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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필택린(居必擇隣)
살 집을 구할 때는 이웃을 살피고 가려서 정한다는 말이다.
居 : 살 거(尸/5)
必 : 반드시 필(心/1)
擇 : 가릴 택(扌/13)
隣 : 이웃 린(阝/12)
집은 추위와 더위와 비바람을 막아주는 것 뿐만 아니라 넓게는 집안의 문벌(가문 家門)과 집안의 가계(家系), 집안 내림(가통 家統)의 상징이기도 했다. 안주와 번영은 물론 내면적인 근거와 뿌리의 상징성을 띠었다. 그런데 산업사회로 진입하면서 그 의미가 소실되어 가고 있다.
고려 명종(1181년) 때 노극청(盧克淸)이라는 사람이 산관(散官)으로 있다 직장동정(直長同正)이 되어 자리를 옮기자 집을 팔려고 내 놓게 되었다. 마침 이부낭중(夷部郞中) 현덕수(玄德秀)가 여기저기 살 집을 알아보던 중 노극청의 집을 사게 되었다.
덕수는 노극청의 곧고 바른 인품과 이웃들의 넉넉한 인심에 끌려 노극청의 아내가 부르는대로 백은(白銀) 12근을 주고 샀다. 현덕수는 모처럼 좋은 집과 금보다 귀한 훈훈한 이웃과 거필택린할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그런데 외지에서 돌아온 노극청이 아내의 말을 듣고 펄쩍 뛰었다. "내가 이 집을 살적에 백은 9근을 주고 사서 그간 수리한 곳도 없이 편안하게 살았는데 백은을 3근이나 더 받은 것은 도리로 따질 때 경우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극청은 그 길로 백은 3근을 가지고 현덕수를 찾아갔다. 극청이 다짜고짜 백은 3근을 현덕수 앞에 내놓으면서 내 도리상 도저히 이것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덕수는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어찌 당신은 의(義)를 내세워 경우를 찾고 나는 못찾게 합니까? 백은 12근은 요즘 시세로 합당한 금액이니 돌려주려는 생각은 마시오."
현덕수가 온당한 값을 치른 것이니 받지 않으려 하자 노극청이 단호히 말했다. "나는 지금껏 도리를 따라 살아온 사람인데 이 은을 받지 않겠다면 백은 12근을 다 돌려줄테니 매매는 없는 것으로 합시다."
노극청이 물러날 기세가 없이 강하게 나가자 현덕수는 어쩔 수 없이 백은 3근을 받았다. 백은을 받아든 덕수는 '내가 어찌 의로움이 극청만 못할 수 있단 말인가' 하면서 백은 3근을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일이 있던 고려 명종 때는 무신들이 득세하여 너나 할 거 없이 이익만을 쫓아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 이기심이 팽배해 있는 때에 이 이야기가 회자되자 신선한 충격이 되어 온 장안에 화제가 되었다.
한약제의 사간(射干)이라는 나무는 키가 4치 밖에 안 되지만 백길 높이의 산에서 자라기 때문에 저 아래 산과 온갖 나무들을 굽어 볼 수 있다. 키가 커서가 아니라 서 있는 위치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쑥이 삼대밭 속에서 자라게 되면 부축해 주지 않아도 곧게 자라 키가 크다.
난괴(蘭槐)의 뿌리는 향료가 되는데 그 뿌리를 오물에 담갔다가 내놓으면 누구도 가까이 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탕이 나빠서가 아니라 적셔진 오물 때문이다.
현대의 사람들은 물질주의의 이기심에 물들어 있어 집을 팔고 사는데 있어서도 돈만을 앞세우고 있어 우리의 옛 풍속을 잃어가고 있다. 너와 내가 서로 양보하여 교필택우(佼必擇友) 즉 좋은 친구로 사귀는 옛 고려 선인들의 금과 옥조같은 고결한 숨결을 들을 수 있었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노극청과 현덕수처럼 흐뭇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세상을 만들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 거필택린(居必擇隣)
함께하는 이웃이 좋으면 인생이 행복하다
좋은 이웃과 함께하여 같이 산다면 천만금이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는 생각을 실천한 사람의 기록이 중국 남북조 시대의 남조(南朝) 역사서인 '남사(南史)'에 나온다.
송계아라는 고위 관리가 퇴직을 대비하여 자신이 살 집을 보러 다녔다. 남들이 추천해 주는 몇 곳을 다녀도 송계아는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천백만금을 주고 여승진이라는 사람의 이웃집을 사서 이사하였다. 백만금밖에 안 되는 집값을 천백만금이나 주고 샀다는 말에 여승진이 그 이유를 물었다.
송계아의 대답은 간단했다. "백만금은 집값으로 지불하였고, 천만금은 당신과 이웃이 되기 위한 값으로 지불한 것이다!" 송계아는 집을 고르는 가장 중요한 조건을 이웃에 둔 것입니다.
'거필택린(居必擇隣)이라!'
주거지를 정할 때는 반드시 이웃을 선택해서 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천만금을 주더라도 좋은 이웃과 함께 한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높은 지위와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 하고, 부동산 투자를 위하여 이리저리 주거지를 옮기는 현실에 좋은 이웃은 어떤 사람들인가를 한 번쯤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
사자소학(四字小學) 붕우편(朋友篇) 중에서
人之在世(인지재세)에 : 사람이 세상에 있으면서
不可無友(불가무우)니 : 친구가 없을 수 없으니
以文會友(이무회우)하고 : 글로써 벗을 모으고
以友輔仁(이우보인)하라 : 벗으로써 인을 도와라.
友其正人(우기정인)이면 : 그 바른 사람을 벗하면
我亦自正(아역자정)이요 : 나도 저절로 바르게 되고,
從遊邪人(종유사인)이면 : 간사한 사람을 따라서 놀면
我亦自邪(아역자사)니라 : 나도 저절로 간사해 진다.
蓬生麻中(봉생마중)이면 : 쑥이 삼 가운데서 자라나면
不扶自直(불부자직)이요 : 붙들어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白沙在泥(자사재니)면 : 흰모래가 진흙에 있으면
不染自汚(불염자오)니라 : 물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더러워지느니라.
近墨者黑(근묵자흑)이요 :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어지고
近朱者赤(근주자적)이니 : 주사(朱砂)를 가까이하는 사람은 붉게 되니
居必擇隣(거필택린)하고 : 거처할 때엔 반드시 이웃을 가리고
就必有德(취필유덕)하라 : 나아갈 때엔 반드시 덕있는 사람에게 가라.
擇而交之(택이교지)면 : 사람을 가려서 사귀면
有所補益(유소보익)하고 : 도움과 유익함이 있고,
不擇而交(불택이교)면 : 가리지 않고 사귀면
反有害矣(반유해의)니라 : 도리어 해가 있느니라.
朋友有過(붕우유과)어든 : 친구에게 잘못이 있거든
忠告善導(충고선도)하라 : 충고하여 착하게 인도하라.
人無責友(인무책우)면 : 사람이 잘못을 꾸짖어 주는 친구가 없으면
易陷不義(역함불의)니라 : 의롭지 못한데 빠지기 쉬우니라.
面讚我善(면찬아선)이면 : 면전에서 나의 착한 점을 칭찬하면
諂諛之人(첨유지인)이요 : 아첨하는 사람이고,
面責我過(면책아과)면 : 면전에서 나의 잘못을 꾸짖으면
剛直之人(강직지인)이니라: 굳세고 정직한 사람이다.
言而不信(이언불신)이면 : 말을 하되 미덥지 못하면
非直之友(비직이우)니라 : 정직한 친구가 아니다.
見善從之(견선종지)하고 : 착한 것을 보면 그것을 따르고
知過必改(지과필개)하라 : 잘못을 알면 반드시 고쳐라.
悅人讚者(열인찬자)는 : 남의 칭찬을 좋아하는 자는
百事皆僞(백사개위)며 : 온갖 일이 모두 거짓이고,
厭人責者(염인책자)는 : 남의 꾸짖음을 싫어하는 자는
其行無進(기행무진)이니라: 그 행동에 진전이 없다.
(용례)
명심보감(明心寶鑑) 성심편(省心篇) 下
神宗皇帝御製曰: 遠非道之財, 戒過度之酒, 居必擇隣, 交必擇友, 嫉妬勿起於心, 讒言勿宣於口, 骨肉貧者莫疎, 他人富者莫厚. 克己以勤儉爲先, 愛衆以謙和爲首, 常思已往之非, 每念未來之咎. 若依朕之斯言, 治國家而可久.
신종황제의 '어제'에 이르기를, "도리(道理)에 맞지 않는 재물은 멀리하고, 정도에 지나치는 술을 경계하며, 반드시 이웃을 가려서 살고 벗을 가려 사귀며, 남을 시기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고, 남을 헐뜯어 말하지 말며, 가난한 일가친척을 멀리 하지 말고, 부유한 남을 후하게 대하지도 말 것이다. 자기를 극복하는 것은 부지런하고 아껴 쓰는 것을 우선으로 삼고, 사람을 사랑함에는 겸손하고 화평함을 첫째로 삼을 것이며, 언제나 지난날 나의 잘못을 생각하고 매번 앞날의 허물을 생각하라. 만약 나의 이 말에 의한다면 나라와 집안을 오랫동안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 탐욕을 부리지 말라
(채근담 제78장)
人只一念貪私, 便消剛爲柔, 塞智爲昏, 變恩爲慘, 染潔爲汚, 愧了一生人品.
사람이 한번 이기(利己)를 탐욕하면 강(剛)한 기상도 녹아서 유약해지고, 슬기도 막혀 혼미해지며, 은혜로운 마음도 변하여 혹독해지고, 결백한 마음도 더러움에 물들어 한평생의 인품을 깨뜨리고 만다.
故古人以不貪爲寶, 所以度越一世.
그러므로 옛 사람은 탐욕하지 않음을 보배로 삼는다고 했으니, 일세일세를 초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해설]
야생동물의 생활을 관찰하면 약육강식의 원리가 그대로 적용 되는데, 그것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과 종족번식을 위한 본능일 뿐이다. 즉, 먹이를 얻고 짝짓기의 상대를 얻기 위해서 등 만부득이한 경우일 뿐이다.
그런 것들에 비하여 인간의 욕망, 특히 권력욕, 지배욕 등은 끝도 없고 한도 없다.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하여 인간들은 정의(正義)라는 명분을 내걸고 대량학살도 서슴지 않으니 말이다. 그같은 업(業)을 짊어지고 있는 인간임을 자각하고 욕망을 자제하는 것이 보배라는 교훈이다.
고려 고종 때 사람 노극청(盧克淸)은 욕심이 없기로 유명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그의 아내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집을 돈 12근에 팔았다.
그 사실을 안 노극청은 즉시 집을 산 현덕수(玄德秀)를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자 이 돈 3근을 다시 돌려 드려야겠소. 내가 이 집을 살때 9근을 주었는데 선비로써 어찌 까닭 없이 3근을 더 받겠소?"
현덕수가 말했다. "집은 세월이 가면 값이 오르게 마련이오. 그냥 받아두시오."
노극청이 말했다. "그까짓 3근의 돈 때문에 탐욕을 부렸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니 어서 받으시오. 그렇지 않으면 물리겠소"
한덕수는 할 수 없이 그 돈을 받으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그러니 난들 어찌 싯가보다 싼 집을 사 비웃음을 받겠소. 우리 이 돈을 절에 시주하여 좋은 일이나 합시다."
요즘은 어떤가? 집값 땅값이 하룻밤 지나고 나면 억대가 올랐다 내렸다 하는 널뛰기 세상이다.
◼ 덕(德)을 쌓아 이웃으로
공자가 살았던 춘추시대에 권력자는 패도를 꿈꾸고 약소국에 대한 정벌로서 영토 확장과 인구증대에 진력했습니다. 그로인해 전쟁이 난무하고 가정은 파괴되었다.
공자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하면 가정을 복원시키고 평화의 시대를 구축할 것인가? 그 방법으로 仁(사랑)을 제시하고 그 사랑은 가정을 넘어 이웃으로 전하고 또 전하여 지역사회로 확장되고 온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 온 세상이 평화로운 평천하의 꿈을 구상하였다.
이 평천하(平天下)를 실현하는 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덕의 힘이라고 보았다. 그러면 덕(德)의 의미를 살펴보겠다. 글자를 풀어보면,
①彳+直+心 인생의 길(彳)을 가는데 정직(直)한 마음(心)으로 가라
②得+心 다른 사람의 마음(心)을 얻는(得) 것이다.
바르고 정직한 마음으로 가면 사람들은 처음에는 바보로 생각하거나 무슨 속셈 있나 노려보지만 시간이 지나 그 본심을 알게 되면 그를 우러러보게 될 것이고 그의 모범적인 말과 행동은 다른 사람의 마음을 얻기에 충분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실상은 덕의 실천자는 잘 보이지 않고 부덕한 자들만 득실거린다.
제나라 경공이 말 4천 필이나 있었는데 그가 죽었을 때 덕이 있다고 하지 않았다. 죽을 때 말 한 필 가져가지 못하면서 왜 그렇게 백성들을 착취하여 자신의 배만 채우려 했을까. 이웃에게 나눠주고 세금 덜 거둬 백성들 편하게 했으면 덕 있다고 칭송받았을 텐데…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초나라 접여가 당시 상황을 "덕이 쇠했다. 모두가 정치하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지적했다.
고위직을 지냈거나 대기업의 CEO들이 지난날의 과오로 검찰청 포토라인에 서면 "제 덕이 부족해서..." 하고는 고개를 숙이는 장면을 본다. 이 정도면 조금의 양심은 있는 편이다. 아예 행위자체를 부인하는 경우가 허다하니 안타깝다. 그들의 일상은 어떠했을까?
내뱉은 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고 아집이 있어 상대방의 말보다는 자신의 말을 중요하게 여겨 남의 말꼬리를 자르는 교묘한 말재주로 주변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얼굴은 본심을 덧칠해서 순간순간의 낌새를 봐가면서 착하고 어진 사람인양 행동한다. 상대의 마음을 훔치기 위한 수단이다.
체득한 지식을 바탕으로 지혜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덧칠한 언어로 마구 말을 내뱉으면서 도덕적으로 군자(실제는 소인이다. 공자의 제자 자하가 말했다. 소인은 잘못을 저지르면 반드시 꾸며댄다고)인양 행동한다. 마치 가짜 돈이 화려하듯…
가짜 돈 감별사는 우선 지폐를 보고 화려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으면 어딘가 부자연스런 모습이 있어 일단 의심을 한다고 한다. 진짜는 꾸밀 필요가 없다. 가짜니까 화려하게 꾸며서 억지의 모습으로 본 모습을 숨기는 것이다.
향원(지역의 유지)들의 모습도 비슷하다. 지역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는 척하면서 잇속을 챙기고 감언이설로 이 사람 저 사람 말을 옮기면서 갈등요인을 감추어 둔 채 미봉(彌縫)으로 해결하고는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모두로부터 좋은 사람으로 평판 받기를 원한다. 이는 덕의 도적이고 사이비이다.
실제 존경받는 지역유지가 되려면 향인지선자호지(鄕人之善者好之) 즉 마을의 착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야 제대로 된 지역의 유지고 지도자인 것이다.
진정한 지도자는 '총탄이 떨어지는 전장에서 앞에 나가 싸우고 길에서 먼지를 먼저 뒤집어 쓰면서 함께하는 여행자의 장애물을 제거하며 안내하는 사람'이라고 한다.
덕의 본 모습을 보자.
공자가 딱 꼬집어 '이거다'고 덕을 단정하지 않는 것으로 봐서,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은 모양이다. 그래서 북극성을 예로 제시한다. "북극성이 중심에 있고 뭇 별들이 그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순환하고 있다." 북극성은 별의 움직임에서 중심축인 것이다.
다음은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은 풀이다. 풀 위로 바람이 불면 풀은 눕는다"는 것이다.
공자 당시 노나라 권세가 계강자가 말 안 듣는 무리를 살육하는 폭압정치를 내세우자 공자는 덕의 정치를 주장하면서 했던 말이다. 행동하는 지성이 있으면 민초들은 자발적으로 수긍하고 따르기 마련이다.
계속 예를 제시한다. "천리마가 천리를 달릴 수 있는 것은 힘이 아니라 덕이라"고 말한다.
우선 천리마는 건강하고 힘이 좋다. 힘이 좋아야 먼 길을 달릴 수 있다. 하지만 혼자 힘이 좋으면 자기의 페이스를 유지하지 못하고 오버페이스로 빨리 지칠 수 있다. 더불어 함께 천리 길을 달린다면 지치지도 않고 오랫동안 먼 길을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마라톤을 보면서 그런 경우를 경험한다. 혼자서 연습하면 이내 지친다. 그러나 클럽회원들과 같이 연습하고 달려가면 힘이 솟는 것을 알 수 있다. 힘이 솟으니 지치지도 않는다. 혼자 하면 빨리 가는듯하지만 빨리 지쳐버리고 더불어 같이 가면 보다 더 멀리 가도 지치지 않는다.
세 가지의 예로서 덕이란 무엇일까를 추정해 보자. 중심에서 방향성을 유지하고 있는 북극성과 타인의 몸과 마음을 끌어들이는 힘 같은 것이 있기에 어떤 일을 추진하면 강요에 의한 복종(?)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눕는 것이다.
조직에서 어떤 사람이 의견을 제시하면 모두 다 "네!"하고 동의하여 영향력을 발휘라는 그런 모습, 무엇인가 끄는 힘 이게 덕이 아닐까? 덕이란 자신을 낮추고 배려하는 마음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가치인 것이다.
덕의 힘은 어디서 발원할까? 자신을 낮추고 욕심내지 않고 잇속을 비우는 겸손과 배려의 자세이다. 자신을 비우면 주위를 끌어당기는 힘은 배가 되는 것이다.
진공청소기를 보자. 청소기가 발명되기 전에는 그냥 쓰레받기를 앞에 놓고 빗자루로 쓸어 담으면 되었다. 그러나 먼지나 쓰레기를 제거하는 청소의 청결도는 미약하였으나 발명 이후는 확연히 달랐고 시간도 훨씬 절약되었다. 진공청소기는 자신을 비움으로서 주변의 쓰레기나 먼지를 흡입하는 것이다.
태풍 또한 마찬가지이다. 폭풍은 시끄럽고 흉포하지만 위력은 태풍만 못하다. 태풍의 눈은 고요하고 저기압이지만 위력이 여기서 나오는 것이다.
예(羿)는 활을 잘 쏘고 오(奡)는 배를 손으로 끌 수 있는 천하장사지만 결코 제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었다. 하지만 우(禹)와 직(稷)은 백성들이 갈망하는 바를 잘 파악하여 성군이 되었다.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가 조자룡의 마음을 끈 것도 자기 자식보다는 조자룡을 아끼는 듯한 마음에서 드러난 것이다.
장판전투에서 단기필마로 아내 감부인을 구출하고 아들 아두를 구해서 돌아온 조자룡을 보고 유비는 아들을 땅바닥에 팽겨 치면서 하는 말 "못난 내 피붙이 때문에 귀한 장수를 잃을 뻔 했다"고 했다.
이 정도 되면 몸과 마음만 주겠는가. 영혼까지 던지지 않을까? 지금처럼 덕이 부족한 세상 무엇이 덕의 세계로 이끌 것인가?
공자가 제시하는 실천덕목은 ①충(忠)과 신(信)을 주로 하고 의로움으로 옮겨갈 것을 주장한다. 여기서 충(忠)은 충성하는 개념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 일을 도모하면서 정성을 다하고 진심진력하는 자세를 말하는 것이다. 온 마음을 다해서 일에 임하는 태도가 충의 개념이다.
신(信)은 신뢰를 말한다. 약속을 쉽게 하고 쉽게 파기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심사숙고하여 약속하고 중간에 변수가 생기더라도 먼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웬만큼 바꾸지 않으려는 자세가 신뢰의 바탕이 아닐까.
의로움으로 옮긴다는 것은 수오지심의 마음이다. 즉 의롭지 못한 행동을 보고 지나치거나 의롭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오죽했으면 공자는 의를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이 근심거리라고 했을까. 이런 일련의 행동 즉, 진심진력과 신뢰, 의를 보고도 실천하지 못했을 때 수오지심하는 자세들이 덕을 숭상하는 길이다.
두 번째는 ②선사후득의 자세이다. 임무 우선형이고 창의적으로 일을 처리를 하는 자세이다. 임무가 부여 되었는데 이 일을 맡아서 하는데 이득이 될 것인가 손해가 될 것인가 계산하지 않고 행동하는 자세이고, 처음 시도하는 일이라고 시작을 할까 말까 망설이는 시점에서 과감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자세로 나아가는 자세가 창의적인 일처리이다.
이순신장군의 생즉사의 자세가 선사후득의 자세요, 선난후획의 마음가짐이다. 주어진 과업에 대해서 진심으로 최선을 다하고 나서 그 부산물에 대해서는 뒤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을 말한다.
세 번째는 ③중용이다. 중용이란 그저 공간적 중간,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가령 1백 미터 달리기를 하기 위해서 출발선상에 서 있는 상태이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온 힘을 다해서 전력질주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심판의 총성을 기다리듯 하는 것이 중용의 자세이다.
다음은 ④문덕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멀리 있어 중앙권력이 미치지 못해 통치가 되지 않는다든지 복종하지 않는 무리가 있을 때 무력으로 지배하는 자세보다는 문덕으로 다스리라는 것이다.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면 되는데 북한에서 탈북자가 많은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문덕의 핵심은 예와 악의 조화로 다스리는 것이다. 예라는 것이 질서유지의 측면이라면 악은 화락을 통한 조화의 측면이다. 적절한 채찍과 당근을 사용하여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덕의 세계로 이끄는 것이다.
그럼 이 어렵고 힘든 덕을 실천한 사람을 보자.
태백은 고공단보의 큰아들로 왕의 자리를 물려받아야 하나 아버지의 뜻과 막내의 능력을 보고 스스로 오랑캐의 땅으로 떠남으로서 왕의 자리를 양보하였는데 백성들이 알아주지 않았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덕행으로 유명한 공자 10대 제자중에 민자건이라는 사람도 당시 실세였던 계씨가 비읍재가 되기를 원하였으나 끝까지 사양했다.
백이, 숙제는 주나라 문왕이 죽고 장례도 치루기 전에 은나라를 공격하려는 무왕(희발)에게 공격하지 마라고 주문하다가 살해될 위기에서 강태공의 도움으로 살아 남았지만 주나라의 벼슬은 하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비아냥거리는 왕미자의 말을 듣고 결국 굶어 죽었다.
우리 주변에서 조그마한 권좌라도 서로 차지하려고 아니 일자리 하나두고도 싸우고 난리가 나는데 왕의 자리를 양보하고 또는 그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생명도 마감하는 것을 보면서 덕의 실천은 험난하고 힘든 일임에 틀림없다.
덕을 신념화시킨 공자는 어떻게 했을까. 광(匡)에서 위기에 처했다. 양호가 이 지역 주민을 괴롭혀 원성이 컸다. 공자가 그 고을을 지나다가 양호와 외모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감금해 버렸다.
그러나 공자는 주나라의 문화를 잇고 있다는 자긍심을 잃지 않았고, 사마 환퇴가 죽이려고 하자 "하늘이 나에게 덕을 주었는데 환퇴가 차마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고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소시민으로서 덕을 쌓고 임하는 자세는?
위의 사례에서 보았듯 충실하고 신실하며 의로운 자세를 유지하면서 양보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갖추기 위해 "배우고 부단히 익혀라 그러면 그를 알아보고 친구들이 멀리서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덕을 쌓는 방법이다.
요즘 배움의 현장은 즉흥적이고 율동적이고 감성을 자극하는 곳에 사람이 넘친다. 신체의 활동에 국한한 배움도 중요하지만 뇌의 기능 활성화를 위한 고전읽기 같은 독서를 통한 뇌의 유산소 운동도 병행되어야만 더욱 건강한 삶을 누릴 것이다.
다음은 이직보원 이덕보덕(以直報怨 以德報德)의 자세로 사는 것이다.
소시민으로서의 덕을 실천하는데 원망 받을 자나 원수에 대해 무한한 사랑으로 대처하기에는 역량이 턱없이 부족하다. 이상적 가치보다는 실천 가능한 목표, 원수는 정의의 저울로 재서 처리하고 덕을 베푼 자에게는 더 큰 덕으로 대처하는 자세로 사는 것이다.
이 정도만 되어도 반드시 내게 이웃이 있고 나를 찾는 이 있으리라.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덕을 쌓아서 이웃으로 사회로 국가로 번져나가면 결국 지도자도 그들의 눈높이에 맞춰 평천하의 세계, 우리의 이웃이 편안하고 온 국민이 편안한 평화가 이룩되는 세상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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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급스런 글입니다 큰오빠님 많이 배웠어요
자주 읽으면 보탬이 많이 된다우~울 누이 야
네 ~~ 에 공감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