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난 가운데서도 보호해 준 하나님
선생님은 역사적인 사연을 품고 나오면서도 이러한 심각한 내용을 선생님과 제일 가까운 부모에게 얘기하지 못했습니다. 형님 누나 동생에게도 얘기 못 했습니다. 처자한테도, 친척들한테도 얘기 못 했습니다. 우리 동지들에게도 때가 되기 전에는 이것을 얘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누구에게 먼저 전했느냐? 해방되고 난 다음 원수들이 우글대는 북한 땅에서부터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말씀 전파가 출발함과 동시에 원수의 총끝이 선생님을 겨누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감옥길부터 출발했습니다. 원수에게 또 몰림받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공산치하에서 3년 가까이 감옥살이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선생님은 죽지 않을 것을 알았습니다. 평양감옥에 들어갈 때에도 어떠어떠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는 것까지도 알았습니다. 선생님에게 어떤 것이 필요한 때는 영계에서 무지몽매한 강도, 절도, 살인범 등 수많은 죄수들에게 “아무 감방에 번호가 몇 호인 사람이 있으니 그분에게 어떤 것을 갖다 드려라.” 하고 시키기도 하고, 겨울이 되어 날씨는 추워지는데 선생님이 입을 옷이 없을 때에는 그들을 시켜서 옷을 갖다 주기도 했으며, 또 먹지 못하여 배가 고플 때에는 난데없는 사람을 통해 먹을 것을 갖다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평양 감옥에 들어가면 누구누구를 만날 것을 알았기 때문에 희망 가운데서 1948년 5월 20일까지 지냈습니다. 그때 감방의 창가를 스치던 버들잎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기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뜻을 따르기로 약속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들과 만남으로써 원수의 땅, 제일 깊은 골짜기에서부터 하늘의 밀회가 시작되었습니다. 거기에서 하늘의 병사를 모집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정과 사회에서 몰리고 쫓겼으니 감옥에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거기서부터 통일교회가 출발해서 남한 땅으로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유엔군이 제일 먼저 상륙한 곳이 흥남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바쁘게 구해야 할 한 아들이 그곳에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알고 있었습니다. 공산당들은 그 전전날 한 감방에 있는 사람들에게 밥을 준다고 꼬여서 전부 데리고 나갔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를 죽이려고 그러는 줄 모르고 밥을 준다고 하니까 그것을 얻어먹겠다고 서로 먼저 가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벌써 그것을 알았습니다. “너희들은 마지막 길을 가는구나! 그렇지만 난 죽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너희들은 다 죽더라도 난 죽지 않는다. 어떠한 참사의 비운이 거쳐가는 자리에서도, 총살을 당해 쓰러지는 자리에서도 난 결코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해 10월 12일 형기가 7년 이상인 죄수 70명 정도를 30리쯤 산속으로 끌고 들어가서 전부 죽여 버렸습니다. 그 당시 선생님의 형기는 5년이었기 때문에 다음날 끌려갈 차례였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얼마나 바빴겠습니까? 13일 밤거리를 내다보니 벌써 사태가 달라졌습니다. 유엔군이 흥남에 상륙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 공산군들은 보따리 싸기가 바빴습니다. 이렇게 해서 드디어 10월 14일 공산군이 물러가자 우리는 감옥에서 빠져 나와 남한으로 내려왔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지내왔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하나님을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이단의 괴수라는 팻말이 붙어 원수들로부터 몰리고 쫓기고 비난받으며 나왔습니다. 이화여대 사건 때 김활란과 박마리아가 주동이 되어 경무대에 가서 거짓 증거로 4개 부처장관을 움직여서 통일교회를 없애고 선생님을 완전히 매장하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안 죽었습니다. 선생님은 세상의 어떠한 일이 부닥쳐 오더라도 안 망한다는 것입니다.
1955년도에 7․4사건이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원숭이띠라서 감옥살이를 많이 하는지 모르지만 서대문 형무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 서대문 형무소 소장이 기독교인이었는데, 대뜸 “네가 문 아무갠가? 한 달간 구류다, 이 자식아.”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에게 농담삼아 한마디했습니다. “이 자식이 뭐야? 당신은 이런 것을 해 먹었지.” 하면서 비리를 이야기하니까 가슴이 찔렸는지 깜짝 놀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자식아, 가만히 있어.”라고 했습니다. 이런 돼먹지 못한 사람이 선생님의 가슴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런데 한 달 정도 지나서는 그렇게 못되게 굴던 형무관들을 선생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듣게 만들었습니다. 물을 갖다 달라 하면 떠 올 정도였습니다. 그것은 선생님이 때려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라 인격적으로 대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22-129, 69.02.02)
첫댓글 귀하신 말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