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관점이 바뀌면 보이는 풍경이 달라진다
제주에 살면서 종종 아웃리치(out-reach) 팀들이나 단체로 오신 교회 팀들의 가이드를 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항상 첫 번째 가는 곳이 4.3 평화공원이다. 의외로 많은 기독교인들이 4.3 사건을 잘 모른다. 더욱이 서북청년단과 관련된 일들은 무지할 정도로 모른다. 그렇게 2시간 정도 4.3 평화 기념관을 둘러 보고 마지막으로 가는 곳은 이기풍 선교관 앞에 있는 순교 기념비이다. 그곳에 가면 1호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제주도 땅을 밟은 이기풍 목사와 제주 출신 중에 처음으로 목사 안수를 받은 이도종 목사, 그리고 2007년 자신의 생일 때 아프카니스탄에서 생을 마감한 배형규 목사, 이렇게 3인의 순교비가 세워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제주도는 관광지이다. 코로나 펜데믹이 발생한 이후 더욱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 땅을 밟고 있다. 하지만 제주도의 아픔과 고통의 역사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다. 과거 역사 속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졌는지에 대해선 무지할 정도로 모른다. 그저 눈이 시리도록 빛나는 에메랄드 빛 바다와 육지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에 심취해서 즐기는 관광지일 뿐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과거 제주도에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보여주고 들려주면 많이 것들이 달라 보이기 시작한다. 오히려 변함이 아름다운 자연이 잔인할 정도이다.
2. 구원은 과정이다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은 기독교 안에서 고전 중의 고전이다. 보통 기독교 3대 고전을 토마스 아 캠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그리고 마지막으로 존 버니언의 ‘천로역정’이라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천로역정은 다양한 버전으로 출판이 되어 있고, 해설서와 같은 책들도 여러 권이 존재한다. 그렇다면 천로역정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은 무엇일까? 무엇보다 구원을 한 번의 ‘이벤트’(event, 사건)로 설명하지 않고 긴 여정(순례)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주인공 ‘크리스천’이 ‘구원’이라고 쓰여진 담장 길을 걸어 십자가에 도착하자 그동안 짊어지고 있었던 무거운 짐이 굴러 떨어지고 새로운 옷을 입는 장면이다.
하지만 순례의 여정이 끝난 것은 아니다. 천국 도성으로의 진정한 여행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다시 길을 떠난다. 곤고재(고난의 산)에도 오르고, 겸손과 죽음의 그늘 골짜기를 지나기도 하고, 길에서 만난 ‘신실’과 허망 시에 이르기도 하고, 거기에서 신실이 화형을 당하는 사건도 겪는다. 다행히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풀려나 순례의 길을 다시 떠난다. 그때 ‘소망’을 만나 더 거칠고 힘든 과정(안락, 금전과 절망)을 통과한다. 한 마디로 거룩한 성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과정들을 겪는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신앙생활은 한 번 예수님을 영접함으로 완성되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 다양한 문제와 상황속에서 순례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것을 배우게 된다.
나는 이 점이 한국교회가 천로역정을 통해 다시 배워야 하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지난 과거를 보면, 우리는 구원을 한 번의 사건으로만 설명하고 가르쳤다. 마치 예수님을 한 번 영접하기만 하면 모든 구원의 문제와 과정이 끝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인지 언제 어떻게 구원의 경험을 했는지를 묻고, 그것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치 그런 류의 확신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천로역정은 그것을 완성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이후에 수많은 유혹과 공격과 어려움과 도전이 존재하고, 그것을 신실과 소망을 가지고 겪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3. 이원론적 세계관을 극복하라
존 버니언이 천로역정을 집필한지 300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히는 고전으로 이 책이 꼽힌다. 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던져주는 메시지가 많다는 말이다. 하지만 300년이라는 기간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은 변화와 진보를 겪게 된다. 그때 그 사람들의 사고와 세계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관점들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될 수는 없다. 특히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세상을 바라보는 이원론적 세계관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은 말씀을 듣고 멸망의 도시를 떠난다. 이 멸망의 도시는 우리가 몸을 가지고 매일 살아가는 이 세상이다. 구원은 그런 멸망의 도시에서 거룩한 성, 곧 천국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이것이 전통적인 구원론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타고 없어질 것이다. 마치 소돔과 고모라 처럼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받아서 사라질 곳이다. 믿는 자들은 그런 세상에서 벗어나 하늘 너머 어딘가에 있을 천국으로 거처를 옮기는 것이 구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구원이나 종말은 그런 것이 아니다. 물론 세상의 심판을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만, 그 심판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이 완전히 없어지고 하늘 너머 다른 공간, 곧 신천지(新天地)로 옮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창조세계가 새로워질 것을 말씀하신다. 요한계시록은 그것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전에 있던 창조세계가 새로워지는 본 어게인(born again)을 말하는 것이다.
안타까운 것은 이런 일원론적 세계관(창조-새창조)보다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이 우리들의 신앙과 삶, 세계관 안에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구원과 신앙생활을 하나의 여정(순례)으로 설명하는 것은 정말 탁월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읽는 내내 답답하게 느껴지는 것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이원론적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멸망의 도시를 영적으로만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지만, 그 멸망의 도시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이며, 우리가 매일 몸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아니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가꾸어 가야하고 만들어야 가야하는 피조 세계인 것이다. 우리는 땅에서 하늘로 가는 존재가 아니라 부활 후에도 육체를 가지고 (새로워진) 땅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이다.
4. 새로운 안경을 가지고
천로역정을 읽는 내내 두 가지 답답함이 나를 불편하게 했다. 첫째는 여전히 구원을 하나의 이벤트로만 여기고, 한 번 예수님을 영접했다면 그것으로 구원이라는 문제는 다 해결된 것처럼 말하며, 다시 율법과 건물로 돌아가 더욱 더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강요받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둘째는 하나님의 창조에 방점을 찍기보다는 타락에 더 깊은 방점을 찍으며 멸망할 세상과 언제가는 옮겨갈 하늘 너머의 천국으로 철저하게 나누는 이원론이다. 저자 존 버니언의 의도까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가 가진 전제가 이원론에 근거하고 있기에 책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사고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인다.
종교개혁이 일어난지 500년이 넘었고, 천로역정이 출판된지 30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우리는 구원론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이제 21세기라는 새로운 환경에 어울리는, 더 나아가 성경이 진짜 말씀하시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새롭게 발견하고, 그것을 바르게 가르치고 제시하는 작업들이 우리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 이제는 오래된 옛 안경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안경을 맞추어야 한다. 300년이나 된 안경을 통해 배워야할 것도 있지만, 그 안경으로는 볼 수 없는 세상이 우리들에게는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새로운 접근과 도전이 필요하다. 생각이 달라지면 달리 보인다.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