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아파트 전셋값이 24주 연속 상승하는 등 전세시장이 다시 불안해지고 있다. 한편에서는 역전세와 전세 사기 피해를 본 세입자 대책 마련에 비상이다. 중산층 주거 안정을 위해 2015년 도입한 ‘기업형 임대’(공공지원 민간임대)가 자리를 잡지 못해 개인 간 전·월세 계약에 의존하는 국내 임대차 시장 불안이 가중되고 있다.
6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공공택지에서만 인천 검단을 포함해 최소 7곳 이상이 기업형 임대 건립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1~10월 주택도시보증공사(HUG)의 기업형 임대 출자액은 1730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5182억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공급 주택 수는 지난해의 20%인 1889가구로 쪼그라들었다.
8년 전 ‘뉴스테이’로 시작한 기업형 임대는 건설사 브랜드 아파트를 시세보다 저렴하게 최장 10년간 살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주택시장 내 비중이 0.3%(6만6000가구·2021년 기준)에 그쳐 ‘시장 안전판’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형 임대가 존폐 위기에 처한 이유는 수시로 바뀌는 정책 리스크 영향이 크다. 문재인 정부에서 인센티브를 대폭 축소한 데 이어 올 들어 분양전환 가격을 소급 규제하는 법안이 잇따라 발의되고 있다.
10년 장기 임대 프로젝트인데…선거철 되면 수시로 규제 바꿔
총선 앞둔 野 "분양전환가 소급"…文정부 땐 인센티브 대폭 축소
경기도에 본사를 둔 A건설은 최근 2021년 따낸 ‘기업형 민간임대(공공지원 민간임대) 사업’ 우선협상자 지위를 포기했다. 지난달 정부가 늘어난 공사비 대부분을 반영해주는 개선안을 내놨지만 올해 초 결정한 내부 방침을 번복하지 않기로 했다. 수십억원의 매몰 비용을 감수하는 게 정책 불확실성과 맞닥뜨리는 것보다 낫다는 판단에서다.
1년간의 줄다리기 끝에 공사비 인상 문제를 매듭지은 기업형 임대주택 시장이 이번엔 총선 리스크에 직면했다. 임차인(세입자)의 이익을 위해 분양전환 조건을 소급 규제하는 법안이 잇달아 발의되고 있어서다. 10년 장기 임대로 설계·운용돼야 할 제도가 정권과 선거 민심에 영향을 받는 ‘정책 리스크’로 멈춰 설 위기에 놓였다.
2015년 도입된 기업형 임대주택은 주변 시세의 75~90% 수준 임대료로 최장 10년간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이다. 도입 당시 공공기관의 공공임대 때문에 생긴 ‘임대아파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꿔놨다는 점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외관과 내장재 등이 일반 건설사에서 짓는 분양 아파트와 동일해 무주택 수요자의 선호도가 높았다. 개인이 개인에게 전·월세를 놓는 ‘비제도권’ 비중이 80%에 달하는 국내 기형적 임대차 구조를 바꿀 최적의 대안이 될 것이란 기대가 나왔던 이유다.
올해 도입 8년째인 기업형 임대제도는 기대와 달리 사실상 존폐 위기에 직면했다는 우려가 나온다. 국토교통부에 따르면 지난해 이 사업의 신규 공모 물량은 1만8447가구로 2021년(4만1270가구)에 비해 반토막 났다. ‘민간 제안’ ‘공공택지’ ‘정비사업 연계’ 등 세 가지 방식 중 재건축·재개발 조합이 참여하는 정비사업 연계 방식은 3년 전부터 공모 물량이 끊겼다.
공모 이후 실제 착공으로 이어지지 않는 현장이 많은 게 더 큰 문제로 지적된다. 공모부터 본사업까지 2~3년간의 인허가 기간 각종 정책 불확실성에 직면해서다.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공공택지 방식 우선협상 대상자로 선정된 42개 사업장은 지난 1년간 정부에 공사비 인상을 건의하며 사업이 중단됐다. 2만4525가구에 달하는 물량이다.
소급 적용 등 정책 불확실성 커
기업은 잊을 만하면 불거지는 정책 불확실성을 사업의 최대 걸림돌로 꼽는다. 국토부가 공급량 급감을 우려해 지난달 늘어난 공사비 대부분을 올려 주겠다는 방안을 내놨는데도 시장 분위기가 쉽사리 달라지지 않는 배경이다.
업계에선 지난해 초부터 공사비 문제 해결을 강력하게 주문했다. 우선주 출자자인 주택도시보증공사(HUG)만 확정 수익을 보장받는 구조에서는 손익분기점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이다. ‘불가’ 방침을 고수하던 정부는 지난해 9월 신규 사업자만 ‘절반가량 보전’으로 방침을 바꿨다. 이후 올해 6월에는 기존 사업자까지 적용 대상을 넓혔다. 지난달 기존보다 보전 규모를 두 배 이상 늘려주는 새 대책을 내놨다. 그사이 사업 포기를 공식 선언한 사업장만 일곱 곳이 넘는다.
신규 공모에 참여하려던 기업도 속앓이하긴 마찬가지다. 최대 발주처인 LH(한국토지주택공사)는 이른바 ‘무량판 사태’가 터지자 진행 중이던 신규 공모 일정을 기약 없이 중단하기도 했다.
당장 내년 총선을 앞두고 정치권에선 제도를 사후 규제하는 내용의 ‘민간임대주택에 관한 특별법’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분양전환 가격을 임대사업자 자율이 아니라 건설원가 등의 금액으로 제한해 소급 적용하는 내용이 담겼다. 이해관계자인 임차인을 과반수로 넣도록 한 분양가심사위원회 구성 규정 등도 논란이다. 이동주 한국주택협회 본부장은 “손바닥 뒤집듯 정책과 제도가 바뀌는 상황에서 어떤 기업도 장기 임대사업에 참여하지 않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유정 기자