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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내면으로 향한 길
코란 전기 메카 시기의 두드러로 인간의 개인적, 실존적 결단에 관련된 점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요컨대 메카 시기의 이슬람은 하나의 신앙체계로서 유기적으로 조직되고 제도화된 역사적 종교가
아니라, 인간 개개인의 생생한 종교적 실존 방식에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이었다. 자기의 죄악성을 자각한 인간 주체가 신의 부름에 어떻게 결단하고 어떻게 응하느냐는 신앙의 문제였다. 이제부터 이야기할 '내면으로 향한 길'이라는 것은 대개 이 메카 시기 이슬람의 계통을 이끄는 문화 양식이다.
1. 울리마(샤리아 법제화)와 우라파(내면으로 향하는 자)
'내면으로 향한 길'이라고 하면 당연히 외면으로
향한 길'을 대립항으로 예상할 수 있다. '외면으로 향한 길'이란 여기서는 제2장에서 제법 상세히 설명한 공동체(움마)를 향한 길, 즉 『코란』 후기 메디나 시기의 정신에 바탕을 둔 문화 양식으로, 종교를 사회화·정치화·법제화하고,마침내는 그것을 앞에서 말했던 이슬람법(샤리아)으로까지 확립한 정통파 울라마들의 길을 가리킨다.
울라마들이 이슬람을 사회제도적 형태로 발전시키던 바로 그 무렵, 여전히 그 역방향을 향해서 내면적 관점이라 부를 만한 것을 중시하며 나가려는 입장이 이슬람 문화 형성의 저류로 강력하게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내면이라고 하는 것은 감각, 지각, 이성으로는 전혀 포착할 수 없는 사물의 감춰진 차원이자 존재의 깊은 곳이
며, 모든 사물에 대해 이런 의미에서의 내면, 심층을 인정하고 그것을 탐구하려 했다. 어떤 것에는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곳이 있다. 물론 종교에도 그런 의미에서의 내면이 있을 터이다. 일반적으로 울라마에 대비해 '내면으로 향한 길'을 택한 사람들을 '우라파'라고 한다.
내면으로 향한 길을 걸은 우라파는 외면주의자 울라마에 대항하고 그들과 싸우는 입장이었기에
울라마와 굳게 손을 잡고 울라마에게 전면적 지지를 보낸 권력, 체제에 저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즉 반체제파이다.
그들은 종종 정부에 대한 반역자로, 또한 「코란』의 가르침에 등을 돌린 배신자 또는 이단자로 박해당하고 죽임을 당했다.
2. 이맘론
내면으로 향한 길을 걷는 사람들 사이에서 태어난 문화 양식, 특히 앞으로 이야기할 이란적 이슬람, 즉 시아파 이슬람의 문화에 어딘지 모르게 비극적인 분위기나 운명적 비장감 같은 것이 흐르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시아파의 시조 제1대 이맘imam인 알리와 그의 두 아들 호산과
후세인, 특히 후세인의 죽음을 둘러싼 '카르발라의 비극 수니파 칼리프 야지드 1세가 이라크의 카르발라에서 시아파 3대 이맘 후세인 이븐 알리와 추종자들을 몰살한 사건 - 역자 주)'이 있다. 시아파
는 그 기원에서부터 이미 비극적이었고, 그러한 슬프고 아픈 기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시아파 사람들의 역사 감각은 현저하게 비극적이다. 예언자 무함마드가 세상을 떠난 이래, 이슬람 역사 자체가 정의에 반하는 왜곡되고 잘못된 역사이며 자신들은 근본적으로 잘못된 세상에서 살아왔고 지금도 여전히 살고 있다는 감각이 그들의 심층 의식에
늘 잠복해 있다.
시아파 제6대 이맘 (자파르 알 사딕 Ja 'far al-Sadiq, 765년 사망)은"우리는 이방인, 이국인"이라 말했다.
3. 샤리아(외면의 법체계) 대 하키카(내면의 본질)
이슬람의 공식적 얼굴이라 할 수 있는 현교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적인 기본 개념, 혹은 키워드가 '샤리아(이슬람법)'이다. 그에 반해 이슬람의 감춰진 얼굴이라 할 만한 밀교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키워드는 하키카Haqiqah이다.
하키카는 아라비아어로 진리, 실태, 심상,리얼리티라는 뜻이다. 지금 내가 설명하고 있는 문제의 맥락에서는 일단 '내적 진리' 혹은 '내면적 실재성' 정도로 번역하면 좋으리라고 생각한다. 어쨌든 '샤리아'와 '하키카', 이 두 가지 키
워드를 통해서 '외면으로 향한 길을 걷는 울라마의 종교관과 '내면으로 향한 길'을 걷는 우라파의 종교관이 이슬람문화사 속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대립의 첨예함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키카라는 말이 이 장면에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슬람에서 '내면으로 향한 길'을 택한 사람들은 사물을 볼 때 어떤 사태, 사건이든 반드시 그 안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감춰진 본질이 있다고 확신하며, 그것을 아주 깊이 추구하려는 특징이 있다. 사물이든 사건이든 모든 외적인 것, 바깥에 드러난 것, 외형을 가진 것, 즉 가시적인 것은 반드시 그 심층 부분에 눈으로 볼 수 없는 본질을 감추고 있다고 이 사람들은 믿고 있다. 모든 외적 인 것은 내적인 것이 자기를 표현하는 장소이다. 여기에
서 말하는 내적인 것이라든가 눈으로 볼 수 없는 본질은 일종의 형이상적 에너지 같은 것이고, 형이상적 에너지인 한 자기를 밖으로 표출하고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외적 사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적인 것, 현상적 사물이 존재의 차원에서 결코 무가치하고 허망하다.
는 말은 아니다. 다만 외적인 것을 그것만으로 완결된 것으로 간주해, 그 안에 자기를 그러한 형태로 표현하는 내적 본질을 보는 일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밖으로 드러난 형태의 배후 혹은 밑바닥에 있으면서 그것을 안에서 지탱하고 있는 내적 본질, 그것을 하키카라고 부른다. 하키카는 가시적인 것의 보이지 않는 밑바탕, 문자 그대로 존재의 비밀이다. 물론 '비밀'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상태에 있는 의식으로는 인지할 수 없다. 의식의 어떤 특이한 심층 차원이 열리고 일종의 독특한 형이상적 기능이 발동될 때 비로소
모습을 볼 수 있는 존재의 내적 본질이다.
똑같은 내면으로 향한 길', 하키카 제일주의라 하더라도 모두 같은 방향으로 모두 같은 방향으로
나아간 것은 아니다. 그들은 크게 매우 다른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형태, 다른 방향으로 내면적 이슬람의 발전에 관계했다. '내면으로 향한 길'의 문화에 두가지 다른 계통이 있다는 말이다. '내면으로 향한 길'의 두가지 계통, 그 하나는 시아파적 이슬람이고 다른 하나는 수피즘이라는 이름으로 서양에 알려진 이슬람 신비주의이다.
4. 시아파적 이슬람
신의 언어 내면에 '비밀스러운 의미'를 인정하는
시아파 사람들에게는 『코란은 하나의 암호 책이다. 글자그대로 읽는 보통의 책이 아님은 물론, 단순한 종교서도 아니다. 전편이 암호로 가득 찬, 암호로 쓰인 책이다. 코란의 말은 보통의 아라비아어이지만, 그 이면에 숨은 정신적 의미인 하키카가 있다. 즉 이 아라비아어는 암호언어이다. 시아파의 유명한 하디스에 "코란에는 비교적 깊
이가 일곱 층으로 겹쳐 있다"는 말이 있는데, 이러한 감춰진 의미의 깊이가 있기 때문에 코란은 암호 책이다.
물론 암호는 해독돼야 한다. 이 암호 해독, 다시 말해 외면적 의미에서 내면적 의미로 옮기는 해석학적 작업을 시아파의 독특한 학술어로 '타월ta' wil'이라 한다. 아라비아어로 '원초에 되돌아가게 한다', 즉 제일 처음 상태로 환귀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시아파의 해석학적 학술어로는 평범한 인간의 언어로 표현되고 외면화된 신의 의지를 본
래의 신의 의지 자체, 소위 계시의 원점으로 되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요컨대 현교적으로 해석된 코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밀교적 의미로 고쳐 해석해 표면적 의미를 내면화하고 그것을 원초적 이데아까지 되돌리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코란』에는 그 당시 예언자 무함마드 주변에 일어난 갖가지 사건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 화해, 무함마드의 가정에 일어난 사적인 사건 따위, 이
러한 외적 사태를 공간적, 시간적 차원을 옮겨 내적 공간과 내적 시간의 사태로 해석한다. 그리고 이러한 내적 해석의 결과 거기에 드러나는 근원적 이미지의 세계, 그것이야말로 신의 세계이자 순수하게 정신적인 성스러운 세계의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시아파는 근본적으로 이란적이다.
그들에게 현세는 존재의 성스러운 차원과 속된 차원이 갈등하는 장으로, 타월을 통해 내면화하고 상징적 세계로 다시 보지 않는 한 완전히 속된 세계이자 존재의 속된 차원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본성상 존재의 천상 원과 싸워야 할 악과 어둠의 세계이다. 선과 악, 빛과 어둠의 투쟁이라는 고대 이란 조로아스터교의 이원론적 세계 인식이 매우 특징적인 형태로 이슬람화해 여기에서 작동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조로아스터교적 이원론과 다른 것은 이 어둠과 악으로 가득한 현세가 그 하키카적 심층에서는 그대로 선과 빛으로 가득한 성스러운 존재 차원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이다. 뭐라 해도 이슬람은 절대 일신교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존재의 하키카를 깊이 깨달은 영성적 달인의 견지에서이고, 일반인에게 현세는 결코 빛의 나라가 아니다.
시아파적 영성의 최고 권위자를 이맘이라 한다. 이맘imam의 글자 뜻은 '앞에 가는 사람', '선도자'이다. 보통 수니파에서는 금요일 집단예배의 회중 앞에 서서 예배 의식을 지도하는 사람을 가리키고, 또한 이슬람사 초기에는'칼리프'의 동의어로 쓰였다. 그러나 시아파에서 이맘이라
는 말은 이것과 완전히 다른 중차대한 의미가 있다. 지금 말한 시아파적 세계 전체(혹은 전 존재계)의 영성적 최고 권위자라는 의미이다. 이란의 '열두 이맘파'는 인류의 역사에 그러한 이맘이 열두 명 나타났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예언자와 이맘은 본래부터 하나의 동일한 신적 광명, 신의 빛이라고 하는데 우주의 근원적 빛에 연원하는 두 개의 빛이다. 예언자는 이 궁극의 광원에서 밖으로 나가는 빛이고, 이맘은 안으로 깊
이 숨어드는 빛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결국 무함마드나 세간에서 예언자로 인정하는 사람들은 모두 '외면적 예언자(현교적 의미에서의 예언자)'이고, 이에 반해 시아파에서 말하는 이맘은 '내면적 예언자(밀교적 의미에서의 예언자'인 것
이다.
외면적으로 공공연하게 밖으로 드러난 예언자와 내면적 예언자로서 일반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형이상적 예언자의 특성을 자기 심층에 간직한 사람, 이렇게 되면 이단 냄새가 풍긴다. 적어도 정통파의 입장에서 보면 의심할 여지없이 이단이다. 외면과 내면의 구별은 그렇다치더라도 어쨌든 무함마드 외에 이슬람의 예언자가 여럿임을 인정한다는 말이기 때문이다.
이맘은 실로 고대 영지주의에서 말하는 '천상의 인간'의 형상 그것이다. 하지만 감각적 현실
주의자인 아랍인에게는 일반적으로 이와 같은 사고가 발붙이기 힘들다. 그들의 눈에 이러한 영지주의적 환상으로 가득 찬 시아파적 사상은 요령부득의 망상으로 비친다. 아니, 요령부득의 망상에 머무르지 않고 신에 대한 용서하기
힘든 모독으로 비치는 것이다. '외면으로 향한 길'과 '내면으로 향한 길'은 이슬람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적으로 현교와 밀교 사이에는 언제나 이러한 숙명적 대립이 존재한다.
'열두 이맘파'는 그 이름처럼 열두 명의 이맘만을 인정한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딸 파티마 자흐라Fatimah Zahr(꽃피는 파티마'라는 화려한 이름의 주인)는 무함마드의 사촌 알리와 결혼했는데, 이 예언자의 사위 알리가 시아파의 1대 이맘이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예언자 주변에 있던 사람 가운데 알리는 코란」의 외면적 의미는 물론이고, 일곱 겹의 층을 이뤄 한겹 한겹 깊이를 더해가는 내면적의미 전체를 통합적으로 해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라고 시아파 전승에 기록돼 있어, 성전 해석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이다. 초대 알리를 이어 아버지에게서 아들로, 아들에게서 손자로, 대대로 이맘이 이어져 열두 번째에 이르게 된다. 열두 번째 이맘은 서기 9세기 말 사람이다. 그 뒤에는 더 이상 이맘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맘의 부재이다. 그렇다면 외적 계시는 물론이고 내적 계시마저 끊어진 것이 아닐까
라는 매우 자연스러운 의문이 생긴다.
그러한 의문에 대해 시아파는 이렇게 대답한다. 확실히 이 지상, 즉 외적 세계에 관한 한 서기 10세기 이후 지금까지 우리는 이맘이 부재한 시대를 살고 있다. 하지만 제12대 이맘은 사실 죽지 않았다. 그는 내면의 세계, 즉 존재의 보이지 않는 차원으로 몸을 옮겨 거기에 숨어 지금까지 줄곧 살아 있다." 제12대 이맘의 존속에 대한 이와
같은 시아파의 사고방식은 '내면으로 향한 길'이 이란적 문화에서 어떻게 전개되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흥미롭고 특이한 이미지 구조이기 때문에 간단하게나마 설명하고 지나가려 한다.
제12대 이맘은 서기 869년에 태어났고, 이름은 무함마드 이븐 하산Muhammad b. Hasan이다. 874년 7월 24일, 아버지인 제11대 이맘이 세상을 떠난 날 그는 지하의 밀실에 들어간 것을 마지막으로 행방이 묘연해져 아무도 그가 어디로 갔는지를 알지 못했다. 다섯 살 먹은 어린 이맘
이 연기처럼 사라진 것이다. 물론 수니파 사람들이나 사물을 합리적 차원에서만 생각하는 근대 서양 학자들은 어린 이맘이 은밀하게 암살당했다고 말하지만, 시아파에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임시로 모습을 감췄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에 숨었는가? 지상의 어딘가가 아니라 이 세계의 안쪽, 앞에서도 말했던 존재의 '눈에 보이지 않는' 차원에 몸을 숨겼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란적인 사고방식이다. 이 상태를 이맘의 잠복 상태, '숨으심ghaybat'이라 부른다. ghaybat 또는 ghaybah, 아라
비아어로 '사물이 눈에 보이지 않는 상태'라는 뜻이다. 즉 잠복 상태이다. 다만 이 잠복은 이 시점에서는 임시의, 말하자면 예비적 잠복 상태이고, 시아파의 종교사 학술어로는 '작은 숨으심ghaybat-e sughra'이라 부른다. 이 작은 잠복상태가 약 70년간 지속되며, 그 기간에 숨어 있는 이맘은 네 명의 정식 대리인(이들을 '나이브nab라 부른다)을 연이어 임명한다. 그들을 통해 시아파적 이슬람 세계를 계속 통치했고, 스스로도 때때로 대리인들이 있는 곳에 모습을 드
러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도 70년간으로 끝이 나고 서기 940년, 그는 드디어 본격적이며 결정적 잠복 상태에 들어간다. 이것을 그때까지의 상태와 구별해서 '큰 숨으심'ghaybater 이라 부른다. 서기 940년 이후 현재까지 아직 그 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호메이니의 활약, 이란 혁명, 그 모든 것이 이 이맘의 '큰 숨으심' 상태 중에 벌어진 사건이다.
'큰 숨으심' 상태에서 이맘은 완전히 볼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다. 그를 눈으로 보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이 이맘을 만날 수 있는 장소가 있다면, 그것은 신앙이 깊은 사람이 밤에 꾸는 꿈이다. 꿈에 그 모습을 본다.
그리고 또 하나, 영성이 아주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기도하는 가운데 들어서는 탈혼, 탈자 상태의 의식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 두 가지를 제외하면 절대로 이맘의 모습을 볼 수 없다. 이맘 자신이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으며, 대리인 나이브를 임명하는 일도 더 이상 없다. 12대 이맘은 이미 전 존재계의 내면에 존재하며 거룩한 중핵 자체로 변모해 있는 것이다. 역사의 보이
지 않는 차원에서 정신의 왕국을 지배하는 존재로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역사의 보이지 않는 차원에 몸을 두고 있으며 그의 성스러운 예지에서 시시각각 뿜어져 나오는 내적 계시의 빛을 통해 인류의 역사에 작용하고 있다.
복잡하고 다층적인 이론 구조를 가진 이 내면적 인간학,어둠과 싸우고 어둠을 정복하는 빛의 인간학은 '숨어 있는 이맘이 다시 나타난다'는 대단원에서 이상한 종말론적 환상을 빚어낸다. 이 세계의 끝인 천지 종말의 전망이다. 그렇다고 해도 종말론에서 흔히 연상되는 아비규환, 카오스,
모든 만물이 파멸하는 죽음의 전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부활, 밝고 편안한 조로아스터교적 축복이 넘치는 전망이다. 일찍이 인류 역사에 나타난 위대한 사람들이 모두 되살아난다. 모든 것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 하늘에서는 은혜로운 비가 내리고, 대지는 흐드러진 꽃들의 향기로 가득하고, 나무들은 열매를 맺는다. 되살아난 만물이 환희의 노래를 부른다. 그렇게 삼라만상이 기뻐하고 있는 가운데 이제까지 모습을 감추고 있던 제12대 이맘이 빛나는 구세주, 메시아로 나타나 완전히 새롭게 정의와 평화의 존재질서를 세운다. 어둠에 대한 빛의 마지막 승리, 순수하게 성스러운 세계가 찾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때'는 도대체 언제 오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그 '때'가 정말로 올 때까지 그것이 얼마나 긴 기간이든, 몇천 년이고 몇만 년이고 성과 속, 빛과 어둠은 상극관계를 이어갈 것이다. 그 '때'가 올 때까지 존재의 성스러운 차원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서, 존재의 속된 세계는 눈에 보이는 세계로서 두 개의 세계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두 개의 시간, 성스러운 시간과 속된 시간이 평행을 이루며 흘러간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역사라고 부르는 것과 평행선을 그리며 존재 공간보다 한 차원높은 차원에서 전개돼가는 역사가 있다. 바로 '성스러운 역사'로서 그것은 우리 눈에 신화적 이야기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란적 시아파 사람들이 구상하는 인류 역사는 외적 사건이 연쇄적으로 전개되는 역사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외적 사건 또는 사태의 그늘에 반드시 눈에 보이지 않는 내적, 형이상적 사건 혹은 사태가 있다. 안과 밖이 복잡미묘하게 얽혀들어 만드는 역사, 그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구체적인 인류사인 것이다.
두가지 가능성 - 이맘의 대리인과 왕
그러나 메시아는 바라고 기다려야 할 구세주이지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세주가 아니다. 따라서 세계를 현실적으로 통합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부재하는 이맘을 대신해 실제로 시아파적 세계를 다스리는 것은 어떤 사람인가, 혹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이맘의 대리인
그 하나는 최고의 시아파 학식을 갖춘, 지덕知德이 뛰어난 사람이 그 임무를 맡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만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이 있다. 우선 첫째, 그 사람은 이슬람의 모든 학문에 모조리 정통한 이슬람학계 제일의 권위자야 한다. 둘째, 성전 『코란』의 외적 의미와 내적 의미에 두루 통해 존재의 내적, 비교적 차원에 통한 사람이어야 한
다. 셋째, 이슬람법을 자신의 성전 해석에 따라 유연하게 현실 사태에 적용할 수 있는 사람, 즉 앞에서 설명했던 이즈티하드가 가능한 사람이어야 한다. 이미 말했듯이 수니파와 달리 일찍이 시아파에서 이즈티하드의 문은 닫힌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성전을 법적으로 해석하는 사적 자유가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는 허용돼 있다. 그러나 이세
가지 조건보다 더 중요하고 더 근본적인 조건이 있다. 그것은 숨어 있는 이맘이 끊임없이 내뿜는 영감의 음파를 민감하게 잡아내는 영성적 능력을 갖춘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마지막 조건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쨌든 지금 열거한 조건을 갖춘 사람만이 이맘이 부재한 사이 숨어 있는 이맘의 비밀스러운 지도를 받고 공
동체의 주권을 장악할 수 있다. 시아파의 이 독특한 국가 주권자 개념은 그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플라톤 『국가론의 철인정치 사상에서 강한 영향을 받았다.
그리고 '혁명' 뒤, 이런 의미에서의 국가 최고 주권자의 지위에 오른 사람이 호메이니라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란의 신문, 잡지 등 저널리즘은 여전히 호메이니를 이맘 호메이니라 부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설명한 사실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은 호메이니를 경애한 나머지 부르는 속칭이지 그가 결코 진짜 이맘은 아니다. 제12대 이맘 이래, 이맘은 지상에 태어난 적이 없으므로 당연한 일이다. 이맘이 아니라 이맘을 대신해서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다.
왕
그러나 이맘이 부재한 기간 중, 이맘을 대신해서 시아파적으로 구상된 이슬람 공동체를 통치하는 인물로서 또 하나 강력한 가능성을 가진 자가 있다. 그것은 바로 샤shah, 즉 왕이다.
물론 완전히 이슬람화된 시아파의 정치 이념에서는 이슬람교도의 정치적 주권자로서의 왕은 숨어 있는 이맘이 다시 세상에 나타날 때까지 일시적으로 주권을 맡고 있는 사람이지, 왕 자신에게 진정한 권능이 있는 것은 아니다. 진정한 권능을 갖고 있
는 것은 존재의 보이지 않는 차원에 숨어 있고, 거기에서 이 세계를 통치하고 있는 '숨어 있는' 이맘이다. 왕은 공공적 사회 질서를 지키는 자일 뿐 법적 권위조차 갖고 있지 않다.
왕이 신을 대신해 국가를 잘 다스리는 지의 판단의 실제적 근거는 정치가 제대로 되는지 안 되는지에 달려 있다. 의심의 눈초리로 사태를 지켜보며 조금이라도 나쁜 점이 눈에 띄면 정치 형태를 잘못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한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나 그러했다. 그러므로 곧 혁명이 일어난다.
5. 수피즘- 자기를 지우면 내면에 신이 가득찬다
수피가 사실적으로 체험한 자아 소멸, 즉 무아의 경지는 의식이 없어져 멍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신적 실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의해 의식 전체가 모조리 빛으로 변화해 빛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하키카, 또는 신과 완전히 일체임을 자각한 사람은 모두 왈리이다. 신과 일체가 돼 신과 함께 살고 신의 눈으로 사물을 볼 수 있는 사람, 요컨대 그것이 왈리이고 이제부터 이야기할 수피, 이슬람 신비가도 그 가운데 특히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은 모두 왈리이다.
다만 같은 왈리라도 수피의 경우는 매우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다. 수피즘에서는 시아파의 이맘론과 달리 사람은 태생이나 혈통, 신의 선택에 의해 선천적으로 왈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통해 비로소왈리가 된다는 점이다.수행을 통해 왈리가 된다. 여기에서 수행이란 궁극적으로 전 존재계의 절대적 원점인 신과 일체가 되며, 그 일체됨을 주체적 사태로서 자각하는 것을 최종 목적으로 삼
아 전인적 영성 훈련을 행하는 것을 가리키는데, 누구라도 단번에 그러한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이는 없다. 이 목적을 위해 우선 그것에 방해가 되는 자아의식을 없애야 한다. 그것이 일차적인 목표이다. '자아의식, 나라는 의식을 없앤다'는 말은 단순히 나를 잊는 소극적인 행위가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자기가 아닌 것을 찾아내려는 적극
적인 노력이다. 자기라든가 나라는 것을 속속들이 파고들어 간다. 그 극점에서 나의 내면에 내가 아니라 발랄하고 창조적으로 작동하는 살아 있는 하키카, 즉 신을 찾아내고 신을 만나는 것이며, 이것이 수피즘이 말하는 '내면으로 향한 길'의 제1 단계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신은 정통파 이슬람 공동체가 말하는 절대적 초월자, 다가가기 힘든 높은 곳에서, 바깥에서 인간을 지배하는 초월신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곳에 편재하고 모든 것의 내면에 있으며 인간의 혼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내재신이다.
계시에 바탕을 둔 메카 시기의 이슬람은 개인적 실존형 종교이고, 수피즘은 이 메카 시기의 계시 정신을 그대로 순수하게 밀고 나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점점 다가오는 천지 종말의 날과 심판의 때, 자신이 살면서 저지른 죄의 무거움과 두려움, 대개 그러한 것들이 메카 시기 이슬람을 짙은 종말론적 정서로 물들인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한 것인데, 수피들은 거기에서 출발해 철저하게 현세 부정의 길로 나아간다. 현세 부정은 구체적으로는 금욕 생활, 고행의 실천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금욕과 청빈, 그것은 곧 주체적으로 현세에 대한 일
체의 집착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현세를 본질적으로 미망의 세계라 보고 그것에 등을 돌리며, 현세적인 모든 것을 죄악의 원천으로 간주해 실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원래부터 수피는 현세를 등진 고독한 이들이다. 신 앞에 오직 홀로 서는 단 한 사람의 실존, 그것이 수피이다.
샤리아를 엄수하며 아무리 외면 생활을 깨끗하게 꾸미고 정리한다 해도 내면이 더럽혀져 있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형식적으로 완벽하게 도덕적으로 살아도 내적 정신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말이다. 수피즘의 발전사 초기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바스라의 사산이 한 "단 한 톨의 내적 성실함이 단식이나 예배보다 천배가 무겁다"는 유명한 말이 있는데, 이 말은 샤리아에 대한 수피의 태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우리 실존의 중핵에는 자아의식이 있다. '나'라는 것이 먼저 있고, 그 주변에 빛의 고리처럼 세계가 펼쳐진다. 자아의식은 인간 존재, 인간 실존의 중심이며 세계가 자신을 드러내는 중심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든 인간적 괴로움과 악의 근원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나가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있고 악이 있다. '나'는 모든 것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수피의 견지에서 보면 자아의식, '나'라는 의식이야말로 신에 대한 인간의 최대의 악이며 죄인 것이다.
인격적 일신교에서 생겨난 신비주의인 수피즘은 내가 나'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한 나와 신이 대립한다. 그것이 악이다. 내가 신을 2인칭으로 '너'라고 부르든, 혹은 신을 3인칭 '그'로 부르든, 어쨌든 존재는 두 개의 극으로 분열되고 의식 또한
두 개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수피즘은 이것을 신과 신자가 대립하는 것으로 본
다. 즉 신 외에 그것에 대립해 무엇인가 다른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돼버린다. 그래서는 이원론이다.
나야말로 실재하는 것 Ana al-Haqq, 즉 '나는 신'이라는 엄청난 선언을 해서 서기 922년에 위대한 수피 할지Hallaj는 신을 모독한 죄로 바그다드 형장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는데,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아아, 나라고, 너라고 하는구나.
하지만 그리 되면 신이 둘이 되는 것을,
아아, 할 수만 있다면 '둘'이라는 수를
입에 올리지 않은 채 있고 싶은 것을.
이 점에 대해 아부 사이드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네가 존재하고, 혹은 그가 존재한다면(인간이 존재하고 신이 존재한다면), 둘이 존재한다. 이것은 이원론이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너 되게 하는 것'을 없애버려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수피는 그 수행하는 방법에 있어 무엇보다도 우선 자기부정, 즉 자아의식을 없애는 데 모든 힘을 쏟
는다.
그런데 수피가 자기부정의 길을 밀고 나가는 동안에 생각지도 못했던 신기한 사태가 발생한다. 자기부정이 완전히 새로운 적극적인 의미를 갖기 시작하더니 일종의 자기긍정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부정에 부정을 거듭해 자아의 식을 지우면서 나를 그 내면을 향해 깊이 파내려가면, 마침내 자기부정의 극한에서 인간은 자기가 없는 바닥에 부
딪힌다. 여기에 이르러 인간의 주체성이라는 의식은 남김없이 소멸되고 내가 없는 자리로 돌아간다. 자아의 완전한 무화, 자아가 텅 비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인간적 주체성이 없어진 밑바닥에서 수피는 찬연히 빛나기 시작하는 신의 얼굴을 본다. 인간적 입장에서 자아의식이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곧바로 신의 실재성이 밝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 이상한 실존적 체험을 신비가 할라지가 자신의 시에서 “내텅 빈 한가운데에 영원히 너의 실재성이 있다 Hu-wiyatunlaka filatiyati abada"는 말로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똑같은 내용을 15세기 이란의 수피 시인이자 철학자 자미Jami는 산문에서 “인간적 자아가 사라진다는 것, 그것은
신의 실재성이 밝게 드러나 인간의 내부 공간을 남김없이 차지해 이제 그 사람 안에 신 이외의 어떠한 의식도 전혀 남아 있지 않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수피가 사실적으로 체험한 자아 소멸, 즉 무아의 경지는 의식이 없어져 멍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
려 거꾸로 신적 실재에서 뿜어져 나오는 강렬한 빛에 의해 의식 전체가 모조리 빛으로 변화해 빛 이외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신적 실재'라 한 것은 '하키카', 존재의 절대적 형이상적 근원을 가리키며, 이슬람 신비가는 이러한 하키카의 압도적인 힘을 종종 이 세상 것이 아닌 듯한 영적인 빛에 의한 의식의 조명으로 체험한다. 이러한 형이상적 광명 체험을 신비주의 술어로 '조명체험', 아라비아어로는 이슈라크ishraq라 한다.
참고로 말하자면, 이슈라크는 아라비아어로 본래 밝아 오는 새벽빛'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쪽 지평선 위로 태양이 쑥 올라오고 그 빛을 받아 갑자기 전 세계가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수피는 이 빛의 체험, 하키카의 영광을 받아 현
상적 차원에서 존재의 심층이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체험을 그대로 세계가 드러나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오히려 자아의 신화, 인간이 현실의 몸을 가진 채 신이 되는 것, 인간적 자아가 신적 자아로 변화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한 형태로 드러나는 존재계를 보는 눈은 더 이상 인간의 눈이 아니라 신의 눈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서기 9세기 가장 위대한 수피 가운데 하나였던 바야지드 바스타미 Bayazid BastamI(874년 사망, 이 수피의 이름은 비스타미 Bistami라고 다소 부정확하게 서양에 전해져 유럽과 미국 화제에서는 아직도 대다수가 비스타미라고 한다)는 “뱀이 그 허물을 벗듯이 나는 '자기'라는 껍질을 벗었다. 그리고 나는 내 자신의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럴 수가! 내가 '그'였다"고 말했다. 나는 '그'였다. 자아를 완전히 벗어버린 나는 이제 알라, 신 그 자체였다는 말이다. 앞서 말했던 할라지의 '내가 바로 신'이라
는 유명한 말은 이것과 완전히 동일한 체험을 좀 더 간결하고 압축된 형태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공동체적, 샤리아적 이슬람을 대표하는 울라마들의 귀에는 이러한 수피의 말이 더할 나위 없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 이것이 힌두교와 같은 '해탈' 체험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라면, '내가 곧 절대자'라는 자각은 최고의 궁극적 경지를 스스로
표현해 밝힌 것이고 거기에 이르는 것이야말로 수행의 목표가 되겠지만, 이러한 언어가 이슬람의 일신교적 배경에서 튀어나오자 매우 위험한 사태가 돼버렸다.
이렇게 이슬람에서 '내면으로 향한 길'은 수피즘과 함께 드디어 갈 데까지 갔다는 느낌이 든다. 여기에 와서도 여전히 '내면으로 향한 길'은 이슬람인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수피는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순수한 이슬람이다"라고 대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