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평 미만 공중이용시설, 장애인편의시설 없어도 된다’는 장애인차별
GS25 편의점, 1년 이내에 경사로 등 장애인편의시설 마련해야
국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는 기각, 국가에 면죄부 준 법원
장애계, 일부 승소에 환영하면서도 ‘정부 책임 촉구’
종로구 현대빌딩 스타벅스 매장 앞 턱은 약 30cm 정도 된다. 비장애인은 쉽게 올라갈 수 있지만 휠체어 바퀴는 이 턱을 넘어갈 수 없다. 턱에 ‘장애인 편의시설 설치 의무화하라’라고 적힌 피켓이 붙어 있다. 턱 왼쪽에는 전동 휠체어의 바퀴가, 턱 위에는 비장애인의 발이 보인다. 전동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규식 서울장차연 상임대표는 스타벅스 매장에 들어갈 수 없었다. 사진 하민지
법원이 ‘300제곱미터(약 90평) 미만의 편의점 등에는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는 현행 제도는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이번 판결이 확정된다면, GS25 편의점은 경사로 등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18년 4월, 장애계가 소를 제기한 지 3년 10개월 만의 판결이다.
그러나 법원은 GS리테일과 대한민국에 대한 손배해상청구는 기각했다. ‘현 제도가 장애인의 행복추구권과 평등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하면서도, 이러한 제도를 만든 국가에 대한 책임은 묻지 않은 것이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아래 장추련) 등 장애인권단체는 1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서문 앞 삼거리에서 판결의 의미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GS25 편의점, 장애인편의시설 미제공은 차별
서울중앙지방법원 제30민사부(재판장 한성수)는 10일, 휠체어 이용자 등이 GS25 편의점을 운영하는 GS리테일과 대한민국에 제기한 장애인차별구제 청구소송에서, GS리테일이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는 것은 명백한 차별이라고 판결했다.
현행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아래 장애인등편의법)’ 시행령 별표1에는 바닥면적 기준 300제곱미터(약 90평) 미만의 공중이용시설은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하지 않아도 된다고 명시한다. 이러한 기준에 따라 장애인이 접근할 수 없는 음식점·카페·편의점은 90% 이상으로 추정된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장애인권단체는 10일 서울중앙지방법원 서문 앞 삼거리에서 판결의 의미를 알리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 허현덕
재판부는 이러한 바닥면적 기준이 위법·위헌적이라고 판단했다. 소송대리인 나동환 장추련 변호사는 “재판부는 바닥면적에 따른 예외조항이 장애인의 접근권을 막고, 장애인등편의법과 장애인차별금지법에 반할 뿐 아니라 당사자의 헌법상 행복추구권·평등권의 원칙을 위반한다고 판단했다”라고 의미를 짚었다.
이번 판결이 확정되면, 1년 이내에 GS리테일이 운영하는 GS25 편의점 직영점 중 2009년 4월 11일 이후 신축·증축·개축한 시설은 경사로 등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편의시설 설치가 불가능한 경우에는 이동식 경사로와 호출벨 등의 대안적인 방법을 제공해야 한다.
GS리테일은 가맹점에 대해서도 확정판결 후 6개월 이내에 직영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추거나 대안적 조치를 취하도록 영업표준안을 마련해야 한다. 또 확정판결 1년 이내에 가맹점 사업자에 점포환경 개선을 권고하고 비용 중 20% 이상을 부담해야 한다.
나동환 변호사는 “재판부는 대부분의 GS25 편의점에 턱이나 계단이 있어 휠체어 이용자가 접근할 수 없음에도 경사로 등의 편의시설을 제공하지 않은 것을 명백한 장애인차별금지법 위반이라고 인정했다. 또한 바닥면적 예외규정도 적용될 수 없다고 판단했다”라며 “피고 GS리테일의 도로무단 점유, 임차 점포가 많다는 이유로 현실적으로 경사로 설치가 쉽지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설명했다.
- 법원 ‘바닥면적 기준으로 장애인 접근성 막은 국가 책임은 없다’
그러나 재판부는 정작 이러한 기준을 만든 정부에는 책임이 없다고 판단했다.
21년 4월, 장애계가 해당 시행령에 대한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하면서 장애인의 소규모 공중이용시설 접근에 관한 문제가 화두가 되자, 같은해 7월 복지부는 ‘접근성을 향상시키겠다’며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제외 기준을 현행 300제곱미터(약 90평)에서 50제곱미터(약 15평)로 줄이는 내용의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장추련에 따르면 개정안이 그대로 적용될 경우, 여전히 70%에 육박하는 공중이용시설이 편의시설 설치의무 대상에서 제외된다. 면적기준을 없애는 대신 규모만 줄이는 꼼수를 쓴 것이다.
장애계의 거센 반대에도 복지부는 여전히 개정안을 추진 중이다. 건물의 규모나 면적을 기준으로 장애인편의시설 설치 의무를 둔 나라는 우리나라밖에 없다.
김성연 장추련 사무국장은 “이 소송을 진행하는 사이 복지부는 시행령을 바꾸겠다고 했다. 없애는 게 아니라 90평을 15평으로 줄이겠다고 한다. 장애인정책을 담당하는 복지부가 재판부보다 장애인식이 없다”라며 “정부는 ‘책임 없다’는 이번 판결에 안도하지 말고, 바닥면적 기준을 없애는 시도를 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원고인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이 발언하고 있다. 사진 허현덕
원고인 김명학 노들장애인야학 교장은 “(정부의 책임을 묻지 않은) 이번 판결에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지금도 수많은 건물에 장애인은 들어가지 못한다. 배가 고파도 식당에 가지 못해 배고픔을 참아야 할 때도 많다. 모든 건물에 장애인도 마음 놓고 들어갈 수 있을 때까지 끝까지 싸우겠다”라고 밝혔다.
한편, 2018년 4월 장애계는 GS리테일·호텔신라·투썸플레이스·대한민국을 대상으로 차별구제소송과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이 중 2020년 2월 호텔신라와 투썸플레이스와는 강제조정이 성립했다. 호텔신라는 2025년까지 장애인 객실 설치를, 투썸플레이스는 직영점에 장애인편의시설을 설치할 것을 약속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