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던 때, 옛 왕조에 끝까지 충성했던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현재 황해북도 개풍군 산골짜기에 있는 두문동이란 곳에 은거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숫자는 73명으로 태조 이성계가 그들을 등용하고자 과거를 열어도 응하지 않고 산속에서 학문을 닦는데만 전념했다고 하지요. 결국 조선 왕조는 군사를 보내 두문동을 포위하고 이래도 안 나오나 보자며 산에 불을 지릅니다. 두문동에 은거하던 고려의 충신들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지요. 죽음을 각오한 이들 중에는 훗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리게 되는 황희도 있었는데 두문동의 동료들은 젊은 황희의 재능이 아까워 억지로 쫓아냈다고 합니다. 결국 황희는 살아남고 나머지 72인의 충신들은 불에 타 죽었다고 전해집니다. 이들을 두문동 72현이라 하지요. 이 일화에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사자성어가 나왔다고 합니다. 두문동 72현 이야기는 현재까지 널리 알려져 여말선초를 다루는 매체에서 자주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방영중인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살의의 파동에 눈을 뜨고 킬방원으로 각성 중인 이방원이 두문동에 불을 지르는 장면이 나왔지요. 그런데 말입니다... 뭐 예상하시는 분들도 있겠지만... 두문동 72현의 전설은 후대에 각색된 이야기입니다. 고려에 충절을 다한 충신들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으나 72명이나 불에 타 죽은 일은 없지요. 요즘 제 포지션이 뭔가 미담파괴자 같군요. 에잇, 기록이 그런 걸 어쩝니까. 일단 두문불출에 대해 집고 넘어가자면, 이 사자성어는 조선이 생기기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고려의 학자인 이규보의 편지에서 두문불출이 언급되며 좀 더 옛날로 가면 당태종 때 편찬된 <진서>, 좀 더 과거로 가면 사마천의 <사기>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러니까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 나온 게 아니라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란 명칭이 생겨난 것입니다. 전후관계가 뒤바뀐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 두문동 전설은 대체 언제부터 생겨난 것일까요. 이에 대한 첫 번째 기록은 조선이 건국되고 300년도 더 지난 영조 시대에 이르러서야 나타납니다. 실록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하지요. 임금이 가마를 타고 가면서 신하들을 돌아보고 이르기를, "부조현(不朝峴)이 어느 곳에 있으며, 그렇게 명명한 것은 또한 무슨 뜻인가?"= 하니, 주서 이회원이 아뢰기를, "태종께서 과거를 설행했는데, 50여 가문이 과거에 응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름이 생긴 것입니다. 그들이 두문불출 했으므로, 또 그 동리를 두문동이라고 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부조현 앞에 이르러 가마를 정지하도록 명하고, 근신에게 말하기를, "말세에는 군신의 의리가 땅을 쓴 듯이 없어졌는데 이제 부조현이라고 명명했다는 뜻을 듣고 나니, 비록 수백 년 뒤이지만 오히려 사람으로 하여금 눈으로 보는 것처럼 마음이 오싹함을 느끼게 한다." -<영조실록> 영조16년(1740), 9월 1일 영조는 이 일화를 듣고 즉석에서 ‘고려의 충신들처럼 대대로 계승되기를 힘쓰라.’라는 시를 쓰고 그 터에 충신들을 기리는 비석을 세웠다고 합니다. 일단 여기까지는 72명도 아니고 불에 타죽은 일화도 없습니다. 게다가 태조 때의 일이 아닌 태종 치세의 일화입니다. 그러다가 10년 뒤 실록에 두문동 일화가 다시 등장합니다. 고려의 두문동 72인의 충신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명하였으니, (중략) 또 어필로서 ‘고려 충신이 지금도 그 명성이 남아 있으니 특별히 그 동에 세워 그 절개를 표창한다.’는 글자를 써서 내리고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영조실록> 영조 27년(1751) 9월 27일 10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50여가가 시험을 치르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72명으로 변해있습니다. 여기서 72라는 숫자가 중요합니다. 공자의 문묘에 배향된 제자 숫자가 72명이거든요. 그러니까 72란 숫자는 여기에 끼워 맞추기 위해 설정된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 사례는 은근히 많습니다. 예를 들어 아서왕 전설에 나오는 원탁의 기사, 그리고 프랑크 왕국의 전설적인 국왕 샤를마뉴의 기사단은 모두 12인입니다. 판본마다 구성원의 이름이 다르기는 하나 여하튼 대부분 12인으로 고정되어 있지요. 그리고 공교롭게도 예수가 최초로 뽑은 제자가 12명입니다. 뭐 동양이나 서양이나 숫자를 통해 정통성, 혹은 신성성을 부여하는 건 흔한 일이지요. 여하튼 위 <영조실록> 기록을 보면 72라는 숫자는 나오는데 그 개개인에 대한 이름은 전해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조의생과 임선미, 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맹씨 성의 누군가(혹은 맹호성)라고만 말할 뿐이지요. 이들을 보통 두문삼절이라 부릅니다. 이들은 두문동에 은거한 행적이 비교적 명확히 남아있는 진짜 충신이지요. 뭐 불에 타 죽은 것 까지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런데 이처럼 나라에서 옛 충신을 격상시키는 움직임을 보이자 각 가문들이 두문동 72현에 이름을 올리기 위해 조상의 행적을 조사하기 시작합니다. 고려 말에 살던 자신의 조상이 조금이라도 은거한 흔적이 나타나면 죄다 두문동에 연결시켜 버린 것이지요. 이후 수십 년간 두문동 72현의 후손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쓴 전기가 우후죽순처럼 쏟아진 것은 물론입니다. 그래서 두문동 72현에 대한 기록은 통일된 게 없지요. 불에 타 죽었다는 전설도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황희의 케이스가 좀 특이한데 다른 두문동 72현이 영정조 시대에 조작된 것에 반해, 황희가 두문동과 연결되는 것은 훨씬 후대인 1890년입니다. 황희의 후손인 황영선이 발간한 <방촌선생청무실사>에 처음으로 등장하지요. 이 책은 후손들이 황희를 문묘에 배향해달라고 청한 글들을 모은 것입니다. 물론 교차검증은 안됩니다. 황희가 조선 건국 초부터 벼슬을 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사는 실록에서 여럿 발견되지요. 워낙 유능한 인물인지라 젊은 시절 기록도 많습니다. 이성계의 동조세력이었다는 게 학계의 중론이지요. 이건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라서 두문동에서 타 죽었다는 사람이 실제로는 조선 조정의 녹을 받고 있던 예가 수두룩합니다. 그렇다면 300년 간 조용하다가 왜 하필 영조 시대에 가서야 두문동 이야기가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당시 조선의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를 때부터 경종 독살설에 시달렸고, 이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는 등 그의 집권에 반발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습니다. 불안한 정통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지요. 이런 상황에서 영조에게 필요한 것은 왕만을 따르는 충직한 신하, 그리고 그 모범이 될 만한 위인들입니다. 그래서 길가에서 두문동 이야기를 꺼내 세상에 알리고, 신하들의 충정을 사고자 그 72현으로 확장시킨 것이지요. 앞서 알아본 것처럼 두문동 충신들을 위한 제사가 거행되고 비석을 세워 기념하게 하며, 이들의 후손을 특별히 등용한 것까지 모두 영조 시대에 있던 일입니다. 역사적 인물이 조명받는다는 것은 누군가가 그들을 이용해 어떤 목적을 이루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영조의 경우에는 왕권 강화가 목적이었지요. 사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적 없는 글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예전에 언급했다시피 이곳에 올라오는 글만 보면서 역사를 다 알아버린 것처럼 여기면 곤란합니다. 이 채널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관심 환기 정도니까요. 관심이 생겼다면 좀 더 다양한 서술을 접해보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첫댓글72라는 숫자에 기인함을 생각하지 않았니요 ? 7+2=9九乾이지요 바로 壬癸점입니다 더 오를 수없는 數 황도1도 움직이는데 72년 소림사의 제자 72인 황산의 千미터 넘는 산 72개 피타고라스 철학에 따른 숫자들이지요 그렇게 만들어 지는 자연현상입니다 911,311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고 일본 센다이 해일이 그렇고 , 나비효과 그냥 왜 72명만 그랬을까? 예수는 왜 제자12명과 본인 13명이였을까? 의문을 던져보세요 두문동에 72라는 숫자에 한 사람이 빠진 수란것을 다른곳으로 갔나요 좋은 하루 되십시요
두문동 72현이라 하지요. 이 일화에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사자성어가 나왔다고 합니다만,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그러니까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 나온 게 아니라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란 명칭이 생겨난 것입니다. 전후관계가 뒤바뀐 것이지요.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72라는 숫자에 기인함을 생각하지 않았니요 ? 7+2=9九乾이지요 바로 壬癸점입니다 더 오를 수없는 數 황도1도 움직이는데 72년 소림사의 제자 72인 황산의 千미터 넘는 산 72개 피타고라스 철학에 따른 숫자들이지요 그렇게 만들어 지는 자연현상입니다 911,311 쌍둥이 빌딩이 폭파되고 일본 센다이 해일이 그렇고 , 나비효과 그냥 왜 72명만 그랬을까? 예수는 왜 제자12명과 본인 13명이였을까? 의문을 던져보세요 두문동에 72라는 숫자에 한 사람이 빠진 수란것을 다른곳으로 갔나요 좋은 하루 되십시요
봄소식처럼 기쁜일 많은 한달되시고
행복하세요.니케님~~!
즐감
봄소식처럼 기쁜일 많은 한달되시고
행복하세요.김지환님~~!
두문동 72현이라 하지요. 이 일화에서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뜻의
두문불출(杜門不出)이란 사자성어가 나왔다고 합니다만, 사마천의 <사기>에서는
그러니까 두문동에서 두문불출이 나온 게 아니라 두문불출에서 두문동이란
명칭이 생겨난 것입니다. 전후관계가 뒤바뀐 것이지요. 공부 잘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봄소식처럼 기쁜일 많은 한달되시고
행복하세요.시메온님~~!
어허 !
지레 놀라선 선비들.....
봄소식처럼 기쁜일 많은 한달되시고
행복하세요.돌지둥님~~!
전고대방의 72현 명단에
그런 사연이
잘 배웠는디
뒷맛은 껄덕지근 합니다.
봄소식처럼 기쁜일 많은 한달되시고
행복하세요.류재훈님~~!
두문동과 두문불출의 역사적 연관성의 여부를 떠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