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K
김륭
머릿속에 살던 짐승들이 염소를 따라 가슴까지 내려와 죽었습니다
손에 숨을 쥐고 그러니까 꽃 대신 뱀을 쥐고 나는
지금 누워 있다, 는 문장으로 수습(收拾)된 사람
당신은 내게서 꺼낼 수 있는 짐승들이 몇 마리나 남았을까 궁금해 하지만 그것은 내 죽은 숨들을 발밑에 심는 일, 봄이다 내 피가 내 몸을 돌아다니다 흙을 묻히듯 그렇게 봄은 까마득히 무덤 위에 올려놓은 뗏장처럼 간신히 숨만 붙은 노동이 되고 종교가 되고
삐걱거리는 침대는 나를 비루하고 지루하게 살아낸 몇 마리 짐승들의 딱딱한 기억, 입 안의 울음들이 그랬듯이, 갔어요, 방금 출발했다니까요 퉁퉁 면이 불어터진 우리 동네 중국집 주인장 말씀을 따라
마침내 나는, 나를 떠나 나를 끓어오르려는 숨의 임계 너머로 두 발을 녹일 수 있게 된다 너무 일찍 출발했거나 너무 늦게 도착했거나 목숨이란 게 슬그머니 문밖에 내다놓은 자장면 빈 그릇 같아서
집으로 가자, 고 말하지 않는 식물들 사이
숨이 자꾸 흘러 흙이 붙은 뿌리째 떠낸 비곗덩어리처럼 나는, 내 몸을
따로 흘러 내가 없고 아내도 없고, 하늘을 흘러내린 썩은 동아줄에
딸 하나 가만히 묶여 있고
누워 있다, 는 단 하나의 문장 위로 바람 간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의자와 염소가 하늘을 뒤집어 입는 저녁
바지가 가슴까지 올라가 죽었습니다
-시집 『원숭이의 원숭이』
김륭
1961년 진주 출생. 2007년 〈문화일보〉신춘문예 시, 〈강원일보〉신춘문예 동시 당선.
시집 『살구나무에 살구비누 열리고』『원숭이의 원숭이』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