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公子)의 사상(思想)
공자 사상의 근원
공자는 태어난 시기는 역사적으로 춘추시대라고 분류되는 중국의 혼란기.
주왕조의 권위 하락, 제후국들이 발호 하던 시기.
당시 周의 통치 제도는 봉건제 (왕과 제후가 같은 희성의 씨족, 종법 관계)
경제적 수입만을 취하던 경대부의 채읍이 세력이 커지면서 제후의 봉토와 같은 성격을 띰.
古來의 통치 체제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고 제후국간의 또는 대부간의 내란이 그치지 않았던 시기.
공자 사상의 본
요, 순 - 개인적으로는 고매한 인격, 정치는 인재를 등용.
국민의 복지를 향상, 국민들에게 효제충신의 윤리도덕을 가르침
공자의 ‘修身齊家治國平天下’사상의 이상이 되었던 것.
( 공자 사상에 나타나는 인본주의는 요순의 통치 원리에서 그 근원 확인. )
주공 - 정치적으로 봉건제의 틀을 마련, 세역제도와 예악을 정비.
(공자가 이상적인 국가 통치 수단이라고 생각하는 禮의 확립을 시킨)
자산 - 위기인 정나라를 전쟁에서 구해내고 정나라의 경제를 일으킴.
성문법 제정, 능력에 의해 등용, 도덕성
(공자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위정자 모습)
그는 위정자는 덕이 있어야 하며 도덕과 예의에 의한 교화가 이상적인 지배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러한 사상의 중심에 놓인 것이 인(仁)이다. 인(仁)에 대한 공자의 정의는 <논어>에서만 해도 사람다움(人),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愛人) 등 매우 다양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정의는 ‘극기복례(克己復禮)’ 곧, “자기 자신을 이기고 예에 따르는 삶이 곧 인(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정의를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보는 이유는 공자가 '인(仁)'을 단지 도덕적 규범으로서가 아닌 사회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정치사상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공자 사상의 인(仁)은 그리스도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와는 다른, 부모형제에 대한 골육의 애정 곧 효제(孝悌)를 중심으로 하여 타인에게도 미친다는 사상이다. 모든 사람이 인덕(仁德)을 지향하고, 인덕을 갖춘 사람만이 정치적으로 높은 지위에 앉아 인애(仁愛)의 정치를 한다면, 세계의 질서도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 수양을 위해 부모와 연장자를 공손하게 모시는 효제의 실천을 가르치고, 이를 인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또 충(忠), 즉 성심을 중히 여겨 그 옳고 곧은 발로인 신(信)과 서(恕)의 덕을 존중했는데, 이러한 내면성(內面性)을 중시하고 전승(傳承)한 것이 증자(曾子) 일파의 문인이다.
그러나 공자는 또한 인의 실천을 위해서는 예(禮)라는 형식을 밟을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예란 전통적 ·관습적 형식이며, 사회규범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유교에서 전통주의를 존중하고 형식을 존중하는 것은 바로 이 점에 입각한 것이며, 예라는 형식에 따름으로써 인의 사회성과 객관성이 확실해진 것이다.
이처럼 공자의 사상은 사회적 ·정치적 인간을 위한 도덕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그 보편성을 보증하는 것으로서 하늘의 존재도 생각하고 있었다. 공자로서는 하늘이 뜨거운 종교적 심정으로 받들어지는 불가지(不可知)의 존재였지만, 이는 인간적인 활동을 지원하는 신(神)일지언정, 인간을 압박하는 신은 아니었다. 공자의 사상은 어디까지나 인간중심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태평성대 (太平聖代)요순(堯舜)시대
(태평성세太平聖歲)
부족국가로 구성된 시기에 중국은 태평성세를 맞이하게 되는데 이 시기가 바로 '요순시대'이다. 요(堯)임금은 나라이름을 당(唐)이라 하였으며, 순(舜)임금은 나라이름을 우(虞)라고 했다. 이 '요순시대'는 중국에서 이상적인 정치가 베풀어져 백성들이 평화롭게 살았던 태평성세로, 중국사람들은 요임금과 순임금을 가장 이상적인 군주로 숭앙하고 있다. 백성들의 생활은 풍요롭고 여유로와 심지어는 군주의 존재까지도 잊고 격양가를 부르는 세상이었고, 정치는 가장 이상적인 선양(禪讓)이라는 정권이양방식으로 다툼이 없었다. 선양은 당시 가장 도덕을 갖춘 사람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후대의 혈연에 따라 왕위를 세습하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요임금은 원래 허유(許由)가 어질고 덕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임금의 자리를 물려 주려고 하였다. 허유는 이 말을 듣고 기산으로 몸을 감추었다. 그래도 계속 요임금의 또 다른 요구가 계속되자 허유는 못들을 말을 들었다고 강물에 귀를 씻었으며, 그의 한 친구는 한술 더떠서 더러운 귀를 씻은 물을 먹일 수 없다고 하며 말을 상류로 끌고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이는 바로 당시의 태평성세를 칭송하는 전설로 중국인의 이상적인 정치와 민생에 대한 열망을 표현하고 있다. 결국 요임금은 순이라는 사람이 훌륭하다는 소문을 듣고 몇 가지 시험을 거친 후 임금의 자리를 물려주게 된다. 이 시대를 요순시대라고 하는데 지금까지 태평성세를 표현하는 대명사로 쓰이고 있다.
공자의 우상-주공의 주(周)나라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은 아버지를 문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천명을 받들어 천자가 되었음을 선포하였다. 천하를 통일한 후 그는 도읍을 호(鎬)로 옮기니 이곳이 바로 서주의 수도 호경(鎬京)이다. 그는 이어 공신과 친족들에게 그 공에 따라 상을 내리고 봉토를 주어 그곳에서 살게 하였다. 예를 들면 태공망 여상에게는 제(齊)나라를, 동생인 주공(周公) 단(旦)1)에게는 노(魯)나라를 봉토로 주었다. 이것이 바로 주나라의 봉건제도이다. 봉건제도란 나라의 영토를 왕이 직접 통치하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으로 나누어 왕이 통치하지 않는 나머지 영토를 친족과 공신에게 나누어주던 제도이다. 토지를 받은 제후는 왕실에 공물을 바치며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군대를 파견하여 도와야 했다.
이 제도는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으로 나타나는데, 지배계층으로는 천자(天子), 공후백자남(公侯伯子男)으로 나뉘고 제후국에서는 군(君), 경(卿), 대부(大夫), 상사(上士), 중사(中士), 하사(下士)로 나뉘어졌으며, 피지배계층은 서민과 노예였다. 이 봉건제의 근간은 종법제도(宗法制度)이다. 종법제란 종족을 대종과 소종으로 나누어 대종인 정실의 맏아들에게 왕위를 계승시키는 제도이다. 이것은 다시 각 제후국에서도 적용되었다. 제후국 안에서는 제후의 본처가 낳은 장남이 대종이 되어 제후 자리를 세습하였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대부가 되었는데 이 대부는 제후의 소종이지만 자신들의 식읍 안에서는 대종이 되어 그 식읍을 세습받았다. 주 무왕과 무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운 사람은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이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가 낚시꾼을 부를 때 일컫는 강태공이다. 강태공에 얽힌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는 데 바로 '땅에 쏟은 물은 다시 대야에 거두어 들일 수 없다(覆水難收)'라는 말이다. 강태공은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여 공부만 하고 집안 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리하여 살림살이가 너무 어렵게 되자 그의 아내는 마침내 달아나고 말았다. 위수 가에서 낚시를 하고 있던 강태공은 후에 주 문왕으로 추대된 서백(西伯, 서쪽 땅의 우두머리)에 의해 등용된 후, 문왕과 무왕을 보좌하면서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의 기틀을 세웠다. 그 공로로 그는 무왕에게서 제(齊) 땅을 봉토로 받고 고향인 제나라의 제후로 부임하던 중 초라한 늙은 여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녀가 바로 달아난 아내였다. 그 아내는 금의환향하는 남편에게 다가와서 옛 정을 생각해서 다시 아내로 맞아달라고 간청했다. 그 때 강태공은 물을 대야에 담아오게 한 뒤 땅바닥에 물을 쏟고는 그녀에게 다시 담아보라고 하면서, 한번 엎질러진 물이 다시 그릇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도 다시 맺을 수 없다고 말하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고 한다.
주나라는 태평스런 성왕, 강왕의 흥성시기를 거친 후 유왕에 이르러서는 혼란에 빠진다. 그는 미녀 포사(褒姒)에게 빠져 태자를 폐하고 포사의 아들인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포사는 웃음이 없는 것으로 유명하였는데 유왕은 그녀의 웃는 모습을 보려고 비단을 찢는 소리를 내게 하기도 하고 자주 봉화를 올려 제후와 병사들이 모이게 하였다. 그러나 정작 반란군이 쳐들어 왔을 때는 구원하러 오는 자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신후족과 견융족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신후족에 의해 원래 태자였던 의구가 왕위를 잇게 되니 그가 바로 평왕(平王)이다. 그러나 물러갔던 견융족이 계속 변방을 침공하고 호경을 위협하자 평왕은 도읍을 낙양(洛陽)으로 옮겼다. 이 때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의 시대를 동주(東周) 시대라 하고 그 이전을 서주(西周) 시대라고 한다.
각주
1 단(旦): 주공 단은 원래 식읍이 '주(周,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기산(岐山)의 북쪽에 위치)'였기에 '주공'이라고 불리웠다. 주나라 건국 후에는 '노(魯)'를 봉토로 받았으며, 주공은 어린 조카인 성왕(成王)을 대신하여 7년간 섭정하면서 나라와 백성을 다스리는 근간이 되는 '예악제도(禮樂制度)'를 완성하였다. 이에 후대의 공자(孔子)는 서주(西周)의 문물을 칭송하였으며, 꿈속에서조차 주공(周公)을 그리게 된 것이다.
공자의 문화 정체성
공자는 춘추 말엽 노(魯)나라에서 태어났다. 당시 그가 태어난 창평현(昌平縣, 山東省 曲阜)은 천자의 권위가 살아 숨 쉬던 주 왕조 문명의 흔적이 비교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곳이었다. 공자가 일생 동안 흠모했던 '과거의 찬란했던 문명'은 바로 주나라 주공(周公)이 이룩한 예악제도와 인문 정신을 말한다. 주공은 주나라의 시조인 문왕의 아들이자 무왕의 아우로서, 일찍이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실질적으로 세운 인물이었다.
무왕이 일찍 죽고 그의 아들인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주공은 섭정을 행하면서 주나라 초기 국가조직과 정치제도를 만드는 데 주역을 담당하였다. 그의 문명 건설은 예악문물과 정치제도, 교육사상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진행되었는데, 이것들이 나중에 중국 인문주의의 원형으로 자리매김되었고 중국문화의 주류를 이루었다. 주공은 섭정을 끝내고 노나라에 봉해졌다. 따라서 노나라는 자연히 주공의 영향을 받아 주 문명의 중심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 후 약 500년이 흘러 노나라에서 태어난 공자는 주공의 문화적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노나라의 분위기에 흠뻑 젖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주공의 예악문물은 공자에 의해 보존되고 계승되면서, 맥이 끊어지지 않고 후세에 전수될 수 있었다. 공자는 주공이 중국의 예악제도와 인문 정신을 이미 다 이루었다고 생각했으며, 본인은 그것을 계승하면 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주공에 대한 그의 흠모는 존경을 넘어서 종교화되기까지 하였다. 공자는 노년에 주공이 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였는데, 이를 보면 그의 존재 근거가 오로지 주 문명의 회복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말하면 주공의 업적은 주로 시스템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었다. 즉, 질서나 제도와 같은 중국문화의 하드웨어를 구축하는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않았다. 진정한 소프트웨어는 '군자'와 '소인'의 구분을 통해 도덕적 인간상을 밝히고 '인자(仁者)'의 구체적인 덕목을 말한 공자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공자는 막상 자신이 말한 대부분의 정신과 덕목들이 주공의 인문 정신에서 근원하였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仁)이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제자의 질문에 대해 "자신을 이겨서 예로 돌아가는 것이 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예'란 곧 주공의 인문 정신과 예악질서를 뜻한다. 그의 문화 정체성은 철저하게 과거의 문화적 원형에 의존해 있었다. 따라서 그는 "나는 나면서부터 아는 자가 아니며 단지 옛것을 좋아하고 애써 구할 뿐이다"라고 말했던 것이다. 공자의 문화 복원은 구체적으로 주대로부터 전해져 내려온 경전을 손질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그의 덕택으로 중국인들은 수천 년간 『시경』 『주역』 『서경』 『예기』 『악경』 『춘추』를 늘 곁에 두고 읽을 수 있었다.
[출처] 공자(公子)의 사상(思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