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전 가는 길
이 수 영
지하철 1호선 S 정류장 역, 나는 그곳에 자주 간다. 처음에는 내가 정기적으로 다니는 안과에 가는 길목이었기 때문이고, 몇 년을 정기적으로 다니다 보니 요즘은 그 근처를 지날 때는 가끔 차에서 내려 인도 양쪽에 펼쳐진 난전을 기웃거리기도 한다. 거기는 수많은 사람과 차들이 붐비는 곳이다. 이웃 고을은 물론, 구마고속도로와 88고속도로를 드나드는 시외버스의 나들목이라서인지, 시장 이름도 관문시장이다. 그래서일까? 이름에 걸맞게 손님이 많이 찾아드는 제법 큰 시장이고, 그 시장을 낀 인도에 펼쳐진 난전은 때로는 본전보다 더 많은 사람이 붐비기도 한다.
난전은 비 오는 날이나 1년에 며칠 안 되는 특별한 날을 빼고는 늘 복잡하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게 몸을 사리고 다녀야 하는데 그게 어렵다. 곳곳에 재미있게 진열된 과일이나, 잘 다듬어진 채소와 산나물도 봐야 하고 난전 상인과 손님들의 재미있는 흥정을 비롯해 볼거리, 들을 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억센 사투리로 입에 거품을 물고 떠들어 대는 난전 상인의 신명은 언제나 흥겹고, 손수 캐온 달래, 냉이와 텃밭에서 솎아온 상추, 쑥갓을 다듬는 할머니의 굵은 손마디와 미소가 정겹다.
“요거 한 무디기 삼천원!, 두 무디기 오천원!” 할머니의 투박한 말 한마디에, 나는 “요거하고 조거하고 두 무디기 주이소.” 합계 오천 원을 건네 받는 할머니의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어릴 적 시골 장터의 향수일까? 난전에 오는 손님들은 젊은 새댁들보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대부분이다. 그곳에서는 신용카드도 없고, 꼬깃꼬깃 접어둔 현찰 몇 푼이면 그만이다.
과일을 파는 난전 앞을 지난다. 어쩌면 저렇게 쌓아 올릴 수 있을까. 반짝반짝 닦아서 윤이 나는 사과, 배, 감, 귤들이 바구니 위에 곡예를 하듯 예쁘게 쌓여 있다. 그 솜씨가 어느 유명 조각가의 작품 같다. 그렇게 공들여 쌓은 걸 손님이 손으로 가리키면, 환하게 웃으며 비닐봉지에 담아 준다. 그 비닐봉지에는 노점 상인들의 삶의 고뇌와 감사의 마음이 함께 담긴다.
하늘이 맑은 오뉴월 어느 날, 나는 난전의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때였다. 우르릉 쿠르릉…, 갑자기 하늘이 울고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더니 투닥투닥 우박과 함께 소나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상인들은 비닐로 덮거나, 더러는 일산 밑으로 상품을 옮기기도 했지만 불과 몇 분 사이에 온몸이 흠뻑 젖을 정도로 쏟아지는 소나기로 인도 가장자리에 진열되어 있던 상품들은 물난리를 피하지 못했다. 얼마 후, 하수구의 물이 쿨쿨거리며 역류할 즈음 언제 그랬느냐는 듯 날은 개었지만, 난전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우야꼬! 우야꼬! 이 일을…. 저걸 우짜노!”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들은 의연했다. 자기 몸에 걸친 옷들이 젖거나 말거나 엉망이 된 상품들을 정리하느라 동분서주한다. 도전 삶의 현장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나는 도로 옆 건물의 현관 입구에 쪼그리고 앉아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울렁거리고 콧날이 시큰했다.
얼마 후 난전을 한 바퀴 돌아 지하철역으로 돌아오는 길은 소나기 후의 맑은 하늘처럼 짧은 시간임에도 어수선함을 제법 시원스레 걷어내고 있었다.
할머니의 나물을 샀던 곳을 지나면서, 그 옆에 동남아 어느 나라에서 시집왔다는 새댁의 난전에서 고등어 한 손을 샀다. 이런 걸 사서 아내한테 칭찬 들은 적은 거의 없지만 그들을 보는 순간 무심코 사게 되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고는 그때마다 김수환 추기경의 말씀으로 마음을 달랜다.
“노점상 물건을 살 때는 값을 깎지 마라. 돈을 그냥 주면 나태함이 커지지만 제값을 주고 사면 그들에게 희망을 선물하는 것이다.”
난전, 그곳은 고단한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다. 때로는 기존 상가들의 터줏대감 행세에 서러움을 당하기도 하고,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도로교통법을 비롯한 식품위생법, 소비자 보호법, 폐기물관리법 등의 규제를 받는다고 한다. 그 모든 서러움을 당하고도 난전에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그들의 삶이 안타깝다.
내 어릴 적 시골 5일 장은, 그냥 노지에 차린 난전이 대부분이었다. 집에서 손수 지은 농산물을 이고 지고, 또는 우마차에 싣고, 꼬불꼬불 시골길을 걸어서 다녔다. 그때의 장날은 하루쯤 고단한 농사일에서 벗어나 이웃 마을 사람들과 서로의 소식을 묻고 안부를 주고받는 만남의 공간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기 이 난전이 번성하는 것도, 옛날의 시골 장터를 잊지 못하는 사람들의 향수가 있고, 그때 그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과, 서민들의 알뜰한 삶이 있는 그런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난전에 가면 고향의 5일 장이 생각나고, 그때 그 사람들이 보고 싶어진다. 그리고 해 질 녘 동구 밖에서, 장에 가신 아버지가 사 오실 눈깔사탕 봉지를 기다리던 어릴 적 내가 있다. 2023. 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