해했고 교회가 정한 절차대로 장례를 실천했습니다. 그러나 입교하기 전에 가정이나 동네에서 유교‧불교의 장례 관련 지식은 물려받았지만,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하게 습득하지 못한 채 연령회장이 되어 가톨릭과 다른 종교의 죽음 이해와 장례의 의미와 목적에 관한 공통점과 차이점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는 이도 있습니다.
연령회가 장례를 주관하면서 장의사나 상조회사 직원처럼 시신의 처리를 중시한 나머지 교회 장례의 근본인 기도‧교리‧예식 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시절도 있습니다. 더욱 심각한 점은 교회 장례에 필요한 전례‧교리교육‧교회사 지식은 물론 기본교리마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나는 내용으로 강의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지만, 문제는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례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간략히 설명하고 잘못 시행하거나 조심해야 할 부분도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 죽음의 이해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온 지 2백 년이 넘었지만, 불교‧유교에 비해 짧으므로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렵고 죽음과 장례의 이해도 그 테두리에 머물기 쉽습니다. 각각의 종교가 죽음을 받아들이는 바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하면 장례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기 쉽습니다.
유교는 하늘의 기를 받은 혼(魂)과 땅의 기를 받은 백(魄)이 어머니 뱃속에서 합쳐 사람이 되었다가 떨어지면 죽는 것이라고 봅니다. 제사를 받드는 아들을 낳은 이가 자기 집에서 온전하게 죽으면 상례(喪禮)를 통해 신격(神格)인 조상신이 됩니다. 따라서 아무리 악하게 살았더라도 상례를 격식대로 거행하면 제물을 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습니다[不二]. 산다는 것은 죽어가는 것이고, 죽더라도 다시 태어나[生有] 살다가[本有] 죽은[死有] 뒤에 다음 삶이 시작되는 단계[中有]를 거쳐 다시 태어나 살다 죽는 사유(四有)가 수레바퀴처럼 돌며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다음 생에는 더 나은 곳에서 더 좋은 존재로 태어나려고 생전에 공덕(功德)을 쌓고 보시(普施)하며 사후에 재(齋)를 바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가톨릭교회는 이승을 뒤로하고 영원한 삶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시작을 죽음이라고 믿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는 죽음을 삶의 끝이 아니라,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삶으로 태어난다는 의미로 ‘천상탄일’(天上誕日, Dies natalis)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선종한 이가 하느님 품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린다는 믿음을 고백하고, 유족은 부활과 영원한 만남에 대한 희망으로 사별의 아픔을 이겨냅니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도인은 주님과 이웃의 사랑 안에서 여생을 기쁘고 보람있게 살 수 있는 용기와 희망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장례는 두려운 종말을 고하는 절망의 통과의례가 아니라 영원한 삶을 찬미하는 희망의 예식입니다.
3. 임종에 대한 자세와 준비
명나라 때 중국으로 들어간 선교사들은 교리서·기도서·예식서 등을 한문으로 번역하거나 저술하면서 장례 예식서의 주요 부분을 그 나라 실정에 맞게 편찬했습니다. 우리 교회는 중국교회의 한문본 ‘성교례규’를 번역하고 당시 여건과 교우들의 형편을 고려해 편집한 ‘텬쥬셩교례규’를 발간했는데, 운명 이전부터 바치는 기도와 예절까지 세세히 수록했습니다. 당시는 박해 중이라 사제를 모시기 어렵고 성당도 없어 평신도를 중심으로 장례를 거행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안에서 형제자매인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것과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
교우가 임종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속히 찾아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도록 권면하고 위로하면서 함께 기도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누구보다 문병‧임종‧장례에서 이웃사랑을 잘 실천합니다. 어렵고 아픈 이들을 위한 기도‧권면‧돌봄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의 주요 임무이므로 아플 때부터 찾아가 위로하고 함께 기도하면서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기도록 인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모로 환경이 달라져 이전처럼 봉사하기 어렵지만, 임종 이전에 해야 할 바를 소홀히 하기 쉬운 오늘의 우리가 되살려야 할 모습입니다.
임종은 운명하는 이와 남은 이들에게 가장 엄숙하고 중요한 순간입니다. 임종하는 이는 불안과 평화, 절망과 희망이 엇갈리면서 삶을 마무리하고, 남은 이들은 임종하는 이와 형제적 사랑을 나누고 자기 죽음을 묵상하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임종하는 이는 사랑하는 이들을 남겨두고 주님께 돌아가야 하므로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고 운명을 담담히 맞이하는 이도 있지만, 인간적인 두려움과 불안 때문에 그동안 잘 간직했던 믿음이 흔들리는 이도 있습니다. 가족과 교우 등 신앙공동체가 함께 기도하고 격려하면서 주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받아 주신다는 굳은 믿음과 희망 안에서 모든 것을 온전히 주님께 맡기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아픈 이가 도저히 회복될 수 없다고 판단되면 고해성사‧성체성사‧병자성사를 받도록 준비합니다. 임종하는 이는 가족에게 주님 뜻에 맞게 살라고 당부하고, 남에게 진 빚이나 손해를 끼친 것, 옳지 못하게 취한 재물 등을 갚아 달라고 부탁합니다.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도 깊이 뉘우치고, 다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않도록 결심한 뒤에 사과하거나 다른 이를 통해 대신 용서를 빕니다. 검소하게 장례를 거행하고 자기 영혼을 위해 기도하며 미사를 봉헌하라고 요청합니다. 서로 화목하고 주님의 계명을 잘 지켜 세상 마칠 때 주님 품에서 만나자고 약속하면서 남은 이들을 축복합니다.
임종이 임박하면 가족과 교우들이 모여 공동체 안에서 주님께 편안히 돌아갈 수 있도록 소란하게 울지 말고 차분히 기도해야 합니다. 임종 예식은 ‘상장예식’ 18~53쪽에 두 가지 양식이 있으므로 상황에 따라 적절히 선택할 수 있으며, 사제와 함께 또는 평신도들만으로도 거행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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