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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28-32 그 사람이
야곱은 자기 형 에서에게서 장자가 되는 기업을 샀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그 기업에 속한 복을 자기에게로 옮겨 받는데 있어서는 일이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에 기만적인 수단을 썼습니다. 그 관계로 그는 외삼촌 집에 가서 20년 동안 품꾼으로서 일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는 많은 자녀(11명)들과 재산(우양)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형 에서를 만나면 큰 풍파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게 됩니다. 그는 가족들과 재산(우양)을 앞서 보내고 자기는 홀로 남아서 결사적으로 기도하였습니다. 야곱은 하나님 면전에 나아가 기도하여 승리하는데 그 승리란 새 이름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생명이 보존된 승리입니다. 육신은 결정적 타격을 입습니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영적 승리입니다.
1. 본문 28절은
“그 사람이 가로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입니다.
1)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야곱은 자기 형 발꿈치를 잡고 뒤로 끌어당기려 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 태 중에서 그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일이었습니다
2)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더 존귀한 새 이름을 부여하십니다.
이는 야곱으로 하여금 기념할 만한 은혜의 표징이었던 구명(求命)을 완전히 폐하게 하려 하심이 아니라 보다 높은 은혜의 발전을 증거 하게 하시기 위해서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두 이름 중에서 후자는 더 존귀하기 때문에 전자보다 우선합니다. 이스라엘이란 이름은 (הדשׁ 또는 דושׁ 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배를 의미합니다. 이런 이름을 받음으로써 마치 그는 하나님의 왕자로 호칭되는 듯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힘에 대한 칭찬을 야곱에게 이양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이것은 그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기고 기뻐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3) 이제 새로운 이름에 대한 설명이 잇달아 추가됩니다.
모세는 문자 그대로 “이는 네가 하나님과 사람으로 더불어 겨루어 이기었음이니라” 라고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롬은 그 의미를 충실히 나타내어서 “만일 네가 하나님께 그토록 강하게 맞섰다면 사람들에게는 더 더욱 이기지 않겠느냐”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토록 큰 승리에서는 자신감이 생겨날 것이고 자기 종에게 그런 자신감을 고취시켜 여러 가지 싸움에 내어 보내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었습니다. 이것은 나중에 야곱이 동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자녀나 후손들에게 명명하듯 이름을 지어주시는 것은 사실입니다. 동시에 그 이름이 의미하는 것 자체도 주심으로써 사건이 그 이름과 부합하게 하십니다.
4) 저의 성이 금덩어리 김(金)씨입니다.
거기에다가 저의 아버님께서 지으실 때는 용룡(龍) 자에다가 구슬주(珠) 였답니다. 무슨 용이 구슬을 입에 물고 하늘로 올라가는 꿈을 꾸셨다나 아니면 개천에서 용나라는 식으로 희망 사항이셨다나 아무튼 어렸을 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자랐습니다. 그런데 이장님이 사고를 내셨습니다. 그래도 첫 글자는 그대로이고 쓸 용(用) 자와 기둥 주(柱) 자로 바뀐 것입니다. 우리 아버님은 그렇게 키우실 능력이 없으시면서도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또 저의 이름이 기독교식으로 풀이해도 쓸만하지만 한번도 교회 안에서 금기둥이 되겠다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저의 일생은 “빼작론”에 머무를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주와 만물의 설계자이시고 인생의 모든 일들을 예정하신 분이시기에 명명하시고 그분의 뜻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바로 이런 분이십니다.
2. 본문 29절은
“야곱이 청하여 가로되 당신의 이름을 고하소서 그 사람이 가로되 어찌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입니다.
이 말은 위에서 언급된 것과 배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앞에서 야곱이 복을 구했을 때 그것이 승복의 표시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째서 이제 마치 의심하기라도 하는 듯이 그 이름을 묻습니다. 앞에서 그는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 문제의 해결은 간단합니다. 야곱은 그분을 하나님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모호하고 얕게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 야곱은 더 높이 올라가기를 소원합니다.
성자 야곱이 이런 소원을 말로 했다 해서 이상히 여길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자신을 아주 많이 나타내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휘장과 은폐물 속에 가려진 것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을 명확하게 알 수가 없었습니다. 율법 아래 살던 모든 성도들도 틀림없이 이런 열망에 불타올랐을 것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에서 마노아의 기도를 읽을 수 있습니다(삿13:8). 그 기도 뒤에 여호와의 응답이 나오는데 자기 이름을 기묘(奇妙)라고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마노아로 하여금 더 이상 묻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종합해 볼 때 야곱의 소원이 비록 경건했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는 아직 완전한 계시의 시기가 차지 않았으므로 이를 허용하지 않으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열조들은 처음에 아침의 여명 속에서 행하도록 요구받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점차적으로 그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다가 마침내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떠오르셨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완전한 광채는 그리스도로부터 비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그분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더 광채롭게 나타내신 이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뒤에서만 그분의 영광을 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족장과 사도의 중간 위치를 점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장들과 비교하여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했다는 말을 듣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조들에게서 자신을 감추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접근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만일 그토록 큰 은혜에 대한 열망을 품고 그분을 맞이하려 달려가지 않는다면 우리의 배은망덕은 지극히 불경스럽고 가증스런 것이 됩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일장에서 우리에게 그런 권면을 하고 있습니다(벧전1:12,13). 야곱이 비록 하나님을 보다 완전히 알고 싶어한 것은 경건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그 시대 영역을 뛰어 넘으려 했기 때문에 거부당합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소원을 거두절미하고 그 자신의 축복에 만족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 규정된 영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거절하셨던 조명을 우리에게는 허락하셨는데 만일 우리 호기심이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하계를 뚫고 나간다면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3. 본문 30절은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이 하나님을 향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여기서 다시 칭찬 받고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기념이 결코 사라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후손에게 기념비를 남기고 있습니다. 그 후손들은 그 기념물로부터 하나님께서 그곳에 나타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야곱 혼자서 본 이상이 아니라 전 교회가 볼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상 לאינפ ;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야곱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고 공언합니다. 야곱은 죽음을 모면한 것에 대해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언어는 성경에 종종 나타납니다. 이것은 고대 사람들 사이에 흔한 일이었습니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시에는 땅이 흔들리고 산들이 녹으며 암흑이 하늘을 뒤덮습니다. 그렇다면 보잘 것 없는 인간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생기겠습니까? 하나님의 엄위로우심은 무한하여 천사들조차 포용하거가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엄위로우신 임재는 도리어 천사들을 흡수해 버립니다. 만일 그분의 영광이 우리에게 비친다면 그것은 우리를 소멸시켜 버리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축하고 보호하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찮은 존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지 못하는 동안에는 교만하게 기뻐하며 멋대로 행동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육체가 땅을 향할 때 어리석게도 제 것인 양 사칭하는 가공적인 생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그들 자신이 연기보다 덧없는 존재라는 것을 감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육체의 교만을 낮추려면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야만 합니다.
야곱도 자기가 하나님을 뵈었을 때 특별하신 관용으로 파멸에서 구출되었다고 선언합니다. “야곱은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만 맛보고도 어찌해서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고 자랑하는가?” 라고 반문한다면 야곱의 이런 자축이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다른 모든 것보다 이 이상을 높이는 것은 여호와의 나타나심이 분명한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복음의 빛이나 율법의 광채와 비교하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불꽃이나 희미한 광선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간단합니다. 야곱은 희귀하고 비상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뵈었다는 말입니다. 야곱이 적은 분량의 지식을 기뻐하고 자축한다면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하나님의 산 형상이신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거울로 우리 목전에 명백히 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과 4장에서 우리에게 권면하는 대로 우리가 한 낮에 보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눈을 뜨도록 힘써야 합니다.
4. 본문 31-32절은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 환도뼈로 인하여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친 고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환도뻐 큰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입니다.
아마 이 기적을 보다 분명하게 증명하기 위해 그의 절뚝거림에는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었을 것입니다. 싸움이 끝났으나 그는 여전히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하나님을 의지할 자로 남습니다. 또 하나님 그분 자신의 힘으로만 승리할 자입니다. 이 점은 모세의 말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의 육체 가운데서 만세 무궁한 장관(壯觀)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영적 투쟁에서 모종의 상처를 입지 않을 만큼 막강한 전투자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로부터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든 육체에는 항상 약점이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또 어떤 자라도 무한히 자신을 기뻐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모세는 유대인들이 환도뼈 힘줄, 그 힘줄이 위치한 부분을 먹지 않는다는 것도 말합니다. 이것은 미신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시대는 교회의 유아기였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당시에 살던 신도들을 엄한 교사의 가르침 아래 두셨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비록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의 처지가 보다 자유롭긴 하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 옛 백성을 외형적 의식으로 규제하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5. 야곱은 기도 중에 하나님과 사람(사람의 형태로 오신 하나님)을 이기는 복을 받습니다.
1) 이 점에서 우리가 명심할 것이 있습니다.
야곱의 승리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야곱 안에서 이루신 승리입니다. 어떤 승리이겠습니까? 주의 약속의 말씀이 그 안에서 득세하여서 얻는 승리요, 주께서 자기 뜻을 그의 속에 두시고 간절한 소원이 되게 하시고 인내하며 간구하게 하심으로, 정하신 바를 야곱을 통해서 이루시는 온전하신 승리입니다.
2) 사실은 사람이 하나님을 보면 죽는 법이지만 죽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사람의 형태로 오셔서 야곱과 교제하여 주신 것과(30절) 하나님은 무한하시되 낮고 천한 야곱을 찾아 오셔서 맞잡고 씨름하듯이 교제하시려고 사람의 형태로 오신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에 하나님을 사람 대하듯이 구체적인 신앙으로 해야 됩니다. 그리고 또한 효과적인 말로 해야 됩니다. 하나님은 너무 높아서 인간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하는 기도자는 사람 모양으로 낮추어 오셔서 교제해 주시는 하나님을 모르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신약시대에 화육(化肉)하시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접촉하며 그분과 교제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구약 시대에는 화육(化肉)하시지는 않았지만 역시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을 접촉할 수 있도록 사람의 형상으로 그들에게 임하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이시면서 또 사람으로 임하시고 또 역사하시는 분이십니다.
3) 그러니까 야곱이 하나님께 항복하고 나서도 붙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알아 모셨다”는 뜻입니다.
“주께서 친히 복을 주셔야 합니다. 주께서 이 문제를 해결해 주소서”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승리한다면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승리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의 찬송과 감사가 계속되는 것입니다.
출처: 예장 서울노회 원문보기 글쓴이: 최정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